Masuk약속은 다음 날 오후였다.시간은 충분했고, 충분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기다릴 시간이 많다는 건 생각할 틈도 많다는 뜻이었으니까.이수는 약속 장소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사람이 많지도, 적지도 않은 도심의 조용한 라운지였다.유리창 너머로는 차들이 끊임없이 지나갔고, 그 흐름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세상처럼 보였다.그러나 이수의 감각은 그 흐름에서 조금 비켜나 있었다.그녀는 테이블에 손을 올려두고 숨을 고르듯 천천히 들이마셨다.마음속에서는 이미 수십 번의 대화가 지나가고 있었다.‘무슨 말을 할까.’‘어디까지 말해야 할까.’‘말하지 않아야 할 건 무엇일까.’그때 문이 열렸다.현이었다.정제된 정장, 흐트러짐 없는 표정.멀리서 보면 완벽히 안정된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그러나 이수는 그의 걸음이 아주 미세하게 느리다는 걸 알아챘다.그건 망설임이었다.현은 이수를 발견하자 짧게 고개를 숙였다.“기다리게 했나요.”“아니에요. 저도 방금 왔어요.”형식적인 대화. 그러나 그 사이에는 이미 오래된 감정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현은 자리에 앉으며 이수를 정면으로 바라봤다.눈빛은 차분했지만, 그 차분함이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이수는 느꼈다.“요즘… 많이 바쁘시죠.”“네. 조금요.”짧은 대답. 불필요한 설명은 없었다.그 점이 현을 더 자극했다.“그래도 연락은 잘 받으시더군요.”그 말은 사실 확인이 아니라 거리 측정에 가까웠다.이수는 그 의도를 알아차렸지만 표정에는 드러내지 않았다.“필요한 연락이라면 당연히요.”현은 잠시 말을 멈췄다.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그 짧은 시간 동안 그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문장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졌을 것이다.“이수 씨.”그가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요즘 도진 씨와… 자주 보시나요.”질문은 부드러웠다.그러나 부드러움은 언제나 무기가 될 수 있었다.이수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필요한 일로는 가끔요.”“필요한 일이라면?”“일.”간
밤은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다.도시의 불빛이 꺼진 뒤에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낮과 같은 소음이 남아 있었다.도진은 잠들지 못한 채 거실에 앉아 있었다.불은 켜지지 않았고, 창밖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만이 그의 얼굴 윤곽을 드러냈다.현과의 대화는 끝났지만, 끝난 느낌이 아니었다.말은 차분했으나 그 사이에 남은 긴장은 서서히 체온처럼 번지고 있었다.그는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떨리지는 않았다.그러나 지나치게 안정적이라는 점이 오히려 이상했다.‘익숙해지고 있다.’갈등에, 위험에, 그리고 선택해야 할 순간에. 그 사실이 도진을 조용히 불안하게 만들었다.이수는 아침 햇살에 눈을 떴다.꿈을 꾼 기억은 없었지만, 잠에서 깨어난 몸은 이상하게도 무거웠다.부엌에서물을 한 컵 따라 마신 뒤 창문을 열었다.차가운 공기가 잠을 덜 깬 얼굴을 스쳤다.그녀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숨을 골랐다.요즘 들어 아침마다 가슴 어딘가가 살짝 늦게 따라오는 느낌이 들었다.마치 마음이 몸보다 한 박자 느린 것처럼.휴대전화가 울렸다.이번에는 도진이 아니라 현이었다.이수는 한 번 화면을 바라보고 잠시 망설였다가 전화를 받았다.“네, 대표님.”“오늘… 잠깐 시간 괜찮을까.”현의 목소리는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그러나 이수는 그 미묘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무슨 일로요?”“계약 관련해서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어.”이수는 잠시 생각했다.그 말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뒤,이수는 의자에 앉았다.그리고 손바닥을 무릎 위에 올렸다.‘계약.’그 단어는 언제부터인가가장 안전한 핑계가 되어 있었다.감정을 숨기기에도, 거리감을 유지하기에도.도진은 낮이 되자 밖으로 나왔다.목적지는 없었다.그저 걸어야 할 것 같았다.사람들 사이를 지나며 그는 이수의 얼굴을 떠올렸다.어제의 메시지, 짧은 문장, 그 안에 담긴 배려.그녀는 늘 그랬다.상대의 상태를 한 발짝 떨어져서 정확히 읽어냈다.그 점이 도진에
저녁은 도시의 윤곽을 부드럽게 지우며 내려앉았다.창가의 불빛들이 하나둘 켜질 때마다 도진의 마음속에서도 무언가가 조금씩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그는 집에 돌아와서도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코트는 소파에 걸려 있었고, 신발은 현관에 가지런히 놓이지 않았다.정돈되지 않은 것들은 오늘 하루의 결이 아직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다는 증거였다.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이번에는 이수의 이름이 아니었다.현.도진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았다.“지금 통화 가능하겠지.”현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낮고 안정적이었다.그 안정감이 오히려 도진의 경계를 자극했다.“무슨 일입니까.”“잠깐,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네.”짧은 침묵 뒤, 도진은 대답했다.“지금은 어렵습니다.”거절은 분명했지만 거칠지 않았다.그러나 현은 그 미묘한 거리감을 놓치지 않았다.“그래요.”그가 낮게 웃었다.“그럼 내일로 하죠.”전화를 끊고 난 뒤, 도진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가슴 안쪽이 이유 없이 답답해졌다.현과의 통화는 항상 그랬다.말보다 말 사이에 남는 여운이 더 오래 남았다.그는 창문을 열었다.밤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차가운 공기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게 했다.‘내일이라…’그 단어는 시간의 문제 같았지만, 사실은 선택의 문제였다.이수는 집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켜 놓은 채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화면에는 빈 문서만이 떠 있었다.손가락은 키보드 위에 얹혀 있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오늘 카페에서의 대화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외면하지 않겠다.”그 말은 확답이 아니었고, 약속도 아니었다.그런데도이수의 마음은 그 말에 이상하게도 안정을 느꼈다.그녀는 커서를 움직이다가 결국 노트북을 덮었다.지금은 글로 옮길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휴대전화에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오늘, 무리하지 마세요.도진이었다.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그가 오늘 하루 어떤 상태였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이수는잠시 망설이다가 답장을
아침은 어제와 다르지 않게 시작되었다.도시는 제 속도로 움직였고, 사람들은 각자의 이유로 바빴다.그러나 도진에게만큼은 모든 것이 조금 늦게 도착하는 아침이었다.그는 커피를 내려놓고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어젯밤의 생각들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휴대폰이 울렸다. 이수였다.도진은 잠시 망설였다.받지 않을 이유도, 받아야 할 이유도 모두 충분했다.결국 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도진 씨.”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차분했고, 무너지지 않으려는 힘이 느껴졌다.그래서 더 마음이 쓰였다.“네.”짧은 대답 뒤에 침묵이 흘렀다.서로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꺼내지 못하는 침묵이었다.“어제는… 잘 들어가셨어요?”“네. 이수 씨도요?”“네.”또 한 번의 침묵. 그러나 이번에는 어색하지 않았다.마치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 같았다.“오늘,”이수가 먼저 말을 이었다.“시간 괜찮으세요?”도진은 그 질문이 단순한 약속을 묻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오늘이라는 단어에는 어제의 여운과 오늘의 결심이 함께 담겨 있었다.“네. 괜찮습니다.”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는 조심스러운 허락이 담겨 있었다.이수는 전화를 끊고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고 있었다.긴장이라기보다는 이제 더 이상 피하지 않겠다는 결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어제보다 조금 단단해 보였다.아주 조금, 그러나 분명하게.‘오늘은… 말하지 않더라도 느낄 수 있겠지.’그녀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현은 차 안에서 라디오를 끄고 있었다.익숙한 음악조차 오늘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머릿속에는 이수와 도진의 이름이 번갈아 떠올랐다.그는 자신이 왜 이토록 신경 쓰고 있는지 이제는 숨기지 않았다.이건 단순한 호기심도, 비즈니스적인 관심도 아니었다.그는
밤은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다.잠들지 못한 사람들의 방에서는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고,시계는 제 역할을 포기한 물건처럼 벽에 붙어 있을 뿐이었다.도진은 새벽이 가까워졌다는 것도 모른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불은 켜지지 않았고, 창밖에서 흘러드는 도시의 빛만이그의 윤곽을 어렴풋이 드러냈다.눈을 감으면 이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고,눈을 뜨면 아무것도 없는 공기만이 남아 있었다.그 간극이 그를 괴롭혔다.그는 자신이 왜 이토록 흔들리는지 이제는 부정하지 않았다.문제는 흔들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흔들림을 어디까지 허락할 것인가였다.‘조금 더 가까워지면… 되돌아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그는 그 가능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더 조심했고, 그래서 더 멀리 서 있으려 했다.그러나 오늘 밤은 그 계산이 잘 맞지 않았다.이수는 침대 위에 앉은 채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창밖에서는 어느새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갑작스러운 비는 도시의 표정을 단번에 바꾸어 놓았다.그녀는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감정이 넘치지 않도록, 생각이 앞서 나가지 않도록.도진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말수가 적어질수록 더 많은 것을 안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고,그 무게를 혼자 견디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사람처럼 느껴졌다.‘그 사람은… 늘 그렇게 살아왔겠지.’ 이수는 그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연민과는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닿고 싶어지는 마음, 그러나 함부로 손을 내밀 수 없는 마음.그녀는 베개 옆에 놓인 휴대전화를 다시 집어 들었다.메시지 창을 열었다가 몇 글자를 쓰고 지웠다.‘괜찮아요?’너무 가볍고.‘오늘은… 잘 들어가셨어요?’너무 일상적이고.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지금은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것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현은 사무실에 홀로 남아 있었다.불이 꺼진 건물 안에서 그의 방만이 밝았다.창밖에는 비가 내려 유리 위로 길게 선을 그었다.그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도진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버튼은 이미 눌러져 있었고 불은 켜져 있었지만,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아니, 열리지 않는 쪽이 차라리 다행이었다.조금 전, 문 앞에서 돌아선 순간부터 가슴 한가운데가 묘하게 서늘했다.아픈 것도, 숨이 막히는 것도 아닌데 분명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말로 하지 않은 것들, 하지 못한 것들,그리고 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도진은 그제야 안으로 들어섰다.문이 닫히고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이수의 얼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불안해 보이지 않으려 애쓰던 눈빛,그러나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그 고요한 표정.‘그게 당신 혼자일 필요는 없어요.’그 말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언제였던가. 아마… 아주 오래전에도 없었을 것이다.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도진은 차에 올라타 한동안 시동을 걸지 않았다.핸들 위에 손을 올린 채 가만히 숨을 골랐다.지켜야 할 선. 지키고 싶은 사람.그 두 가지가 같은 방향을 향하지 않을 때,사람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그는 그 질문에 너무 익숙했다.늘 같은 방식으로 답해왔기 때문이다.‘혼자 감당한다.’그래야 다른 누구도 말려들지 않는다.그게 자신이 배워온 방식이었다.하지만 오늘 밤은 그 방식이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이수는 문에서 떨어져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방 안은 아주 조용했고, 시계 초침 소리만이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그녀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메시지를 쓰지도, 지우지도 않은 채로.‘지금은… 아니야.’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오늘 밤은 무언가를 더 요구할 밤이 아니었다. 도진의 눈빛을 떠올리면 그 사실은 분명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밤은 더 힘들었다.이수는 천천히 일어나 창가로 갔다.이번에는 커튼을 완전히 열었다.도진의 차는 이미 보이
귓가에 닿은 목소리는 위로인지, 반가움인지, 그리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도진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사람들의 시선도, 사인회장도, 현실도 그에게는 모두 멀어졌다.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올렸다.그리고, 정말로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하듯 조용히, 그러나 확신 있게 입맞춤을 했다.그 순간 도진의 다리가 풀렸다.머리가 가벼워졌다.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다.세상이 기울었다.그는 휘청이며 앞으로 쓰러졌다.이수의 손이
비는 오후 내내 흐릿하게 내리고 있었다.도심의 커다란 유리 건물들은 회색 안개 속에서 윤곽이 무뎌져 있었고,사람들은 비를 피해 우산을 들고 바삐 움직였지만,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냄새는 오히려 공기를 맑게 정돈하고 있었다.도진은 백화점 입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늘 그렇듯, 아무 계획 없이 들른 곳이었다.욕망도, 필요도 없이 그저 시간이 남아서 들어오는 곳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완벽했고, 어떤 자극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비가 어깨를 적셔도 그는 대수롭지 않았다.몇 백 년 동안 수없이 맞아온 비였다.어떤 비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달빛은 기와 위에서 희미하게 번졌고,바람은 소리 없이 건물의 모서리를 스쳤다.도진은 이수의 처소에서 멀어질수록오히려 마음 한가운데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자리 잡는 걸 느꼈다.그 감정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호위무사로서 세자빈을 지키려는 의무감도 아니었다.그것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가슴을 묘하게 죄어오는 부끄러울 만큼 인간적인 감정.도진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는 무사였다.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며, 의무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오늘 하루 동안
현은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단순한 명령자의 시선이 아니었다.오랜 우정과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으나,그 밑바닥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마마의 밤이니만큼… 혹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을 더 살펴보아라.”명분 있는 명령이었다.그러나 그 말 속에는 ‘왜 네가 여기에 있었느냐’는 질문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도진은 눈을 내렸다.“…예, 저하.”그는 마지막으로 이수를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그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동안 방 안의 공기는 다시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