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어쩌면 앞으로 하씨 가문 전체가 남훈의 손에 들어갈지도 몰랐다.“그래서.”남훈이 느긋하게 물었다.“넌 뭘 원하는데?”“하강준의 정자.”수연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모든 그림이 완성돼 있었다.“그리고.”수연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 늙은 여자도 죽어야 하고 그 꼬마도 죽어야 해.”‘그리고 송별아도... 걔도 언젠가는 반드시 죽일 거야.’남훈은 잠시 말을 할 잃었다가 이내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었다.“하하. 역시... 우린 같은 부류네.”남자의 웃음에는 어떤 거리낌도 없었다.“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인간들...”그러다 문득 남훈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근데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남정이 널 입양해서 키워준 건 사실이잖아. 은혜가 있는데... 그 사람 아들을 망치고 손자까지 죽이려 하고, 심지어 그 여자까지 죽이겠다는 건...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수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 늙은 여자가 날 키워준 건 맞아. 근데 날 사랑한 적은 없어.”수연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수십 년 동안, 나한테 제대로 된, 값나가는 보석 하나 준 적 있어?”“한 번도 없어. 돈 좀 빌려달라고 해도, 그것도 안 빌려줬어.”수연은 이를 악물었다.“근데 송별아한테는? 그 늙은이 손이 얼마나 큰데. 수억 원짜리 보석도 아깝다는 말 한 번 없이 막 주더라.”수연의 손이 떨렸다.“내가 그 여자 옆에서 몇 년을 모셨는데... 난 그럴 자격도 없어? 제대로 된 선물 하나 받을 자격도?”수연의 주먹이 갑자기 커피 테이블을 내리쳤다.테이블이 크게 울리면서, 커피 잔과 접시가 덜컹거리며 흔들렸다.“불공평해. 너무 불공평해!”남훈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떠오른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아까보다 더 짙어졌다.“이해됐어.”...별아는 혼자 전시장으로 갔다.마동기의 개인전은 관람객이 적지 않았다.입구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작품 이야기
마동기가 K시에 와서 개인 전시회를 열었다.시천이 별아에게 전시회 초대권 한 장을 보내왔다.별아는 한동안 시천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전화를 걸어서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물었다.“뭐라고? 너 R시로 내려갔다고?”별아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왜 나한테 말도 안 했어?”시천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전화기 너머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말했다.[그쪽에 처리해야 할 개인적인 일이 좀 있어서 아무한테도 미처 말을 못 했어. 그래도 작업실 일은 걱정하지 마. 도설 씨한테 다 맡겨 놨거든.]“알겠어.”별아는 더 묻지 않았다.“바쁘면 일 봐.”통화는 짧았다.별아는 몇 마디 더 이어가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전시회 초대권은 택배로 도착해 있었다.별아는 오래도록 자신의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그 사람을 의도적으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다.하지만 이런 기회가 온 이상, 한 번쯤은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도심 한복판에서 조금 벗어난, 골목 깊숙한 곳의 작은 카페.수연과 남훈이 마주 앉아 있었다.두 사람 모두 속내를 감춘 채였다.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지만, 서로의 눈빛에는 계산과 의심이 또렷이 깔려 있었다.“네가 그 애한테 먹인 약.”수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가짜가 섞였다는 걸, 하강준이 알게 되면 가만히 안 둘 거야.”수연은 손톱을 천천히 만지작거렸다.막 손질한 정교한 네일이 조명을 받으며 반짝였다.“송별아가 네 편을 들어서 하태산 앞에서 좋게 말해줄 리도 없고, 이 일이 들통나면 하태산이 널 살려둘 것 같아?”비아냥이 묻어났다.“하씨 가문 족보에 이름을 올리고 싶으면, 일단 살아 있어야지.”수연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살고 싶고 하씨 가문에 인정받고 싶고, 하강준을 대신하고 싶다면 그렇게 쉬운 길은 없어.”그러다 남훈을 똑바로 바라봤다.“하지만 네가 나한테 하강준을 가져다준다면... 난 네가 하씨 가문 안으로 들어가게 도와줄 수 있어. 그리고 네 목숨도 지켜줄 수 있고.”커피 잔을 들고
그 기억들은 너무 아팠다.별아는 늘 스스로에게 말해왔다.이제는 내려놓자고, 이제는 괜찮아져야 한다고.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일들은 마음속에서 조금도 희미해지지 않았다.“하강준.”별아가 조용히 물었다.“나... 너를 용서해야 할까?”강준은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잠시 별아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날 용서하든 말든... 난 평생 너한테 속죄하면서 살 거야.”강준은 두 손으로 별아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남자의 눈빛은 깊고 어두웠다.“송별아를 사랑하는 거... 그게 내가 이 인생에서 해야 할, 유일한 일이야.”강준은 천천히, 별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어둠 속에서 그는 조급하지 않았다.부딪치듯 다가가지도 않았다.그저 오래도록 부드럽게 천천히 얽혀들었다.그 키스에는 조금의 욕망도 담겨 있지 않았다.강준은 단지 느끼고 싶었다.별아의 숨결과 별아의 체온을, 아주 오랜만에 다시 느끼는 그녀의 향기를...강준의 태도는 집요할 만큼 집중되어 있었고, 그만큼 깊고 진심이었다.그날 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남녀의 관계를 갖지 않았다.대신 침대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앉아서 밤새도록 빗소리를 들었다.비는 멈추지 않았고, 말도 점점 줄어들었다.동이 트기 직전이 되어서야 별아는 강준의 어깨에 기대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강준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담요를 끌어와 별아의 어깨 위에 조심스레 덮어주고, 그대로 그녀가 기대어 잠들게 두었다.가슴이 묘하게 벅찼다.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이었다.‘이렇게만 살아도... 이대로 평생 가도... 괜찮겠네.’...강준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은준이 바로 앞에 서 있었다.아이의 표정은 묘했다.이상한 듯 신기한 듯이 아빠와 엄마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아빠.”은준이 말했다.“아빠랑 엄마는 왜 침대에서 안 자고 바닥에서 자?”진지하게 덧붙였다.“바닥 차가워. 엉덩이 얼면 병 나.”강준은 웃으면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 강준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그는 다친 다리를 끌어안은 채, 이를 악물고 있었다.고통이 밀려오는 걸 꾹 눌러 참는 모습이었다.“너 왜 그래?”별아는 놀라 급히 다가갔다.강준의 얼굴이 창백했다.“다리 아픈 거야?”별아의 목소리가 급해졌다.“119 부를게.”곧장 방으로 들어간 별아가 핸드폰을 잡으려고 했다.그 순간, 강준이 손목을 붙잡았다.“괜찮아.”낮고 거친 목소리가 이를 악문 틈새로 새어 나왔다.“조금만 참으면 돼.”마당의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창을 통해 스며들어 강준의 이마 위로 떨어졌다.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별아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불을 켜려는 별아를, 강준이 다시 말렸다.“불 켜지 마.”잠시 숨을 고른 뒤, 낮게 말했다.“이렇게 꼴사나운 모습, 너한테 보여주기 싫어.”“네가 꼴사나운 모습 보인 게 한두 번이야?”별아는 쏘아붙였다.“이 와중에 무슨 체면이야.”말은 그렇게 했지만, 별아는 결국 손끝을 거둬들였다.강준의 쓸데없는 자존심을... 끝내 지켜주고 말았다.“진통제 없어?”“서랍에 있어.”강준의 숨이 조금씩 가라앉았다.“근데 그 약, 너무 오래 먹어서...”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요즘은 안 먹어. 버틸 수 있어.”강준의 호흡은 여전히 억눌려 있었다.그런 모습을 보자, 별아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얼른 서랍을 열고 진통제를 찾아냈다. 한 알을 반으로 쪼개서 강준의 입가로 가져갔다.“한 조각이라도 먹어.”담담하지만 단호했다.“이렇게 버티는 것보다 나아.”강준은 별다른 말 없이 물도 없이 그 약을 삼켰다.별아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너, 약 만드는 회사까지 있으면서...”별아가 낮게 말했다.“네 다리 병 고치는 약 하나 만드는 게 그렇게 어려워?”“어렵지 않아.”강준은 침대 가장자리에 몸을 기댔다.아직도 아까의 통증 때문에 가슴은 천천히 들썩이고 있었다.“그냥...”강준은 시선을 어둠 속에 두고 말했다.“아프고 싶어.
차가 병원을 벗어나자, 남정의 미간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은준이가 어떻게 갑자기 방사선에 노출됐다는 거지...”남정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교수님한테 분명히 들었어. 은준이가 하고 있던 금목걸이에 문제가 있었다고.”남정이 무릎 위에서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말이 되나? 그 금목걸이는 내가 직접 금은방에서 고른 거야. 그리고 절에까지 가져가서 축원도 받았어. 은준이 무사히 자라라고, 평생 지켜주라고 한 건데...”목소리가 점점 떨렸다.“어떻게 그게 은준이를 아프게 한 원인이 될 수가 있지?”남정은 머릿속으로 금목걸이가 자신의 손에 있었던 순간부터, 별아에게 전달되기까지의 과정을 하나하나 되짚었다.그러다 문득 시선이 수연에게 꽂혔다.“그날, 네가 별아한테 선물을 전해줬지.”남정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설마... 네가 무슨 짓을 한 건 아니겠지?”수연은 순간적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눈가가 금세 붉어졌다.“엄마, 제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요?”목소리가 떨렸다.“은준이는... 은준이는 제 조카잖아요. 제가 어떻게 제 조카를 해치겠어요.”수연은 울먹이며 말했다.“엄마, 오해하시는 거예요.”남정은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수연의 억울한 표정은 연기처럼 보이지 않았다.‘그럼 도대체 누가? 이상하네.’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은준이 퇴원할 무렵, 별아의 몸 상태도 거의 회복돼 있었다.강준은 고집스럽게 말했다.“이제 집에 가자. 셋이 같이.”별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넌 네 전 약혼자 문제부터 정리해.”별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나랑 우리 아들, 다시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난 약혼자 같은 거 없어.”강준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서가인도 이제 너한테 안 와. 걱정 마.”강준은 한 손으로 은준을 번쩍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지팡이를 짚은 채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은준은 얼굴이 환해져서 별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엄마, 빨리 와! 우리 같이 집에 가는 거잖
수연은 별아의 시선을 피한 채, 얌전히 남정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말 한마디 없이, 마치 공기처럼 존재를 지우고 있었다.남정은 남선애의 헌신에 깊이 감사했다.“정말 고생 많았어. 별아랑 은준이 둘 다 회복되면, 사부인께 제대로 인사를 드려야겠어.”은준은 할머니와 이야기가 잘 통하는지, 건강을 되찾자마자 금세 장난기 많은 아이로 돌아와 있었다.“별아야, 그런데 은준이 병은 도대체 왜 생긴 거야?”별아는 얼버무리지 않고 사실 그대로 말하는 편을 택했다.“교수님 말로는... 방사선 때문이라고 하셨어요.”“방사선?”남정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어떻게 방사선에 노출될 수가 있지? 집에 그런 물건은 없잖아.”이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별아를 바라봤다.“도대체 어디서 방사선을 맞았다는 거야?”별아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금목걸이 때문이라고 말하는 순간, 남정이 자책할 게 분명했다.남정 자신도 환자였다.이 일로 마음의 병이 깊어져서 다시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강준은 분명 별아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그래서 별아는 지금은 그 모든 억울함을 그저 삼킬 수밖에 없었다.물론 절대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다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어머님, 은준이는 약 먹고 나서 지금은 거의 다 좋아졌어요. 조금 더 정리되면, 그때 천천히 말씀드릴게요.”“그래, 그래.”남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지금은 다들 얼른 회복하는 게 제일이야. 사람 걱정 안 시키는 게 최고지.”남정은 은준과 잠시 놀아주다가, 마침 식사를 가져온 남선애와 함께 병실 밖으로 나가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은준은 곧 잠이 들었고, 별아도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그런데 수연은 여전히 병실에 남아 있었다.말도 하지 않은 채, 눈을 떼지 않고 은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시선이 너무 집요해서, 별아의 등골이 서늘해졌다.“무슨 나쁜 생각이라도 하는 거예요?”수연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더니, 피식 웃었다.“제가 은준이 고모인데요. 무슨 나쁜 생각을 하겠어요?”그리고는 능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