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급한 일로 강소희를 만나야 해. 일주일 스케줄 조정하고 신하늘에게는 대충 둘러대. 이번 일 비밀이야.]
[강소희가 일을 벌인 바람에 지금 강원도로 가는 길이야. 허 실장, 오키나와 갔다 오면 특근 좀 해. 신하늘에게 휴가 주게.]
잠시 차준호는 과거 자신이 허기찬에게 보냈던 문구들을 내려다보며 입안이 형편없이 씁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일단 자신이 과거에 강소희에게 휘둘렸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대체 왜 이 중요한 대목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 건지 답답할 뿐이었다.
“뭐야, 별거 없잖아.”
그 사이 술기운이 올라 얼굴이 붉어진 허기찬은, 스마트폰 화면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더니 또 다른 장면을 차준호에게 슥 내밀었다.
“하긴,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어쨌든 강소희 씨는 말이죠, SNS를 보니까··· 아주 꾸준하게 애인이 있
차가운 서울 야경을 뒤로하고 내려온 밤, 선거 전략 회의를 나와 함께 끝낸 차준호는 끝내 고급 호텔 대신 세종동 골목 끝자락에 위치한 내 허름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대표님, 피곤하시잖아요. 돌아가세요.”“쫓아내면 더 스트레스받아. 명줄 줄어들겠네, 알면서 그래?”이 와중에도 살벌하게 뼈 있는 농담을 던지는 남자인지라, 기가 차서 한숨만 새어 나왔다.얼마나 오랜만에 돌아온 집인지 몰랐다.주인이 오랫동안 비워둔 낡은 구옥이었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오랜 시간 쌓인 내 생활의 흔적들이 바로 어제 떠났다 돌아온 것처럼 아늑하게 나를 감쌌다.나는 얼른 보일러 온도를 높이고,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덮어두었던 안방 침구를 정성스레 정리했다.그 사이 차준호는 허름하기 짝이 없는 낡은 욕실에서 깔끔하게 씻고 나왔다. 신기하게도 그 남자는 어디서 챙겨왔는지 새 로브를 입고 있었고, 내 몫까지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다.나 역시 서둘러 씻고 나와 그가 챙겨준 폭신한 로브를 걸쳐 입었다.내 공간에 차준호라는 거대한 존재가 들어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벅차오르고 든든했다.하지만 지독히 고급스러운 삶만 살아온 그에게 이곳은 그저 누추하고 불편한 침소일 뿐이라는 생각에 절로 미안함이 밀려왔다.“편하게 쉬셔야 하는데······.”“신하늘이 옆에 있으면 어디든 똑같아.”내 염려를 단번에 잘라낸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침대를 향해 손짓했다.“어서 내 품에서 쉬어. 나한테 안겨 있을 날도 별로 안 남았잖아.”어떻게 저렇게 심장을 칼로 베어내는 듯한 소리를, 저리도 미소를 머
“어! 대표님!”“오셨습니까?”허기찬과 선우현을 비롯한 XX당 관계자들이 하나둘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고, 나 역시 천천히 차준호에게로 다가섰다.자신의 죽음마저 아득하게 비웃던 이 남자가, 이제 내가 벌여놓은 정황의 전장 속으로 깊숙이 발을 들이려 하고 있었다.“회사 안 들어가셨어요? 아니면 회장님하고 한남동이라도 가시지.”“신하늘 밥 안 먹었을 거 아니야.”이 와중에 밥 타령이라니.그러고 보니 그가 몰고 온 보좌 인력들의 손에는 고급스러운 팩들이 잔뜩 들려 있었다.싱그러운 과일과 정갈한 고급 한정식 도시락, 그리고 세련된 디저트까지.이 남자는 늘 이랬다. 자신의 생명이 시들어가는 것은 방관하면서도, 언제나 내 끼니와 안위에는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사람 마음을 이토록 심란하게 어지럽혀 놓고서.“대표님, 저랑 잠깐 옥상에서 이야기 좀 나눠요.”어쨌든 나를 아끼는 그 지독한 마음을 이용해 먹는 수밖에 없었다.차준호는 나른한 미소를 흘리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망설임 없이 내 손을 꽉 감싸 쥐었다.“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그가 잡아끄는 온기를 묵묵히 받아들이며 함께 사무실을 나왔다.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그의 뜨거운 체온이 굳어있던 내 심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고 있었다.***서울의 밤은 화려함의 극치를 달렸으나, 그 속살은 지독하게 건조하고 냉혹했다.옥상 위, 나는 차준호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아득한 허공을 응시했다. 봄의 초입이라기엔 너무도 예리한 바람이 칼날처럼 뺨을 베고 지나갔다.저 멀리 보이는 희미한 별빛이 차갑게 일렁였
세종동의 좁은 골목 초입, 최기범이 공들여 준비한 그곳에 다다랐을 때 도시에는 서서히 푸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그러나 건물 내부는 마치 쇳물을 부어 넣는 주물공장처럼 열기와 긴장감으로 펄펄 끓어오르는 모양새였다.일반 직장인들에게는 퇴근길에 접어들 시간이었지만, 이곳엔 당에서 파견한 정예 인력이 즉각 투입되어 사무실은 흡사 거대한 벌집을 쑤셔놓은 듯한 소란스러움으로 가득 찼다.벽면에는 내 얼굴과 기호가 큼지막하게 박힌 초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선거 공약서와 홍보 인쇄물이 시선을 사로잡았다.다섯 대의 유선 전화기가 일제히 비명을 지르듯 울려 댔고, 벽면 데스크에 늘어선 봉사자들의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는 팽팽한 치열함 속의 총격음처럼 귀를 때렸다.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득하게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이전의 내게 선거일이란 그저 빨간 날로 표시된 공휴일일 뿐이었고, 거실 소파에 누워 개표 방송을 게임하듯 들여다보던 게 전부였다.하지만 이것이 진짜 정치판의 민낯이자, 피비린내 나는 권력 쟁탈전의 서막이었다.사무실 한쪽, 당에서 파견된 선거 전략 전문가 이승은 선대위원장이 지역구 지도 한 장을 거창하게 펼쳐 놓으며 나를 불러세웠다.“신 후보님, 개표 방송 날 전국에서 가장 먼저 후보님 가슴에 당선 무궁화꽃이 달릴 수 있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 판을 짜겠습니다!”내가 직접 벌인 판이었지만, 막상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니 절로 기가 찼다.“역시 사람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그럼요. 오래 사셔서 국회에도 아주 길게 머물러 주셔야죠.”내가 오래오래 살아가는 그 길에 반드시 차준호라는 남자도 함께 있어 주어야 하는데.그 지독하고 오만한 성격상 절대 이식을 받지 않겠다고
차준호의 귓가에는 차진철 회장과 강진욱 박사의 목소리가 더 이상 닿지 않았다.아버지에게 자신의 시한부 비밀이 알려진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었으나, 어차피 언젠가는 드러났을 진실이었다.그보다 그를 자극하는 것은, 제 목숨을 던져서라도 자신을 수술대로 떠밀려는 신하늘의 기특하고도 처연한 간절함이었다.차준호가 여전히 생명에 초연한 채 딴생각에 잠겨 있자, 차진철 회장은 원망과 분노가 섞인 눈빛으로 노려보았다.“당장 이식 수술 날짜부터 잡아! 진아와 고 여사에게는 내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데려올 테니! 조직적합성까지 맞다는데 이게 기회가 아니면 뭐란 말이냐? 아니면 강소희라도 끌어들이든가! 해준다고 할 때 받아! 받아들이란 말이다!”차준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무엇보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온통 신하늘뿐이었다. 밥은 제때 챙겨 먹었는지, 저 험악하고 어수선한 선거판 한가운데에서 위축되지는 않았는지 걱정되어 미칠 것만 같았다.조급해진 차준호는 말 한마디마다 서늘한 독을 품은 채 차갑게 쏘아붙였다.“아버지, 소희는 배우이고 현재 임신 중입니다. 진아 이야기는 더더욱 듣고 싶지 않고요. 타인의 피를 짜내 연명하느니, 차라리 우아하게 말라죽겠습니다. 사람 목숨, 그리 쉽게 꺼지지 않습니다.”그러자 차진철 회장 역시 벼락같이 일어나 차준호의 어깨를 억세게 움켜잡았다.“네 어미도 그렇게 금방 죽었다! 다들 내 곁을 그리 황망하게 떠나 버렸는데······ 너마저 이러면······ 나는 대체 어쩌라고·····&m
병원 복도에는 하얀 소독약 냄새가 공기 중에 자욱하게 맴돌며, 마치 유령의 숨결처럼 서늘하게 피부를 핥고 지나갔다.차진철 회장의 눈빛에는 칼날처럼 날이 서 있었다. 그것은 듣고 싶지 않은 잔인한 진실을 터뜨려 버린 나를 향한 원망이자, 무너진 자존심이 내뿜는 독기였다.“신 비서, 선거로 바쁜 몸일 텐데 남의 집안일에 유난 떨지 말고 어서 돌아가!”피 끓는 아비의 절박함인 동시에, 무너져 내린 위엄을 지키기 위한 비겁한 화풀이였을지언정 난 반발하지 않았다.오한이 서릴 정도의 무시와 멸시를 해도 차준호만 살릴 수 있다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차 대표는 절대로 이식을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어. 큰일이야, 신 비서. 제발 살려줘.]고미주를 통해 알게 된 그 잔인한 진실이 귓가를 울렸다.그렇기에 나는 차진철이라는 거대한 권력을 끌어들여 그를 강제로 벼랑 끝에 몰아세울 수밖에 없었다.“제가 무모했습니다, 회장님. 이런 방식으로 알려드리게 되어······ 송구합니다. 이기적인 저를 원망하셔도 좋습니다. 그저······ 대표님을 잘 부탁드립니다.”나의 처연한 사죄에 차진철은 짓눌린 한숨을 내쉬며 차갑게 시선을 돌려 버렸다.몸을 돌려 서늘한 복도 너머로 걸음을 옮기려던 바로 그 순간.“신하늘, 같이 가. 기다려.”거칠고도 단단한 악력이 내 손목을 강하게 잡아챘다.돌아본 곳에는 여전히 오만한 가면을 쓰고 있는 차준호가 서 있었다.늘 모든 것에 초연하고 아득한 거리를 두던 남자의 두 눈동자에는, 마치 길 잃은 아이처럼 사정
차진철 회장의 등장만으로도 로비를 채우고 있던 환자들과 보호자들의 시선이 일시에 그에게 쏠려들었다.나와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수행원들을 빽빽하게 대동하고 나타난 그는, 존재 자체만으로 병원 복도의 공기를 순식간에 다시 겨울로 바꿔 버렸다.구겨진 미간 아래로 굳어진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노골적인 멸시와 불쾌함이 그 서늘한 눈빛에 훤히 찍혀 있었다.“신 비서, 선거는 벌써 포기한 건가? 바쁠 텐데 그만 가봐.”감히 이 재계의 거물을 병원으로 불러내다니. 내가 생각해도 스스로 겁이 없긴 했다.차진철의 냉정한 축객령에도 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차준호의 얼굴에도 깊은 불쾌함이 감돌았다.“신하늘, 선 넘지 마.”손끝으로 차가운 오한이 몰려왔지만, 나는 꺾이지 않기 위해 허리를 바짝 세우고 차진철 회장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제가 아무리 바빠도 회장님을 이 자리에 모실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나의 당돌한 응수에 차진철의 안색이 한층 더 험악하게 일그러졌다.“운 좋게 공천장을 거머쥐어도 현실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아. 사람은 제 분수를 알아야 하는 법이지!”그는 거침없이 날 선 비난을 내던지며 나를 짓눌렀다.정치적 입지가 고공행진을 이어간다 한들, 차진철의 눈에 나는 여전히 감히 차준호의 곁을 탐할 수 없는 미천한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하지만 오죽했으면 내가 이 서늘한 거물을 직접 병원으로 끌어들였겠는가.“본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행원들을 모두 멀리 물려주십시오. 회장님과 대표님,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이서만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신하늘, 피곤하니까 일 키우지 마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
종일 정신 없다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커피에 의지해온 탓일까. 카페인의 날카로운 자극이 현기증을 부추겼다.그가 왜 하필 기억을 잃은 걸까.3년치 기억만 사라지다니. 비극 같으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빌어먹게도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카메라 군단이 다시 몰려들었다. 간신히 버티던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변했다.그런데 병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고미주와 강진욱의 대화에 일순 어깨가 흠칫거려졌다.[강 박사님, 차 대표는 언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나요?][네, 최종 검사가 끝나는 대로 오늘
이아준은 통화 도중,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신하늘과 도국과의 옛 기억 속에 깊게 잠겼다.화려한 마천루가 즐비한 강남의 이면, 세종동 서쪽 끝자락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빈민가가 있었다. 그곳에 위치한 ‘하늘 보육원’은 세 사람의 유년이 뿌리내린 곳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나이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이자 가족이었다.이아준은 태어나자마자 차가운 보육원 앞마당에 버려진 신세였다. 그러나 운명은 잔인하고도 변덕스러웠다. 뒤늦게 그가 국내 최고 재벌가인 L그룹의 잃어버린 혈통임이 드러났고, 하루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