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금기 같은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나와 도국, 그리고 이아준까지. 우리 세 사람 사이에 이런 묘한 기류 따위는 절대 발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럴 리도 없었고, 또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 관계의 ‘부외자’이자 철저한 제삼자인 최기범은 가장 예리하고 날카로운 칼날로 우리 관계의 진실을 단숨에 파고들어 버렸다.
이제 큰일이었다. 이 순간 이후로 오랜 시간 쌓아온 셋의 균형이 단번에 어긋나버릴까 봐 위태로운 불안감만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순간 당황스러워진 나는 다들 취한 거냐며 이 무겁고 진지한 분위기를 억지로라도 깨트리고 싶었다.
“어휴, 최 실장님도 참···. 많이 취하셨나 봐요.”
그때, 가기 위해 점퍼를 챙겨 들다 말고 도국이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도국은 이아준과 함께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차분히 술잔을 기울였다.방금전까지 이아준은 선우현과의 통화를 길게 이어갔고, 도국은 느긋하게 창밖으로 펼쳐진 서울의 야경을 감상하며 혼자 잔을 비워냈다.신하늘은 무사히 돌아왔고, 굳이 선거에 나가지 않더라도 그녀의 입지는 견고해졌다. 만약 출마를 감행한다면 당선될 확률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한편 이아준은 L그룹 내 최대 지분을 소유한 인물이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20대 순위권에 이름을 올리며, 미국 포춘지 인터뷰까지 예약되어 있는 거물이 되었다.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려가는 듯했다. 마침내 모든 갈등이 해결된 것일까.통화를 마친 이아준이 어두운 표정으로 주방 식탁에 돌아와 앉았다. 그 직관적인 그늘을 보며 도국의 마음 한구석에도 서늘한 불안이 피어올랐다. 하도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나날이 지속되었던 탓에, 온전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도국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신하늘의 행복뿐이었다. 설령 그녀가 차준호와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젊고 능력 있는 그녀는 무엇이든 이뤄낼 수 있는 완벽한 삶을 살 터였다.이제 자신은 세종동에 건물 두 개를 리모델링해서 올리고, JW를 정리한 뒤 이아준과 여유로운 앞날을 즐기면 그만이었다.“요즘 L-DS 전자 주가가 많이 올랐던데 좀 정리할까 봐. 차준호한테 날개도 달렸으니 CH에도 투자 좀 해볼까 하는데. 반사 이익은 거기가 제일 크겠지?”그 순간, 이아준의 입꼬리가 한층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이아준의 얼굴 위로 진한 그늘이 드리워졌다.“차준호 대표가 많이 아픈 것 같아.”순간 도국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 들었다. 그 건장하고 완벽하던 남자가 왜?이아준이 이토록 심각하게 말할 정도라
차가운 서울 야경을 뒤로하고 내려온 밤, 선거 전략 회의를 나와 함께 끝낸 차준호는 끝내 고급 호텔 대신 세종동 골목 끝자락에 위치한 내 허름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대표님, 피곤하시잖아요. 돌아가세요.”“쫓아내면 더 스트레스받아. 명줄 줄어들겠네, 알면서 그래?”이 와중에도 살벌하게 뼈 있는 농담을 던지는 남자인지라, 기가 차서 한숨만 새어 나왔다.얼마나 오랜만에 돌아온 집인지 몰랐다.주인이 오랫동안 비워둔 낡은 구옥이었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오랜 시간 쌓인 내 생활의 흔적들이 바로 어제 떠났다 돌아온 것처럼 아늑하게 나를 감쌌다.나는 얼른 보일러 온도를 높이고,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덮어두었던 안방 침구를 정성스레 정리했다.그 사이 차준호는 허름하기 짝이 없는 낡은 욕실에서 깔끔하게 씻고 나왔다. 신기하게도 그 남자는 어디서 챙겨왔는지 새 로브를 입고 있었고, 내 몫까지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다.나 역시 서둘러 씻고 나와 그가 챙겨준 폭신한 로브를 걸쳐 입었다.내 공간에 차준호라는 거대한 존재가 들어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벅차오르고 든든했다.하지만 지독히 고급스러운 삶만 살아온 그에게 이곳은 그저 누추하고 불편한 침소일 뿐이라는 생각에 절로 미안함이 밀려왔다.“편하게 쉬셔야 하는데······.”“신하늘이 옆에 있으면 어디든 똑같아.”내 염려를 단번에 잘라낸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침대를 향해 손짓했다.“어서 내 품에서 쉬어. 나한테 안겨 있을 날도 별로 안 남았잖아.”어떻게 저렇게 심장을 칼로 베어내는 듯한 소리를, 저리도 미소를 머
“어! 대표님!”“오셨습니까?”허기찬과 선우현을 비롯한 XX당 관계자들이 하나둘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고, 나 역시 천천히 차준호에게로 다가섰다.자신의 죽음마저 아득하게 비웃던 이 남자가, 이제 내가 벌여놓은 정황의 전장 속으로 깊숙이 발을 들이려 하고 있었다.“회사 안 들어가셨어요? 아니면 회장님하고 한남동이라도 가시지.”“신하늘 밥 안 먹었을 거 아니야.”이 와중에 밥 타령이라니.그러고 보니 그가 몰고 온 보좌 인력들의 손에는 고급스러운 팩들이 잔뜩 들려 있었다.싱그러운 과일과 정갈한 고급 한정식 도시락, 그리고 세련된 디저트까지.이 남자는 늘 이랬다. 자신의 생명이 시들어가는 것은 방관하면서도, 언제나 내 끼니와 안위에는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사람 마음을 이토록 심란하게 어지럽혀 놓고서.“대표님, 저랑 잠깐 옥상에서 이야기 좀 나눠요.”어쨌든 나를 아끼는 그 지독한 마음을 이용해 먹는 수밖에 없었다.차준호는 나른한 미소를 흘리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망설임 없이 내 손을 꽉 감싸 쥐었다.“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그가 잡아끄는 온기를 묵묵히 받아들이며 함께 사무실을 나왔다.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그의 뜨거운 체온이 굳어있던 내 심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고 있었다.***서울의 밤은 화려함의 극치를 달렸으나, 그 속살은 지독하게 건조하고 냉혹했다.옥상 위, 나는 차준호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아득한 허공을 응시했다. 봄의 초입이라기엔 너무도 예리한 바람이 칼날처럼 뺨을 베고 지나갔다.저 멀리 보이는 희미한 별빛이 차갑게 일렁였
세종동의 좁은 골목 초입, 최기범이 공들여 준비한 그곳에 다다랐을 때 도시에는 서서히 푸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그러나 건물 내부는 마치 쇳물을 부어 넣는 주물공장처럼 열기와 긴장감으로 펄펄 끓어오르는 모양새였다.일반 직장인들에게는 퇴근길에 접어들 시간이었지만, 이곳엔 당에서 파견한 정예 인력이 즉각 투입되어 사무실은 흡사 거대한 벌집을 쑤셔놓은 듯한 소란스러움으로 가득 찼다.벽면에는 내 얼굴과 기호가 큼지막하게 박힌 초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선거 공약서와 홍보 인쇄물이 시선을 사로잡았다.다섯 대의 유선 전화기가 일제히 비명을 지르듯 울려 댔고, 벽면 데스크에 늘어선 봉사자들의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는 팽팽한 치열함 속의 총격음처럼 귀를 때렸다.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득하게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이전의 내게 선거일이란 그저 빨간 날로 표시된 공휴일일 뿐이었고, 거실 소파에 누워 개표 방송을 게임하듯 들여다보던 게 전부였다.하지만 이것이 진짜 정치판의 민낯이자, 피비린내 나는 권력 쟁탈전의 서막이었다.사무실 한쪽, 당에서 파견된 선거 전략 전문가 이승은 선대위원장이 지역구 지도 한 장을 거창하게 펼쳐 놓으며 나를 불러세웠다.“신 후보님, 개표 방송 날 전국에서 가장 먼저 후보님 가슴에 당선 무궁화꽃이 달릴 수 있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 판을 짜겠습니다!”내가 직접 벌인 판이었지만, 막상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니 절로 기가 찼다.“역시 사람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그럼요. 오래 사셔서 국회에도 아주 길게 머물러 주셔야죠.”내가 오래오래 살아가는 그 길에 반드시 차준호라는 남자도 함께 있어 주어야 하는데.그 지독하고 오만한 성격상 절대 이식을 받지 않겠다고
차준호의 귓가에는 차진철 회장과 강진욱 박사의 목소리가 더 이상 닿지 않았다.아버지에게 자신의 시한부 비밀이 알려진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었으나, 어차피 언젠가는 드러났을 진실이었다.그보다 그를 자극하는 것은, 제 목숨을 던져서라도 자신을 수술대로 떠밀려는 신하늘의 기특하고도 처연한 간절함이었다.차준호가 여전히 생명에 초연한 채 딴생각에 잠겨 있자, 차진철 회장은 원망과 분노가 섞인 눈빛으로 노려보았다.“당장 이식 수술 날짜부터 잡아! 진아와 고 여사에게는 내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데려올 테니! 조직적합성까지 맞다는데 이게 기회가 아니면 뭐란 말이냐? 아니면 강소희라도 끌어들이든가! 해준다고 할 때 받아! 받아들이란 말이다!”차준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무엇보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온통 신하늘뿐이었다. 밥은 제때 챙겨 먹었는지, 저 험악하고 어수선한 선거판 한가운데에서 위축되지는 않았는지 걱정되어 미칠 것만 같았다.조급해진 차준호는 말 한마디마다 서늘한 독을 품은 채 차갑게 쏘아붙였다.“아버지, 소희는 배우이고 현재 임신 중입니다. 진아 이야기는 더더욱 듣고 싶지 않고요. 타인의 피를 짜내 연명하느니, 차라리 우아하게 말라죽겠습니다. 사람 목숨, 그리 쉽게 꺼지지 않습니다.”그러자 차진철 회장 역시 벼락같이 일어나 차준호의 어깨를 억세게 움켜잡았다.“네 어미도 그렇게 금방 죽었다! 다들 내 곁을 그리 황망하게 떠나 버렸는데······ 너마저 이러면······ 나는 대체 어쩌라고·····&m
병원 복도에는 하얀 소독약 냄새가 공기 중에 자욱하게 맴돌며, 마치 유령의 숨결처럼 서늘하게 피부를 핥고 지나갔다.차진철 회장의 눈빛에는 칼날처럼 날이 서 있었다. 그것은 듣고 싶지 않은 잔인한 진실을 터뜨려 버린 나를 향한 원망이자, 무너진 자존심이 내뿜는 독기였다.“신 비서, 선거로 바쁜 몸일 텐데 남의 집안일에 유난 떨지 말고 어서 돌아가!”피 끓는 아비의 절박함인 동시에, 무너져 내린 위엄을 지키기 위한 비겁한 화풀이였을지언정 난 반발하지 않았다.오한이 서릴 정도의 무시와 멸시를 해도 차준호만 살릴 수 있다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차 대표는 절대로 이식을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어. 큰일이야, 신 비서. 제발 살려줘.]고미주를 통해 알게 된 그 잔인한 진실이 귓가를 울렸다.그렇기에 나는 차진철이라는 거대한 권력을 끌어들여 그를 강제로 벼랑 끝에 몰아세울 수밖에 없었다.“제가 무모했습니다, 회장님. 이런 방식으로 알려드리게 되어······ 송구합니다. 이기적인 저를 원망하셔도 좋습니다. 그저······ 대표님을 잘 부탁드립니다.”나의 처연한 사죄에 차진철은 짓눌린 한숨을 내쉬며 차갑게 시선을 돌려 버렸다.몸을 돌려 서늘한 복도 너머로 걸음을 옮기려던 바로 그 순간.“신하늘, 같이 가. 기다려.”거칠고도 단단한 악력이 내 손목을 강하게 잡아챘다.돌아본 곳에는 여전히 오만한 가면을 쓰고 있는 차준호가 서 있었다.늘 모든 것에 초연하고 아득한 거리를 두던 남자의 두 눈동자에는, 마치 길 잃은 아이처럼 사정
종일 정신 없다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커피에 의지해온 탓일까. 카페인의 날카로운 자극이 현기증을 부추겼다.그가 왜 하필 기억을 잃은 걸까.3년치 기억만 사라지다니. 비극 같으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빌어먹게도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카메라 군단이 다시 몰려들었다. 간신히 버티던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변했다.그런데 병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고미주와 강진욱의 대화에 일순 어깨가 흠칫거려졌다.[강 박사님, 차 대표는 언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나요?][네, 최종 검사가 끝나는 대로 오늘
이아준은 통화 도중,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신하늘과 도국과의 옛 기억 속에 깊게 잠겼다.화려한 마천루가 즐비한 강남의 이면, 세종동 서쪽 끝자락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빈민가가 있었다. 그곳에 위치한 ‘하늘 보육원’은 세 사람의 유년이 뿌리내린 곳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나이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이자 가족이었다.이아준은 태어나자마자 차가운 보육원 앞마당에 버려진 신세였다. 그러나 운명은 잔인하고도 변덕스러웠다. 뒤늦게 그가 국내 최고 재벌가인 L그룹의 잃어버린 혈통임이 드러났고, 하루아침에
[1월 1일, 재벌가 차준호와 톱여배우 강소희! 둘만의 밀월여행이었나· 강원도에서 추락 사고!][CC그룹 후계자 차준호·한류스타 강소희! 과연 현재 상태는?][사고 직후 불거진 비밀 연애 의혹· 관계자들은 어떤 입장을···][과연 차준호와 강소희 사고에 관한 진실은 무엇인가!]새해의 태양이 채 떠오르기도 전, 대한민국은 단 하나의 소식으로 들끓었다. 차준호는 강소희를 자신의 세단에 태운 채 1월 1일 새벽 강원도 산길을 달리던 중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십여 미터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했다.단순한 교통사고인지, 범죄와 연관된
‘이 나쁜 자식!’지난 3년간 내게 보인 그 모든 다정함은 한낱 유희였을까? 차준호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문드러져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자존심을 끌어모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도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대표님은 그동안 절 어찌 보셨는데요?”나는 유리창 너머로 썰물처럼 번지는 화려한 야경을 사납게 응시하며, 심장에 박힐 날 선 말을 뱉어냈다.“네 주변에 남자가 들끓어 보였거든.”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오는 남사친 둘을 두고 한 오해였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