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기억을 찾아가면서, 내 마음도 이제 좀 알아 버렸거든.”
그가 이렇게 솔직한 남자였던가. 하긴, 어쩌면 그는 단 한 번도 내게 솔직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을지도 몰랐다.
차준호는 나를 마주하며 천천히 거리를 좁혀왔다. 그의 눈동자에는 일절 흔들림이 없었다. 이미 무겁고 확고한 결심을 마친 사람처럼, 내 모든 것을 낱낱이 꿰뚫어 보듯 단호한 눈빛으로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요?”
“덕분에 요즘 거짓말의 묘미를 알아버렸어. 그러니까 일이 술술 풀리더라고. 전리품은 확실하게 챙겨줄 테니 걱정 마.”휘청, 눈앞이 아뜩해지는 현기증에 난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를 이용하라니. 전리품이라니. 그가 대체 이런 위험한 짓을 사서 하며 얻는 실익이 뭐가 있다고 이토록 당당한 걸까.
“그래도 전 제 마음대로 할 거예요.”<
이아준은 능청스러운 도국을 바라보며 하마터면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역시, 도국의 의미심장한 말 속에는 수많은 계산이 은밀하게 깔려 있었다.당황한 이아정이 입을 다문 채 어쩔 줄 몰라 하자, 이아준이 입꼬리를 한가롭게 올리며 말문을 열었다.“할아버지, 오셨으니 좀 앉으세요.”그가 시치미를 떼며 손님을 맞이하듯 구니, 순간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거실의 공기가 뒤틀렸다.이왕춘은 미련 없다는 듯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속 시끄러운 일은 없는 거겠지?”‘대체 뭐가 속 시끄러운 일입니까?’는 반발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도국이 이아준의 마음을 다 읽은 듯 먼저 이왕춘을 향해 다가섰다.“저희끼리 시끄럽게 수다도 좀 떨고, 게임도 즐길 예정입니다.”그 말을 듣자마자 이왕춘은 기가 찬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분위기가 묘하게 서먹해진 찰나, 뒤에 서 있던 이아정이 헛기침하는 척하며 나지란을 빤히 노려보았다.“아준이 너, 행동 똑바로 해. 우리 L그룹의 명예가 걸린 일이야.”나지란의 말에 대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 이아준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만약 자신이 진짜 마음을 품은 상대가 도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저 인간들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제가 누구에게 마음을 주든 신경 쓰이시는 게 당연하겠죠. 어찌 됐든 전 L그룹의 얼굴이 될 몸이니까요.”이아준의 나른한 응수에 옆에 서 있던 도국조차 참지 못하고 낮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결국 나지란은 눈을 하얗게 뒤집으며 이왕춘의 눈치를 살폈다.“기고만장하기는. 쯧!”다시금 거실
“대표님!”조금 전까지 신세를 한탄하며 이곳으로 걸어오는 동안 머릿속은 온통 복잡한 상념으로 터질 듯 가득 차 있었다.하지만 차준호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내 안에 패배의식으로 침전해 있던 모든 감정이 순식간에 전투적으로 곧게 세워졌다.“놀랐어? 하긴, 반갑게 맞이했다면 그건 신하늘이 아니지.”그는 팔짱을 낀 채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나를 나른하게 내려다보았다.차준호가 이곳에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애초에 오늘 그의 호텔로 가지 않겠다고 차갑게 통보했던 건 바로 나였으니까.“어떻게······ 여기에 계신 거죠?”이곳은 L그룹 소유의 건물이고, 차준호는 서울 시내 한복판에 본인 소유의 거대한 호텔을 두고 있는데, 그가 왜 이곳에 있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신하늘이 위기에 처했으니까. 내 호텔로 데리고 갈 타이밍이 안 나와서, 객실 하나 빌렸지.”객실이라니.조금 전 유니폼을 입은 안내원이 왜 나를 향해 ‘고객님’이라 불렀는지 그제야 이유를 깨달았다.발걸음이 마치 깊은 땅속에 차갑게 뿌리를 내린 것처럼 묵직해져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 남자는 대체 왜 내게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어서 들어와. 피곤하잖아.”피곤함이 뼈마디까지 밀려드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차준호가 머무는 은밀한 영역 안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얼마나 더 큰 풍파가 들이닥치게 될까.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최기범과도 아무 일 없었고, 도국을 비롯한 이아준과도 부끄러움 하나 없
[세종동 사건 당사자 신하늘! 최근 SNS에 보여준 이미지는 전부 거짓? 그녀는 위선의 화신! 국회의원 김희주의 메가톤급 폭로!][김희주, 신하늘 관련 각종 증거 수집해 경찰 제출! 사건 관련 자료 검찰 송치 단계 진입!][지난 10년간 세종동 재개발 추진해 온 김희주, 이를 가로막은 악녀 신하늘? 과연 진실은?][김희주 아들 농락한 신하늘, 이번엔 글로벌 슈퍼스타 D군과 야밤 밀회? 팜므파탈의 실체!][토요일 밤 L레지던스로 향하는 신하늘 목격 제보 잇따라! 차기 재벌가 대표 L 씨와도 부적절한 관계?][매일 명품으로 휘감고 다니는 '세종동 사건' 피해자 코스프레 비서 신하늘, 그동안 동료 직원들에게도 눈총받아!][신데렐라 꿈꾸나? 재력가·유명인 남자만 노린 CH컴퍼니에 낙하산 승진한 신하늘, 그녀는 희대의 악녀인가?]모든 언론사와 텔레비전 뉴스, 포털 사이트 메인까지 일제히 나를 향해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김정규가 다급하게 이아준에게 전해온 소식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마녀사냥 제대로 시작됐어요! 김희주, 진짜 무서운 여자입니다! 모든 언론사에 한꺼번에 터트렸어요!게다가 이 일 때문에 L그룹 본가 사람들이 지금 당장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사실조차 아득히 황당했다.“이건 범죄야! 실명까지 대놓고 거론하면서 사람을 언론으로 이렇게 매장시킨다고?”“진짜 지독해! 이런 망할 김희주, 처음부터 작정하고 판을 짰어!”이아준과 도국의 분노만큼이나 내 안에서도 뜨거운 화염이 치밀어 올랐다.마치 정교하게 설계된 덫에 걸려든 기분이었다. 건물 주변에는 이미 기자들이 빽빽하게 진을 치고 있어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조차 쉽지 않아 보였다.“일단 내가 알아서 할게! 좀 더 조심했어
나는 입을 달싹이며 앞에 놓인 물 잔을 들어 타들어 가는 목을 적셨다.친구들은 전혀 가볍지 않은, 진지한 태도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가장 먼저 말문을 열어준 것은 도국이었다.“강소희와는 무관하지만, 뼛속까지 재벌가 집안이라 결혼까지 가기는 쉽지 않을 거야.”‘마음을 정리해라’, ‘그놈 나쁜 놈이다’, ‘세상에 남자는 많다’ 같은 식의 진부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마음을 정리하겠다고 했을 뿐인데, 도국은 벌써 결혼이라는 현실적인 벽까지 다각도로 언급하고 있었다.이아준 역시 마찬가지였다.“우리 집안 이아정과의 혼담도 진행 중이던데. 차준호 본인 의사와는 다르게 차진철 회장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어. 조만간 상견례를 할 것처럼 보였거든.”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상견례까지 언급하면서도, 둘 다 차준호라는 인물 자체에 대해서는 섣부른 비난을 아꼈다.친구들은 나보다 세상 물정도 잘 알고 연애 경험도 많아서인지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하지만 차준호와의 관계가 시작된 이래 내 삶의 모든 것은 이미 통제 불능이었고, 결국 벼랑 끝에 서게 되었다.‘신 비서’로 지낼 때의 당당함은 까마득한 옛일이 되어 버렸다. 지난 3년 동안 착각 속에 머물렀고, 차준호가 만들어 낸 허상에 갇혀 구름 위를 걷듯 살아왔을 뿐이다.그러니 이제는 정말 결론을 내려야 했다. 차준호와 멀어질 것이고, 혼자 힘으로 꿋꿋하게 일어서겠노라고.“하늘아, 더 할 말 없어?”“진실 게임이잖아.”역시 이아준과 도국은 촉이 좋았다. 내가 김희주에 관한 일과 차준호에 대한 미련을 모두 털어내고, 3월부터
내가 멈칫거리자 친구들은 뭘 그리 신경 쓰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굴었다.이제는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너무 대단해져 버린 이아준과 도국에게 혹여나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여전했지만, 녀석들은 오히려 전망 좋은 소파 쪽으로 나를 이끌었다.20년도 넘게 알고 지낸 친구들이기에, 하고 싶은 말도 많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도 컸기에 돌아가려는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하늘이 네가 요즘 충격을 받아서 그런가, 걱정이 많아졌구나? 기분 전환도 할 겸, SNS에 여기서 우리랑 놀고 있다고 올려.”이아준은 평소 같은 표정으로 음식과 와인잔을 세팅하며 가볍게 웃었다.내가 녀석들을 자꾸 언급하면 세상 사람들은 나를 김희주처럼 평가할지도 몰랐다. 남자를 이용해 먹으려는 꽃뱀이라고.그리고 JW 엔터테인먼트 대표인 주원형 같은 이들도 내가 도국의 소꿉친구 포지션에서 하루빨리 멀어지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이아준은 또 어떤가. L그룹에 뒤늦게 합류한 핏줄이라 이왕춘 회장은 예뻐하지만, 그 외의 친족들은 이물질이라며 배척하는데 가까이 지내는 친구도 최악이라며 손가락질할 게 뻔했다.스캔들이라도 터지면 L그룹과 JW의 주가가 동시에 폭락할 테고, 녀석들 주변 사람들의 인생까지 꼬이게 될 테니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해야 했다.게다가 당장 내 코가 석 자였다. SNS가 문제가 아니라 당장 3월 새로운 일터부터 찾아야 했다. 미래로 향하는 길은 안개 속에 잠긴 미로 같았고, 발밑의 돌부리마다 계속 터지는 돌발 상황들이 끊임없이 발목을 잡았다.“하늘이 얼굴 되게 심각하네.”“요즘 사춘기인가 보지 뭐.”갑자기 도국의 입에서 나온 ‘사춘기’라는 단어에 딸꾹질이 나올 만큼 어깨가 솟구쳤다. 질풍노도의 시기 딱
토요일 오후.최기범의 한남동 저택은 차가운 침묵에 짓눌려 있었다.아버지 최승현 회장의 생일이라 화목해야 마땅한 날이었지만, 집 안에는 싸늘한 냉기만 감돌았다.아무리 성향이 맞지 않아도 피를 나눈 부모 자식 사이였기에 최기범은 선물도 정성껏 챙겨 왔고, 처음엔 성질을 죽인 채 자리를 지키려 했었다.자신을 향한 부모님의 애정은 여전했으나, 식탁 위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하고 금세 날 선 대화로 무너져 내렸다.“자식이 많은 것도 아니고 너 하나뿐인데, 아비 생일날도 얼굴을 찌그러뜨리고는······ 쯧, 네 엄마가 일을 저질렀어도 너는 중심을 잡아야지.”“······노력 중이에요.”최승현 회장의 얼굴엔 감정이 쉽게 드러나지 않아 평온해 보였어도, 내심 무심한 아들에게 섭섭함이 묻어 있었다.그나마 어머니 김희주보다는 이성적인 사람이 아버지였다. 최기범은 말을 아끼며 침묵 속에 식사를 이어 나갔다.명색이 잔칫상이라 기름진 음식이 많았고, 오랜만에 힘을 주어 차린 상이라 비주얼만큼은 제법 대단해 보였다.“당신이라도 날 곱게 봐줘야죠. 괜히 언론에서 부풀린 거예요. 알아서 할 테니 오늘은 그런 말 말고 기분 좋게 밥이나 먹어요.”며칠 전 최기범과 한바탕 실랑이를 벌였던 김희주는 최승현의 눈치를 살피며 눈꼬리만 치켜올렸다.최기범은 아버지 앞에서는 본심을 숨긴 채 미소 짓는 김희주의 위선에 속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알아서 해결하기는커녕 계속해서 일만 키우고 있으면서.그래도 좋은 날이었기에 최기범은 최대한 참아내며 최승현의 잔에 술을 채웠다.
종일 정신 없다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커피에 의지해온 탓일까. 카페인의 날카로운 자극이 현기증을 부추겼다.그가 왜 하필 기억을 잃은 걸까.3년치 기억만 사라지다니. 비극 같으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빌어먹게도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카메라 군단이 다시 몰려들었다. 간신히 버티던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변했다.그런데 병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고미주와 강진욱의 대화에 일순 어깨가 흠칫거려졌다.[강 박사님, 차 대표는 언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나요?][네, 최종 검사가 끝나는 대로 오늘
이아준은 통화 도중,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신하늘과 도국과의 옛 기억 속에 깊게 잠겼다.화려한 마천루가 즐비한 강남의 이면, 세종동 서쪽 끝자락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빈민가가 있었다. 그곳에 위치한 ‘하늘 보육원’은 세 사람의 유년이 뿌리내린 곳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나이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이자 가족이었다.이아준은 태어나자마자 차가운 보육원 앞마당에 버려진 신세였다. 그러나 운명은 잔인하고도 변덕스러웠다. 뒤늦게 그가 국내 최고 재벌가인 L그룹의 잃어버린 혈통임이 드러났고, 하루아침에
[1월 1일, 재벌가 차준호와 톱여배우 강소희! 둘만의 밀월여행이었나· 강원도에서 추락 사고!][CC그룹 후계자 차준호·한류스타 강소희! 과연 현재 상태는?][사고 직후 불거진 비밀 연애 의혹· 관계자들은 어떤 입장을···][과연 차준호와 강소희 사고에 관한 진실은 무엇인가!]새해의 태양이 채 떠오르기도 전, 대한민국은 단 하나의 소식으로 들끓었다. 차준호는 강소희를 자신의 세단에 태운 채 1월 1일 새벽 강원도 산길을 달리던 중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십여 미터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했다.단순한 교통사고인지, 범죄와 연관된
‘이 나쁜 자식!’지난 3년간 내게 보인 그 모든 다정함은 한낱 유희였을까? 차준호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문드러져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자존심을 끌어모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도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대표님은 그동안 절 어찌 보셨는데요?”나는 유리창 너머로 썰물처럼 번지는 화려한 야경을 사납게 응시하며, 심장에 박힐 날 선 말을 뱉어냈다.“네 주변에 남자가 들끓어 보였거든.”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오는 남사친 둘을 두고 한 오해였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동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