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일요일 오전. 일본의 한 예능 프로그램 대기실.
“여기가 진짜 일본이라니! 우리 진짜 성공했다, 그치?”
하나의 들뜬 목소리가 적막한 대기실 안을 쾌활하게 울렸다.
“게다가 3월 1일 신작 게임 출시 이벤트 무대에 우리가 메인 주인공이라니! 언니 너무 기뻐요!”
거울 앞에서 메이크업을 수정하던 두나 역시 붉어진 볼을 감추지 못한 채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들뜬 기색이 역력한 것은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세나 역시 뿌듯함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하루빨리 더 높이 올라가 확실한 성공을 거둬야만 했다. 그래야 도국과 연예계 바닥에서 오래도록 같은 시선을 공유하며 연을 이어갈 수 있을 테니까.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그를 향한 아련한 마음이 가슴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그때, 대기실 한쪽 모니터를 조용히 바라보던 나나가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리며 두 손
중환자실 앞에 머무는 공기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늘 그러하듯, 지나치게 소독되어 있어 오히려 비현실적인 악취를 풍겼다.분명 차진철 회장이 무사히 눈을 떴다는 희망적인 소식이 들릴 줄 알았는데.막상 도착해 마주한 현장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못해 서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나와 차준호는 모든 사고(思考)가 정지된 백색의 공간 속에 툭 던져진 것만 같았다. 그저 서로의 손뼈가 불거질 만큼 강하게 맞잡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투명한 유리벽 너머, 한 시대를 호령했던 거물 차진철은 더 이상 위엄 있는 경영자의 모습이 아니었다.그는 수많은 투명 호스와 전선에 온몸을 포박당한 채, 수분기가 다 빠져나가 생명을 잃어가는 고목(古木)처럼 무력하게 누워 있었다.거대한 기계 장치들이 그의 가느다란 숨통을 강제로 붙들고 있었고, 인공호흡기가 규칙적으로 내뱉는 기계적인 마찰음만이 그가 아직 이승의 끈을 놓지 않았음을 위태롭게 증명하고 있었다.“회장님, 안 돼요, 제발······!”고미주 여사가 유리벽을 손톱으로 긁어내리며 절규했다.차진아는 이미 넋이 나간 얼굴로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그저 제 아버지이지만 ‘회장님’만 연신 부르며 목놓아 울부짖고 있었다.그때, 바이탈 모니터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붉은빛으로 요동치더니, 이내 극도로 위태로운 빈맥(Tachycardia) 신호를 내뿜기 시작했다.“어레스트(심정지) 임박! V-fib(심실세동)입니다!”어떻게 이런 일이.외침과 동시에 의료진이 흉부 압박에 들어갔고, 에피네프린 투여 지시가 빗발쳤다.급박한 의료진의 움직임으로 중환자실 내부가 순간
아침이 한참 지났음에도 병원 휴게실은 적막했다.창문 너머로 맑은 햇살이 스며들었지만, 형광등 불빛만 무기력하게 가득 찬 휴게실 내부 바깥의 소란과는 단절된 고요한 섬처럼 사람을 짓눌렀다.자판기 옆 낡은 소파 끝자락에 차진아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이아준은 그런 차진아의 모습이 내내 눈에 거슬려 선뜻 문을 열고 나가지 못했다.차준호가 무사히 깨어났고 신하늘도 무탈하다니 이제 그만 회사로 복귀해야 하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를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사경을 헤매는 아버지를 둔 채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그 작은 체구가 애처로워서일까.아니면 차진아에게서 마치 벌을 받고 있던 어린 시절의 제 모습이 겹쳐 보여서였을까차진아의 손에는 다 식어버린 믹스 커피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눈물은 이미 뺨을 타고 흘러내릴 힘조차 없는지, 눈가에 위태롭게 맺힌 채 불안하게 반짝였다.이아준은 참다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마시던 캔커피를 들고 차진아의 옆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서 바라본 차진아는 열아홉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훨씬 더 작고 어린아이 같았다.“진아 양, 식사는 해야지. 뭐라도 좀 사다 줄까?”“······저는 괜찮아요.”낮고 메마른 음성. 슬픔이나 투정조차 사치라는 듯 단념이 깔린 말투였다.“이따가 고 여사님이 좋은 소식 가지고 오실 거야. 그때 견디려면 지금 뭐라도 좀 먹어둬야지.”차진아는 이아준의 느닷없는 다정함이 생경했는지, 쭈뼛거리며 작게 어깨를 움츠렸다.“······고맙습니다, 이아준
깊게 가라앉았던 의식의 수면을 뚫고, 마침내 차준호라는 고요한 섬이 보였다.눈꺼풀 너머로 희미한 햇살이 번져왔고,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듯 귓가를 따라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그동안 꽤 많은 눈물을 쏟아냈다고 생각했는데, 내 몸속에는 여전히 흘릴 수분이 남아 있었는지 얼굴이 다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그가 눈앞에 반드시 나타날 거라는 단 하나의 확신으로 버텼던 시간들이 의식 바깥 어딘가에서 거친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아득히 빠져나갔다.“······신하늘은 정말 사람 놀라게 하는 데에는 탁월한 재주가 있어. 늘 예상 밖이야.”누가 할 소리. 그 재주는 차준호가 넘버원인 것을.그의 말에 그래도 심장이 일렁거렸다.불과 얼마 전까지 죽음의 문턱에서 피 말리는 사투를 벌였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의 얼굴은 해사했고 눈빛은 여전히 형형한 기개를 품고 있었다.온 세상을 발 아래 두고도 지루하다는 듯 오만하게 흘겨보는 그.그 어떤 가혹한 운명도 감히 자신을 꺾을 수 없다고 믿는 특유의 눈빛.다시는 마주하지 못할까 봐 차마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고 삼켰던 애틋한 존재가, 지금 내 눈앞에 온전한 실체로 존재하고 있었다.“······깨어나주었네요, 정말로······.”갈라진 목소리가 겨우 새어 나왔다. 제대로 된 멋진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고작 그 한마디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건강해진 그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홀로 남아 얼마나 아득한 공포에 떨었는지, 그리고 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가장 기쁜 날, 가장 많은 걱정과 슬픔 속에 나는 잠겨 있었다.내가 휴게실 한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자, 하나둘 사람들이 다가왔다.고미주 여사가 초췌한 안색으로 내 손을 잡았다.“얼굴이 그게 뭐야? 웃어야지. 처음 볼 때부터 남다르다 생각했지만, 내가 정말 대단한 사람을 곁에 두고도 몰라봤어. 신 비서······ 진심으로 축하해.”그녀의 안색은 어두웠지만, 나를 향한 축복만큼은 진실했다. 차진아 역시 분홍빛으로 물든 눈가에 힘을 주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정말 축하해요, 언니. 그리고······ 우리 오빠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요.”많이 울어서인지 눈이 붉어진 애처로운 차진아의 얼굴을 보며 위로의 말을 고르던 찰나, 새벽의 정적을 찢는 묵직한 구둣발 소리가 휴게실 안으로 들려왔다.“······하늘아.”“신하늘.”그곳엔 도국과 이아준이 서 있었다. 휴게실에 내가 보이지 않자 찾아온 모양이었다.나는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억지로 추슬렀던 내 표정은 그들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바쁜데 너희까지 걱정 끼치고. 고마워, 함께 있어줘서. 어서 가.”이아준이 가장 먼저 다가와 내 어깨를 단단히 감싸 쥐었다. 그 온기 속에서 나조차 몰랐던 몸의 비명이 실시간으로 느껴지는 듯했다.“차 대표는 이
“보호자분······.”그 정적인 음성이 복도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는 순간,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시간의 실타래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땀에 절어 검게 변한 수술복 차림의 강진욱 박사가 피로가 가득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뒤늦게 달려온 선우현이 무어라 외치려 했지만, 내 망막은 그 어떤 장면도 포착하지 못한 채 하얗게 점멸했다. 오직 강진욱의 입술이 그리는 미세한 떨림과 그 너머에 머무는 진실만이 나의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우선 췌도 이식 수술 자체는 무사히 마무리되었습니다. 초기 주입 반응도 양호합니다. 다만, 두 분 모두 전신 마취와 수술의 여파가 커 의식을 회복하시기까지 조금 더 경과를 지켜봐야 합니다.”적막을 찢고 들려온 그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의 심장을 울렸다.그토록 갈구하던 기적의 언령이자 희망의 신호가 고막을 때리자, 꼿꼿이 버티고 있던 다리의 신경이 일제히 풀려나갔다.비틀거리는 나를 지탱한 것은 의지가 아니었다.그것은 차마 무너지지 못한 지독한 긴장의 잔여물이자, 아직은 쓰러질 수 없다는 강력한 본능이었다.주변에서 터져 나오는 안도의 탄식과 깊은 숨소리가 아득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불이 꺼진 수술방의 육중한 문을 멍하니 응시했다.오랫동안 내 영혼을 짓누르고 있던 거대한 바위가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강진욱 박사는 무겁게 헛기침을 하며 설명을 이어갔다.“회장님의 췌도 세포가 차 대표님의 간문맥을 통해 성공적으로 주입되었습니다. 회장님의 체력이 다소 우려스럽긴 하나, 수술 자체는 기대 이상으로 잘 끝났습니다. 이제부터
대한민국 선거일은 국민들에게 단순한 투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국가의 명운이 좌우되는 거대한 이벤트이자, 격동하는 대한민국 정치의 맥박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날일 터.특히 이번 선거는 세종동을 중심으로 한 ‘신하늘 신드롬’으로 인해 전 세계 외신의 이목까지 집중된 상태였다.평소 적막과 알코올 냄새만 가득하던 대형 병원 로비는 이제 거대한 광장으로 변모해 있었다.“오늘 신하늘 후보랑 차준호 대표가 들어왔다던데, 진짜야?”“차 대표가 선거운동 내내 아내 외조한다고 무리하더니 결국 탈진해서 실려 왔대요. 그 서슬 퍼런 기운은 어디 가고 아내 옆에선 영락없는 사랑꾼이던데.”사람들의 대화는 개표 방송의 요동치는 숫자만큼이나 뜨거웠다. 누군가는 혀를 차며 차준호의 헌신을 ‘세기의 외조’라 칭송했고, 누군가는 신하늘을 향해 경탄과 축복의 덕담을 보냈다.“처음엔 그냥 운 좋은 신데렐라인 줄 알았지. 근데 저 여자, 다 죽어가던 세종동 민심 뒤집어놓는 거 보니까 보통 내기가 아니더라고.”“그러니까 사람들이 투표했겠죠. 새로운 세상에 거는 기대가 오죽 크겠어요?”각 지역구별로 형형색색의 그래프가 오르내리며 전국이 들썩이던 순간, 장내를 일순간 정지시키는 날카로운 긴급 속보음이 로비를 찢어발겼다.[특보: 김희주 후보 검찰 자진 출두, 모든 과오 인정한다고 밝혀.][김희주 의원,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 및 신하늘 후보를 향한 갑질·폭행 모두 시인]화면 속 김희주는 이전의 서슬 퍼런 여장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초라하고 수척해진 모습으로 포토라인에 섰다.쏟아지는 플래시 세례 속에 그녀가 힘겹게 마이크를 잡았다.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
종일 정신 없다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커피에 의지해온 탓일까. 카페인의 날카로운 자극이 현기증을 부추겼다.그가 왜 하필 기억을 잃은 걸까.3년치 기억만 사라지다니. 비극 같으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빌어먹게도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카메라 군단이 다시 몰려들었다. 간신히 버티던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변했다.그런데 병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고미주와 강진욱의 대화에 일순 어깨가 흠칫거려졌다.[강 박사님, 차 대표는 언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나요?][네, 최종 검사가 끝나는 대로 오늘
이아준은 통화 도중,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신하늘과 도국과의 옛 기억 속에 깊게 잠겼다.화려한 마천루가 즐비한 강남의 이면, 세종동 서쪽 끝자락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빈민가가 있었다. 그곳에 위치한 ‘하늘 보육원’은 세 사람의 유년이 뿌리내린 곳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나이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이자 가족이었다.이아준은 태어나자마자 차가운 보육원 앞마당에 버려진 신세였다. 그러나 운명은 잔인하고도 변덕스러웠다. 뒤늦게 그가 국내 최고 재벌가인 L그룹의 잃어버린 혈통임이 드러났고, 하루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