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강소희는 울음을 뚝 그친 채 물끄러미 주원형을 바라보았다.
평생을 살아오며 늘 그에게 감사했고, 의지했으며, 때로는 비겁하게 이용하기까지 했던 자신이었다.
차준호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것도 사실이었고, 한때는 최기범을 차선책으로 삼아 화려한 미래를 꿈꿨던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온 세상이 자신을 버리고 벼랑 끝으로 몰아세운 지금, 앞으로의 미래를 주원형과 함께해야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될 줄이야.
그때, 주원형의 깊은 눈동자 속에서 살기 어린 결심이 오롯이 번뜩였다.
“나랑 결혼해. 프러포즈 선물로 김희주 그 여자, 피눈물 나게 만들어 줄 테니까. 그리고 내 인생에서 넌 늘 빛나는 여자였어. 계속 빛나게 만들어 줄 거야. ”
어떻게 이 순간에 이런 엄청난 말을 내뱉을 수 있을까.
주원형의 묵직한 진심이 가슴에 와닿자, 참았던
차준호는 털썩 소파 위로 무너지듯 앉았다. 머릿속이 거센 폭풍을 맞은 듯 아득해졌다.자수라니. 불과 어제 대표실을 나설 때만 해도 강소희 사건으로 골머리를 앓던 녀석이었다.대체 최기범이 무슨 죄를 지었다는 말인가. 설마 신하늘의 실종에 녀석이 직접 관여하기라도 했다는 뜻인가.“······허 실장, 자세히 말해 봐.”차준호가 겨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자, 허기찬은 데스크 위에 봉투 하나와 정갈하게 적힌 메모를 정돈해 올려놓으며 급히 설명을 이어갔다.“사직서를 놓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 메모도 함께 남겨두셨고요. 아직 언론에 기사가 뜨거나 경찰 측에서 공식 수사 상황을 브리핑한 단계는 아닙니다.”사직서 봉투 위에 포스트잇으로 붙여진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준호야, 그동안 고민 많이 했다. 나 자수하러 간다. 나중에 통화하자.]어제 대표실을 나가면서 허기찬의 책상 위에 두고 간 듯했다.차준호는 가쁜 숨을 누르며 요동치는 심장을 겨우 가라앉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휴대전화를 들어 최기범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통화가 연결되었다.“······너 뭐야. 어제 나랑 대화할 땐 이런 말 없었잖아.”차준호의 날 선 추궁에 수화기 너머로 최기범의 덤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너랑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는 확실히 결심을 못 했지. 하지만 대표실 문을 나서면서 마음을 굳혔다.차준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당황스러움이 차올랐지만, 결국 가슴속에 뭉쳐 있던 의구심을 터뜨렸다.
차준호는 너무 놀라 당황한 기색을 미처 숨기지 못했다.불과 며칠 사이에 최기범의 얼굴은 마른 장작처럼 축나 있었다. 광대뼈 아래로 지나치게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수면을 완전히 잊은 자의 얼굴 그 자체였다.차준호는 말없이 냉장고를 열어 맥주 두 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캔 표면에 맺힌 차가운 이슬이 손바닥을 적셨다.“잘됐네. 찾아가려고 했는데.”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은 최기범의 목소리가 정적을 긁어냈다. 팔짱을 낀 두 팔이 보이지 않는 벽을 단단히 쌓아 올리고 있었다.“심란해. 신하늘 때문에. 한잔해.”“하긴, 술이라도 마셔야 살겠지. 난 됐다. 운전해야 해.”최기범의 건조한 말이 낮게 떨어졌다. 녀석이 방어막을 한 꺼풀 벗겨내자, 차준호 역시 돌려 말하는 것을 멈추었다.“내 아버지가 이상해. 선우현은 증발했고, 지금은 너마저도 지독하게 의심스러워.”최근 제 마음을 짓눌러온 불신과 울분이 오랜 벗을 향한 화살이 되어 쏟아졌다. 그러자 최기범이 실소를 흘렸다. 비릿하고 씁쓸한 웃음이었다.“난 우리 엄마 아들이고, 그 피를 고스란히 이어받았지. 근데 차준호, 넌 다른 줄 알아? 차진철 회장님이 얼마나 지독한 냉혈한인지. 그 핏줄 어디 안 가잖아.”차준호의 명치끝이 지독하게 달아올랐다. 정교하게 벼려진 말이었다. 역린을 찌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격분이 이성의 둑을 밀어붙이고 있었고, 그 단단했던 둑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그럼 내가 어떤 놈인지 잘 알겠네. 신하늘에게 티끌만큼이라도 위해를 가한 자는 절대로 가만히 안 둬. 미칠 것 같아. 그래서······.&
사고가 아니라, 명백한 범죄였다.게다가 수사기관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결정적 증거’라는 표현을 끌어썼다면, 그건 혐의를 입증할 완벽한 확증이라는 뜻이었다.도국과 이아준은 그 시절 ‘하늘 보육원’을 덮쳤던 참상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던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 처참한 화염 이후, 신하늘의 삶이 얼마나 지옥 같은 진창 속으로 내던져졌는지 누구보다 아프게 알고 있었다.김희주는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소름 끼치는 범죄자였다. 그러니 주원형의 한방은 꽤 강력한 무기가 된 셈이었다.옆에 서 있던 이아준 역시 온몸을 미세하게 떨며 도국의 손에 들린 휴대전화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김희주, 그 여자는 악마야. 그냥 둬서는 안 돼.도국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신하늘이 지금 어떤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는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 얽히고설킨 타래를 풀 열쇠가 김희주와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해졌다.“하늘이와 연관된 것이라면 그 어떤 정보라도 주십시오. 저도 JW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지금은 주원형이라도 김희주를 들쑤셔 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걱정 마. 나도 모든 걸 걸었으니까. 관련 정보는 파일 보내줄게.주원형이 얼마나 악독한 인간인데. 강소희를 위해 감히 국회의원과 맞서려 하다니. 사랑이라는 감정이 냉혈한마저 얼마나 무모하게 만드는지 도국은 새삼 놀라게 되었다.전화를 끊은 뒤에도 수화기 너머로 전해진 충격이 여운처럼 남아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도국은 차오르는 한숨을 겨우 눌러 담으며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그때, 이아준이 도국의 어깨를 두드리며 잠시 입을 달싹였다.“국아, 하늘이는 너와 나를 걱정시킬 위인이 아니야. 분명
“나 대한민국 국회의원이야!”용산경찰서 취조실 안, 김희주의 날카로운 고성이 차가운 시멘트 벽에 부딪혀 요란하게 튀어 올랐다.신경질적으로 마른세수를 해대던 그녀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듯 형사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맞은편에 앉은 형사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건조했다.“그러게 말입니다. 그리 바쁘신 분이 왜 고용인을 폭행하셨습니까.”“합의! 합의하면 될 거 아니야!”그때, 곁을 지키던 변호사가 조용히 손을 올려 김희주의 어깨를 눌렀다. 경솔한 언행을 자제하라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그 의미를 모를 리 없음에도 김희주는 터져 나오는 분노와 경련을 주체하지 못해 입을 다물지 못했다.결국 또 경찰 조사를 받다니. 문밖에서 플래시를 터뜨리며 기회를 노리고 있을 기자들의 얼굴이 환각처럼 떠올랐다.제풀에 성질을 못 이겨 일을 그르친 제 고약한 성격이 원망스러웠다. 스스로 땅을 치고 후회해 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형사는 그녀의 히스테리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무미건조하게 받아쳤다.“신하늘 씨, 지금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곁에 있던 변호사가 얼른 끼어들며 말을 가로챘다.“그건 의뢰인께서 새벽 조사 때 다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안에 대해서 저희 의뢰인은 아는 바가 전혀 없으십니다.”그러자 형사는 변호사가 아닌 김희주를 향해 서늘한 눈길을 흘렸다.“그건 강남경찰서에서 하신 말씀이겠지요. 저희는 용산경찰서입니다. 참 여기저기 사고를 치고 다니시니, 이렇게 여러 범죄 혐의로 번갈아 조사를 받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내가 도의적인 책임감으로 이렇게 직접 나와 준 거잖아! 변호사만 보낼 수도 있는데! 좀 쉽게 쉽게 갑시
차준호에게 이 저택은 언제나 겨울의 서리처럼 차가웠다.오늘도 저택에는 늘 무거운 정적만이 맴돌았다. 깊은 침묵이 밀려들자, 마치 적진 한가운데로 발을 내딛는 장수의 심정으로 비장하게 발을 디뎠다.1층 다이닝 룸 근처에 있던 고용인 두 명이 차준호를 발견하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아, 대표님.”“오셨습니까. 차라도 준비해 드릴까요?”차준호는 대답 대신 1층 내부를 천천히 훑었다. 평소라면 거실에 머물며 신문을 보거나 뉴스를 틀어놓았을 터였다.“아버지는 어디 계십니까?”“회장님께서는 2층 서재에 계십니다.”집 안을 둘러보는 차준호의 눈매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한 위화감이 공기 중에 감돌고 있었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아직 명확히 짚어낼 수 없었지만, 본능적인 경계심이 솟구쳤다.“요즘 아버지는 식사를 잘하십니까?”질문이 떨어지자마자 두 고용인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시선을 교차했다. 짧은 침묵 속에 말을 아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평소와 다름없으십니다.”“차는 서재로 올려 보낼까요?”차준호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뒤돌아섰다.***도대체 이 찜찜한 기분의 정체는 뭘까. 무언가 결정적인 한 끗을 놓치고 있다는 조바심이 차준호를 짓눌렀다.1층 공간을 재차 훑고 손님방 문을 슬쩍 들여다본 뒤, 그는 무거운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2층에 다다르자 서재 너머로 앵커의 긴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뉴스에서는 차준호, 신하늘, 김희주, 그리고
어느덧 시간은 정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강남경찰서에서 새벽녘에 잠실로 돌아온 이아준과 도국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이아준의 눈꺼풀은 무겁게 내리앉았고 몸은 솜뭉치처럼 둔하게 가라앉았다. 겨우 소파에 누워 몇십 분 남짓 쪽잠을 청했던 이아준은 샤워를 마친 뒤 수트를 갈아입으며 타이를 매만졌다.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에는 지독한 피로와 그늘이 짙게 배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육체보다 그를 더 괴롭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추위와 공포에 떨고 있을지도 모를 신하늘의 잔상이었다.그런 이아준을 묵묵히 바라보던 도국이 어느새 손님방에서 나와 텀블러에 쉐이크를 타서 무심한 듯 건넸다.“빈속으로 출근하지 말고.”단백질 음료가 담긴 텀블러를 받아 든 이아준의 입가에 희미하고 쓸쓸한 미소가 스쳤다.“더 자지 뭐 하러 나와.”“너 가는 거 보고. 자도 돼. 이거라도 마셔.”“사실 아무것도 안 넘어가는데. 네가 준 거니까 먹고 가야겠다.”이아준이 쉐이크를 한 모금 삼키고 다시 정수기로 걸어가 차가운 물을 컵에 가득 채워 벌컥벌컥 마셨다.차가운 수분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지만,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답답한 열기와 타들어 가는 애타함은 전혀 식지 않았다.“김희주가 아니라는 게 확실해지니까 일이 더 복잡하고 기괴해진 느낌이야.”“그러게. 김희주라면 잃을 게 많아서 겁만 주겠지 싶었는데······.”도국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이아준은 들고 있던 컵을 조용히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차라리 김희주라는 명확한 적이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정적을 깨우는 밤 11시 반 무렵.창밖으로는 하얀 눈꽃이 송이송이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강남 C 호텔 25층 로열 스위트룸 내부는 숨 막힐 듯 팽팽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도를 최대한 낮춘 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차준호라는 거대한 포식자에게 온전히 잠식당한 채, 밤을 녹여내는 은밀하고도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내 몸의 지도를 그보다 더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그의 뜨겁고도 습한 숨결이 예민한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