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순간 나지란의 눈동자에서 일말의 오만함마저 완전히 휘발되어 버렸다.
가면을 벗어던진 얼굴은 이제 살아남기 위한 비굴함과 추악한 눈물로 지저분하게 젖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이마를 짓찧듯 고개를 조아리며, 이왕춘을 향해 찢어지는 비명을 토해냈다.
“살려주십시오! 아버님! 전 그이도 없이 홀로 이 차가운 집안에서 며느리로 버텼습니다! L그룹의 본가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이 김희주와 손을 잡아야만 했어요! 앞으로······ 앞으로 아준이에게도 잘하겠습니다!”
“할아버지! 제발 저와 엄마 구속만 안 되게 해주세요! 이제 회사 지분 따위는 절대로 탐내지 않을게요! 이아준도 제가 최선을 다해 돌보겠습니다, 네?”[하늘 보육원]에 불을 질렀냐는 직구에 느닷없는 동문서답이라니.
수상하기
“네, 오빠. 말씀하세요.”과연 도국이 궁금해하는 것은 무엇일까. 수화기 너머로 나직하게 스며드는 그의 숨소리가 세나의 가슴을 지그시 눌러왔다.-······등급이 어떻게 돼?그게 그리도 중요한 걸까.“저는 아직 SS클래스가 되려면 까마득해요. 겨우 A클래스인걸요.”고작 그걸 묻기 위해 국제 통화까지 건 것인지, 덜컥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왜 그런 걸 묻느냐고 따지려다 세나는 이내 입술을 깨물었다.이 찰나의 순간에 대체 무엇을 기대했단 말인가.하지만 도국은 집요했다.-혹시 너, 문제 풀다가 막힌 거라도 있어?세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어깨를 움찔했다. 사실 그것 때문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차였다.“미션을 받긴 했어요. C게임을 20까지 레벨업해야 등업 심사를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전화기 너머로 도국의 침묵이 이어졌다.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이었다.“오빠?”-최기범 실장의 우정이 대단하군. 이런 상황에서도 차준호를 돕다니.읊조리는 도국의 말을 들으며 세나는 그렇게도 연결이 되나 싶어 픽 웃음을 터뜨렸다.“친구 사이라면 서로 잘되길 바라는 게 당연하잖아요. 오빠도 마찬가지 아니에요?”그때, 수화기 너머로 도국의 옅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맞아. 나 역시 아준이와 하늘이를 위해서라면 지옥이라도 함께 가줄 수 있지.이아준의 이름이 신하늘보다 먼저 등장했다.“그런데 오빠, 대체 왜 이런 걸 물으신 거예요?”도국이 가볍게 받아쳤다.-미안.
순간 나지란의 눈동자에서 일말의 오만함마저 완전히 휘발되어 버렸다.가면을 벗어던진 얼굴은 이제 살아남기 위한 비굴함과 추악한 눈물로 지저분하게 젖어가고 있었다.그녀는 바닥에 이마를 짓찧듯 고개를 조아리며, 이왕춘을 향해 찢어지는 비명을 토해냈다.“살려주십시오! 아버님! 전 그이도 없이 홀로 이 차가운 집안에서 며느리로 버텼습니다! L그룹의 본가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이 김희주와 손을 잡아야만 했어요! 앞으로······ 앞으로 아준이에게도 잘하겠습니다!”“할아버지! 제발 저와 엄마 구속만 안 되게 해주세요! 이제 회사 지분 따위는 절대로 탐내지 않을게요! 이아준도 제가 최선을 다해 돌보겠습니다, 네?”[하늘 보육원]에 불을 질렀냐는 직구에 느닷없는 동문서답이라니.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죄를 덮기 위해 허겁지겁 불쌍한 척을 연기하는 두 모녀의 꼴을 보고 있자니 가소로움에 기가 찼다. 대체 뭘 잘하고, 누굴 돌보겠다는 것인가.“제가 던진 질문에 대답부터 하시죠. 김희주와 결탁해서, 내가 그곳에 있는 걸 알면서도 [하늘 보육원]에 불을 지른 겁니까? 역시 처음부터 진짜 타깃은 나였습니까? 내가 죽으면 다 잘될 줄 알았냐고요.”이아준의 낮고 서늘한 일갈이 응접실의 공기를 단칼에 베어냈다. 정적이 질식할 듯 가라앉았다.“어멈아. 대답해라.”이왕춘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몇 마디 되지 않았으나, 그 음성에는 무간지옥의 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듯한 거대하고 서늘한 분노가 넘실거리고 있었다.“아버님! ······아준이를 죽이려던 건 절대 아니었습니다!”
차준호는 타오르는 갈증과 인내심의 한계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그때 회장실 벽면의 TV 뉴스가 나직하게 흐르며 집무실의 정적을 깼다.[스카이 블루]의 철벽 보안은 그를 철저히 이방인 취급하며 밀어냈고, 신하늘과의 거리는 단 한 뼘도 좁혀지지 않았다.그는 이 정체된 상황을 타개할 마지막 열쇠를 찾기 위해 차진철을 찾아오게 되었다.“20XX년, 아버지도 세종동에 부지를 매입하셨더군요.”그 땅에 묻힌 진실이 뭐길래 차준호의 직감이 이렇게 들끓는 걸까.“뜬금없이 그건 왜 물어? 땅이라는 건 돈 냄새가 나면 사는 거다. 넌 지금 네 사업에나 집중해. 신 비서는 어디서 잘 먹고 잘살고 있겠지. 신경 끄고!”차진철의 대답은 어수선했다. 뜬금없이 신하늘을 언급하다니.왜 말을 돌리는 것일까.문득 속내가 뒤틀려가는 기분이 든 차준호는 눈빛이 흔들리고 있는 차진철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아버지, 혹시 신하늘에게 떳떳하지 못한 것 있습니까?”세종동 개발 비리의 뿌리를 캐내기 위해 김희주의 행적만 추적해 왔는데.차진철의 주먹이 꽉 쥐어져 있었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 수십 군데 부지를 소유한 그가 지금 왜 동요하는 걸까.“뭐가 되었든 간에 난 최선을 다한 경영인이야.”차준호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일순간 차진철이 짓고 있는 그 굳은 표정 뒤에 숨겨진 비겁함을 목격했다. 갑자기 제 심장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그래서요?”그것은 신하늘의 상처와 직결된 가장 추악한 진실로 통하는 문이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스쳤다.차준호의 가슴이 거세게 고동치기 시작한 순간, 차진철은 참지 못한 노기를
신하늘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일주일.차준호의 CH-컴퍼니는 세상의 모든 찬사를 한 몸에 받으며 연일 신기록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자체 개발 게임의 기록적인 매출은 물론, 직접 발굴한 걸그룹 ‘에스텔라’가 대중음악사의 불모지와 같던 게임 OST 앨범으로 전무후무한 대성공을 거둔 덕이었다.그러나 세상을 더 뜨겁게 가열하는 건 실체 없는 성과의 숫자보다 차준호와 신하늘, 두 사람을 둘러싼 치명적인 스캔들이었다.- CH-컴퍼니의 비서에서 전격 게임 개발실에 발탁되어 초대형 프로젝트를 완성해 낸 실력자.- S대 축제 현장에서 신인 세나를 첫눈에 알아본 날카로운 안목.- 거대 권력과의 악연에 굴하지 않고 정치판의 한복판으로 뛰어든 담대함.“······그리고 내 아들의 여자라고 전 국민이 다 알게 되었다가 실종된 여자······.”차진철의 낮은 혼잣말에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속내와 정적이 담겨 있었다.서울 CC그룹 본사 회장실의 서쪽 창가를 뚫고 들어온 붉은 낙조가 묵직한 마호가니 책상과 융단을 선혈 같은 오렌지빛으로 처연하게 물들이고 있었다.책상 위 대형 모니터와 벽면의 TV 스크린에서는 신하늘의 얼굴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제법이군.”처음부터 알았다. 아들이 선택한 여자라면 결코 평범할 리 없다고.순결한 얼굴 뒤에 숨겨둔 날카로운 손톱이 언젠가는 차준호의 심장을 후벼 파고, 나아가 자신이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이 거대한 제국마저 흔들 것이라는 사실을.본래 똑똑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가장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는 법이었다
차준호는 결국 대표실을 내팽개치듯 뒤로하고 호텔 스위트룸으로 향했다.회사에 더 머물렀다가는 진짜 정신병이라도 걸려 버릴 것 같았다.사방에 깔린 기획서와 모니터마다 스쳐 지나는 숫자들, 그리고 무엇을 봐도 결국 신하늘이라는 단어로 귀결되는 환각에 머리가 터질 듯이 지욱거렸다.그는 내일 일정마저 모조리 취소하고 무작정 휴가를 내버렸다.게임은 연일 연신 기록에 기록을 새로 썼고, 주가는 매일같이 매섭게 붉은 기둥을 세우며 치솟았다. 해외에서는 그룹 '에스텔라'가 K-POP 역사상 전무후무한 게임 OST 대기록을 써 내려가며 온 세상을 휩쓰는 중이었다.성공, 대박, 완벽한 승리. 세상은 온통 차준호와 그의 회사를 향해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하지만 그 화려한 축제의 한가운데, 신하늘은 없었다.모습을 감춘 채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었다.자신의 거대한 세상에서 그 여자 딱 한 사람이 일주일 숨어버렸을 뿐인데, 차준호의 일상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김희주의 반대당에서 공천을 받았다는 속보를 접했을 때, 대단하다고 축배를 들며 소리쳐 축하해 주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단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이런 거대한 일을 터뜨리고 홀로 사지로 걸어 들어간 신하늘의 독단에, 차준호는 머리끝까지 피가 솟구쳤다.탈출구라 생각하고 찾아온 호텔 스위트룸. 하지만 통유리창 너머로 캄캄한 도심의 야경을 내려다보던 차준호는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여기는 좀 나을 줄 알았는데. 젠장.”신하늘의 흔적이 이곳에서조차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자신을 옥죄어 오고 있었다.차준호의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잔인한 환영이었다.신하늘이 비스듬히 앉아 쉬던 저 소파, 뜨겁게 자신의 몸을 겹쳐 왔던 침대,
[김희주! 억울하다는 입장 반복! 결코 신하늘의 부모 사고와 관련 없다? 허위사실 유포로 강소희 맞고소!][현재 자신은 보좌관이 없는 상태에서도 무소속으로 출마 의지를 다짐! 세종동 동쪽 주민들에게 선거인 등록을 받을 것을 선언!][강소희는 아직도 입장 표명 없어. 차준호와 1월 1일에 대한 의혹은 더욱 커져.][신하늘은 과연 선거 전까지 모습을 드러낼 것인가. 지지자들은 김희주 의원 박탈과 구속을 촉구해!]주원형은 기사를 훑어보면서 방송국 복도를 걸었다.여전히 언론은 강소희를 씹고 뜯으려고 난리였다. 이럴 때 신하늘이 한 말처럼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며 제풀에 여론이 꺾이는 것을 기다리는 게 정답으로 여겨졌다.그는 지금 김훈과 함께 아이돌 '플로럴 스피릿'의 1위 후보 등극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방송국에 모습을 드러냈다.겉으로는 그룹 '에스텔라'의 해외 활동 공백을 틈타 국내 걸그룹 시장을 장악한 것을 격려하는 모양새였으나, 속내는 강소희의 남자로서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과시하려는 심산이었다.리허설 무대 위에서 춤추는 '플로럴 스피릿' 멤버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김훈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참, 대중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죠. 우리 애들이 비주얼도 훨씬 낫고 돈도 배는 더 써서 홍보했는데, 도대체 왜 '에스텔라'가 독보적인 탑인 걸까요?”그 말에 주원형의 입매가 비틀려 올라갔다.에스텔라의 멤버들을 따져보면 하나는 가창력을 빼면 외모도 춤도 평범했고, 두나는 아예 일반인 수준에 불과했으며, 나나는 그나마 귀여운 스타일이라 1, 2년 반짝할 수준이었다.하지만 센터 세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국내외 시장을 씹어 먹고도 남을 보석 그 자체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제 혼자 빛을 내는 스타 그 자체였다.“그런 세나를 발굴한
이아준은 통화 도중,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신하늘과 도국과의 옛 기억 속에 깊게 잠겼다.화려한 마천루가 즐비한 강남의 이면, 세종동 서쪽 끝자락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빈민가가 있었다. 그곳에 위치한 ‘하늘 보육원’은 세 사람의 유년이 뿌리내린 곳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나이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이자 가족이었다.이아준은 태어나자마자 차가운 보육원 앞마당에 버려진 신세였다. 그러나 운명은 잔인하고도 변덕스러웠다. 뒤늦게 그가 국내 최고 재벌가인 L그룹의 잃어버린 혈통임이 드러났고, 하루아침에
[1월 1일, 재벌가 차준호와 톱여배우 강소희! 둘만의 밀월여행이었나· 강원도에서 추락 사고!][CC그룹 후계자 차준호·한류스타 강소희! 과연 현재 상태는?][사고 직후 불거진 비밀 연애 의혹· 관계자들은 어떤 입장을···][과연 차준호와 강소희 사고에 관한 진실은 무엇인가!]새해의 태양이 채 떠오르기도 전, 대한민국은 단 하나의 소식으로 들끓었다. 차준호는 강소희를 자신의 세단에 태운 채 1월 1일 새벽 강원도 산길을 달리던 중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십여 미터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했다.단순한 교통사고인지, 범죄와 연관된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
종일 정신 없다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커피에 의지해온 탓일까. 카페인의 날카로운 자극이 현기증을 부추겼다.그가 왜 하필 기억을 잃은 걸까.3년치 기억만 사라지다니. 비극 같으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빌어먹게도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카메라 군단이 다시 몰려들었다. 간신히 버티던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변했다.그런데 병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고미주와 강진욱의 대화에 일순 어깨가 흠칫거려졌다.[강 박사님, 차 대표는 언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나요?][네, 최종 검사가 끝나는 대로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