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작은 옥탑방 창문 너머로, 붉고 일렁이는 태양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었다. 이곳 제주에 내려와 열흘도 넘게 지냈지만, 이 고요한 일출을 눈에 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아득한 검은 바다가 짙은 오렌지빛으로 온통 물들어 가고, 하늘과 물이 맞닿은 경계선에서 태양은 세상을 품어 안듯 천천히 올라서고 있었다.
빛이 창가를 넘어 쏟아져 들어오자, 곁에 있던 차준호가 미간을 천천히 찌푸렸다.
아침 햇살 아래 드러난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흐트러져 있었고, 건장하고 묵직한 상체가 이불 바깥으로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내가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남자가 이토록 무심하고 나른하게 내 곁에 있는 현실이 비현실적일 만큼 아득하게 느껴졌다.
조만간 거대한 전쟁의 그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6월의 무더위 속, 차준호와 묘하게 어수선한 주말을 보내고 맞이한 월요일 아침.허기찬도 자리를 비운 터라 나는 한층 더 무거운 마음으로 회사로 향했다. 토요일에 그와 정갈하게 식사를 마쳤지만, 개운치 않은 만남이라 도무지 잔상이 지워지지 않았다.아무리 연애에 둔한 나라도, 지금 그와 나 사이를 흐르는 공기가 단순한 대표와 비서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오늘은 그가 따로 옷을 보내주지 않았다. 토요일에 미리 건네주었던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서니, 아침부터 작렬하는 태양이 지면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CH-컴퍼니 사옥에 도착해 탁 트인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풍겨오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땀을 식히며 한숨을 돌리던 바로 그때, 로비 저편에서 우르르 발소리가 들려왔다. 회사에서 다시 야심 차게 추진 중인 걸그룹 연습생 네 명이 로비를 가로질러 뛰어가는 중이었다.“어?”역시나 네 명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건 단연 세나였다. 세나는 나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는지 서둘러 일반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세나가 잘되어야 차준호도 마음을 놓을 텐데. 걸그룹 사업이 궤도에 오르면 차준호는 회사 주력인 게임 사업에 온전히 에너지를 쏟아부을 터였다.나는 세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응원하듯 불끈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격려를 건네고 돌아서는데, 등 뒤에서 사원들의 나직한 수군거림이 밀려왔다.“어머나, 오늘도 저 비서님 스타일 완벽하다.”“집도 세종동이래. 대박, 완전 금수저인가 봐.”“잘생긴 대표님도 매일 가까이에서 보고, 진짜 출근할 맛 나겠다.”엉뚱하게 부풀려진 소문에 괜히 귀끝이 화끈거리며 뜨거워졌다.
뭘 또 옷까지 갖춰 입고 오라니.고급 음식을 먹으려면 드레스 코드라도 필요한 것일까.심지어 그는 전담 기사와 차까지 보내주겠다고 했다.기묘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지만, 나는 한사코 거절한 채 혼자 택시에 몸을 실었다.차준호가 보내줄 차라면 보나 마나 묵직한 고급 세단일 터였다. 그런 거대한 존재감을 과시하며 호텔 입구에 내린다면, 그렇고 그런 여자로 보일 것 같아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어느덧 도착한 C호텔.하지만 탁 트인 유리문 너머 로비로 선뜻 발을 들여놓지 못한 채, 나는 호텔 정문의 근사한 소나무와 잘 가꿔진 조경 사이에 놓인 벤치에 앉아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사실 회사에 입사한 이후부터 나는 줄곧 알 수 없는 위화감과 아찔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차준호는 정말 나를 단순히 일 잘하는 비서로만 대하고 있는 게 맞을까?그의 다정한 시선, 가끔 닿을 듯 말 듯 스쳐 지나가던 묵직한 체온, 그리고 나를 이곳으로 부른 진짜 의도까지.그렇다고 친구들에게 남자가 주말에 호텔로 오라고 하면 그게 무슨 의미냐고 차마 물어볼 수도 없었다. 황급히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남자가 여자를 호텔로 부르는 이유’ 따위를 내 손으로 검색하자니 꼴이 너무 우스웠다. 괜히 옆에서 산책하던 투숙객들이 내 휴대전화 화면이라도 볼까 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어쩌나. 이제야 아차 싶었다. 단칼에 거절했어야 했나?하지만 그저 고생한 비서에게 근사한 식사 한 끼 대접하겠다고 한 것뿐인데, 나 혼자 너무 앙큼하고 과하게 김칫국을 마시는 건 아닌가 싶어 머릿속이 어지럽게 꼬여갔다.바로 그때였다.Rrr, Rrr-.화면에 차준호라는 세 글자가 찍혔다.“여보세요.”– 신하늘, 뭐 상상했어?나지막하고 묵직한 그의 음성에 심장이 순식간에
금요일 밤, 나는 침대 위에 엎드린 채 차준호가 던진 한마디를 나지막하게 되짚으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이번 토요일에 내가 있는 호텔로 놀러 와.’보통 대표가 비서에게 호텔로 놀러 오라고 하지는 않을 터.도대체 호텔에서 음식을 먹자는 이야기의 진짜 의미는 뭘까. 1층의 탁 트인 대형 레스토랑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그가 거주하고 있는 펜트하우스 스위트룸을 의미하는 걸까.조만간 7월 말이 되면 그와 단둘이 일본으로 여행도 다녀오게 될 터인데.마치 자신의 개인적인 공간으로 오라는 나른하고 은밀한 뉘앙스였기에, 그의 낮은 음성이 귓가에서 유영하듯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단 한 번도 연애 상대로 선을 넘어 지내본 적 없는 여성을 무작정 스위트룸으로 부를 남자는 세상에 없을 테니까.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며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가슴 한구석은 여전히 열기 띤 긴장감으로 수런거렸다.머리를 식힐 겸, 나는 온라인 게임 속 세상으로 들어가 도국, 그리고 이아준을 만났다.화려한 그래픽 사이를 신나게 오가며, 우리는 게임 화면 옆 채팅창으로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문득 내 머릿속을 메우던 생각이 나도 모르게 문자 형태로 툭 튀어나오고 말았다.[너희들 호텔 음식 먹어 봤지? 더 맛있어?]나의 뜬금없는 질문에 채팅창에는 쿡쿡거리며 웃는 이모티콘들이 줄지어 올라왔다.[우리 하늘이, 호텔에서 뭐 먹는 로망 있는 거야? 참고로 우리 잠실 레지던스도 호텔 셰프가 음식 다 해주는 거야. 내가 테이크아웃해서 너희 집에도 들고 갔잖아.][아, 진짜? 그런 거였어? 난 또. 뭐 특별할 줄 알았네.]그러고 보니 내가 살면서 근사한 호텔에서 해산물 요리를 먹은 기억은 없었지만, 이아준이 챙겨준 음식은 자주 먹어본
6월 초 금요일 저녁, 한남동.병원에서 퇴원 수속을 마친 차진철 회장은 선우현 실장의 조용한 부축을 받으며 저택으로 향했다.차진아 역시 당분간 통원 치료를 받으며 상처를 소독하고, 만약 진물이 다시 올라오면 추가 수술을 받는 것으로 치료 방향을 정한 뒤 다 함께 한남동 저택으로 발길을 돌렸다.무겁고 정적만이 흐르는 넓은 거실. 차진철이 소파에 깊숙이 묻어앉아 묵묵히 텔레비전 뉴스를 시청하던 그때였다.“회장님, 저희는 먼저 2층으로 올라가 볼게요.”고미주가 기운 없이 서 있는 차진아의 팔을 챙겨 받치며 조심스럽게 몸을 물렸다. 차진철이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들어가서 쉬거라.”차진아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고개만 꾸벅 숙인 채, 묵직한 원목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2층 복도 너머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곁을 지키던 선우현은 다시 텔레비전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화면 속에서는 CH-컴퍼니의 초대형 프로젝트 발표회가 한창 보도되고 있었다.“선우현 실장.”차진철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우리 준호, 혹시 연애하나?”순간, 선우현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선우현은 천천히 화면 속 차준호의 매끄러운 얼굴을 눈에 담으며 차분하게 대답을 건넸다.“아니실 겁니다.”선우현의 단호하면서도 경계하는 듯한 음성에 차진철은 피식 옅은 실소를 터뜨렸다.“하긴. 그놈이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연애질 따위에 빠질 놈은 아니지.”하지만 차진철의 날카로운 맹수 같은 눈빛은 차준호의 얼굴을 지나, 그의 바로 한 걸음 뒤를 조용히 보좌하고 있는 인물에
시작부터 끈적하게 달라붙는 초여름의 후텁지근한 공기가 서울의 거리를 무겁게 짓누르던 6월 초.세상 전체가 타오르는 열기를 견디지 못해 눈물을 흘리는 것인지 모를 장대비가 아스팔트 위로 사납게 쏟아지고 있었다.도로 한복판. 대형 살수차가 만들어낸 인공의 폭우 속에서 도국은 지금 강소희의 가느다란 허리를 미칠 듯이 끌어안은 채, 그녀의 입술을 거칠고 탐욕스럽게 짓이기고 있었다.드라마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애절하면서도 파격적인 키스 씬.카메라 렌즈 뒤로 수십 명의 스태프들이 숨을 죽인 채 지켜보고 있었지만, 도국의 시야에는 오직 젖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제 품에 파고드는 강소희의 붉은 입술만 가득 찼다.강소희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달큼하고도 묘하게 유혹적인 향기가 빗속의 열기와 섞여 아찔하게 코끝을 간질였다.“제발······ 제발 그만해······.”눈물을 글썽이며 흐느끼듯 속삭이는 강소희의 연기에 맞춰, 도국은 거친 숨을 내쉬며 그녀의 아랫입술을 제 입술로 강하게 문질러 내렸다.콸콸 쏟아지는 살수차의 물줄기가 두 사람의 젖은 머리칼을 적시며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녀린 몸, 그리고 숨을 쉴 때마다 격렬하게 오르내리는 강소희의 봉긋한 가슴이 도국의 단단한 가슴팍에 뜨겁게 부딪혀 왔다.질식할 것 같은 밀착감 속에서 도국이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대사를 짓씹었다.“조용히 해. 여기서는······ 못 멈춰.”짐승 같은 독점욕이 잘 묻어나도록 도국은 눈에 힘을 주고 그녀를 안은 손에도 압력을 높여갔다.그리고 자신의 매력이 잘
은은한 꽃향기와 고급스러운 원목 가구가 아늑하게 어우러진 대한종합병원 VIP 병실 안.차진철 회장은 묵직한 보조 테이블 위에 마련된 체스판을 사이에 두고, 자신 맞은편에 정갈하게 앉아 있는 차준호를 흐뭇한 눈빛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바쁜 일과를 마치고 늦은 저녁 직접 병실을 찾아와 준 아들의 모습에, 차진철의 주름진 눈가로 기분 좋은 온기가 번져 나갔다.제 손으로 우리나라 경제계에 명확한 이정표를 하나 세워두고 나서, 그때 CC그룹을 이어받겠다면서 창업한 몇 년 전 차준호의 얼굴이 떠올랐다.그렇게 오만할 정도로 당찬 선언을 내던지고 나가 스타트업 기업인 CH-컴퍼니를 창업하더니, 바로 올봄 대기업 반열에 올리는 기염을 토해냈다.자식의 미친 듯한 추진력과 능력을 옆에서 지켜보는 아비로서 기특하고 자랑스럽지 않을 리가 없었다.차진철이 체스판 위의 나이트를 천천히 옮기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너, 무슨 게임 산업 어쩌구저쩌구하더니······ 그래도 꽤 시가총액이 올라갔더구나.”겉으로는 무심한 척 던지는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아들에 대한 깊은 뿌듯함이 짙게 베여 있었다.차준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길고 정갈한 손가락으로 루크를 집어 들어 망설임 없이 판 위에 내려놓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이제 겨우 시작이에요. 3년 뒤에는 지금보다 최소 3배는 더 올려놓을 겁니다.”거침없는 자신감에 차진철은 낮고 경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폰을 들어 올리며 다음 수를 두었다.“악착같이 애비를 이겨 먹으려고 하다니. 허허!”차진철은 호탕하게 웃음을 지으면서도, 늙은 맹수다운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들의 얼굴을 가만히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