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것은 판을 송두리째 뒤엎을 절대적인 균열이자, 내 손에 새로이 쥐어진 가장 확실한 패였다.
언제부터인가 차준호는 피임을 하지 않았다. 핏줄을 기어이 고집하는 차진철 회장의 오만을 꺾기 위한 충동적인 행위였을지 몰라도, 지금 내게는 이 남자의 생의 의지를 키울 뜨거운 무기가 된 셈이다. 그래서일까 입꼬리가 절로 서늘하게 올라가려 했지만 이내 일자로 굳혔다.
물론, 확증 없는 가능성에 온전히 삶을 걸 수는 없었다. 극도의 피로로 인한 생리 불순일 수도 있었고, 쇠약해진 몸으로 거친 선거판을 버티다 허망하게 유산이 될 확률도 배제할 수 없었다.
“신하늘, 무슨 생각을 그리 심각하게 하지?”
내 속도 모르고, 차준호는 다시 느릿하게 허리를 감싸 안으며 짙은 입맞춤을 내리물었다. 혀끝에 번지는 숨결은 달콤하면서도 아득한 갈증을 머금고 있었다.
애틋함과 함께 속에
“혼인신고도 꼭 이런 거짓말처럼 하려고 하는군요.”서로의 인생을 온전히 걸겠다는 비장한 서약인 동시에, 그가 내게 건네는 폭력과도 같은 사랑을 찬란하게 각인시키는 선언과도 같았다.완전히 달아났던 정신이 한꺼번에 짓눌리는 충격과 묘한 전율 속에서, 나는 황당함이 섞인 눈으로 차준호를 바라보았다.“신하늘, 내가 준 반지 껴.”귓가를 파고드는 그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에는 거절을 허락지 않겠다는 서늘한 압도감이 서려 있었다.옆에서는 도국과 이아준이 눈을 번뜩이며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고, 손바닥만 한 선거 사무실 안에는 수십 명의 참모와 자원봉사자들까지 가득 차 있어 보는 눈이 지독하게 많았다.수많은 시선이 집중된 한복판에서 낭만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하고 오만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혼인신고서를 내밀다니.그것도 당연하다는 듯 대담하게 직진하는 그 남자의 행동에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민망함과 오기가 동시에 밀려들었다.차준호의 멱살이라도 잡고 단둘이 옥상으로 올라가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판을 벌인 남자는 내게 그럴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깊고 짙은 눈동자 속에는 타협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서서히 몸을 숙여 내 귓가에 입술이 닿을 듯 가까이 다가왔다. 스쳐 지나가는 뜨거운 숨결에 피부 위로 오소소 소름이 도드라졌다.타인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오직 나만을 제 시야에 가두어버리는 지독한 집착이었다.“내가 계속 청혼했잖아. 오늘 신하늘이 사인하는 순간, 곧바로 구청에 접수해서 1분 만에 네 법적인 남편이 될 거야.”이 남자의 저돌적이고 거침없는 행보를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세상을 내 발밑에 안겨주겠다던 말은 결코 허황된 빈말이 아니었고, 그가 가진 모든
공식 선거운동의 포문이 열린 이후, 내 삶의 시계는 온통 미친 듯이 마모되어 가고 있었다.하루가 48시간이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새벽 첫 차가 세종동 차고지를 빠져나가는 순간부터 밤늦게 상가 번화가의 불빛이 사그라질 때까지, 나는 거친 선거판을 종횡무진 누볐다.당 지도부와 중진 의원들은 초반 기선 제압이 승패를 가른다며 전폭적인 화력을 쏟아부어 주었고, 그들의 지원에 힘입어 나는 연일 수십 대의 카메라와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의 한복판에서 화려하게 빛났다.차준호의 일상은 나보다 한층 더 기이하게 찬란했고, 심각할 정도로 급박했다. 그의 연인인 내가 정치적 돌풍을 일으키자, 그 뒤를 든든하게 받치고 있던 CH-컴퍼니는 그야말로 날개를 달았다.연일 주식 시장이 열릴 때마다 신고가를 경신하는 것은 물론이었고, 그 폭발적인 질주는 단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모기업인 CC그룹과 더불어 차준호가 소유한 CC건설, 그리고 그가 거느린 백화점 및 호텔 계열사 전체의 주가가 동반 폭등하며 거대한 경제적 신화를 써 내려갔다.대한민국 재계의 모든 시선이 그 남자에게 집중되었다. 이아준처럼 그 역시 세계 경제계가 주목하는 젊은 기업인에 선정되어, 미국의 유명 경제 저널지에서 인터뷰를 요청하려 한국까지 찾아올 정도였다.무서울 정도로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1분 1초를 쪼개 살아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차준호의 이상한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그는 내가 외부 유세를 위해 마이크를 잡고 길거리에 서는 순간만큼은, 상당한 규모의 경호진을 뒤에 거느린 채 내 그림자 속 깊은 곳에 머물러 주었다.마치 ‘스카이 블루의 영토’를 지키는 서늘한 파수꾼 같았다.나는 그에게 수술대에 누우라며 징징거리거나, 눈물을 훔치며 불쌍한 척 애원하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았다. 애원과 구걸은 내 삶의 문법에 존재하지
스포트라이트가 고막을 찢을 듯한 셔터 소리와 함께 내 전신으로 쏟아져 내렸다.투명한 유리구두를 신은 신데렐라도, 사과를 베어 물고 왕자를 기다리는 백설공주도 아니었다. 확성기를 쥔 내 손가락 마디마디에 핏줄이 불거질 만큼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옆에 선 이아준과 도국, 그리고 차준호의 시선이 내 등 뒤를 묵직하게 받쳐주고 있었다. 더 이상 숨을 곳도, 물러설 곳도 없었다. 나는 확성기를 입가에 바짝 대었다.“유권자 여러분, 그리고 카메라 너머의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XX당 기호 X번 국회의원 후보, 신하늘입니다.”스피커를 타고 퍼져 나간 내 목소리는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서늘할 만큼 명징하게 현장의 소음을 잠재웠다. 기자들의 셔터 소리마저 일순 멈칫했다.웅성거리던 인파 속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는 소리가 들려왔다.확성기를 집어 들고 내 이름을 연호했던 수많은 유권자를 향해, 나는 내가 왜 이 전장(戰場)에 섰는지, 그리고 이 세종동에 평생을 바친 부모님을 향한 깊은 존경이 얼마나 큰지 차분히 풀어놓았다.경쟁자의 비열한 유치함을 굳이 끌어들여 깎아내릴 필요도 없었다. 나는 그저 온전히 나 자신의 현실과 신념만을 직설적으로 피력했다.“저는 완벽하게 고결한 사람이 아닙니다. 상처 입고, 바닥을 구르고, 진창에 처박혔던 비운의 생존자일 뿐입니다!”끊임없는 짓밟힘, 기득권이라는 아득한 벽, 가진 자들의 오만함.세상은 늘 힘없는 자들에게 잔인한 폭력을 휘둘렀고, 평범한 사람들은 그 공포 앞에 자신을 속이며 숨죽여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기자들의 손끝이 가쁘게 움직였다.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메시지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누구는 패드를 두드리고, 누구는 휴대폰에 메모를 남기며, 다른 이는 수첩 위에 펜을 바쁘게 짓눌러 써 내려갔다.
만약 임신이라면.이것은 판을 송두리째 뒤엎을 절대적인 균열이자, 내 손에 새로이 쥐어진 가장 확실한 패였다.언제부터인가 차준호는 피임을 하지 않았다. 핏줄을 기어이 고집하는 차진철 회장의 오만을 꺾기 위한 충동적인 행위였을지 몰라도, 지금 내게는 이 남자의 생의 의지를 키울 뜨거운 무기가 된 셈이다. 그래서일까 입꼬리가 절로 서늘하게 올라가려 했지만 이내 일자로 굳혔다.물론, 확증 없는 가능성에 온전히 삶을 걸 수는 없었다. 극도의 피로로 인한 생리 불순일 수도 있었고, 쇠약해진 몸으로 거친 선거판을 버티다 허망하게 유산이 될 확률도 배제할 수 없었다.“신하늘, 무슨 생각을 그리 심각하게 하지?”내 속도 모르고, 차준호는 다시 느릿하게 허리를 감싸 안으며 짙은 입맞춤을 내리물었다. 혀끝에 번지는 숨결은 달콤하면서도 아득한 갈증을 머금고 있었다.애틋함과 함께 속에서 차오르는 진실을 내뱉고 싶어 입술이 달싹였으나, 나는 끝내 단어를 가두었다. 대신 그보다 더 격정적으로 그의 입술을 탐하며, 이 벼락같은 확신을 쾌락의 깊은 음영 속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누구 때문에 좀 골치가 아프네요.”한참을 몰아치던 열기를 나른하게 가라앉힌 차준호가 내 귀밑머리를 쓸어 넘기며 입술을 대어 왔다.“신하늘, 오늘은 어째 수술대에 누우라는 앙탈을 안 부리는군. 어디 한번 애원이라도 해 보지 그래.”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생(生)에 대한 지독한 집착이 솟구쳐야 정상 아닌가. 어째서 이 남자는 이토록 찬란한 기회를 비웃듯 외면하려 드는가.말해봤자 입만 아프니까 안 하는 거지.그의 눈빛에는 최악의 순간마저 제 손귀에 쥐고 흔들려는 특유의 자만심이 서려 있었다. 시한부라는 사형선고 앞에서도 그는 여전히 왕처럼 군림하려 들었다.나는
수화기 너머 허기찬의 묵직한 정적만이 차준호의 낮게 가라앉은 숨소리를 차갑게 갈랐다.유언장이라니.사실 거창하게 덧붙일 사족 따위는 없었다. 신하늘, 내 모든 것을 그 여자에게 넘겨준다는 명확한 사실 하나면 족했기에 준호는 무심한 어조로 재촉했다.“허기찬, 대답해.”- 대표님, 수술받으세요. 신 후보님을 위해서라도 제발요. 그게 그분한테 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선물이잖아요.늘 가볍고 유쾌하던 허기찬의 음성에서 웃음기가 싹 빠져나가 있었다. 그 진중한 애원에 차준호는 가만히 밤하늘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달빛을 받아 서늘하게 반짝이는 은빛 커플링. 그 투명하고 차가운 빛깔을 눈에 담으며 준호는 낮게 중얼거렸다.“가장 아름다울 때 떠날 거야. 우리 아버지 마음에 어머니가 평생 박혀 있듯이······ 신하늘에게 절대 잊지 못하는 남자로 남으면 그걸로 족해.”병마에 찌들어 추하게 시들어가는 몰골 따위는 죽어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생의 끝자락에 선 인간의 거만하고도 슬픈 집착이었다.밤하늘은 가을처럼 드높았고, 구름은 지나간 여름의 잔재처럼 풍성하게 밤을 가로지르고 있었다.어쩌면 제 인생에 허락될 마지막 계절이 될지도 모를 시간을 건조하게 계산해 보았다.“뭐, 추운 겨울은 싫으니까. 그전에 끝을 보면 그것도 나쁘지 않고······.”읊조리는 혼잣말 끝에 단 한 번이라도 더 신하늘의 그 따뜻한 온기를 품에 안고 싶다는 다급함에 그가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이었다.- 대표님, 그거 아세요?끊어진 줄 알았던 수화기 너머에서 허기찬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
서울의 밤공기는 3월 말의 미온을 머금지도 못한 채, 10층 옥상 표면을 차갑게 쓸어내리고 있었다.강제로 통화를 잘라버린 그의 행동에는 망설임이라곤 단 1밀리그램도 섞여 있지 않았다.철저히 자신의 궤도대로만 세상을 돌리려는 남자.바로 지독히도 차준호다운 무자비함이었다.“대표님, 남겨질 저는 어쩌라고요? 회장님은요?”속에서 검은 잿가루가 흩날리듯 타들어 갔으나, 그를 향해 던진 내 절박한 눈빛은 차준호의 오만한 웃음 앞에 무력하게 튕겨 나갔다.달빛을 오롯이 쏟아부은 듯 신비롭고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단어는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내 인생이잖아. 내 마음이야.”또. 또 그 전형적인 차준호식 회피이자 오만이었다. 가슴 바닥에서부터 뜨거운 오기가 밀려와 목구멍을 찔렀다.“대표님은 정말 나쁜 남자예요. 이렇게 한 사람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으면, 최소한 책임이라도 지셔야죠!”내 비명이 옥상 바람에 흩어지자마자, 그는 슈트 주머니에서 지난번 제주도에서 보여준 작고 묵직한 벨벳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딸깍. 밤의 정적을 깨뜨리는 정갈한 마찰음과 함께, 은은한 달빛을 튕겨 내는 반지 한 쌍이 모습을 드러냈다.“그러니까 책임진다고. 손 내밀어, 반지 껴.”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그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통에 숨소리가 잘게 떨려 나왔다.“저랑 결혼해서, 평생을 함께할 것도 아니잖아요!”오래오래 살아서 백년해로하고, 아이를 낳아 함께 늙어가며 주름진 손을 잡아줄 ‘진짜 가족’이 되어줄 것도 아니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