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역시 시장이라 사생활 보호를 철저히 챙겼다.차장섭은 이미 룸 안에 앉아 있었다.해인이 들어오자 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은 해인의 얼굴에 머물렀다가 천천히 배로 내려갔다.“고생이 많구나.”차장섭의 눈에는 격한 감정이 일렁였다. 하고 싶은 말이 수없이 많아 보였다.하지만 끝내 입 밖으로 나온 말은 한마디뿐이었다.“어서 앉거라.”차장섭은 지나칠 만큼 다정하게 메뉴판을 내밀었다.“네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몰라서 아직 주문을 못 했다.”해인은 자리에 앉았지만 메뉴판을 받지 않았다.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다.그녀가 담담히 말했다.“저는 가리는 음식 별로 없어요.”차장섭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결국 유호가 손을 뻗어 메뉴판을 받았다.“본인이 안 가려도, 뱃속 아기는 가리잖아.”유호는 메뉴판을 훑고 서빙 직원에게 몇 가지 음식을 주문했다. 마지막에는 따로 당부도 했다.“참, 제 아내는 파를 못 먹습니다. 고명에서도 빼 주세요.”서빙 직원은 적어 둔 뒤 메뉴판을 들고 나갔다.그제야 차장섭의 시선이 유호에게 향했다.유호는 해인의 취향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들어온 뒤부터 해인에게서 거의 눈을 떼지 않았다.테이블이나 의자 옆을 지날 때도 일부러 손으로 사이를 막아 주었다. 해인의 부른 배가 혹시라도 시야가 가려진 틈에 부딪칠까 걱정하는 모습이었다.‘이런 남자가 바람을 피웠다고?’차장섭은 이 일에 다른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몇 분 뒤 서빙 직원이 차 주전자를 들고 들어와서 세 사람에게 따르려 했다.해인의 잔에 따르려고 하자 유호가 손으로 막았다.“지금은 늦은 시간이라 제 아내는 차를 마시면 밤에 잠을 잘 못 잡니다. 따뜻한 물로 바꿔 주세요.”룸 안에는 세 사람만 남았다.차장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최근 뉴스 말이다. 내가 희정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 그 아이가 함부로 말을 했다.”실제로 이틀 동안 인터넷은 이 일로 들끓었다. KH그룹의 주가까지 영향을 받았다.오늘은 월요일이라 기자들이 KH그
해인은 낯선 번호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누구세요?”차장섭은 세상 풍파를 겪을 만큼 겪은 사람이었다.그런데도 해인의 목소리를 듣자 이상하게 긴장했다.[해인아, 나다. 아빠다.]해인의 미간이 곧바로 좁혀졌다.‘아빠’라는 호칭을 듣자 목소리는 차갑게 식었다.“죄송하지만, 제 아빠는 10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전화 잘못 거신 것 같네요.”말을 끝낸 해인이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전화 너머의 차장섭이 급히 말했다.[해인아, 네가 나를 원망하는 거 알아. 나도 변명할 생각 없어. 아버지로서 하루도 책임을 다하지 못한 건 사실이니까.][그런데 네 엄마 몸이 많이 안 좋다. 의사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어. 네 엄마가 너를 한 번만 보고 싶어 한다.]그 말을 들은 해인의 손이 멈췄다.“많이 아프신가요?”당당한 시장이었지만, 차장섭은 해인 앞에서 한없이 낮아져 있었다. 목소리는 바닥까지 내려앉았다.[그래. 맞는 신장을 찾지 못하면 길어야 넉 달이라고 했다. 해인아, 네가 우리를 미워해도 좋다. 그래도 내가 부탁하마.][네 엄마가 후회만 안고 떠나게 하지는 말아 다오. 생사를 앞둔 일 앞에서는, 미움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지 않겠니?]‘넉 달’이라는 말을 듣자 해인의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그녀는 줄곧 도수희를 원망하면서 자신을 버린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도수희가 찾아와도 말을 섞지 않았고, 가까이 지내려 하지 않았다.그런데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왜 있는 걸까? 친엄마가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가슴 한쪽에 돌덩이가 들어앉은 듯 답답했다.해인은 전에는 도수희의 병이 동정을 얻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차장섭이 도수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거짓말을 해 가며 자신을 만나려 들 이유도 없었다.하지만 해인의 마음속 응어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생각해 볼게요.”[천천히 생각해도 된다. 그런데 오늘 나랑 밥 한
서진은 자신이 데리고 나온 사람을 그렇게 길가에 내버릴 수는 없었다. 더구나 지금 희정의 배 속에는 자신의 아이가 있었다.“희정아, 내가 다시 한번만 물을게.”서진은 희정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정말 나와 결혼하기 싫어? 아이를 내 핏줄로 인정받게 해 주는 것도 싫어?”희정의 대답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싫어. 이 아이는 한유호의 아이야.”서진의 마음이 가라앉았다.“넌 곧 엄마가 돼. 그런데도 정말 복수 때문에 아이까지 이런 비난 속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아이가 겪지 않아도 될 일인데?”희정은 입술을 다물었다.서진의 눈빛은 복잡했다.“아이에게 아주 조금의 모성도 없어? 아이의 앞날을 위해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볼 마음은 없어?”서진의 질문은 하나같이 날카로웠다.솔직히 희정은 그런 것들을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이 아이를 이용해 모두를 괴롭게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복수하고 싶었다.그런데 그런 생각을 걷어 내고, 단순히 엄마라는 입장에서만 바라본다면 어떨까?희정은 갑자기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어릴 때 부모 사이는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일이 바빠 늘 늦게 들어왔다. 때로는 출장이라며 며칠씩 집을 비우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도 서재에서 잤다.그날은 엄마의 서른 번째 생일이었다.엄마는 직접 생일 케이크를 샀고, 손수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렸다. 그러나 하늘이 어두워질 때까지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그 사이 엄마는 아버지에게 수없이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을 때마다 아버지는 일이 바쁘다고 했다.그때 희정은 겨우 일곱 살이었다. 엄마 곁에 앉아 기다리다 밤 아홉 시가 되자 배가 너무 고팠다. 참지 못하고 식탁 위에 놓인 닭날개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엄마의 음식은 사실 그다지 맛있지 않았다. 하지만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날 정도라서, 희정은 금세 닭날개를 다 먹었다. 하나 더 먹고 싶었다.엄마는 닭날개가 담긴 접시를 희정 앞에 밀어주었다. 이미 식
천호선은 아들이 몇 년 동안 희정의 주변만 맴돌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희정은 차씨 집안의 딸이었다. 집안도 대단하니, 이 혼사가 성사된다면 천씨 집안에 손해 볼 일은 없었다. 그래서 천호선은 두 사람의 만남을 굳이 막지 않았다.그는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는 줄 알았다. 아직 젊고 자유롭게 지내고 싶어 결혼 이야기만 미루는 것이라 생각했다.그런데 알고 보니 아들 혼자 마음을 쏟고 있었고, 희정의 마음은 서진에게 있지 않았다.희정은 이미 유호의 아이를 가졌다고 떠들고 있었다. 그런데도 서진이 거기에 끼어들다니.그건 어리석다 못해 정말 답답한 짓이었다.게다가 희정의 행동은 명문가 딸다운 품위가 조금도 없었다.어제 언론 앞에서 희정이 했던 말은 정말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조금이라도 뿌리가 있는 집안이라면 그런 태도를 가진 여자를 며느리로 들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차장섭은 딸을 완전히 잘못 기른 셈이었다. 이제 희정이 천씨 집안에 시집오겠다고 해도, 천호선은 달가워하지 않을 지경이었다.명문가는 며느리를 들일 때는 사람됨과 품격을 본다. 희정에게는 집안을 이끌 만한 기품이 없었다.희정은 태생이 고귀했지만, 스스로 길을 좁혀 버렸다.천호선이 말했다.[네가 아직 나를 아버지로 생각한다면 희정이를 집으로 돌려보내.]천호선은 아들이 멋대로 굴다 차장섭을 적으로 돌리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차장섭은 지금 실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민간인이 관계의 인물과 맞서서 좋을 일이 없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어디까지 물러서야 하는지 안다.서진이 말했다.“아버지... 희정이는 제 친구예요. 지금 저를 필요로 하고 있어요.”천호선이 비웃듯 되물었다.[필요로 한다고? 친구? 너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친구겠지. 친구라면 서로 주고받는 게 있어야 해.] [네가 그 애를 위해 그렇게 많이 해 줬는데, 그 애는 너한테 뭘 해 줬지?]서진이 조용히 대답했다.“희정이가 저에게 도움을 청한 건 저를 믿기 때문입니다.”천호선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너 자
“그런데 우리 아빠는? 돌아서더니 바로 도수희를 집에 들였어. 도수희는 들어온 지 세 달도 안 돼서 아빠를 부추겨 강해인을 데려오려고 했고.”“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나는 엄마를 잃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행했어. 그런데 갑자기 새엄마가 생기고,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언니가 생긴다고 했어.”“차씨 집안 외동딸이라는 자리까지 낯선 사람에게 나눠 줘야 했어. 내 것을 빼앗기 싫어 반항하면, 그걸 두고 ‘말 안 듣는다’고 하는 거야?”희정의 눈가가 붉어졌다.“서진아, 네가 말해 봐. 내가 뭘 잘못했어? 왜 아빠는 여전히 내 아빠인데,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나를 덜 사랑하게 된 거야? 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줬잖아.”“아니면 애초에 나를 사랑한 적이 없었나 봐. 지금 아빠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강해인을 위한 거야. 내가 그렇게 오래 좋아한 남자까지 강해인이 빼앗아 갔어.”“아빠는 날 위해 뭔가를 해 준 적이 없어. 진작 한씨 집안과 혼담을 추진해 줬다면, 시장 딸인데 한유호와 안 어울릴 게 뭐가 있겠어?” “벌써 내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했을지도 모르지.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 “왜 도수희가 나타나자 우리 엄마가 죽고, 강해인이 나타나자 모두가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된 건데? 내가 그 여자들을 미워하는 게 잘못이야?”마지막 말은 눈물에 젖어 있었다.희정은 차 안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울면서 울음을 삼키지 못했다.서진은 희정이 자기 앞에서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 처음 봤다.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몸을 조금 가까이 붙이며 그녀를 품에 안으려고 했다.그때의 희정은 한없이 약해져 있었다. 서진의 손길에도 크게 밀어내지 않았다.그녀는 서진의 어깨에 기대 울었다. 눈물은 볼을 타고 흘러 무릎 위로 떨어졌다.서진은 어릴 때부터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 집안의 외아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희정의 삶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다. 서진은 희정이 어떻게 견뎌
희정은 전화를 끊었다.차장섭이 다시 전화를 걸어도 연결되지 않았다. 희정은 차장섭의 번호를 차단했다.차장섭은 막막한 얼굴로 서 있었다. 이 딸 때문에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었다.하지만 친딸이라 너무 매정하게 끊어 낼 수는 없었다. 희정이 이렇게 변한 데에는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었다.차장섭이 한숨을 내쉬고 류 집사를 바라보았다.“희정이 혼자서는 경호원도 피하고 기자도 피해서 몇 분 만에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없어.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있을 거야.”류 집사가 대답했다.“방금 CCTV를 확인했습니다. 천호선 회장님 집의 차량이 담장 밖에 한참 서 있었습니다.” “서진 도련님과 희정 아가씨가 안팎에서 맞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희정 아가씨께서 빠져나갈 수 있었던 듯합니다.”서진과 희정은 어릴 때부터 가까웠다. 두 사람은 함께 자란 사이였다.서진이 희정을 도운 건 차장섭에게 아주 의외의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차장섭은 희정이 멋대로 일을 키우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희정이 이렇게 날뛰면 상처 입는 건 해인과 도수희뿐이었다. 차장섭은 비서를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직접 천 회장 집에 다녀와. 천 회장에게 아들 단단히 단속하라고 전해. 우리 집안 일에 천씨 집안이 끼어드는 건 좋지 않다고도 말해.”차장섭이 말한 천호선은 서진의 아버지였다. 차장섭은 서진과 직접적인 친척 관계가 아니라서, 더 강하게 말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아들을 제어할 수 있는 천 회장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바로 다녀오겠습니다.”...차 안.서진은 옆자리에 앉은 희정을 자주 바라보면서 시선은 자연스레 배로 향했다.희정은 차장섭의 번호를 차단한 뒤 의자 등받이에 기대 창밖을 보고 있었다.거의 두 달 만에 바깥 공기를 들이마신 것이다. 자유는 이렇게 좋았다.희정이 창문을 조금 내리자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녀는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고, 기분도 꽤 좋아 보였다.서진이 물었다.“희정아, 차 시장님이랑 완전히 틀어졌잖아.
애리가 말했다.[네가 중심을 잡아야 하잖아. 그러니까 네 몸부터 망치면 안 돼. 이틀 정도는 집에서 푹 쉬어. 무슨 일 있으면 내가 연락할게.]해인은 그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애리가 다시 말했다.[참, 너한테 말해 줄 게 하나 더 있어.]해인이 물었다.“뭔데?”[예 회장도 입원했어. 똑같이 중독이야. 다만 상태는 네 어머니보다 훨씬 가벼워.]그 말을 듣자, 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애리가 말했다.[예 회장이 경찰에 신고했다더라. 경찰이 개입해서 독이 어디서 나온 건지 조사 중이래.]해인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주여진을 새 병원으로 무사히 옮긴 것은 오후가 되어서였다.간병인은 주여진을 더 정밀한 검사를 받기 위해서 데려갔다.서애리는 서른 초반이었지만 훨씬 어려 보였다. 눈매에는 자기 일을 확실히 해내는 사람 특유의 자신감이 또렷했다.“해인아, 걱정하지 마. 어머니가 여기까지 오셨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서 살펴볼게.”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 언니.”“가자. 너도 반나절 넘게 정신없이 뛰어다녔잖아. 우리 먼저 밥부터 먹자.”이렇게 애리를 번거롭게 했으니, 식사 한 끼 정도는 해인이 대접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응?”희정은 의아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오류가 뜨면 어떻게 되는데? 왜 오류가 난 거야?”“야마모토 교수 팀이 밤새 복구 작업을 했어. 아침 일찍 원인을 찾아냈고.”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서진은 희정에게서 풍기는 옅은 향을 또렷이 맡을 수 있었다. 라벤더 같은 부드러운 향이었다.“장비와 칩 사이에 신호 연결이 생겼대. 다르게 말하면, 한유호 쪽에서 이미 칩의 존재를 확인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야.”그 말을 듣자 표정이 확 굳어진 희정은 곧바로 서진을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이렇게 중요한 일을 왜 진
그 일은 아주 은밀하게 처리된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걸까?’ 해인은 의학을 아는 사람도 아니었다.‘설마 알아챘다고? 말도 안 돼.’이기남은 잠시 생각하다가 마음을 놓았다. 어쩌면 그저 얻어걸린 말일 수도 있었다.이기남은 예철진을 한 번 바라본 뒤에야 입을 열었다.“보호자분, 함부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어머니 걱정하시는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의학적 판단은 의사의 진단을 기준으로 봐야 합니다.” “중독이라는 말은 그렇게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예철진도 곧바로 거들었다.“해인아, 적당히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