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대학 합격자 발표 날 아침.
전날부터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누우면 눈이 떠졌고, 눈을 감으면 화면 속 숫자들이 아른거렸다. 수능 점수는 충분했다. 하지만 충분하다는 것과 합격이라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발표 시각은 오전 아홉 시였다.
여덟 시 오십 분부터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화면을 켜고, 수험번호를 미리 입력해두고, 조회 버튼 위에 마우스를 올려놓은 채 시계만 바라봤다. 초침이 움직일 때마다 심장이 함께 뛰었다.
아홉 시 정각.
손가락이 마우스를 클릭했다. 잠시 멈춘 듯한 화면. 그 몇 초가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페이지가 열리지 않으면 어쩌나, 오류가 뜨면 어쩌나.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화면 중앙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합격을 축하합니다. 한국대학교 법학과 최종합격"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눈물이 터졌다. 온몸이 떨렸다.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엉엉 울었다. 울음을 삼키려 했는데 삼켜지지 않았다. 감정이란 게 이렇게 한꺼번에 밀려올 수 있는 거구나, 그제야 알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눈을 감았다.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새벽에 하이힐 소리를 내며 돌아오던 뒷모습. 내 어깨에 기대어 소리 없이 울던 그 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했던 말.
'너는 엄마처럼 살지 마.'
"엄마. 해냈어."
소식을 들은 재욱이가 뛰어왔다. 아무 말 없이 나를 꽉 안았다.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냥 안고 있었다.
어떤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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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우리는 공장 근처 허름한 고깃집으로 향했다.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불판을 올리고 고기를 얹었다. 지글지글 익는 소리, 피어오르는 연기, 소주잔이 부딪히는 소리.
재욱이가 잔을 채우며 말했다.
"저도 형을 보고 달려갈께요."
그 말이 소주보다 더 깊이 내려갔다. 나는 말없이 잔을 부딪혔다.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의 삼겹살은 이상하리만치 짭조름했고, 놀라울 만큼 따뜻했다.
그리고 몇일 후 나는 회사를 퇴사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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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금과 기숙사비는 간신히 해결했지만 학비에 생활비, 교재비까지 따지니 계산기 앞에서 한숨만 깊어졌다.
나는 과외 사이트에 글을 올렸고, 한국대 법학과 합격생이라는 한 줄이 생각보다 빠르게 연락을 불러왔다.
그리고 며칠 뒤 한 집에서 면접을 보자는 연락이 왔다.
지하철을 타고 강남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공장이 있는 쪽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높고 반듯한 건물들, 깔끔하게 닦인 인도, 잘 차려입은 사람들.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았다.
학생의 집 앞에 섰다.
공장 작업복 대신 새로 산 셔츠를 입고. 그 차이가 아직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주름을 손바닥으로 한 번 쓸어내리고 초인종을 눌렀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
어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넓은 거실, 정돈된 가구, 벽에 걸린 그림들. 나는 눈에 띄지 않게 주변을 훑어봤다. 이런 집에서 자란 아이는 어떤 고민을 하며 공부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한국대 법대에 합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아이에게도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실 것 같아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이도 나왔다. 중학교 2학년이라고 했다. 눈빛이 또렷했다. 나쁘지 않았다.
"공부하기 싫을 때도 있어?"
"네."
"그럼 됐어. 공부하기 싫은 거 정상이야. 그걸 어떻게 버티느냐가 중요한 거거든."
아이가 잠깐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옆에서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난 후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과외비는 월 150만 원 정도 생각하고 있어요. 괜찮으실까요?"
그 순간 짧은 정적이 내 안에서 일었다.
공장에서 밤낮없이 일해도 버거웠던 액수였다. 감탄과 놀람, 그리고 어딘지 모를 씁쓸함이 한꺼번에 스며들었다.
"네, 감사합니다."
집을 나서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하루 두 시간 아이를 가르치는 일로 받는 돈이 철야 근무 끝에 손에 쥐던 월급보다 많았다. 기름 냄새 자욱한 공장의 공기, 쉬지 않고 돌아가는 기계 소리, 퇴근길에 겨우 붙잡던 청춘.
왜 이렇게 가까운 기회들이 그토록 멀게만 느껴졌던 걸까.
마음 한켠이 조금 억울했고, 또 한켠은 허전했다.
하지만 이제는 뒤를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어두운 공장을 빠져나와 밝은 교실로 들어가는 이 전환이, 나를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세상이 어떤 곳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했다.
다시는 그 공장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차갑고 서늘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수술실은 예상보다 컸다. 중앙에 놓인 수술대 위에 회장님이 누워 계셨다. 의료진들이 그 주위를 빽빽하게 둘러싸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계음과 지시 소리들이 공간을 채웠다. 나는 회장님을 바라봤다. 처음엔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저렇게 누워 계신 모습이 낯설었다. 언제나 단단하고 권위로 가득했던 그 사람이 지금 생명을 의료진에게 온전히 맡긴 채 누워 계셨다. 산소 호흡기가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여러 줄의 관이 그의 몸에 연결되어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두려움인지 미안함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나는 회장님 옆에 놓인 보조 침대에 누웠다. 간호사가 내 팔에 굵은 바늘을 꽂으며 말했다. "통증이 있으실 수 있습니다. 참아주세요." "괜찮습니다." 큰 바늘이 들어오는 순간 뻐근한 통증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그것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붉은 피가 관을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관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눈으로 따라갔다. 회장님의 몸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내 피가 지금 저 사람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같은 피.'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관을 타고 흘러나가는 피의 감각이 팔 안쪽에서 느껴졌다.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했다. 내 온기가 저 사람에게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실감됐다. 한참이 지나서야 간호사가 다가와 말했다. "충분히 채혈됐습니다." 의료진 중 한 명이 말했다. "활력징후 안정되고 있습니다." 그 한마디에 수술실 안의 긴장이 조금 느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회장님을 바라봤다. 창백했던 얼굴에 아주 미세하게 혈색이 돌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착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조금 가벼워졌다. 내 피가 그를 살리고 있었다. 간호사가 내 팔에서 바늘을 빼며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고
그곳은 이미 붉은 경광등과 사이렌 소리로 뒤덮여 있었다.어둠을 뚫고 번쩍이는 불빛이 사람들의 불안한 얼굴을 차례로 스쳐 갔다. 나는 깨진 차창 사이로 흘러드는 빗물을 맞으며 회장님을 바라봤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빗물과 뒤섞여 시트 위로 번지고 있었다.구급대원이 내 어깨를 잡아당겼다."괜찮으십니까? 움직일 수 있으세요?"나는 그 손을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둔하게 쑤셨지만 그것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회장님부터요."구급대원들이 회장님을 들것에 옮기는 동안 수아가 조수석에서 빠져나왔다. 이마에 작은 상처가 나 있었고, 손이 떨리고 있었다."아빠!"그녀가 달려가려는 순간 구급대원이 막아섰다."응급환자분 치료가 우선입니다. 비켜주세요.""아빠······ 제발······."수아의 목소리가 빗속으로 번지며 사라졌다."환자 의식 없음! 맥박 약합니다!"구급대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순간 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강인하고 흔들림 없던 그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들것 위에 누운 회장님은 산소 마스크를 낀 채 미동도 없었다.나는 수아의 팔을 잡았다."같이 가자."앰뷸런스 문이 닫히고 사이렌이 다시 울려 퍼졌다. 차 안은 긴박한 지시와 기계음으로 가득했고, 구급대원들의 손길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수아는 내 옆에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회장님을 바라봤다. 그 손이 계속 떨리고 있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손을 잡았다.수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잡은 손에 힘이 들어왔다.---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대기하던 의료진이 들것을 끌어내렸다."수술실로 바로 이송하세요!"들것이 복도를 따라 빠르게 밀려 들어갔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바퀴 굴러가는 소리와 발걸음이 메아리처럼 이어졌다. 잠시 후 수술실 문이 활짝 열리고 회장님의 몸이 그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붉은색으로 빛나는 수술 중이라는 불빛이 켜졌다.문이 닫히는 순간 수아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그녀를 복도 의자에 앉히고 옆에 앉
뜻밖의 질문에 손이 멈췄다. 조심스레 숨을 고른 뒤 대답했다."없었습니다, 회장님.""나는 사람을 배경으로만 판단하고 싶진 않네. 그래서 지금껏 자네 가족 이야기를 묻지 않았지. 그런데 오늘 문득 궁금해졌어."그 시선 속에서 가벼운 호기심이 아닌 진심 어린 무게가 느껴졌다. 가슴 깊이 숨겨둔 기억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조용히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저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유흥업소에서 일하시며 저를 키우셨고, 고등학교 때 돌아가셨습니다."순간 수아의 젓가락이 멈추며 놀란 시선이 나를 스쳤다. 그 눈길이 가슴에 닿았지만 나는 담담히 이어갔다."사실 아버지는 누군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술에 취하시면 가끔 그러셨습니다. 아버지를 찾으려 하지 말아라. 그러면 네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 그래서 애초에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회장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소주잔을 손끝으로 천천히 돌리며 말씀하셨다.
잠시 후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졌다.수아는 무대 옆에서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조명이 자신을 향해 터져 오르는 순간 그녀는 무대로 걸어나갔다."안녕하세요. 태양그룹 부회장 김수아입니다."첫 마디가 공간을 가르며 퍼져나갔다. 수백 개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꽂혔다. 카메라 플래시가 연달아 터졌고, 앞줄에 앉은 기자들의 펜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오늘 저는 기술을 이야기하러 이 자리에 선 게 아닙니다."예상과 다른 첫 문장에 객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사람을 이야기하러 왔습니다."수아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 침묵이 공간을 더 단단하게 조였다."지난 3년간 저는 한 가지 질문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기술이 진짜로 사람 곁에 있을 수 있는가. 위급한 순간에 가족을 대신해줄 수 있는가."&n
수아는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나 오래전부터 회사 물려받으려고 정말 많이 노력했어.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근데 결혼까지 아버지 뜻대로 하라니까, 솔직히 너무 힘들어."체념이 깊게 스며 있었다."내가 뭘 골라본 적이 있나 싶어. 학교도, 전공도, 회사도. 다 정해진 데로 갔어."나는 잔을 내려놓았다."태양그룹 회장으로 산다는 건 다 가질 수 없다는 뜻이잖아. 너도 알잖아.""알아. 아는데."수아가 잠깐 눈길을 피했다가 다시 나를 봤다."오빠. 예전처럼 나한테 가끔씩 사랑을 줄 수 없어? 나 그때만큼 행복했던 적이 없어."그 말이 방 안에 조용히 번졌다.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시선을 거뒀다.
리허설은 예정보다 길어졌다.수아는 같은 문단에서 세 번 걸렸다. 원고를 외우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이 사람이 원고 때문에 걸리는 걸 나는 본 적이 없었다.네 번째에 겨우 넘어가고 조명이 꺼졌다. 수아가 무대에서 내려왔다."괜찮아?""나 많이 긴장하나 봐."그때 통로 쪽에서 누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낯익은 얼굴이었다.삼진그룹 둘째 아들 이준혁. 단정한 수트 차림에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수아야."수아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잠깐 멈췄다가 미소로 번졌다."준혁아. 너도 왔어?""응. 아버지가 경험 좀 쌓아보라고 보내셨어."그가 수아 옆에 서서 전시장을 한 번 둘러봤다. 그러다 다시 수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나 소식 들었어.""뭘.""민호 형이랑 약혼한다며."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수아의 얼굴이 굳었다. 아직 발표하지 않은 일이었다. 양가에서만 오간 이야기였는데 태평양 건너에서 듣고 있었다.수아는 담담하게 웃었다."그렇게 됐어.""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디 마음대로 결혼 상대를 고르겠어. 부모님이 정해준 사람하고 살아야지."농담처럼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이 농담만은 아니었다. 이 사람도 어딘가에서 같은 통보를 받았을 것이었다."그래도 민호 형이면 괜찮은 선택이지.""어···""일 잘 마무리하고, 시간 되면 한국에서 보자."그는 손을 가볍게 들어 보이고 돌아섰다.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며 사라졌다.수아는 그가 사라진 방향을 잠시 봤다.짧은 대화였다. 하지만 그가 남기고 간 말이 얼굴 위에 오래 남았다.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디 마음대로 결혼을 고르겠어. 그 한마디가 위로인지 체념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였을 것이다.나는 그 옆모습을 봤다.수아가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무슨 말을 얹든 이 사람 편을 드는 말이 될 것 같았다.---호텔로 향하는 길, 차 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