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입학식 날 아침, 나는 낯선 도시의 공기 속을 걸었다.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바람이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지만, 내 안은 묘하게 뜨거웠다.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그도 아니면 이제 진짜 시작이라는 현실 때문인지, 한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교정 안은 이미 북적였다. 부모의 손을 꼭 잡은 새내기들, 친구들과 웃으며 사진을 찍는 아이들. 꽃다발을 들고 자녀를 향해 환하게 웃는 부모들. 그 풍경 속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섰다.
하지만 나는 혼자였다.
주머니 속 입학 허가증을 꼭 쥔 채, 강당으로 들어갔다. 혼자라는 사실이 외롭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부끄럽지도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데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버텼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입학식은 형식적이었지만, 무대 위 총장의 말 한마디가 가슴에 박혔다.
"여러분의 노력은 분명 여러분을 최고로 만들어 줄 겁니다."
그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아니, 나를 위한 말이라고 믿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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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는 교정 뒤편, 오래된 소나무 길을 따라 걷고 나서야 나왔다.
민중학사 1동. 낡은 콘크리트 건물은 삭막했지만, 이곳이 앞으로의 내 터전이었다. 컨테이너 숙소에서 지내던 부산 공장 시절을 생각하면, 이곳은 충분히 훌륭했다. 오히려 익숙한 삭막함이 마음을 편하게 했다.
배정받은 방은 305호. 복도 끝 문을 열자, 이미 한 명이 짐을 풀고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혹시 305호?"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착한 인상의 남자였다. 눈빛이 맑았고, 목소리엔 거슬림이 없었다. 나를 슬쩍 훑더니 미소를 머금고 손을 내밀었다.
"법학과 2학년 김민호라고 합니다."
"이번에 법학과에 입학한 김혁수입니다."
"혹시··· 나이는···?"
"스물넷입니다. 사회생활하다가 이제 들어왔어요."
그의 눈에 잠시 놀라움이 떠올랐다가, 곧 장난기 어린 웃음으로 바뀌었다.
"저랑 동갑이네요. 학교에선 제가 선배지만, 사회에선 당신이 선배네요. 그럼 우리 친구하죠."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친구해요."
단순한 인사였지만,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이 넓은 학교에서,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러준 사람이었다.
나는 내 침대 쪽으로 가 가방을 풀었다. 두근거림과 약간의 외로움, 그리고 조금의 기대. 이 모든 감정이 뒤섞인 채, 조용히 짐을 정리해 나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민호는 누구보다 남 부러울 것 없는 집안 출신이었다. 부모님 두 분 다 현직 고등법원 판사, 조부는 이름만 대면 알 법한 원로 변호사. 그야말로 정통 법조 명문가의 핏줄이었다. 하지만 민호는 그 배경을 과시하거나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조용했고,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온도가 있었다.
그런 그가, 첫날부터 나를 친구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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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들처럼 평범한 학교생활을 할 수 없었다.
생계를 유지하려면 아르바이트는 필수였다. 내게 대학은 자유나 낭만이 아닌, 생존이었다. 공부와 생계를 동시에 끌어안고 매일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으며 살아가야 했다. 아침 일찍 강의실로 향하고,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일터로 달려갔다.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일상은 줄타기 같았다.
그날도 수업이 끝나갈 즈음, 1학년 과 대표가 강단 앞으로 나왔다.
"잠깐만요! 이번 MT 건으로 중요한 이야기할 게 있어서요."
강의실이 금세 조용해졌다. 모두들 자리에 앉아 대표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가방을 메고 있었다. 머릿속엔 MT가 아니라, 지하철역까지 걸리는 시간과 알바 시작 시간이 먼저 떠올랐다. 이 자리에 남아 있는 것 자체가, 내겐 사치였다.
몇몇 학생들의 시선이 내 움직임에 쏠렸다. 그 순간, 한 여학생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혁수 오빠, 과 활동에도 좀 얼굴 비춰요!"
간절함과 실망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나는 순간 멈칫했다가,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미안. 지금 알바 가야 해서··· 먼저 갈게."
그녀의 얼굴에 실망이 스쳐 지나갔다. 마음 한구석이 쓰렸다.
그때 2학년 과 대표 민호가 급히 나를 불러 세웠다.
"혁수야, 잠깐만. 얘기 좀 하자."
표정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나는 시계를 슬쩍 훑어보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 늦었어."
"이번 MT 꼭 왔으면 좋겠어."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현실은 마음보다 훨씬 무거웠다.
"시간 되면 갈게. 지금은 확답 못 해."
민호는 입술을 꾹 다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어.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해."
"고마워."
나는 그의 눈을 마지막으로 마주보고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동기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늦깎이 대학생이어도, 돈에 너무 집착하는 거 아냐?"
무심히 던진 말이었지만 뼈를 때렸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들고 걸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내가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를.
다음 날 오후.강의가 끝나고 강의실을 나서는데, 복도 끝에 누군가 서 있었다.수아였다.손에는 작은 쇼핑백이 들려 있었고, 오가는 학생들 사이에서 유독 그녀만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웃었다.나는 순간 멈칫했다."어떻게 여기를···""민호 오빠한테 강의 시간표 물어봤어. 미리 알려줬으면 됐는데, 오빠가 거절할까 봐"그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거절할까 봐 미리 알아왔다는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걸렸다.그녀는 쇼핑백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이거."안을 들여다보니 반짝이는 최신형 휴대폰이 박스째 들어 있었다. 귀여운 미키마우스 케이스까지 함께.
우리가 도착한 곳은 스테이크 전문 레스토랑이었다.문을 여는 순간, 따뜻한 나무 결이 살아 있는 인테리어에 은은한 조명이 어우러져 마치 포근한 담요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공장 식당의 형광등, 편의점 도시락, 고깃집 플라스틱 의자. 내가 익숙한 공간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기죽지는 않았다. 여기 있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자리에 앉자마자 검정 앞치마를 맨 웨이터가 다가왔다."주문하시겠습니까?"민호가 능숙하게 말을 건넸다."오늘 추천 메뉴는 뭐예요?""블랙라벨 스테이크와 블루밍 어니언이 가장 인기 많습니다."민호가 우리를 보며 물었다."뭐 먹을래?""나는 이런 곳 처음이라··· 알아서 시켜줘."
오늘따라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이 유난히 가볍다.합의금이 통장에 들어온 뒤로, 처음으로 숨을 제대로 쉬는 기분이었다. 당장 이번 달 생활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고, 과외를 잃은 빈자리를 메울 시간도 충분히 생겼다. 그것만으로도 세상이 조금 달라 보였다. 사람이 이렇게 단순한 존재인가 싶기도 했다. 돈 걱정이 사라지자, 그제야 캠퍼스가 눈에 들어왔다. 봄이 오고 있었다. 교정 곳곳에 연두색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고, 바람은 차갑지 않았다.수업이 끝난 뒤, 민호에게 말했다."나 이번 MT 참석할께."내가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 민호는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활짝 웃으며 물었다."진짜? 아르바이트는 어쩌고?"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짤렸어. 내가 원해서 그런 건 아니고··· 뭐, 결과적으론 잘 된 거지."민호는 진심 어린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가 되자 병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낯선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남자가 들어섰다. 단정한 넥타이, 광이 나는 구두, 무릎 위에 딱 맞게 접힌 두툼한 서류철. 마치 로펌에서 갓 나온 변호사처럼 말끔한 인상이었다."김혁수 님 되시죠?"나는 침대 머리를 살짝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네, 맞습니다."그는 품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며 고개를 숙였다."태양 손해보험 이승안 과장입니다."악수를 나누는 순간, 손끝에서 전해지는 촉감이 매끄러웠다. 오랫동안 사무실에서 서류만 만져온 사람의 손이었다. 그는 명함 케이스를 닫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몸은 괜찮으신지요?""네, 괜찮습니다. 사고 덕분에 오랜만에 푹 쉬었어요."나는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나는 병원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아직 머리는 멍했고, 발걸음은 낯설 만큼 무거웠다. 마치 내가 아닌 누군가의 몸을 빌려 걷는 기분이었다. 병실 문을 나서는 순간, 형광등 불빛이 눈에 날카롭게 꽂혔다. 눈을 가늘게 뜨며 적응하는 데만도 몇 초가 걸렸다. 몸이 이 정도라면, 내가 얼마나 오래 의식을 잃고 있었던 걸까.원무과 창구에 다다르자, 투명한 유리 너머로 환한 얼굴의 직원이 나를 바라보았다."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뜻밖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따스했다. 이곳의 공기보다도, 약 봉투보다도 더 포근하게 다가왔다."저... 병원비 좀 확인하고 싶은데요."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이름과 생년월일을 물었다. 몇 번 키보드를 두드리던 그녀가 화면을 확인한 뒤 고개를 들었다."김혁수 씨 맞으시죠?"미소가 담긴 눈빛이 나를 스쳤다."
교문 밖을 나서자 스산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머릿속은 다른 열기로 가득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욱신거렸다."편하게 학교 다니는 너희가 뭘 알아···"속으로 중얼이며 횡단보도 앞에 멈췄다. 신호등이 빨간불이었다. 분노는 이미 선을 넘고 있었지만, 발은 그 자리에 묶여 있었다.언제부터였을까. 빨간불이 초록으로 바뀐 줄도 모르고, 나는 생각에 잠긴 채 멍하니 서 있었다.파란불이 깜빡이는 걸 본 건,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반사적으로 몸을 앞으로 내밀며 뛰어들려는 찰나,"퍽!"무언가가 내 몸을 강하게 밀쳐냈다. 공중으로 떠오르는 기분. 세상이 한 프레임씩 끊어지듯 천천히 움직였다.하늘, 간판, 건물, 도로, 그리고 아스팔트.몸이 몇 바퀴를 굴렀다. 등과 머리가 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숨이 튀어나왔다. 차가운 아스팔트가 온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