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욱은 단호하게 말했다. “받아라. 공짜로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서여국의 땅은 손대지 않더라도, 소주와 정국은 달랐다. 그 두 곳은 남제 장병들의 피로 얻어낸 곳이었고, 아무리 서여국이라 해도 그 성들을 차지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받아야 했다. 그는 떳떳했다. 아니, 오히려 하나 더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다만, 봉구안의 뜻이 궁금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녀는 이불 위에 펼쳐놓은 지도를 들춰 침상 위에 펼쳤다. 이미 세 개의 성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소욱은 지도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들어 봉구안을 바라보았다.“그런데, 너는 대체 이런 지도를 어디서 이렇게 많이 구하는 것이냐?”봉구안은 정색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그때였다. 기어오던 둘째 아들이 지도를 깔고 엉덩이를 붙이더니, 그 위에 오줌을 싸 버렸다.“이놈 자식이!”소욱은 목소리를 높이며 장난꾸러기 아들을 번쩍 들었다.하지만 봉구안은 침착하게 젖은 지도를 보며,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차라리 성 하나를 더 요구하는 게 어떨까요?"그녀의 눈빛은 결연했다. 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곧 서여국에 밀서를 써 보낼 것이다.”그 밀서는 그날 밤 바로 보내졌고, 동시에 소욱은 서왕의 편지도 받았다.소욱은 서왕에게 한 달 휴가를 준 뒤, 자손을 보라고 했었다. 하지만 서왕 부부는 불연듯 사라져버렸다. 심지어 편지 한 통 없기에 혹시 남강에 끌려간 줄 알았다.그런데 이제야 온 서왕의 편지. 내용은 단출했다. 현재 서왕은 남제 서쪽의 한 외딴 소읍에서 은신 중이며, 휴가 연장을 요청하는 글이었다.소욱은 웃음을 지었다. 수년간 함께 고락을 나눈 이 친구에게 이런 여유가 생겼다니,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그는 서왕의 흔적이 들키지 않도록, 편지를 바로 불태웠다. 완부옥의 사부, 유성에게 정보가
북연 황제가 암살당했다.범인은 북연의 전 이황자였다.그는 이미 혈육도 버린 자였다. 그런 짓을 벌인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이 소식을 들은 소욱의 표정은 차가워졌다.“북연 황제 곁의 호위들은 전부 죽었단 말인가?”“폐하, 아직 살아 있는 자가 몇 있습니다. 그들이 이황자를 지목하며, 북연 황제의 억울함을 풀어주십사고 전하께 청했습니다.”소욱은 속으로 만족스러웠다.북연을 혼란에 빠뜨리려던 목적은 이미 달성되었다.북연 황제라는 말도 안 되는 말썽꾸러기를 제거하려 했던 것도 처음부터 계획된 수순이었다.그리하여 소욱은 이 일을 명분 삼아 북연 이황자 체포령을 내렸다.“거두지 말고, 잡는 즉시 처형하라.”이황자는 처음부터 남제를 이용해 북연으로 돌아가 권력을 되찾으려 했던 자였다.하지만 그는 예상 못 했을 것이다. 남제가 이렇게 무자비할 줄은 말이다.불과 이틀 만에 그는 관군에게 발각되었다.“나는 남제 황제께서 직접 임명한 변경 관리다! 감히 나를 죽이다니, 법이란 게 있긴 한 건가!”그는 체포되면서도 여전히 뻔뻔했다.그러나 관아의 판단은 명확했다.“북연 황제를 시해한 자, 죽이지 않고 어찌 북연 번국에 명분을 세우겠는가.”그렇게 그는 곧바로 형장으로 끌려갔다.형장에는 이미 큰 단두대가 설치되어 있었다.이황자는 단두대 앞에서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다 계획대로야… 소욱! 너란 놈은 정말 비열하구나!”“우리를 형제라 불러놓고는 서로 죽이게 만들다니! 북연을 삼켜서 좋으냐! 천벌 받을 것이다! 너의 최후는… 으아악!”그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단두대 위로 밀쳐졌고, 날카로운 칼날이 떨어지자 그 자리에서 머리가 잘려 나갔다.떨어진 머리에서는 피눈물이 줄줄 흘렀다.현지 관리들은 그의 시신을 황성으로 보냈고, 공을 인정받으려 했다.……궁중.어전.소욱은 용좌에 앉아, 큰아들을 품에 안고 있었다.그는 어린 아들이 제왕의 위엄에 익숙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오늘은 큰아이, 내일은 작은아이를 번갈아 안았다.북연 이황자
쌍생아가 재앙을 부른다는 민간의 유언비어는 점점 거세졌다.소욱이 사람을 보내 수습하려 해도, 백성들의 입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궁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오랜 세월 조정에 몸담아온 노대신들은 연명 상주를 올리며, 제도를 따르라며 둘째 황자를 궁 밖으로 내보낼 것을 요구했다.백성들의 불안한 민심을 누그러뜨리려면, 일단 그들의 입을 막는 것이 우선이라는 명목이었다.어전.소욱은 진노한 표정으로 상주서를 바닥에 내던졌다.자세히 보지도 않았다.그러나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분노가 가슴을 틀어쥐는 듯해 숨조차 막혔다.유사양은 한쪽에서 황제를 달래는 한편, 자신의 의형제에게 눈짓을 보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봉구안이 도착했다.그녀는 손짓으로 다른 이들을 물리고, 바닥에 떨어진 상주서를 직접 주워 들었다.소욱은 그녀를 보자 찌푸려진 미간을 풀었지만, 애써 미소만 지어 보일 뿐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구안아, 여긴 무슨 일이냐?”그는 서둘러 상소문을 덮었다.봉구안은 손에 든 상소문을 한 번 훑어보며 태연히 말했다.“연명 상주인가 보네요. 이 어르신들, 글씨체부터가 엉망이에요.”소욱이 거들었다.“그러게 말이다. 보기만 해도 화가 치밀더구나.”그는 자리를 옆으로 옮겨 그녀가 옆에 앉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봉구안은 자리에 앉아 상주서를 책상 위에 툭 내려놓았다.“민심 문제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폐하께서는 북연 관련 국정을 챙기셔야죠.”소욱은 그녀의 손을 덥석 감싸며 단호한 눈빛을 보냈다.“이런 일쯤이야 내 사람이 처리하면 그만이다.”“아이 하나 지켜내지 못하면서 어찌 황제라 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고개를 저었다.“모든 걸 폐하 혼자 떠안을 수는 없습니다. 저 또한 그 아이들의 어미입니다. 당연히 보호해야죠.”소욱은 그녀의 수고를 알고 있었다.“그 아이들을 낳을 때도 내가 곁에 있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은 내가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느냐.”“후궁 일이며 군무며, 이미 네가 너무 많은 걸 감당하고 있다.”봉구안은 잠시 생각
진한길은 삿갓을 눌러쓴 채 비옷을 걸치고 있었고, 황제와 황후를 보자마자 곧바로 삿갓을 벗어 허리를 굽혔다.“폐하, 마마. 신, 이번에 돌아온 건 벌을 받기 위해서입니다!”그는 이전 북연에서 황제를 제대로 지키지 못해 폐하가 납치당하게 했고, 본인도 중상을 입었다.한 달 전에서야 간신히 의식을 되찾았고,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황성으로 돌아왔다.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자책하며, 더는 어전 호위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소욱은 그런 진한길을 바라보았다.오랜 세월을 함께한 신하에게 애정이 없을 리 없었다.“돌아왔으면 됐다.”황제의 말은 간결했지만, 감정이 실려 있었다.진한길은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황제 뒤편으로 물러섰다.그 모습을 본 오백은 봉구안 뒤에서 팔꿈치로 진한길을 툭 치며, 장난스레 미소를 날렸다.“그 상처, 장난 아니던데? 아직도 칼 들 수 있어?”진한길은 한결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물론.”그날 밤, 일행은 근처 역관에 묵었다.오백은 진한길과 북연에서의 일을 이야기했고, 그제야 진한길은 전말을 알게 되었다.겉으로는 ‘황제가 북연에 밀사로 다녀왔다’고 포장되었다는 것이었다.그것도 모두 황후의 지혜 덕분이었다.소욱은 진한길의 실책을 따지지 않았고, 여전히 곁에 둘 생각이었다.하지만 봉구안은 선뜻 마음을 놓지 못했다.그녀에게 있어 어전 호위는 생명줄 같은 존재였다.그만큼 중요한 자리인 만큼, 절대로 허투루 쓸 수 없었다.진한길은 이번에 큰 부상을 입었다.만약 또다시 황제를 지키지 못하면, 그 땐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그녀는 이 문제를 소욱에게 진지하게 이야기했다.하지만 소욱은 고개를 저었다.“익숙한 사람을 바꾸고 싶지 않다. 게다가 부상은 곧 나을 테고, 내 옆에 있는 호위가 그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그러나 봉구안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그래도 사람을 쓰는 건 신중해야 합니다.”“폐하가 말 못 하시겠다면, 제가 말하도록 하죠.”그녀에겐 남편의 안전이 최우선이었다.그리고 진한길에게도
소탁은 사실 황후를 탐낸 것이 아니라, 그저 소욱의 ‘혼인 종용’에 복수하고 싶었을 뿐이었다.소욱이 화를 내면 낼수록, 그는 속이 시원했다.봉구안도 눈치챘다.이 소탁이란 사람, 겉으로는 웃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웃는 호랑이’란 점에서 서왕과 비슷했다.정직한 성격의 소욱이 반드시 이길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폐하께서도 걱정하셔서 그러시는 겁니다. 소공자께선 그리 민감하게 굴지 않으셔도 됩니다.”“그리고 황위를 두고 하신 말씀은 지나치셨습니다. 아무리 농이라도 그런 말을 쉽게 해선 안 되지요.”봉구안이 조심스레 남편을 감싸며 소탁에게 일침을 날렸다.농은 농이고, 선을 넘으면 안 된다.소욱의 분노는 봉구안의 손을 잡으며 조금 누그러졌다.소탁도 곧장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췄다.“소인이 경솔했습니다.”소욱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황위뿐만 아니라, 분명히 알아둬야 할 게 있다.”선황께서 너에게 정혼시킨 이는 봉장미“다. 대체 무슨 근거로 내가 너의 약혼녀를 빼앗았단 말이냐?”소탁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답했다.“폐하 말씀이 맞습니다.”……한편, 황성.며칠 간의 수색 끝에, 관군은 마침내 강림을 찾아냈다.다행히도 그는 살아 있었다.소지품과 돈은 모두 물에 쓸려 사라졌고, 짐도 행방불명이 된 탓에 강림은 수행인과 함께 연상이 머무는 집에 얹혀살고 있었다.현재 연상은 진가의 옛 저택에 머물고 있었고, 집은 제법 넓은 편이었다.그러나 갑작스럽게 재난민들을 여러 명 받아들이면서 빠듯한 살림이 된 상황이었다.강림은 그녀를 안심시키며 말했다.“괜찮소! 비가 조금만 그치면, 내가 사람을 보내 전당포에 가서 은전을 찾아오리다.”제물로 준비했던 예물도 물에 떠내려간 터라, 황제와 황후가 수해 지역을 돌아다니는 동안 그도 어쩔 수 없이 연상 집에서 머물 수밖에 없었다.강림은 그녀에게 보답하고 싶었다.돈 이야기는 속물 같고, 차라리 쓸모 있는 것을 알려주기로 했다.그가 연상이 서화 관련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제대로 도와
소욱은 목욕을 마치고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었다.다시 두 아들을 마주했을 때, 궁녀가 음식을 먹이고 있었다.그는 봉구안 옆에 앉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작은 애가 자꾸 우는구나. 너무 여려서 그런걸까?”봉구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태후께서 그러셨습니다. 폐하도 어릴 때 꼭 이랬다고.”소욱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그럴 리가. 큰애는 나를 닮았어.”봉구안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느긋하게 말했다.“태후마마 말씀으론 작은 애가 더 폐하를 닮았대요.”소욱은 끝끝내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그는 자신이 어릴 적 그렇게 약하진 않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적어도 길바닥에서 '한 줄기 급류'처럼 흘러내리지는 않았을 거라고.밖에서는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하지만 두 아이는 부모가 곁에 있는 덕분인지 무서워하는 기색은 없었다.물론 모든 아이가 이처럼 하늘의 축복을 받는 것은 아니다.한 차례의 홍수로 인해, 많은 아이들이 부모와 헤어졌다.다행히 소욱이 미리 대비해 관청에 구휼을 명한 덕분에 상황은 빠르게 안정됐다.이틀 뒤, 동방세가 황성에 도착했다.그는 도착하자마자 ‘거미줄’ 작전을 통해 수해를 정리했다.겉보기엔 단순한 조치 같지만, 그의 지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는 어느 길이 어디로 통하는지, 어떤 물길이 산과 강으로 흘러들어가고, 어느 길은 민가를 침수시킬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날 황제와 황후는 직접 궁을 나서 수해 지역을 순시했다.원래는 소욱 혼자만 나갈 계획이었으나, 봉구안이 끝내 따라 나섰다.그가 북연에 납치되었던 이후로, 그녀는 혼자 외출하게 두지 않았다.황성 내 피해는 이미 수습되고 있었지만, 봉구안은 일부러 오라버니인 봉안진의 집, 참장부에 들렀다.봉안진은 구휼 활동 중이었고, 집엔 형수와 조카딸, 몇몇 호위들만 남아 있었다.봉구안은 혹시라도 난민들이 침입할까 염려했고, 소욱은 곧장 사병 몇 명을 보내 그 모녀를 지키게 했다.봉안진도 그렇다.구휼도 중요하지만, 집안 식구부터 챙겨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