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116처음에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과거 성심 통제망의 잔여 오염이었다.준우가 곧바로 단검을 쥐고 나서려 하자, 재범이 그의 어깨를 잡고 멈춰 세웠다.“아까 브리핑한 거 벌써 잊었어?”“아, 맞다. 몸이 먼저 나갔네.”준우는 숨을 가다듬고 차례를 기다렸다.팀은 브리핑대로 민간인 대피부터 시작해 제압과 정화를 순서대로 수행했다.덕분에 폭주자는 이성을 잃지 않은 상태로 멀쩡히 의료진에게 들려갔다.이전과 완전히 다르고 명확해진 제압 절차에 준우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이렇게 할 수 있었는데도 여태까지 안 했다고? 미치겠군.’준우는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그때 그는 불에 타서 뼈와 근육만 남아 있었다.
115몇 달간은 서로 떨어진 채 바쁜 시간을 보냈다.광고 모델로 일하거나 막노동, 알바로 번 돈을 차근차근 모았다. 그렇게 넷이 모은 자금으로 겨우 리모델링 비용을 마련할 수 있었다.마침내 이들은 컨테이너 박스 정리를 시작했다.우선 준우가 박스를 정화하고 재범이 박스를 모았다. 혜진이 박스 내부 벽을 잘라 큰 공간을 확보했고, 전기와 수도는 기사를 불러서 마련했다.채은은 재빠르게 방들을 꾸몄으며, 각각 장비와 자신들의 물건을 올려둘 곳 역시 마련했다.준우는 자신의 책상 서랍에 카페 쿠폰과 생체에너지 보충제를 넣었다.책장 위에는 책 몇 권과 피규어 몇 개를 대충 놓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각자의 책상을 둘러보니 고스란히 취향이 드러났다.재범의 자리는 칼같이 각이 잡혀 있었고, 혜진은 카메라나 렌즈가 많았으며, 채은은 아기자기하고 분홍빛이 돌았다.현수는 경찰 형사 같은 책상이었고, 승아는 이전에 봤던 책상 모습과
1140팀은 카페에서 길드의 조건을 정하기로 했다.다만 이들은 예약실을 따로 잡아야 했다.이전에 일반 테이블에 앉았다가 사람들이 몰려들어 사인과 사진을 요구했기 때문이다.어딘가 비공식 연예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안 되겠다. 다음번에는 예약실을 잡자.”그렇게 해서 들어온 예약실이었다.카페가 문을 닫을 때까지 대화하고 토론한 끝에, 이들은 다음 조건들을 정리해 냈다.- 비영리 운영- 폭주자 구금 권한 없음- 정화와 구조만 담당- 출동 기록과 회계 공개- 피해자 신병은 의료/복지기관에 인계- 관리청의 부당
113추가적으로 새로운 폭주 대응 체계가 발표되었다.- 관리청과 경찰청의 상층부 교체- 경찰, 소방, 의료진, 능력자 합동 출동 강제- 현장 지휘관에게 긴급 판단 권한 부여- 약물 및 원격 조종 여부 우선 검사- 폭주자를 우선 구조 대상으로 분류- 정화 가능성 확인 전 사살 금지- 대응 기록 외부 감사- 피해자 가족과 의료진의 이의제기 절차 마련현수는 신설된 폭주대응본부의 현장지휘관 자리를 제안받았다.준우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이 정도 변화면 나름 개선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김진서
112며칠 뒤, 국회의사당.성심과 경찰청, 능력자관리청의 결착에 대한 청문회가 시작되었다.증인으로는 현수와 승아, 의료진, 성심 현장대장, 구조된 능력자들이 나와 차례로 증언했다.현수는 차분하지만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저는 현장 보고를 꾸준히 올렸습니다. 하지만 경찰청은 성심의 자료만 받아들이고 제 보고는 무시했습니다.”승아는 시선을 내리깐 채 말을 이어갔다.“절대로 성심 전체가 알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상층부, 그중에서도 소수만이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구조된 능력자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준우 님 아니었으면 저희는 전부 폭주해서 괴물이 되거나 버려져 죽었을 겁니다.”마지막 순서로 준우가 증언대에 섰다.준우는 제도에 대한 비판 대신 자신이 직접
111김진서의 체포가 확정되자, 정부는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다.자신들은 다르다는 외침이었다.어찌 보면 손바닥 뒤집기였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자신들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상징성을 지우기 위함이었다.경찰 특수본은 성심 길드는 물론 능력자관리청과 경찰청을 압수수색했다.특수본에 들어간 현수와 경찰 실무자들 역시 제0관제센터를 공식 압수수색하고 모든 기록을 확보했다.체포된 일부를 제외한 성심 현장대원들은 피해자 구조에 참여했다.그 수가 워낙 많아 성심 전체가 달라붙어도 힘에 부쳤다.준우는 정화의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휘청였지만, 곁으로 다가온 혜진의 어깨를 빌려 겨우 걸음을 옮겼다.관제센터를 벗어나 바깥으로 나오니 이미 수많은 카메라와 생존자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준우는 시선을 내리깐 채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기자 중 하나가 마이크를 밀어 넣으며 급하게 물었다.
007밤 공기가 내려앉은 경찰서 안은 적막했다. 꺼진 형광등 대신 모니터의 푸르스름한 광채만이 현수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췄다. 화면 가득 띄워진 ‘승인 거절’ 팝업창들. 현수는 마른세수를 하며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하다못해 이것까지?”
006준우는 병원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짐 가방을 현관 구석에 던져두었다. 돌아온 집은 낯설 만큼 고요했다. 준우는 등기로 도착한 새 유심 칩을 끼워 넣었다. 작은 칩 하나가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사실 누군가 이 회선을 가로채거나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발끝을 간질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일개 공무원 신분의 능력자가 국가 단위의 정보망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건, 그저 '설마 아니겠지'라며 눈을 감는 것뿐이다.화면이 밝아지며 통신사 로고가 떴다. 진동은 없었다. 당연히 쏟아질 줄 알
005준우가 의식을 되찾은 것은 사흘이라는 시간이 통째로 증발한 뒤였다.처음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찔렀고, 천장의 백색등이 망막을 아프게 찔러왔다. 그러다 고요를 깨는 기이한 소음이 고막을 두드렸다.[우직, 우직, 우직.]단단한 것이 으스러지는 소리. 뼈가 나가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목재가 부러지는 소리도 아니었다. 준우는 천근만근 같은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병실 한구석, 덩치가 산만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사과를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는, 무슨 종이컵을 구
004사내가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을 때, 공기는 이미 비릿한 약의 잔향으로 진득해져 있었다. 살점이 터져 나가며 돋아난 검푸른 털과 거대한 골격. 5미터에 육박하는 괴수 곰이 사거리 한복판에 우뚝 섰다.“쿠어어어엉—!”단순한 포효가 아니었다. 물리적인 충격파가 대기를 찢었다. 근처 승용차들의 유리창이 일제히 비명 지르듯 박살 났고, 고막을 찌르는 진동에 현수와 준우는 본능적으로 귀를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평화롭던 도심의 정오가 단숨에 지옥으로 변했다.아비규환은 순식간이었다. 유턴을 시도하던 차들이 엉겨 붙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