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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다섯 가지 규칙》

Author: 에이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05 21:46:08

차태혁이 작성한 규칙은 모두 다섯 가지였다.

첫째, 사전에 합의하지 않은 접촉은 하지 않는다.

둘째, 불편함을 느끼면 즉시 말한다.

셋째, ‘멈춰요’라는 말이 나오면 이유를 묻지 않고 중단한다.

넷째, 촬영이 끝난 뒤 반드시 상태를 확인한다.

다섯째, 동의는 언제든 철회할 수 있다.

서율은 종이를 읽은 뒤 태혁을 바라봤다.

“이걸 직접 만드신 거예요?”

“네.”

“보통 촬영할 때마다 이렇게까지 해요?”

“이런 장면을 찍는다면 반드시 합니다.”

태혁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서율은 다시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 단순한 약속이라기엔 지나치게 구체적이었다. 마치 그가 과거에 이 규칙이 지켜지지 않았던 현장을 직접 겪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제작사 계약서도 있는데 이게 필요해요?”

“계약서는 제작사를 보호합니다.”

태혁이 펜을 내려놓았다.

“이건 배우를 보호하는 겁니다.”

그 말에 서율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살아오며 서명했던 계약서들은 언제나 돈을 지급하는 사람의 편이었다. 일하다 다쳐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조항, 갑작스럽게 일이 취소돼도 일당을 받을 수 없다는 조항.

서율 자신을 위한 규칙은 처음이었다.

“여기 서명하면 되는 거죠?”

“내용을 전부 이해한 뒤에요.”

“이해했어요.”

서율은 종이 아래에 이름을 적었다.

은서율.

태혁도 그 옆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차태혁.

두 사람의 이름이 같은 종이 위에 나란히 놓였다.

“한 가지 더 확인하겠습니다.”

태혁이 물었다.

“접촉이 가능한 부위는 어디까지입니까?”

서율은 당황해 손가락을 움찔했다.

“아까 말씀하신 손목하고 어깨 정도요.”

“허리는?”

“잠깐 닿는 건 괜찮아요.”

“목은요?”

그 순간 서율의 표정이 굳었다.

아주 짧은 변화였지만 태혁은 놓치지 않았다.

“안 됩니까?”

“아니요. 괜찮아요.”

“지금 표정은 괜찮지 않은데요.”

서율은 애써 웃었다.

“그냥 낯설어서 그래요. 실제로 잡는 것도 아니잖아요.”

태혁은 곧바로 동의하지 않았다.

“목 주변은 제외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필요 여부는 제가 판단합니다.”

“그럼 감독님이 싫어하지 않을까요?”

태혁의 눈매가 서늘해졌다.

“감독이 원하는 장면보다 당신이 허용한 범위가 먼저입니다.”

서율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대역 배우 한 명을 위해 촬영 장면을 바꾸겠다고 말했다. 홍보를 위한 친절도 아니었다.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까지 그는 일관되게 단호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세요?”

“내가 상대 배우니까.”

“그게 전부예요?”

태혁은 대답 대신 계약서를 반으로 접어 자신의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준비하러 가죠.”

촬영장에 들어가기 전, 태혁은 소품팀이 가져온 검은색 스트랩을 직접 확인했다. 안쪽 마감과 잠금장치를 살핀 뒤 자신의 손목에 먼저 채워 보기도 했다.

“너무 조이지 않게 해 주세요.”

그가 소품팀 직원에게 말했다.

“화면에 자국이 보여야 해서 조금은—”

“붉은 자국은 분장으로 만들면 됩니다.”

태혁은 스트랩을 서율에게 건넸다.

“직접 만져 봐요.”

서율은 부드러운 가죽 표면을 손끝으로 쓸었다.

“괜찮아요.”

“착용해도 됩니까?”

“네.”

태혁은 그녀의 대답을 확인한 뒤에야 손목에 스트랩을 둘렀다.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여유를 둔 채 고정했다.

“아픕니까?”

“아니요.”

“저립니까?”

“괜찮아요.”

“그 말 습관처럼 하지 마세요.”

서율이 그를 올려다봤다.

“정말 괜찮을 때만 괜찮다고 말해요.”

낮은 목소리가 이상하리만큼 깊게 들렸다.

그때 감독이 촬영 준비가 끝났다고 외쳤다.

태혁은 세트 쪽으로 몸을 돌리다가 다시 서율을 바라봤다.

“촬영이 시작되면 카메라는 보지 마세요.”

“그럼 어디를 봐요?”

그의 시선이 서율을 단단히 붙잡았다.

“나만 봐요.”

심장이 크게 뛰었다.

“내가 멈추라고 하면 멈추고, 괜찮다고 할 때만 움직여요.”

“네.”

“할 수 있겠습니까?”

서율은 마른침을 삼킨 뒤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어요.”

태혁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먼저 세트 안으로 들어갔다.

서율도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검은 커튼으로 둘러싸인 촬영장을 보는 순간,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서율의 머릿속에서 깨어났다.

누군가의 거친 손.

막혀 오는 숨.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어린 날의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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