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오후 9시 47분.은서율은 침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문에 붙은 종이 한 장 때문이었다.오늘의 플레이 규칙* 도발할 거면 끝까지 책임질 것.* 명령에는 정확하게 대답할 것.* 중단 신호는 언제든 사용할 것.서율은 종이를 읽고 피식 웃었다.“주인님, 이거 뭐예요?”침실 안에서 차태혁의 목소리가 들렸다.“읽었으면 들어와.”“아니, 무슨 회사 교육도 아니고…….”“은서율.”단호한 목소리였다.“들어오라고 했다.”서율은 입술을 꾹 다물고 문을 열었다.태혁은 검은 셔츠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한쪽 팔걸이에는 어제 사용했던 검은색 안대가 놓여 있었고, 옆 테이블에는 케인과 작은 보관함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서율은 그 물건들을 바라보다 태혁과 눈을 마주쳤다.“어제 끝난 거 아니었어요?”“오늘은 네가 어제 한 말 때문에 다시 이야기할 게 있어.”“제가 무슨 말을 했는데요?”“다음에도 도발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지.”서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기억하시네요?”“당연하지.”태혁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앞을 가리켰다.“이리 와.”서율은 일부러 느릿느릿 걸었다.태혁은 그녀를 지켜봤다.“일부러 그러는 거지?”“뭐가요?”“느리게 걷는 거.”“아닌데요?”“씨.... 몇번 봐줬더니 , 시작부터 아주 작정했군.그러다 큰일나 ”서율이 웃음을 터뜨렸다.“주인님, 욕하셨어요.”“네가 시켰잖아.”“제가 언제요?”“어제부터 계속 나보고 봐주지 말라며.”서율은 그의 앞에 섰다.“그건 맞아요 근데 그거랑 이거랑 다르죠 !.”태혁은 팔짱을 꼈다.“그럼 지금부터 똑바로 대답해.”“네, 주인님.”“오늘도 내가 주도하는 플레이를 원하는 거야?”“네.”“어제 정한 중단 신호는 그대로?”“네. 노란색은 확인, 빨간색은 중단.”“좋아.”태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첫 번째 명령.”서율의 눈이 반짝였다.“네.”“거울 앞으로 가.”서율은 고개를 갸웃했다.“거울이요?”“두 번 말하게 하지 마.”그녀는
오후 11시 24분.“주인님, 오늘은 정말 안 봐주실 거예요?”은서율은 침실 문에 기대어 차태혁을 바라봤다.태혁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은서율.”“네, 주인님.”“그 질문 오늘만 3번째야.”“확인하는 거죠.”“뭘?”서율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주인님이 다시 무섭게 할수있는지요 .”태혁은 소매 단추를 잠갔다.“그게 그렇게 궁금해?”“네.”“그럼 웃지 마.”서율의 미소가 멈췄다.태혁은 천천히 그녀 앞으로 걸어왔다.“오늘 플레이는 네가 먼저 요청했어. 맞지?”“네.”“내가 주도하고, 네가 그 지시를 따르는 방식으로.”“네, 주인님.”“중단 신호는?”“노란색은 확인, 빨간색은 중단이요.”“좋아.”태혁은 한 걸음 물러났다.“그럼 지금부터 시작한다.”서율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바로 세웠다.“네.”“대답할 때는?”“네, 주인님.”“잘 기억하고 있네.”태혁은 침실 한쪽 수납장으로 향했다.서율의 시선이 그를 따라갔다.그 안에는 두 사람이 함께 고른 플레이 소품들이 정리되어 있었다.태혁은 검은색 안대와 케인,목줄, 애널 플러그, 삽입형 진동기를 꺼냈다.그리고 손바닥 위에 검은색 안대를 올려놓았다.“오늘은 이걸 사용할 거야.”서율은 안대를 바라봤다.“네.”“확실해?”“네, 주인님.”태혁이 낮고 단호하게 말했다.“그럼 꿇어.”서율은 잠시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태혁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대답.”서율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네, 주인님.”“고개 들어.”그녀가 고개를 들었다.태혁은 서율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아까까지 그렇게 도발하더니. 이제 좀 조용하네.”“……긴장돼서요.”“그럼 긴장된다고 말해. 괜히 센 척하지 말고.”서율은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긴장돼요, 주인님.”“좋아. 그렇게 솔직하게 대답해.”태혁은 그녀 앞에 놓인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내가 하나 물어보지.”“네.”“넌 왜 자꾸 날 시험하지?”서율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그건……
금요일 오후 10시 17분.차태혁은 침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서율은 욕실에서 나온 뒤 한동안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평소 같았으면 편한 잠옷을 입고 남편 옆에 누웠을 시간이었다.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서율은 서랍에서 검은색 실크 슬립을 꺼냈다.어깨를 따라 가느다란 끈이 내려왔고, 부드러운 천이 몸을 감쌌다.거울을 보던 그녀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이 정도면 되겠지?”향수를 손목에 조금 뿌린 뒤 침실로 향했다.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그리고 일부러 노크했다.똑똑.태혁이 책에서 눈을 들었다.“들어와.”서율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주인님.”태혁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책장을 넘기던 손이 멈췄다.“……서율아.”서율은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왜?”“오늘 옷이 좀 다른데?”“이상해?”“아니.”태혁은 책을 덮었다.“예뻐.”서율은 웃음을 참았다.“그게 끝이야?”“더 듣고 싶어?”“응.”태혁은 그녀를 천천히 바라봤다.“오늘 나 유혹하려고 작정했어?”서율은 침대 쪽으로 걸어왔다.“이제야 알아봤네.”태혁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무슨 일 있어?”“없어.”“그런데?”서율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그냥 오늘은 남편이랑 얘기하기 싫어서.”태혁이 눈썹을 올렸다.“그럼 누구랑 얘기하려고?”서율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주인님.”잠시 정적이 흘렀다.태혁은 천천히 책을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그래?”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응.”“그럼 이리 와.”서율은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오히려 장난스럽게 웃었다.“싫다면?”태혁은 팔짱을 꼈다.“아까는 나를 찾더니?”“주인님이 얼마나 나를 원하는지 확인하고 싶어서.”태혁은 낮게 웃었다.“은서율.”“네, 주인님.”평소와 다른 대답이었다.태혁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오늘 아주 자신 있네.”“응.”서율은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주인님이 먼저 부끄러워할 때까지 해보려고.”“쉽지 않을 텐데.”“그럼 어디 한번
월요일 오후 7시 12분.서율은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그때 현관문이 열렸다.“다녀왔어.”“주인님, 왔어?”서율은 고개를 들었다가 눈을 깜빡였다.태혁의 손에는 평소 들고 다니던 가방 외에 검은색 서류 봉투가 하나 더 있었다.“그건 뭐야?”“회사에서 가져온 거.”태혁은 봉투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넥타이를 풀었다.“먼저 씻고 올게.”“응.”서율은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런데 잠시 후 봉투에서 종이 한 장이 미끄러져 나왔다.서율은 무심코 손을 뻗었다.그리고 종이 맨 위에 적힌 글씨를 보는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사직서“……어?”서율은 눈을 크게 떴다.그 아래에는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성명: 차태혁서율은 종이를 내려놓았다.잠시 후 욕실에서 나온 태혁이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물었다.“저녁 먹었어?”서율은 대답하지 않았다.“서율아?”“주인님.”“응?”서율은 식탁 위 종이를 가리켰다.“이거 뭐야?”태혁의 시선이 종이로 향했다.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아.”“아?”“봤어?”서율은 의자를 뒤로 밀었다.“주인님, 회사 그만둬?”태혁은 수건을 내려놓았다.“아니.”“그런데 왜 사직서가 있어?”“그건…….”태혁이 설명하려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회사에서 온 전화였다.그는 화면을 확인하고 서율을 바라봤다.“미안. 이것만 받고 얘기하자.”서율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알았어.”태혁은 전화를 받으며 서재로 들어갔다.문이 닫혔다.서율은 식탁 위 사직서를 다시 바라봤다.'아니라면서 왜 바로 설명을 안 해?'평소 같았으면 장난부터 쳤을 것이다.하지만 이번에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오후 7시 25분.태혁이 서재에서 나왔다.서율은 여전히 식탁에 앉아 있었다.그는 맞은편 의자를 당겼다.“많이 놀랐지?”“응.”“미안. 전화가 급해서.”서율은 사직서를 가리켰다.“이름까지 적혀 있잖아.”태혁은 종이를 집어 들었다.“이거 내 사직서 아니야.”“그럼?”“회사 교육
금요일 오후 6시 48분.“주인님, 오늘 저녁 뭐 먹을까?”서율은 현관으로 들어오는 태혁을 향해 물었다.“당신 먹고 싶은 거.”“그럼 떡볶이?”“좋아.”태혁은 외투를 벗으며 지갑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정확히는 얼마 전 서율이 직접 만들어 선물한 짙은 갈색 가죽 카드지갑이었다.서율은 그 지갑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주인님, 지갑 잘 쓰고 있네?”“당연하지.”“불편한 데는 없어?”“없어. 카드도 잘 들어가고.”태혁이 손을 씻으러 간 사이, 서율은 식탁 위로 떨어진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지갑에서 빠진 듯한 영수증이었다.“주인님, 영수증 떨어졌어!”“응. 거기 놔줘.”서율은 영수증을 집어 들었다.그런데 상단에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반려동물용품 전문점“……응?”서율은 고개를 갸웃했다.아래쪽에는 구매 내역이 적혀 있었다.강아지 간식 2개.소형견 장난감 1개.배변패드 1팩.서율의 눈이 커졌다.“주인님!”욕실에서 태혁의 목소리가 들렸다.“왜?”“우리 강아지 키워?”잠시 정적이 흘렀다.“……뭐?”“주인님이 강아지 용품 샀잖아!”태혁이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나왔다.서율은 영수증을 흔들었다.“설명해 봐.”태혁은 영수증을 확인하더니 웃었다.“아, 이거.”“아, 이거?”“회사 근처에서 산 거야.”“그러니까 왜?”태혁은 식탁 의자를 빼며 대답했다.“내일 봉사활동 가려고.”서율이 눈을 깜빡였다.“봉사활동?”“응. 유기견 보호소.”“……주인님이?”“회사 동료가 같이 가자고 해서 신청했어.”서율은 영수증을 다시 내려다봤다.“그럼 이거 보호소에 가져갈 거야?”“응. 필요한 물품 목록을 받았거든.”서율은 잠시 생각했다.그리고 태혁의 맞은편에 앉았다.“왜 나한테 말 안 했어?”“말하려고 했는데, 이번 주에 서로 바빴잖아.”“몇 시에 가?”“오전 10시.”서율은 곧바로 물었다.“나도 가면 안 돼?”태혁이 고개를 들었다.“당신도?”“응.”“보호소에 확인해 봐야 해.”“그
수요일 오후 7시 15분.“은서율.”퇴근한 태혁이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아내를 불렀다.서율은 소파에서 고개를 들었다.“응, 주인님.”“우리 집에 원래 의자가 6개였어?”서율의 손가락이 멈췄다.“……응?”태혁은 베란다 쪽을 가리켰다.“식탁 의자 4개 말고, 저기 접이식 의자 2개.”“아.”“저건 언제 샀어?”서율은 잠시 생각했다.“하나는 작년에 샀고, 하나는…….”“하나는?”“기억 안 나.”태혁은 베란다 문을 열었다.접이식 의자 2개 옆에는 사용하지 않는 작은 협탁과 운동기구까지 놓여 있었다.“이거 다 쓰는 거야?”서율은 슬그머니 일어났다.“가끔?”“마지막으로 언제?”“…….”“은서율.”“주인님, 왜 취조해?”태혁이 웃었다.“취조가 아니라 물어보는 거야.”서율은 베란다를 들여다봤다.그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게. 안 쓰는 게 많네.”태혁은 협탁을 가리켰다.“이건 중고로 팔아도 되겠다.”서율의 눈이 커졌다.“중고 거래?”“응.”“주인님 해봤어?”“몇 번.”서율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냈다.“그럼 오늘부터 우리 집 중고 거래 시작!”태혁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일단 팔 물건부터 정하자.”오후 8시.거실 바닥에 물건 5개가 놓였다.접이식 의자 2개, 협탁, 사용하지 않는 탁상 조명, 운동기구.서율은 물건들을 하나씩 살펴봤다.“주인님, 이 의자는 얼마에 팔까?”“상태 괜찮으니까 1개에 10,000원 정도?”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사진은 밝은 데서 찍고.”“알았어.”서율은 의자를 벽 앞으로 옮겼다.그리고 휴대폰을 들었다.찰칵.사진을 확인하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뭔가 별론데.”태혁이 다가왔다.“왜?”“너무 평범해.”“의자 사진이니까.”“그래도 예쁘게 찍어야 잘 팔리지.”서율은 의자를 창가로 옮겼다.그 위에 작은 쿠션까지 올렸다.태혁은 팔짱을 꼈다.“쿠션도 같이 팔 거야?”“아니.”“그럼 빼.”“왜?”“구매자가 포함된 줄 알 수도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