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튿날 정오가 지날 무렵, 이른 아침부터 의회 일정을 소화하고 돌아온 아르덴은 집무실에서 베르너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며칠 뒤면 해가 바뀌고 신년이 시작된다.
제국의 모든 권력 지형이 재편되는 민감한 시기인 만큼, 그의 책상에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래도 공작님께서 신경 쓰시던 북부 관세 개정안이 자리를 잘 잡아서 다행입니다. 거세게 반발하던 귀족들도 기세가 한풀 꺾였으니, 내년에는 계획하셨던 대로 좀 더 유연하게 법안을 시행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응. 올라온 보고서의 숫자대로만 흘러가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다만, 겉으로는 수그러든 척하는 귀족들이 은밀히 황실의 그림자 아래 모여 지속적으로 개정안의 허점을 쑤셔대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보고서를 훑는 아르덴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그들이 속삭이는 감언이설 속에서,
아르덴은 라리엘의 손에서 문서를 넘겨받아 등불 아래 바짝 가져다 댔다.만약 레몬즙이나 열에 반응하는 시약을 썼다면, 과거 플로렌스 백작이 발견했을 당시에 이미 갈색으로 변색된 흔적이 남았어야 했다.하지만 그런 자국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이번에는 벽난로의 이글거리는 불빛에 종이를 비춰보며 투과되는 문양이 있는지 확인했지만, 거친 가죽의 결 외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옆에서 트리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원본이 중요하다고 했지, 원본의 내용이 중요하다고 한건 아니잖아요. 그 문서 자체가 의미있는거 아닐까요?그녀는 테이블에 턱을 괸 채 느긋하게 꼬은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아르덴이 그녀를 한번 슬쩍 보고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이 양피지가 무슨 마법의 양피지라도 되지 않는 한, 그럴 일은 없어.”“칫…”트리샤는 결국 입을 삐죽이며 뒤로 물러났다. 라리엘이 다시 문서를 받아들고 찬찬히 들여다보았다.양피지 위에는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한 희미한 얼룩들만이 듬성듬성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아버지가 여기서 뭔가를 발견했다면, 그리고 그걸 아르덴에게 보여주러 오는 길이었다면… 무언가 남아있지 않았을까? 여기에…”그녀는 낮게 중얼거리며 양피지 한복판에 자리한 거뭇한 얼룩 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그녀가 살며시 얼룩을 쓸어내리자, 놀랍게도 검은 자국이 미세하게 번져나갔다. 라리엘의 눈이 커졌다.“아르덴, 이것 좀 봐봐.”그녀는 번져나간 자국을 가리켰다.“이 얼룩말이야. 난 세월에 묻은 때인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냐.”그녀가 다시 한번 양피지를 손끝으로 문지르자, 마치 옅은 기
“난 이런 화려한 곳에서 지켜야 할 식사 예절 같은 건 전혀 모르는데 어쩌죠?”평소와 다름없는 무심한 어조였지만, 그 안에는 아주 미세한 위축감이 섞여 있었다. 라리엘이 편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런 건 신경쓰지 말고 편하게 들어요. 트리샤 씨가 맛있게 먹어주는 게 우리에겐 가장 큰 예의에요.”만약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면 그 말 속에 있는 저의를 파악하느라 머리를 좀 더 굴렸겠지만, 라리엘의 말이었기에 트리샤는 더 생각하지 않았다.그녀는 곧바로 뻣뻣하게 쥐고 있던 포크를 제 손에 익숙한 방식으로 편하게 고쳐 쥐고는 식사를 시작했다.“그럼… 염치 불구하고 잘 먹을게요.”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와 신선한 채소를 입에 넣자, 며칠간 길 위에서 겪었던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아르덴과 라리엘은 그녀가 식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사소한 담소를 나누었다.이윽고 식사가 끝나갈 무렵, 달콤한 디저트 와인이 잔에 채워졌다. 아르덴이 냅킨으로 입가를 가볍게 닦아낸 뒤 차분한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제이드는 어떻게 되었지?”식탁 위의 촛불이 그의 푸른 눈동자에 내려앉아 서늘한 빛을 냈다. 와인을 한 모금 머금어 목을 축인 트리샤가 대답했다.“계획대로 그놈들에게 잘 인도해 줬어요. 며칠에 걸쳐서 은밀하게 거처를 옮기더니, 최종적으로는 아이델의 상인 길드 본부의 지하에 머물게 하더라고요. 보안이 삼엄해서 쥐새끼 한 마리 들락거리기 힘든 곳이죠.”“상인 길드라…”아르덴이 낮게 중얼거리며 와인 잔의 테두리를 가만히 매만졌다. 곁에서 숨을 죽이고 듣고 있던 라리엘이 안쓰러운 기색을 감추지
오라비라는 말에 클로디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그녀는 불만스러운 듯 시선을 내리깔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내 지지 않겠다는 듯 날 선 목소리로 받아쳤다.“나한테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으면서, 그저 시키는 대로 앵무새처럼 물어보라고만 하니까 진전이 없는 거잖아요. 도대체 그 부인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게 뭐죠? 그 보잘것없는 플로렌스 가문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말했잖아. 그건 당신이 알 바 아니라고.”남자의 단호한 거절에 클로디아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이대로 끌려다니다가는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다.오라비도, 가문도, 그리고—자신이 원하는 것조차. 그녀는 조급함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승부수를 던졌다.“상황이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흐르는 건 당신에게도 좋은 일은 아니잖아요? 사실 이건 내가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 알브릭 공작님의 의중이기도 해요.”남자의 눈빛에 미심쩍은 빛이 스쳤다. 클로디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공작님께서는 공작 부인이 혹여 알브릭 가문의 명성에 흠집이라도 내지 않을까 고심이 깊으시더라고요. 만약 그분이 부인의 흠결에 대해 뭔가 실마리라도 잡는다면, 공작 부인의 입지는 점점 좁아질거고… 그렇게 되면 당신들이 하는 일도 수월해지지 않겠어요?”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남자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바깥 멀리서 바람이 스치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부채를 매만지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클로디아의 손끝에 초조함이 서렸다.녹스의 입장에서 알브릭 공작이 거슬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그가 부인에게서 등을 돌려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환영할 일이었다. 남자는 그녀의 제안에 내심 솔깃해하면서도, 겉으로는
응접실은 클로디아가 남기고 간 진한 향수 냄새로 가득했다.달콤하면서도 지나치게 짙은 향이 공기 속에 눌어붙은 듯 맴돌았다. 아르덴은 닫힌 문을 향해 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그의 눈동자는 차갑게 식어, 마치 복잡한 체스판의 다음 수를 계산하듯 날카롭게 가라앉아 있었다.“아르덴.”부드러운 목소리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정적을 깼다.아르덴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선 라리엘이 보였다. 그녀가 아르덴의 팔을 가만히 잡았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레이먼 백작님이 안좋은 소식이라도 전하신 거야?”“아니, 그건 아니고…”아르덴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라리엘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가 조금 전까지 거짓과 계략으로 가득했던 그의 마음을 사정없이 찔러왔다.차갑게 정리되어 있던 사고가 그 온기에 부딪혀 미묘하게 흐트러졌다. 아르덴은 찰나의 순간 고민했다. 지금 사실대로 말할 것인가, 아니면 조금만 더 미룰 것인가.그는 한 번 시선을 떨구었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결심하듯 입을 열었다.“라리엘. 여기 좀 앉아봐. 할 이야기가 있어.”“응? 정말 무슨 일이 있는거야?”라리엘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르덴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부드럽게 이끌어 소파에 앉힌 뒤, 자신도 맞은편에 깊숙이 몸을 묻고 앉았다.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레이먼 백작 영애 말이야. 지금까지 그녀와 단둘이 있을 때 어떤 이야기들을 나눴어?”갑작스러운 질문에 라리엘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깜빡였다.“음
그녀는 고개를 들고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았다.공작의 눈에 자신이 오직 가문을 걱정하는 가냘픈 여인으로만 비치길 간절히 바라는 몸짓이었다.“새로운 정보라기보다는…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공작 부인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공작님께서 혹여 무언가 알아내신 것이 있을까 하여 걱정스러운 마음에 들렀을 뿐입니다.”아르덴은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치며 따분하다는 듯 대꾸했다.“글쎄… 자네 말을 듣고 사람들을 시켜 공작 부인과 플로렌스 가문을 샅샅이 훑었지만, 달리 흠잡을 만한 건 없던데.”아르덴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오히려 수상한 자들이 부인의 뒤를 캐고 있다는 자네 말이 진짜인지 의구심이 드는군.”그의 말에 클로디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그럴 리가요! 제가 드린 말씀은 모두 추호의 거짓 없는 사실입니다. 아주 수상하고 질 나빠 보이는 사내였어요. 그자가 부인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의 소름 끼치는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아르덴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그래? 그렇다면 그 자를 내가 직접 만나게 해줄 수는 없나? 정체가 무엇인지, 그 자가 알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직접 물어보고 싶은데.”클로디아는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달싹였다.그녀는 한참을 주저하며 손에 쥔 손수건을 짓이겼다. 아르덴은 그녀의 손에 시선을 두고 조용히 기다렸다. 결국 클로디아는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송구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만약 제가 공작님께 이 일을 알렸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되면, 제 목숨뿐만
이튿날 정오가 지날 무렵, 이른 아침부터 의회 일정을 소화하고 돌아온 아르덴은 집무실에서 베르너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며칠 뒤면 해가 바뀌고 신년이 시작된다.제국의 모든 권력 지형이 재편되는 민감한 시기인 만큼, 그의 책상에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그래도 공작님께서 신경 쓰시던 북부 관세 개정안이 자리를 잘 잡아서 다행입니다. 거세게 반발하던 귀족들도 기세가 한풀 꺾였으니, 내년에는 계획하셨던 대로 좀 더 유연하게 법안을 시행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응. 올라온 보고서의 숫자대로만 흘러가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다만, 겉으로는 수그러든 척하는 귀족들이 은밀히 황실의 그림자 아래 모여 지속적으로 개정안의 허점을 쑤셔대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라면 문제였다.보고서를 훑는 아르덴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그들이 속삭이는 감언이설 속에서, 과연 황제는 진실과 거짓을 어디까지 가려낼 수 있을 것인가.그때, 하인 한 명이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공작님, 레이먼 백작 영애가 방문하셨습니다. 공작님을 긴히 뵙고자 응접실에서 대기 중이십니다.”베르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르덴의 얼굴로 향했다. 아르덴은 서류를 쥔 손을 멈추고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미간 사이에 아주 희미하게 잡힌 주름과 나른하게 내리뜬 눈꺼풀에서는 숨길 수 없는 따분함이 묻어났다.마치 재미없는 연극의 서막을 억지로 지켜봐야 하는 관객의 얼굴이었다. 그는 귀찮다는 듯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더니 하인을 향해 말했다.“곧 가겠다고 전해.”하인이 문을 닫고 나가자 아르덴이 의자에 비스듬히 앉은 채로 낮게 투덜거렸다.“...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성격이 급한 여자
교묘한 비아냥이었다. 아르덴의 ‘자비’와 라리엘의 ‘처지’를 동시에 건드리는 말에 라리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때, 아르덴이 그녀의 허리를 자기 품으로 더 깊숙이 끌어당기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자비라니요, 백작. 나는 그저 내게 어울리는 가장 고귀한 꽃을 내 화원에 옮겨두었을 뿐입니다. 라리엘은 이제 플로렌스가 아니라 알브릭의 이름으로 빛날 테니까요.” 아르덴은 말을 마친 뒤, 보란 듯이 그녀의 목덜미 근처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 넘겼다. 손끝이 민감한 피부를 스치자 라리엘은 소름이 돋
라리엘은 서신을 쥔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참아냈다. 아버지는 죽기 직전까지도 아르덴을 ‘아들과 다름없는 친구’로 믿고 있었다. 자신의 가문이 가진 위험한 비밀까지 공유할 정도로 그를 신뢰했다. 그런데 아르덴은? 그는 이 서신을 받은 직후에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가문을 파멸시킨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와 함께 아르덴이 집어삼켜진 것일까? 라리엘은 서신을 소중하게 접어 품 안 깊숙이 숨겼다. 지금은 이것을 들고 아르덴을 추궁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창고를
그것으로 족했다. 어차피 자신이 죽인것과 다름 없었다. 자신이 더 깊이 파헤치지만 않았더라도, 백작에게 그런 것을 요청하지만 않았더라도 백작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녀가 진실을 알게 되면 분명 더 깊이 파헤치려 들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그녀 또한 표적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백작을 죽인 세력의 실체가 아직 안개속에 있다는 사실이 그의 피를 말리게 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오해한 채 증오하는 편이 나았다. 친구이자 스승의 딸에게 씌워진 비극적인 연극. 그 모든 비난과 저주는 자신 하나로 충분했다.
라리엘은 짧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소임이라니? 오늘 내 소임은 너의 살아있는 장식품이 되는 것 아니었어? 충분히 완수했다고 생각하는데.” 날 선 대답에 아르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그는 괜히 먼 정원을 바라보며 짐짓 무심한 투로 덧붙였다. “…안색이 좋지 않군. 연회장의 향기가 너무 독했나?” 그것은 아르덴 나름의 절박한 안부였다. 괜찮으냐고, 아까 그들의 말에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진심이 서툰 질문 속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가시 돋친 말들에 온마음이 할퀴어진 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