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그것으로 족했다. 어차피 자신이 죽인것과 다름 없었다. 자신이 더 깊이 파헤치지만 않았더라도, 백작에게 그런 것을 요청하지만 않았더라도 백작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녀가 진실을 알게 되면 분명 더 깊이 파헤치려 들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그녀 또한 표적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백작을 죽인 세력의 실체가 아직 안개속에 있다는 사실이 그의 피를 말리게 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오해한 채 증오하는 편이 나았다. 친구이자 스승의 딸에게 씌워진 비극적인 연극. 그 모든 비난과 저주는 자신 하나로 충분했다. 아르덴은 그녀의 환한 웃음을 다시는 볼 수 없더라도, 적어도 그녀의 목숨만은 지켜내야 했다. 그것이 그가 백작에게 바치는 마지막 충성이자, 소년 시절부터 남몰래 품어온 연심에 대한 유일한 속죄였다. 그는 비어버린 술잔을 내려놓고 침대에 몸을 뉘였다. 예복 상의만 벗어던진 채 셔츠 차림 그대로였다.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정신은 이상하리만치 맑았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빗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지금쯤 울고 있을까. 아니면… 나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을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그녀가 이 저택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만이, 그에게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는 눈을 감으며 라리엘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천천히 되뇌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점점 더 거세졌다. 6개월 전의 그날처럼, 하늘은 모든 진실을 씻어내려는 듯 무심하게 쏟아져 내렸다. 아르덴은 그 비릿한 물비린내를 맡으며 서서히 의식의 저편으로 가라앉았다. 꿈속에서라도, 그녀가 다시 그 황금빛 정원에서 자신을 향해 웃어주기를 바라는 지독하게도 쓸쓸한 소망과 함께. ***** 어제의 폭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공작저의 아침은 눈이 시릴 만큼 찬란한 태양 빛과 함께 시작되었다. 밤새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시달렸던 라리엘은 커튼 틈새로 쏟아지는 날카로운 햇살에 눈을 떴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싱그러웠지만, 그녀의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아르덴이 남기고 간 서늘한 열기에 데인 듯 화끈거렸다. 라리엘은 일찍부터 잠자리에서 일어나 단장을 마쳤다. 거울 속의 여자는 어제의 혼란을 완벽하게 지워낸, 창백하지만 단단한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공작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제국의 고위 귀족들이 집결하는 공식 연회 전날이었다. 연회는 사실상의 ‘공작부인’으로서 치르는 첫 번째 시험대이기도 했다. “부인, 하녀장께서 로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녀의 안내를 받으며 내려간 중앙 홀은 이미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평소 고요하던 공작저는 수십 명의 하녀와 정원사, 외부에서 고용된 일꾼들로 북적였다. 샹들리에의 수천 개 수정 조각을 하나하나 닦아내는 하녀들의 손길은 기계적이었고, 복도마다 배치될 대형 화병들은 어른 키만 한 위용을 뽐내며 들어서고 있었다. 그 혼란의 중심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꼿꼿한 자세로 서 있는 여인이 있었다. 얼마 전부터 알브릭 공작저의 안살림을 맡아온 하녀장, 마르타였다. “늦으셨군요, 부인.” 마르타는 라리엘이 다가오자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베르너와는 또 다른 종류의 거부감이 섞여 있었다. 명망 높은 알브릭 가문을 섬기기 시작한 그녀에게, 하루아침에 몰락한 가문의 딸이 안주인으로 들어온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으리라. “이제 겨우 8시입니다, 마르타. 연회 준비를 시작하기에 늦은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라리엘이 차분하게 대꾸하자, 마르타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알브릭의 연회는 제국의 기준입니다. 1분 1초가 완벽해야 하죠. 부인께서 자라오신 백작가와는 규모부터가 다를 텐데, 제 지시를 잘 따라주실지 걱정되는군요.” 은근한 무시가 섞인 도발이었다. 주변을 지나던 하녀들의 눈길이 일순간 라리엘에게 쏠렸다. 공작부인이 여기서 밀린다면 앞으로 이 저택의 고용인들 사이에서 그녀의 권위는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 뻔했다. 라리엘은 불쾌함을 드러내는 대신, 마르타가 들고 있던 연회 리스트를 자연스럽게 낚아채듯 가져왔다. “규모가 크다고 해서 기본이 변하는 건 아니죠. 오히려 규모가 클수록 안주인의 ‘안목’이 중요해지는 법입니다. 하녀장의 ‘숙련도’가 아니라요.” 라리엘은 장부를 빠르게 넘기며 지시 사항을 훑어 내려갔다. “꽃 장식은 흰 장미 대신 연한 보라색 리시안셔스로 바꾸세요. 공작저의 대리석 톤에는 그게 더 우아할 겁니다. 그리고 와인 리스트에 ‘샤토 라피’가 빠져 있군요. 아르덴… 아니, 공작님께서 의회 손님들을 접대하실 때 가장 선호하시는 빈티지일 텐데요.” 마르타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설마 라리엘이 공작의 취향을 정확히 꿰뚫고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건…….” “일단은 이 정도로 하죠. 나머지는 제가 직접 검토한 뒤 수정 사항을 전달할게요. 마르타 씨는 지금 당장 연회장의 조명 배치부터 다시 확인하세요.” 라리엘의 단호한 태도에 마르타는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섰다. 라리엘은 승리감에 취하는 대신, 차분하게 공작저의 구석구석을 돌며 준비 상황을 점검했다. 오후가 되자 공작저는 더욱 분주해졌다. 라리엘은 직접 연회용 식기를 점검하기 위해 평소에는 잘 열지 않는 별관 깊숙한 곳의 보조 창고로 향했다. 퀴퀴한 냄새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그녀의 뺨을 스쳤다. 화려한 은식기와 크리스털 잔들 사이를 헤매던 그녀의 눈에, 구석진 선반 아래 놓인 낡은 오크통 하나가 들어왔다. 다른 알브릭의 화려한 기물들과는 달리, 투박하고 세월의 때가 탄 나무통이었다. 라리엘은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앞으로 다가갔다. 심장이 불길한 예감에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오크통의 상단에는 낡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플로렌스 백작가.’ 그녀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장갑을 벗고 조심스럽게 인장을 만져보았다. 틀림없는 아버지의 인장이었다. 알브릭 공작저의 깊숙한 창고에 왜 자신의 가문에서 보낸 물건이 보관되어 있는 것일까.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자, 안에는 정교하게 포장된 고급 찻잎들과 함께 짧은 서신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종이는 이미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지만, 그 위에 적힌 필체는 라리엘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버지의 것이었다. [친애하는 나의 어린 친구, 알브릭 공작에게. 자네가 요청한 플로렌스의 고대 문헌 사본들을 정리해 보냈네. 그건 우리 가문의 금기된 역사일세. 부디 조심히 다뤄주면 좋겠네. 나도 이제 곧 읽어볼 생각이니 다시 만날 때는 진척이 있었으면 좋겠군. 그리고 이번에 수확한 찻잎 중 가장 좋은 것들만 골라 함께 보냈네. 자네가 좋아하는 향이니 집무실에 두고 즐기게나. 조만간 들르겠네.] 서신의 날짜는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기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클로디아는 다시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려 입가에 가져갔다.라리엘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만족스럽게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물론 공작님의 의장직과 부인의 친정 문제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정치판이라는 게 그런걸 세세하게 고려하는 곳이 아니잖아요? 뭐, 부인께서는 고상한 꽃처럼 온실 속에만 계시니 이런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시겠지만요.”“클로디아 양. 도대체 무슨…”흔들리는 라리엘의 눈동자를 보며 클로디아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그녀는 이제 자신의 본심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상체를 라리엘 쪽으로 바짝 기울인 클로디아가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한 가지만 더 알려드리자면, 이 모든 위태로운 상황을 공작님께서도 이미 낱낱이 알고 계시다는 거예요. 가엾은 부인을 차마 쉽게 내치지 못하는 공작님의 마음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부인으로서, 남편의 앞길을 막고 있다면 조금은 책임을 통감하고 스스로 결단을 내릴 필요도 있는 것 아닐까요?”라리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클로디아를 쳐다보기만 했다.신년회에서 아르덴을 향해 미소짓던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겹쳐졌다. 그때, 클로디아가 라리엘의 손을 덥석 맞잡았다.“그러니까 부인, 제발 부탁이에요. 자꾸 공작님의 그늘 뒤에 비겁하게 숨기만 하지 말고 당당히 밖으로 나와요. 플로렌스 가문이야 그렇다 쳐도, 아무런 잘못 없는 알브릭 가문까지 물귀신처럼 바닥으로 끌어 내리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얼마나 꼴사납고 이기적인 짓인지 잘 알고 계시죠?”라리엘은 클로디아에게 붙잡힌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역겨울 정도로 부드러운 감촉이었다.그녀는 시선을 들어 클로디아의 탐욕스러운 눈동
“다만요?”베르너가 무거운 음성으로 덧붙였다.“재판을 함께 받으시게 되면 사교계의 평판이나 의회에서의 영향력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나 공작님처럼 높은 자리에 계신 분에게는 더욱더요.”라리엘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바닥에서 차가운 한기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그녀는 불안을 들키지 않으려 들이킨 숨을 아주 천천히 내뱉으며 물었다.“역시 그렇군요. 영향력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일까요?”“최악의 경우에는 의장직에서 물러나야 할지도 모릅니다. 황실에서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작님을 압박하려 들겠지요.”베르너의 목소리는 형집행관의 선고처럼 무겁게 라리엘의 어깨를 눌렀다. 라리엘은 시선을 아래로 툭 떨어뜨린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그녀의 창백해진 안색을 보자 베르너는 그제야 괜한 말을 했다 싶어 급히 말을 보탰다.“하지만 공작님께서는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으실 겁니다. 부인께서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어떻게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공작님께 그 어떤 피해도 가지 않게 할 방법은 없는 건가요?”베르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눈빛에는 안타까움과 원망이 미묘하게 섞여 있었다.“현재로서는… 두 분이 갈라서지 않는 이상, 방법은 없을 겁니다. 알브릭의 이름을 지키려면 플로렌스를 잘라내야 하니까요.”갈라선다. 그 말이 라리엘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무릎 위에 놓인 그녀의 손끝이 바르르 떨려왔다.아르덴을 위해서라면 그렇게라도 해야하는 걸까. 하지만 그를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베르너가 자백서 초안을 완성할 때까지도 라리엘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섬세한 문양이 새겨진 알브릭 공작저의 정문 앞. 클로디아는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서서 거대한 석조 저택을 올려
제국 수도의 화려한 번화가 아래, 오물이 흐르는 하수도관 옆에는 버려진 지하 창고처럼 보이는 거대한 공간이 숨겨져 있었다.습하고 퀴퀴한 공기가 감도는 이곳은 조직원들 사이에서 ‘피난처’라고 불리는, ‘녹스’의 심장부였다.미로 같은 복도 끝, 두꺼운 철문 너머 중앙 방에서 낮고 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쥐새끼들같이 교묘하게도 움직이는군. 그래, 탈레스 그 녀석이 전해달라는 이야기의 요지가 정확히 뭐야?”방 안은 촛불 몇 개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수장의 책상 너머에서 연락책이 마른침을 삼키며 보고를 이어갔다.“요약하자면, 알브릭 공작의 성미상 플로렌스 백작의 죽음을 캐는 일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이미 수사망이 좁혀오고 있으니 본부 차원에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해달라는 간청이었습니다.”“흠…”수장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며 생각에 잠겼다.수천 명의 암살자와 정보원을 거느린 거대 조직의 수장이라기엔, 그의 외형은 의외로 평범하다 못해 왜소하기까지 했다.창백한 안색과 단정한 옷차림은 오히려 하급 관청에서 서류를 만지는 문인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플로렌스 수도원까지 직접 발걸음을 했다면 이미 꽤 많은 것을 알아낸 상태겠군. 탈레스 녀석은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대체 뭘 한 거지?”그의 말투는 지독히 사무적이었다. 분노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 무미건조함에도 앞에 선 연락책은 마치 자신이 질책을 받는 듯 어깨를 움찔했다.“마, 말씀하신 대로 워낙 쥐새끼처럼 움직이는지라… 공작이 수도원에 나타나기 전까지 탈레스는 그가 이미 포기한 줄로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l
평소의 우아함은 간데없이 삐걱거리는 그녀의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아르덴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그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며 라리엘의 가느다란 허리에 손을 감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뭘 그렇게 뻣뻣하게 굳어 있어? 긴장한 거야?”“기, 긴장이라니? 하, 하나도 긴장 안했는데?”라리엘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지만, 그녀의 손은 이미 아르덴의 옷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우, 우리는 부부잖아. 부부라면 당연히 한 침대에서… 그러니까…그게 이상한 일도 아니고…”말을 이어갈수록 얼굴이 점점 붉어진 라리엘은 결국 말을 맺지 못한 채 고개를 숙여버렸다.낮게 웃음을 터뜨린 아르덴은 반대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다시 한번 그녀에게 입을 맞춘 뒤 나직하게 속삭였다.“사실 난 조금 긴장돼.”“... 정말?”그의 뜻밖의 고백에, 굳어 있던 라리엘의 어깨가 조금 풀어졌다.그러고 보니 그의 푸른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르덴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는 곧 라리엘의 눈가, 콧망울, 부드러운 볼을 따라 자잘하게 입을 맞추며 그녀를 천천히 침대 위로 눕혔다.“치, 거짓말쟁이. 전혀 긴장한 얼굴이 아니잖아. 또 나 놀리는 거지?’“그런 속마음을 얼굴에 다 티 낼 수는 없잖아. 공작의 체면이 있는데.”아르덴은 흐트러진 라리엘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다정하게 눈을 맞췄다.신년회에서의 화려한 모습도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이렇게 화장기 없는 얼굴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라리엘은 비교할 수 없을 만
아르덴은 입을 열기 전에 잠깐동안 고민했다. 클로디아가 떠벌리던 수많은 말들… 그것을 그대로 전할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모두 잘라버리고 간결하게 대답했다.“응. 조만간 그쪽 사람을 직접 대면할 수 있을 것 같아.”소문이라는 불편한 변수를 감수하는 대신, 직접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손에 넣었다.이것도 수확으로 친다면, 하나를 주고 하나를 얻은 셈이었다. 아르덴은 비릿한 미소로 창밖을 보았다. 곧 라리엘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사람들을 직접 만나는건 위험하지 않을까?”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르덴은 한결 부드러운 표정으로 라리엘을 보았다.“그 계약서를 들고 법정으로 가기 전에 그들을 한번은 만나야 해. 이럴 땐 지체하지 않는게 가장 덜 위험한 방법이고.”계약서, 법정… 라리엘은 로베르 후작 부인의 말을 가만히 떠올렸다.위험한 건 그것만이 아닐 텐데. 그녀의 눈동자에 깊은 곳에 근심이 내려앉았다. 아르덴은 일부러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짐짓 밝은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그건 그렇고, 황궁을 처음 방문한 소감은? 아까 보니까 입을 못 다물던데.”아르덴의 얼굴을 마주한 라리엘은 그에게 들킬새라, 얼른 눈빛에서 근심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괜히 턱을 살짝 치켜들며 새침하게 말했다.“흠, 처음엔 그랬지만, 조금 지나니까 별로 대단한 것도 없던걸?”“오오, 그래?”아르덴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샹들리에도, 화려한 연회장도, 다 알브릭 저택에 있는거잖아. 규모가 커서 조금 놀란것 뿐이야.”“으응, 그렇군.”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한 사교계의 낯익은 얼굴이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로베르 후작 부인 아니신가요? 무슨 일이시죠?”후작 부인은 주변을 한 번 훑어보더니, 다른 사람들의 귀를 피하듯 라리엘의 팔꿈치를 살짝 감싸 쥐고 커다란 화분 옆으로 그녀를 이끌었다.그녀가 들고 있던 깃털 부채를 반쯤 넓게 펼쳐 자신의 입가를 교묘하게 가리고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부인, 요즘 공공연하게 떠도는 그 끔찍한 소문이 정말로 사실인가요? 어휴, 제 귀로 듣고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서 말이에요.”“무슨… 이야기를 들으신건가요?”“그게 그러니까, 돌아가신 플로렌스 백작님 말이에요. 사고로 돌아가신게 아니라 그 댁을 모시던 집사에게 살해당하셨다는게 사실이에요?순간, 라리엘은 머리를 거대한 둔기로 얻어맞은 듯 사고가 완전히 정지되며 멍해졌다.차가운 얼음물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기분이었다. . 후작 부인은 충격으로 창백하게 질려가는 라리엘의 안색을 유심히 살피며 흥미진진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실례가 되는 줄은 알고 있지만, 이런 흉흉한 소문은 당사자에게 확실히 확인하는게 무엇보다 중요하잖아요?”밀려드는 당혹감 너머로 라리엘의 머릿속에 제이드가 나루터 앞에서 했던 말이 번뜩이며 스쳤다.‘그들은 뼛속까지 잔인한 자들입니다. 일이 잘못되어 수사망이 좁혀올 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꼬리를 자를 편리한 카드 한 장이 필요했던 거지요.’그들, ‘녹스’가 퍼뜨린 이야기가 분명했다. 살며시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라리엘은 다급히 표정을 정리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후
교묘한 비아냥이었다. 아르덴의 ‘자비’와 라리엘의 ‘처지’를 동시에 건드리는 말에 라리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때, 아르덴이 그녀의 허리를 자기 품으로 더 깊숙이 끌어당기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자비라니요, 백작. 나는 그저 내게 어울리는 가장 고귀한 꽃을 내 화원에 옮겨두었을 뿐입니다. 라리엘은 이제 플로렌스가 아니라 알브릭의 이름으로 빛날 테니까요.” 아르덴은 말을 마친 뒤, 보란 듯이 그녀의 목덜미 근처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 넘겼다. 손끝이 민감한 피부를 스치자 라리엘은 소름이 돋
라리엘은 서신을 쥔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참아냈다. 아버지는 죽기 직전까지도 아르덴을 ‘아들과 다름없는 친구’로 믿고 있었다. 자신의 가문이 가진 위험한 비밀까지 공유할 정도로 그를 신뢰했다. 그런데 아르덴은? 그는 이 서신을 받은 직후에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가문을 파멸시킨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와 함께 아르덴이 집어삼켜진 것일까? 라리엘은 서신을 소중하게 접어 품 안 깊숙이 숨겼다. 지금은 이것을 들고 아르덴을 추궁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창고를
“하아…… 하…….” 거칠게 몰아쉬는 숨이 방금 전 아르덴이 서 있던 공간의 잔열을 집어삼켰다. 심장이 늑골을 부수고 나올 것처럼 뛰었다.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뺨을 타고 흐르던 그의 서늘한 숨결, 얇은 잠옷 너머로 전해졌던 손바닥의 지독한 열기, 그리고 찰나의 순간 자신을 꿰뚫었던 눈빛. 그 모든 감각이 사슬처럼 그녀의 전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라리엘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그의 숨결이 닿았던 자리가 여전히 화끈거렸다. 마치 낙인이 찍힌 것 같았다. ‘자극하지 말라고?’ 그녀는
의회에서 돌아온 아르덴의 마차가 저택 정문에 들어선 것은 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였다. 아르덴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망토를 하인에게 넘겼다. 차가운 밤공기를 뚫고 저택으로 들어온 그의 모습에는 금실이 수놓인 어깨 장식과 단정한 칼집, 그리고 하루 종일 그를 조여 왔을 격식과 피로가 한데 엉겨 있었다. 예복도 채 벗지 않은 채 그는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라리엘은 이미 식탁 앞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기다렸다기보다는 도살장에 끌려온 짐승처럼 그가 올 시간만을 헤아리며 경직되어 있었다. 촛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