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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금기된 역사

Author: nomady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18 14:32:36

그것으로 족했다. 어차피 자신이 죽인것과 다름 없었다. 자신이 더 깊이 파헤치지만 않았더라도, 백작에게 그런 것을 요청하지만 않았더라도 백작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녀가 진실을 알게 되면 분명 더 깊이 파헤치려 들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그녀 또한 표적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백작을 죽인 세력의 실체가 아직 안개속에 있다는 사실이 그의 피를 말리게 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오해한 채 증오하는 편이 나았다. 친구이자 스승의 딸에게 씌워진 비극적인 연극. 그 모든 비난과 저주는 자신 하나로 충분했다.

아르덴은 그녀의 환한 웃음을 다시는 볼 수 없더라도, 적어도 그녀의 목숨만은 지켜내야 했다.

그것이 그가 백작에게 바치는 마지막 충성이자, 소년 시절부터 남몰래 품어온 연심에 대한 유일한 속죄였다.

그는 비어버린 술잔을 내려놓고 침대에 몸을 뉘였다. 예복 상의만 벗어던진 채 셔츠 차림 그대로였다.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정신은 이상하리만치 맑았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빗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지금쯤 울고 있을까. 아니면… 나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을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그녀가 이 저택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만이, 그에게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는 눈을 감으며 라리엘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천천히 되뇌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점점 더 거세졌다. 6개월 전의 그날처럼, 하늘은 모든 진실을 씻어내려는 듯 무심하게 쏟아져 내렸다.

아르덴은 그 비릿한 물비린내를 맡으며 서서히 의식의 저편으로 가라앉았다.

꿈속에서라도, 그녀가 다시 그 황금빛 정원에서 자신을 향해 웃어주기를 바라는 지독하게도 쓸쓸한 소망과 함께.

*****

어제의 폭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공작저의 아침은 눈이 시릴 만큼 찬란한 태양 빛과 함께 시작되었다.

밤새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시달렸던 라리엘은 커튼 틈새로 쏟아지는 날카로운 햇살에 눈을 떴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싱그러웠지만, 그녀의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아르덴이 남기고 간 서늘한 열기에 데인 듯 화끈거렸다.

라리엘은 일찍부터 잠자리에서 일어나 단장을 마쳤다. 거울 속의 여자는 어제의 혼란을 완벽하게 지워낸, 창백하지만 단단한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공작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제국의 고위 귀족들이 집결하는 공식 연회 전날이었다. 연회는 사실상의 ‘공작부인’으로서 치르는 첫 번째 시험대이기도 했다.

“부인, 하녀장께서 로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녀의 안내를 받으며 내려간 중앙 홀은 이미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평소 고요하던 공작저는 수십 명의 하녀와 정원사, 외부에서 고용된 일꾼들로 북적였다.

샹들리에의 수천 개 수정 조각을 하나하나 닦아내는 하녀들의 손길은 기계적이었고, 복도마다 배치될 대형 화병들은 어른 키만 한 위용을 뽐내며 들어서고 있었다.

그 혼란의 중심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꼿꼿한 자세로 서 있는 여인이 있었다. 얼마 전부터 알브릭 공작저의 안살림을 맡아온 하녀장, 마르타였다.

“늦으셨군요, 부인.”

마르타는 라리엘이 다가오자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베르너와는 또 다른 종류의 거부감이 섞여 있었다.

명망 높은 알브릭 가문을 섬기기 시작한 그녀에게, 하루아침에 몰락한 가문의 딸이 안주인으로 들어온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으리라.

“이제 겨우 8시입니다, 마르타. 연회 준비를 시작하기에 늦은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라리엘이 차분하게 대꾸하자, 마르타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알브릭의 연회는 제국의 기준입니다. 1분 1초가 완벽해야 하죠. 부인께서 자라오신 백작가와는 규모부터가 다를 텐데, 제 지시를 잘 따라주실지 걱정되는군요.”

은근한 무시가 섞인 도발이었다. 주변을 지나던 하녀들의 눈길이 일순간 라리엘에게 쏠렸다.

공작부인이 여기서 밀린다면 앞으로 이 저택의 고용인들 사이에서 그녀의 권위는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 뻔했다.

라리엘은 불쾌함을 드러내는 대신, 마르타가 들고 있던 연회 리스트를 자연스럽게 낚아채듯 가져왔다.

“규모가 크다고 해서 기본이 변하는 건 아니죠. 오히려 규모가 클수록 안주인의 ‘안목’이 중요해지는 법입니다. 하녀장의 ‘숙련도’가 아니라요.”

라리엘은 장부를 빠르게 넘기며 지시 사항을 훑어 내려갔다.

“꽃 장식은 흰 장미 대신 연한 보라색 리시안셔스로 바꾸세요. 공작저의 대리석 톤에는 그게 더 우아할 겁니다. 그리고 와인 리스트에 ‘샤토 라피’가 빠져 있군요. 아르덴… 아니, 공작님께서 의회 손님들을 접대하실 때 가장 선호하시는 빈티지일 텐데요.”

마르타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설마 라리엘이 공작의 취향을 정확히 꿰뚫고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건…….”

“일단은 이 정도로 하죠. 나머지는 제가 직접 검토한 뒤 수정 사항을 전달할게요. 마르타 씨는 지금 당장 연회장의 조명 배치부터 다시 확인하세요.”

라리엘의 단호한 태도에 마르타는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섰다. 라리엘은 승리감에 취하는 대신, 차분하게 공작저의 구석구석을 돌며 준비 상황을 점검했다.

오후가 되자 공작저는 더욱 분주해졌다. 라리엘은 직접 연회용 식기를 점검하기 위해 평소에는 잘 열지 않는 별관 깊숙한 곳의 보조 창고로 향했다.

퀴퀴한 냄새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그녀의 뺨을 스쳤다. 화려한 은식기와 크리스털 잔들 사이를 헤매던 그녀의 눈에, 구석진 선반 아래 놓인 낡은 오크통 하나가 들어왔다.

다른 알브릭의 화려한 기물들과는 달리, 투박하고 세월의 때가 탄 나무통이었다.

라리엘은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앞으로 다가갔다. 심장이 불길한 예감에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오크통의 상단에는 낡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플로렌스 백작가.’

그녀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장갑을 벗고 조심스럽게 인장을 만져보았다.

틀림없는 아버지의 인장이었다. 알브릭 공작저의 깊숙한 창고에 왜 자신의 가문에서 보낸 물건이 보관되어 있는 것일까.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자, 안에는 정교하게 포장된 고급 찻잎들과 함께 짧은 서신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종이는 이미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지만, 그 위에 적힌 필체는 라리엘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버지의 것이었다.

[친애하는 나의 어린 친구, 알브릭 공작에게. 자네가 요청한 플로렌스의 고대 문헌 사본들을 정리해 보냈네. 그건 우리 가문의 금기된 역사일세. 부디 조심히 다뤄주면 좋겠네.

나도 이제 곧 읽어볼 생각이니 다시 만날 때는 진척이 있었으면 좋겠군. 그리고 이번에 수확한 찻잎 중 가장 좋은 것들만 골라 함께 보냈네.

자네가 좋아하는 향이니 집무실에 두고 즐기게나. 조만간 들르겠네.]

서신의 날짜는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기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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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로렌스의 장미는 시들지 않는다   13화. 기사와 공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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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로렌스의 장미는 시들지 않는다   12화. 어머니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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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로렌스의 장미는 시들지 않는다   1화. 검은 결혼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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