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라리엘은 서신을 쥔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참아냈다.
아버지는 죽기 직전까지도 아르덴을 ‘아들과 다름없는 친구’로 믿고 있었다. 자신의 가문이 가진 위험한 비밀까지 공유할 정도로 그를 신뢰했다. 그런데 아르덴은? 그는 이 서신을 받은 직후에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가문을 파멸시킨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와 함께 아르덴이 집어삼켜진 것일까? 라리엘은 서신을 소중하게 접어 품 안 깊숙이 숨겼다. 지금은 이것을 들고 아르덴을 추궁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창고를 나오며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밖으로 나오자 다시 찬란한 햇살이 그녀를 맞이했다. 하지만 라리엘의 눈앞에 펼쳐진 공작저의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다운 안식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화려한 금빛 안개로 뒤덮인, 언제 어디서 가시가 튀어 나올지 모르는 위험한 미로와 같았다. “부인, 공작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하녀의 보고가 들려왔다. 그녀는 품 안의 서신이 닿은 살결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창밖의 남자를 내다보았다. 아르덴은 마차에서 내려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자네가 요청한 플로렌스의 고대 문헌 사본…….’ 아르덴은 왜 우리 가문의 금기된 역사를 원했던 걸까. 아버지는 그것을 ‘우리 가문’의 역사라고 칭했지만, 동시에 아르덴에게 조심히 다뤄달라고 당부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두 사람이 공유했던 그 ‘금기’는 무엇이었을까. 아르덴이 그 문헌을 손에 넣기 위해, 혹은 그 안에 담긴 진실이 밖으로 새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가장 믿음직한 친구였던 아버지를 제거한 것이라면? 그녀는 가슴을 짓누르는 서신의 무게를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아르덴이 요청한 금기, 그리고 아버지가 마주했던 죽음. 그 사이를 잇는 핏빛 연결고리가 바로 이 저택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 맑은 하늘 아래, 알브릭 공작저에는 화려한 음악 소리가 예행연습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 천장에 매달린 수십 개의 크리스털 샹들리에는 태양의 파편을 흩뿌리는 듯 찬란하게 빛났고, 공기 중에는 대륙 전역에서 공수해 온 백합과 자스민의 진한 향기가 독한 술 냄새와 뒤섞여 기묘한 환각을 불러일으켰다. 라리엘은 육중한 문턱을 넘기 전, 가슴팍에 손을 얹어 요동치는 심장을 짓눌렀다. 오늘 이 자리에 그녀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지 않는 것’을 선택당했다. 사교계의 하이에나들이 굶주린 눈으로 지켜보는 이 잔인한 연회장에 가족들을 초대할 수는 없었다. 라리엘이 땀이 배어 나오는 손바닥을 드레스 자락에 몰래 문질러 닦았다. 그때, 곁에 서 있던 아르덴의 차가운 시선이 그녀의 떨리는 손끝에 머물렀다. 그는 위로 대신 서늘한 냉소만을 던졌다. “떨지 마. 네가 여기서 무너지는 건 내 가문에 대한 모욕이니까.” 그의 목소리는 격려라기보다 경고에 가까웠다. 라리엘은 입술을 깨물며 턱을 치켜올렸다. 그래, 이 남자는 결코 나의 방패가 되어주지 않을 것이다. 오늘 밤, 이 화려한 전장에서 그녀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다. 연회의 주인공인 두 사람이 등장하기 전부터, 장내는 이미 위선적인 웃음과 독을 품은 속삭임으로 가득했다. 부채 뒤에 숨겨진 귀족들의 입술은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몰락한 백작 영애와 냉혹한 공작의 결합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드디어 나오시는군. 제국의 사신과 비운의 신부가.” 육중한 문이 열리고, 장내를 압도하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르덴 폰 알브릭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냉기였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재단된 검은색 예복과 은사로 정교하게 수놓아진 가문의 문양은 빛을 받을 때마다 서늘하게 번뜩였다. 흐트러짐 없이 뒤로 넘긴 금발과 그 아래 자리한 푸른 눈동자는 오늘 밤 그 누구에게도 온기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얼어붙어 있었다. 그의 팔에 손을 얹은 채 걷는 라리엘 역시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짙은 자색의 실크 위에 수천 개의 흑진주가 밤하늘의 별처럼 박혀 있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은하수가 흐르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그녀가 입술을 미세하게 떨며 첫발을 내딛으려던 찰나였다. 단단한 손이 라리엘의 허리를 강하게 감싸 안았다. 예상치 못한 접촉에 라리엘의 몸이 눈에 띄게 움찔하며 굳었다. 그녀가 경악 어린 눈으로 옆을 돌아보자, 아르덴은 무심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한 채 그녀를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사람들의 눈에는 이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신혼부부의 모습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아르덴의 손이 그녀의 허리 곡선을 따라 깊숙이 파고들었고, 그의 어깨와 그녀의 어깨가 밀착되었다. “……무슨 짓이야?” 라리엘이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낮게 읊조렸다. 하지만 아르덴은 대답 대신 그녀의 귓가로 고개를 숙였다. 멀리서 보면 다정한 귓속말을 나누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라리엘의 귓가에 닿은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가만히 있어. 보는 눈들이 많다는 걸 잊었어?” 그의 숨결이 예민한 귓등을 스쳤다. 라리엘은 소름이 돋는 것을 참으며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아르덴의 손아귀에는 힘이 더 들어갔다. “지금 이 자리에서 네가 내게 거부당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내일 아침이면 플로렌스의 영애가 첫날밤에 소박을 맞았다는 신문 기사가 제국 전역에 깔릴 테니까. 네 동생들의 거처까지 기자들이 들이닥치는 건 시간문제겠지.” 비겁한 협박이었다. 라리엘은 이를 악물었다. “웃어, 라리엘. 사냥감을 기다리는 늑대들에게 네 약점을 던져주지 마.” 아르덴의 서늘한 명령에 라리엘은 결국 비틀린 가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 사람이 계단을 내려오자 귀족들이 파도처럼 갈라지며 길을 내주었다. “공작 각하,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부인께서 소문보다 훨씬 아름다우시군요.”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사교계의 거물인 제르망 백작이었다. 그는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라리엘을 훑어내렸다. “백작 가문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공작께서 이렇게 거두어 주시니 참으로 자비로우십니다. 마치 길 잃은 어린양을 돌보는 성자 같으십니다.”아르덴은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어스름한 테라스로 들어섰고, 뒤따라온 클로디아가 유리문을 닫았다.문이 닫히자 화려한 오케스트라 선율과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마치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아득하게 잦아들었다.차가운 겨울밤의 공기가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을 더욱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클로디아는 숄을 한 번 여미고는 고개를 숙였다.“은밀히 전해드리고 싶었는데, 연회장에서 이런 자리를 만들게 되어 송구합니다, 공작님. 누군가 보기라도 하면 공작님께서 난처해지실 테니, 서둘러 말씀드릴게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이 대화가 단순한 안부 인사가 아닌, 오직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은밀한’ 대화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했다.뻔히 보이는 그녀의 속내가 자못 불쾌했지만, 아르덴은 기꺼이 그 연극에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괜찮아. 지켜보는 눈은 없으니 편하게 말해봐.”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클로디아는 기다렸다는 듯 한 걸음 더 다가섰다.바닥에 스치는 드레스 자락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저에게 접근한 그 수상한 남자가 부인에 대해 귀띔해주더군요. 플로렌스의 집사가 생전에 돌아가신 백작님과 심각한 마찰이 있었다고 해요. 정확한 내막은 베일에 싸여 있지만, 아마도 지저분한 금전 문제였던 모양이에요.”그녀는 ‘지저분한’이라는 단어에 미묘하게 힘을 주었다.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상대의 혐오를 자극할 수 있는 지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그녀의 눈동자가 은근히 빛났다.“탐욕에 눈이 먼 집사는 결국 백작님을 살해하고 도망쳤고, 저에게 접근한 그 남자는 집사에게 받아낼 돈이 있어 그를 추적하던 중이었대요.”말을 이어가며 클로디아는 손끝으로 자신의 팔을 천천히 쓸어내렸다.이야기가 점점 자극적으로 흐르자, 그녀의 심장도 덩달아 고조되었다.
1월 1일, 황궁에서 치러지는 신년회는 제국에서 가장 큰 행사인만큼 수많은 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날이었다.황궁 정문 앞은 문장을 새긴 귀족들의 마차 행렬로 끝이 보이지 않았고, 반대편 구석에는 각 가문에서 황실에 바치는 진상품을 실은 수레들이 분주하게 성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그 거대한 소란 속에 섞인 알브릭 공작가의 마차 안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아르덴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자꾸만 무의식적으로 라리엘에게로 흘러갔다.평소 내릴 때가 많았던 그녀의 갈색 고수머리는 우아하게 틀어 올려 섬세한 은핀으로 고정되었고, 그 덕에 고스란히 드러난 새하얀 목덜미가 매끄러운 곡선을 그렸다.가느다란 쇄골 아래로 늘어진 진주 목걸이는 그녀의 호흡에 따라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남청색 드레스 위로 드러난 어깨선과 가녀린 목덜미가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아르덴은 목 안쪽이 바짝 말라붙는 기분이 들었다.이 기묘한 갈증이 무엇인지,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아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시선을 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그의 시선을 느낀 라리엘이 문득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왜 자꾸 그렇게 봐? 어디 이상해? 화장이 번졌나?”그녀가 손등으로 제 뺨을 살짝 짚으며 묻자, 아르덴은 생각이라도 읽힐까 싶어 짤막하게 대답했다.“아니.”라리엘은 그의 반응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잠시 바라보다가, 자신의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손으로 치맛자락을 살짝 정리하며 중얼거렸다.“제일 예쁜 걸로 골라 입은 건데, 별로야?”라리엘이 속상한 듯 눈썹을 까딱이자 아르덴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사실 문제는 ‘별로’인 게 아니라, ‘지나치게 예쁘다&rsqu
아르덴은 라리엘의 손에서 문서를 넘겨받아 등불 아래 바짝 가져다 댔다.만약 레몬즙이나 열에 반응하는 시약을 썼다면, 과거 플로렌스 백작이 발견했을 당시에 이미 갈색으로 변색된 흔적이 남았어야 했다.하지만 그런 자국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이번에는 벽난로의 이글거리는 불빛에 종이를 비춰보며 투과되는 문양이 있는지 확인했지만, 거친 가죽의 결 외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옆에서 트리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원본이 중요하다고 했지, 원본의 내용이 중요하다고 한건 아니잖아요. 그 문서 자체가 의미있는거 아닐까요?그녀는 테이블에 턱을 괸 채 느긋하게 꼬은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아르덴이 그녀를 한번 슬쩍 보고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이 양피지가 무슨 마법의 양피지라도 되지 않는 한, 그럴 일은 없어.”“칫…”트리샤는 결국 입을 삐죽이며 뒤로 물러났다. 라리엘이 다시 문서를 받아들고 찬찬히 들여다보았다.양피지 위에는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한 희미한 얼룩들만이 듬성듬성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아버지가 여기서 뭔가를 발견했다면, 그리고 그걸 아르덴에게 보여주러 오는 길이었다면… 무언가 남아있지 않았을까? 여기에…”그녀는 낮게 중얼거리며 양피지 한복판에 자리한 거뭇한 얼룩 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그녀가 살며시 얼룩을 쓸어내리자, 놀랍게도 검은 자국이 미세하게 번져나갔다. 라리엘의 눈이 커졌다.“아르덴, 이것 좀 봐봐.”그녀는 번져나간 자국을 가리켰다.“이 얼룩말이야. 난 세월에 묻은 때인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냐.”그녀가 다시 한번 양피지를 손끝으로 문지르자, 마치 옅은 기
“난 이런 화려한 곳에서 지켜야 할 식사 예절 같은 건 전혀 모르는데 어쩌죠?”평소와 다름없는 무심한 어조였지만, 그 안에는 아주 미세한 위축감이 섞여 있었다. 라리엘이 편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런 건 신경쓰지 말고 편하게 들어요. 트리샤 씨가 맛있게 먹어주는 게 우리에겐 가장 큰 예의에요.”만약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면 그 말 속에 있는 저의를 파악하느라 머리를 좀 더 굴렸겠지만, 라리엘의 말이었기에 트리샤는 더 생각하지 않았다.그녀는 곧바로 뻣뻣하게 쥐고 있던 포크를 제 손에 익숙한 방식으로 편하게 고쳐 쥐고는 식사를 시작했다.“그럼… 염치 불구하고 잘 먹을게요.”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와 신선한 채소를 입에 넣자, 며칠간 길 위에서 겪었던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아르덴과 라리엘은 그녀가 식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사소한 담소를 나누었다.이윽고 식사가 끝나갈 무렵, 달콤한 디저트 와인이 잔에 채워졌다. 아르덴이 냅킨으로 입가를 가볍게 닦아낸 뒤 차분한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제이드는 어떻게 되었지?”식탁 위의 촛불이 그의 푸른 눈동자에 내려앉아 서늘한 빛을 냈다. 와인을 한 모금 머금어 목을 축인 트리샤가 대답했다.“계획대로 그놈들에게 잘 인도해 줬어요. 며칠에 걸쳐서 은밀하게 거처를 옮기더니, 최종적으로는 아이델의 상인 길드 본부의 지하에 머물게 하더라고요. 보안이 삼엄해서 쥐새끼 한 마리 들락거리기 힘든 곳이죠.”“상인 길드라…”아르덴이 낮게 중얼거리며 와인 잔의 테두리를 가만히 매만졌다. 곁에서 숨을 죽이고 듣고 있던 라리엘이 안쓰러운 기색을 감추지
오라비라는 말에 클로디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그녀는 불만스러운 듯 시선을 내리깔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내 지지 않겠다는 듯 날 선 목소리로 받아쳤다.“나한테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으면서, 그저 시키는 대로 앵무새처럼 물어보라고만 하니까 진전이 없는 거잖아요. 도대체 그 부인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게 뭐죠? 그 보잘것없는 플로렌스 가문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말했잖아. 그건 당신이 알 바 아니라고.”남자의 단호한 거절에 클로디아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이대로 끌려다니다가는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다.오라비도, 가문도, 그리고—자신이 원하는 것조차. 그녀는 조급함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승부수를 던졌다.“상황이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흐르는 건 당신에게도 좋은 일은 아니잖아요? 사실 이건 내가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 알브릭 공작님의 의중이기도 해요.”남자의 눈빛에 미심쩍은 빛이 스쳤다. 클로디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공작님께서는 공작 부인이 혹여 알브릭 가문의 명성에 흠집이라도 내지 않을까 고심이 깊으시더라고요. 만약 그분이 부인의 흠결에 대해 뭔가 실마리라도 잡는다면, 공작 부인의 입지는 점점 좁아질거고… 그렇게 되면 당신들이 하는 일도 수월해지지 않겠어요?”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남자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바깥 멀리서 바람이 스치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부채를 매만지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클로디아의 손끝에 초조함이 서렸다.녹스의 입장에서 알브릭 공작이 거슬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그가 부인에게서 등을 돌려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환영할 일이었다. 남자는 그녀의 제안에 내심 솔깃해하면서도, 겉으로는
응접실은 클로디아가 남기고 간 진한 향수 냄새로 가득했다.달콤하면서도 지나치게 짙은 향이 공기 속에 눌어붙은 듯 맴돌았다. 아르덴은 닫힌 문을 향해 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그의 눈동자는 차갑게 식어, 마치 복잡한 체스판의 다음 수를 계산하듯 날카롭게 가라앉아 있었다.“아르덴.”부드러운 목소리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정적을 깼다.아르덴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선 라리엘이 보였다. 그녀가 아르덴의 팔을 가만히 잡았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레이먼 백작님이 안좋은 소식이라도 전하신 거야?”“아니, 그건 아니고…”아르덴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라리엘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가 조금 전까지 거짓과 계략으로 가득했던 그의 마음을 사정없이 찔러왔다.차갑게 정리되어 있던 사고가 그 온기에 부딪혀 미묘하게 흐트러졌다. 아르덴은 찰나의 순간 고민했다. 지금 사실대로 말할 것인가, 아니면 조금만 더 미룰 것인가.그는 한 번 시선을 떨구었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결심하듯 입을 열었다.“라리엘. 여기 좀 앉아봐. 할 이야기가 있어.”“응? 정말 무슨 일이 있는거야?”라리엘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르덴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부드럽게 이끌어 소파에 앉힌 뒤, 자신도 맞은편에 깊숙이 몸을 묻고 앉았다.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레이먼 백작 영애 말이야. 지금까지 그녀와 단둘이 있을 때 어떤 이야기들을 나눴어?”갑작스러운 질문에 라리엘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깜빡였다.“음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라리엘의 무릎 위에서 책을 거두어 제자리에 꽂았다. 그리고는 부서질 세라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안아 올렸다. 잠결에 으응, 하며 그의 품을 파고드는 라리엘의 온기에 아르덴은 숨을 멈췄다. 그녀에게선 여전히 예전 그 온실의 꽃향기가 났다. 그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며, 차가운 서고를 지나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그녀의 침실에 도착해 침대에 눕히는 순간까지도 아르덴은 팔에 힘을 풀지 못했다. 잠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는 이
숨이 조금 가라앉은 뒤에야 라리엘은 옷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닦아냈다. 눈물에 젖은 편지지를 구겨버리는 대신 조심스럽게 종이를 말렸다. 이 얼룩조차 자신의 일부라고 인정하듯. 지금 여기서 주저앉으면 정말로 아르덴의 말대로 '입 다물고 인형처럼' 살게 될 뿐이었다. '울고 있을 시간조차 아까워. 내가 무너지면 우리 가족은 정말 갈 곳이 없어져.' 라리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붉어진 눈가를 화장으로 차분히 가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거울 속에는 더 이상 처량하게 우는 소녀가 없었다.
연회장의 불빛이 하나둘 꺼진 뒤, 라리엘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화려하지만 갑옷처럼 무거웠던 자수정 드레스를 벗어던졌다. 꽉 조여졌던 코르셋이 풀리자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은 여전했다. 시녀들은 늘 그렇듯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편히 쉬십시오, 부인.”이라는 형식적인 인사만을 남기고 조용히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 침실은 완전히 라리엘 혼자만의 공간이 되었다. 촛불 하나만이 위태롭게 타오르는 방 안에서 라리엘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한동안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손은 무릎
라리엘은 짧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소임이라니? 오늘 내 소임은 너의 살아있는 장식품이 되는 것 아니었어? 충분히 완수했다고 생각하는데.” 날 선 대답에 아르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그는 괜히 먼 정원을 바라보며 짐짓 무심한 투로 덧붙였다. “…안색이 좋지 않군. 연회장의 향기가 너무 독했나?” 그것은 아르덴 나름의 절박한 안부였다. 괜찮으냐고, 아까 그들의 말에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진심이 서툰 질문 속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가시 돋친 말들에 온마음이 할퀴어진 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