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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축하 연회

Author: nomady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18 14:32:42

라리엘은 서신을 쥔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참아냈다.

아버지는 죽기 직전까지도 아르덴을 ‘아들과 다름없는 친구’로 믿고 있었다. 자신의 가문이 가진 위험한 비밀까지 공유할 정도로 그를 신뢰했다.

그런데 아르덴은? 그는 이 서신을 받은 직후에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가문을 파멸시킨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와 함께 아르덴이 집어삼켜진 것일까?

라리엘은 서신을 소중하게 접어 품 안 깊숙이 숨겼다. 지금은 이것을 들고 아르덴을 추궁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창고를 나오며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밖으로 나오자 다시 찬란한 햇살이 그녀를 맞이했다.

하지만 라리엘의 눈앞에 펼쳐진 공작저의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다운 안식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화려한 금빛 안개로 뒤덮인, 언제 어디서 가시가 튀어 나올지 모르는 위험한 미로와 같았다.

“부인, 공작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하녀의 보고가 들려왔다. 그녀는 품 안의 서신이 닿은 살결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창밖의 남자를 내다보았다.

아르덴은 마차에서 내려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자네가 요청한 플로렌스의 고대 문헌 사본…….’

아르덴은 왜 우리 가문의 금기된 역사를 원했던 걸까. 아버지는 그것을 ‘우리 가문’의 역사라고 칭했지만, 동시에 아르덴에게 조심히 다뤄달라고 당부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두 사람이 공유했던 그 ‘금기’는 무엇이었을까.

아르덴이 그 문헌을 손에 넣기 위해, 혹은 그 안에 담긴 진실이 밖으로 새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가장 믿음직한 친구였던 아버지를 제거한 것이라면?

그녀는 가슴을 짓누르는 서신의 무게를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아르덴이 요청한 금기, 그리고 아버지가 마주했던 죽음. 그 사이를 잇는 핏빛 연결고리가 바로 이 저택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

맑은 하늘 아래, 알브릭 공작저에는 화려한 음악 소리가 예행연습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

천장에 매달린 수십 개의 크리스털 샹들리에는 태양의 파편을 흩뿌리는 듯 찬란하게 빛났고, 공기 중에는 대륙 전역에서 공수해 온 백합과 자스민의 진한 향기가 독한 술 냄새와 뒤섞여 기묘한 환각을 불러일으켰다.

라리엘은 육중한 문턱을 넘기 전, 가슴팍에 손을 얹어 요동치는 심장을 짓눌렀다. 오늘 이 자리에 그녀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지 않는 것’을 선택당했다. 사교계의 하이에나들이 굶주린 눈으로 지켜보는 이 잔인한 연회장에 가족들을 초대할 수는 없었다.

​라리엘이 땀이 배어 나오는 손바닥을 드레스 자락에 몰래 문질러 닦았다. 그때, 곁에 서 있던 아르덴의 차가운 시선이 그녀의 떨리는 손끝에 머물렀다. 그는 위로 대신 서늘한 냉소만을 던졌다.

​“떨지 마. 네가 여기서 무너지는 건 내 가문에 대한 모욕이니까.”

​그의 목소리는 격려라기보다 경고에 가까웠다. 라리엘은 입술을 깨물며 턱을 치켜올렸다.

그래, 이 남자는 결코 나의 방패가 되어주지 않을 것이다. 오늘 밤, 이 화려한 전장에서 그녀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다.

연회의 주인공인 두 사람이 등장하기 전부터, 장내는 이미 위선적인 웃음과 독을 품은 속삭임으로 가득했다.

부채 뒤에 숨겨진 귀족들의 입술은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몰락한 백작 영애와 냉혹한 공작의 결합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드디어 나오시는군. 제국의 사신과 비운의 신부가.”

육중한 문이 열리고, 장내를 압도하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르덴 폰 알브릭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냉기였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재단된 검은색 예복과 은사로 정교하게 수놓아진 가문의 문양은 빛을 받을 때마다 서늘하게 번뜩였다.

흐트러짐 없이 뒤로 넘긴 금발과 그 아래 자리한 푸른 눈동자는 오늘 밤 그 누구에게도 온기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얼어붙어 있었다.

그의 팔에 손을 얹은 채 걷는 라리엘 역시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짙은 자색의 실크 위에 수천 개의 흑진주가 밤하늘의 별처럼 박혀 있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은하수가 흐르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그녀가 입술을 미세하게 떨며 첫발을 내딛으려던 찰나였다.

단단한 손이 라리엘의 허리를 강하게 감싸 안았다. 예상치 못한 접촉에 라리엘의 몸이 눈에 띄게 움찔하며 굳었다.

그녀가 경악 어린 눈으로 옆을 돌아보자, 아르덴은 무심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한 채 그녀를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사람들의 눈에는 이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신혼부부의 모습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아르덴의 손이 그녀의 허리 곡선을 따라 깊숙이 파고들었고, 그의 어깨와 그녀의 어깨가 밀착되었다.

“……무슨 짓이야?”

라리엘이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낮게 읊조렸다. 하지만 아르덴은 대답 대신 그녀의 귓가로 고개를 숙였다.

멀리서 보면 다정한 귓속말을 나누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라리엘의 귓가에 닿은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가만히 있어. 보는 눈들이 많다는 걸 잊었어?”

그의 숨결이 예민한 귓등을 스쳤다. 라리엘은 소름이 돋는 것을 참으며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아르덴의 손아귀에는 힘이 더 들어갔다.

“지금 이 자리에서 네가 내게 거부당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내일 아침이면 플로렌스의 영애가 첫날밤에 소박을 맞았다는 신문 기사가 제국 전역에 깔릴 테니까. 네 동생들의 거처까지 기자들이 들이닥치는 건 시간문제겠지.”

비겁한 협박이었다. 라리엘은 이를 악물었다.

“웃어, 라리엘. 사냥감을 기다리는 늑대들에게 네 약점을 던져주지 마.”

아르덴의 서늘한 명령에 라리엘은 결국 비틀린 가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 사람이 계단을 내려오자 귀족들이 파도처럼 갈라지며 길을 내주었다.

“공작 각하,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부인께서 소문보다 훨씬 아름다우시군요.”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사교계의 거물인 제르망 백작이었다. 그는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라리엘을 훑어내렸다.

“백작 가문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공작께서 이렇게 거두어 주시니 참으로 자비로우십니다. 마치 길 잃은 어린양을 돌보는 성자 같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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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로렌스의 장미는 시들지 않는다   13화. 기사와 공주(1)

    숨이 조금 가라앉은 뒤에야 라리엘은 옷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닦아냈다. 눈물에 젖은 편지지를 구겨버리는 대신 조심스럽게 종이를 말렸다. 이 얼룩조차 자신의 일부라고 인정하듯. ​지금 여기서 주저앉으면 정말로 아르덴의 말대로 '입 다물고 인형처럼' 살게 될 뿐이었다. ​'울고 있을 시간조차 아까워. 내가 무너지면 우리 가족은 정말 갈 곳이 없어져.' ​라리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붉어진 눈가를 화장으로 차분히 가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거울 속에는 더 이상 처량하게 우는 소녀가 없었다.

  • 플로렌스의 장미는 시들지 않는다   12화. 어머니의 편지

    연회장의 불빛이 하나둘 꺼진 뒤, 라리엘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화려하지만 갑옷처럼 무거웠던 자수정 드레스를 벗어던졌다. 꽉 조여졌던 코르셋이 풀리자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은 여전했다. 시녀들은 늘 그렇듯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편히 쉬십시오, 부인.”이라는 형식적인 인사만을 남기고 조용히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 침실은 완전히 라리엘 혼자만의 공간이 되었다. 촛불 하나만이 위태롭게 타오르는 방 안에서 라리엘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한동안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손은 무릎

  • 플로렌스의 장미는 시들지 않는다   11화. 얼음 가면(2)

    라리엘은 짧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소임이라니? 오늘 내 소임은 너의 살아있는 장식품이 되는 것 아니었어? 충분히 완수했다고 생각하는데.” 날 선 대답에 아르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그는 괜히 먼 정원을 바라보며 짐짓 무심한 투로 덧붙였다. “…안색이 좋지 않군. 연회장의 향기가 너무 독했나?” 그것은 아르덴 나름의 절박한 안부였다. 괜찮으냐고, 아까 그들의 말에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진심이 서툰 질문 속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가시 돋친 말들에 온마음이 할퀴어진 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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