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라리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 역시 그가 설계한 잔인한 연극의 일부일지도 몰랐다.
경계를 늦추게 만든 뒤, 가장 아픈 곳을 찌르기 위한 전조. 그녀는 가운을 벗어 던지고 싶었지만, 몸을 잠식한 한기가 너무도 지독해 결국 그 온기에 기댄 채 몸을 웅크렸다. 잠시 후, 욕실 문이 열리고 아르덴이 나왔다. 그는 상체를 드러낸 채 머리칼을 거칠게 털어내며 방을 가로질렀다. 거울을 통해 그의 모습이 라리엘의 시야에 들어왔다. 군더더기 없이 탄탄한 근육으로 다져진 상체, 어깨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유려한 선 위로 맺힌 물방울이 보석처럼 빛났다. 그는 라리엘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옷장에 걸린 셔츠를 꺼내 입었다. 단추를 하나하나 채우는 그의 손가락은 길고 정교했다. 그 손이 어제 자신의 턱을 잡아 올리며 협박하던 손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우아했다. 마지막 단추를 채우지 않은 채 셔츠 깃을 정리하던 아르덴이 돌연 거울을 통해 라리엘과 시선을 맞췄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지? 곧 하녀들이 들어올 거야. 공작부인이 첫날밤을 바닥에서 지새웠다는 소문을 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움직여." 그의 시선이 라리엘의 입술로 향했다. 밤새 추위에 떨며 깨문 탓에 핏기가 가신 채 짓눌린 입술. 아르덴의 눈매가 아주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주저앉아 있는 라리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눈높이를 맞췄다. "......." 라리엘은 숨을 들이켰다. 너무 가까웠다. 그의 셔츠 사이로 미처 다 마르지 않은 물기가 느껴졌고, 갓 씻고 나온 남자의 깨끗하고 서늘한 향이 폐부 깊숙이 침투했다. 아르덴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차가운 손가락 끝이 예민한 귓등을 스쳤다. 라리엘은 전율하며 몸을 떨었다.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지만, 그것은 단순히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협적인 긴장감이 그녀의 목을 조여왔다. "얼굴이 엉망이군. 8시에 식당으로 내려와. 내 일과는 정확하니까, 1분이라도 늦는 건 용납 못 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런 미련 없이 방을 나갔다. 라리엘은 그가 떠난 자리에 남은 잔향을 마시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증오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느낀 긴장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공작저의 식당은 지나치게 넓고 화려했다. 하지만 그 공간을 채우는 것은 온기가 아닌, 압도적인 정적이었다. 라리엘은 하녀들이 준비해준 은은한 상아색 드레스를 입고 식탁 끝에 앉았다. 맞은편 먼 곳에는 아르덴이 앉아 있었다. 그는 이미 신문을 펼쳐 든 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달그락. 포크가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가 식당 안에 날카롭게 울렸다. 라리엘은 눈앞에 놓인 요리에 손도 대지 못한 채 커피잔만 만지작거렸다. 식욕이 있을 리 없었다. "음식이 입에 안 맞나?" 아르덴이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아니. 그냥... 생각이 좀 많아서." "생각은 밤에 혼자 있을 때나 해. 지금은 먹어두는 게 좋을 거야. 오늘 네가 소화해야 할 일정이 적지 않으니까." 그는 사무적인 어조로 말을 내뱉으며 신문을 넘겼다. 그의 일과는 철저히 계획되어 있었다. 아침 식사 후에는 집무실로 이동해 영지 관리와 제국 의회 보고서를 검토할 것이고, 오후에는 기사단의 훈련을 참관하거나 외부 인사를 접견할 것이다. 그 무심한 모습은 마치 어제 있었던 화려하고도 끔찍한 결혼식 따위는 그의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듯 보였다. 라리엘은 그 평온함이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은 영혼이 짓이겨진 채 이 지옥 같은 저택에 들어왔는데, 정작 가해자인 그는 너무나 일상적인 아침을 보내고 있었다. "너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네." 라리엘의 억눌린 목소리에 아르덴이 천천히 신문을 접어 내려놓았다. "무엇이 말이지?" "이 모든 상황 말이야. 아버지를 잃고, 가문이 몰락한 여자를 억지로 앉혀두고... 이렇게 평온하게 식사를 하는 게." 아르덴은 우아하게 잔을 들어 남은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는 서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라리엘을 보았다. "내가 여기서 눈물을 흘리며 사죄라도 하길 바랐나? 아니면 식사를 거르고 네 슬픔에 동참하기라도?" "그런 뜻이 아니라..." "라리엘. 너는 내 그림자가 되겠다고 맹세했어. 그림자는 빛이 움직이는 대로 따를 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식탁을 돌아 라리엘의 뒤로 다가왔다. 라리엘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의 압박감에 몸을 경직시켰다. 아르덴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오늘은 저택 안의 고용인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공작부인으로서 관리해야 할 명단을 확인해. 네가 해야 할 일은 그게 전부야." 어제 침실에서 느꼈던 그 기묘한 긴장감이 다시금 그녀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쓸데없는 의심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마. 내 인내심은 그리 길지 않으니까." 라리엘은 그가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비로소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식탁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증오해야 마땅한 남자에게서 느끼는 이 낯선 감각들이 그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려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혀끝을 저미고 지나가는 커피의 쓴맛을 느끼며 그녀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 햇살은 찬란했다. 그 시절의 여름은 지금처럼 뼛속까지 파고드는 냉기가 아니라, 아이들의 뺨을 기분 좋게 달구는 황금빛 온기로 가득 차 있었다. 구름은 마치 누군가 일부러 풀어놓은 양 떼처럼 느릿느릿 흘러갔다. 비가 막 그친 뒤라 공기에는 물기와 흙냄새가 섞여 있었고, 나뭇잎마다 맺힌 물방울은 햇빛을 받아 작은 별처럼 반짝였다. 열한 살의 라리엘은 플로렌스 백작가의 외동딸답게 한껏 치장된 차림이었다. 풍성한 레이스가 달린 분홍색 원피스는 그녀가 달릴 때마다 꽃잎처럼 퍼졌다가 다시 모였다. 갈색 곱슬머리는 리본을 단 채 이리저리 튀어 올랐다. 그녀는 알브릭 공작저의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숨이 찰 때까지 달렸다. 목적지는 하나였다. 비가 온 뒤에만 잠깐 모습을 드러낸다는 연못 위의 무지개. 그녀의 뒤에는 한 소년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었다. 열두 살의 아르덴은 이미 아이보다는 소년에 가까웠다. 또래보다 키가 훌쩍 컸고, 움직임 하나하나에 쓸데없는 동작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만큼은 단 한 순간도 앞을 달리는 소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발밑의 자갈이나 미끄러운 잔디보다, 혹시라도 라리엘이 넘어지지는 않을지, 숨이 가빠지지는 않을지가 더 중요했다. “아르덴! 빨리 와!” 라리엘이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햇살을 그대로 머금은 듯한 웃음이었다.미첼로가 어깨를 들썩이며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여유로운 손짓으로 눈썹 언저리를 긁적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좋습니다, 부인. 말씀하신 약탈금은 우리 녹스에서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국 법정까지 가서 번거롭게 힘 뺄 필요 있겠습니까? 너무 간단한 문제라, 부인의 그 귀한 발걸음이 무색해질 정도군요.”미첼로는 마치 자선 사업이라도 하는 양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협상이 이대로 끝날 것이라 확신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라리엘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더욱 단단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제 요구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미첼로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라리엘을 보았다.“약탈금의 완전한 반환과 더불어, 지금 그쪽에 구속되어 있는 제이드 크로이츠와 그의 딸 트리샤의 신변을 요구합니다. 그들에게 걸린 모든 제약과 감시를 풀고, 완전한 자유를 보장한다는 문서를 작성해 주세요.”그녀의 말에 가장 놀란건 트리샤였다. 하마터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라리엘을 쳐다볼 뻔 했다.미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낮은 신음을 내뱉으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흠… 부인께서는 확실히 협상의 기본을 잘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세상 모든 일에는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라는 철칙이 있습니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내놓는 법이죠.”그는 두 손바닥을 테이블 위로 펼쳐 보이며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우리가 막대한 약탈금을 내놓기로 했으니, 이제는 부인께서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우리에게 내놓으실 차례이지요. 공작가의 이권이나, 아니면 황실의 기밀 같은것 말입니다.”그의
라리엘은 떨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차분하게 입을 뗐다.“이 아이는 내가 어딜 가든 그림자처럼 함께하는 전속 시종이에요. 설마 녹스의 수장께서는 이 방 안에 연약한 여성 한 명이 늘어나는 것조차 두려워하실 만큼 겁이 많으신 건 아니겠지요?”라리엘의 도발적인 어조에 문지기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트리샤는 그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잠자코 서 있었다.“잠시만 기다리십시오.”문지기 하나가 허락을 구하러 들어갔다. 잠시 후 문을 열고 나온 그는 퉁명스럽게 덧붙였다.“시종은 철저한 몸수색을 받은 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트리샤는 아무런 저항 없이 양팔을 벌려 몸수색을 받아들였다.문지기의 무례한 손길이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훑었으나, 트리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무미건조한 표정을 유지했다.수색을 마친 후, 라리엘과 트리샤는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등 뒤에서 문이 쾅 닫히며 문지기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하여간, 귀부인들이란. 시녀 손을 안 빌리면 한 걸음도 못 움직인다니까.”실내는 복도의 저속한 소음이 완벽히 차단된 채, 기묘할 정도로 정적이고 고풍스러웠다.벨벳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희미한 빛이 방 안의 호화로운 가구들을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다.녹스의 수장은 창가에 서서 건물 아래 대기 중인 알브릭 가문의 기사들을 무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라리엘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라리엘은 순간 숨을 들이켰다.뒷골목의 제왕이라기에 흉터 가득한 거구의 사내를 예상했건만, 눈앞의 사내는 의외로 왜소하고 창백한 인상이었다.학자처럼 정갈한 차림새였지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만큼은 독사의 그것처럼 서늘했다. 수장은 천천히 다가와 예의를
수도 중앙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의 하류, 축축한 물비린내가 진동하는 다리 밑은 대낮에도 볕이 들지 않는 음습한 요새와 같았다.머리 위로는 마차가 지나가는 둔탁한 진동이 울리고, 발밑으로는 검은 강물이 철벅거리며 기괴한 소리를 내고 있는 가운데 아르덴은 마치 조각상처럼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서 있었다.잠시 후, 어둠 속에서 마른 체구의 남자가 비죽이 얼굴을 내밀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이거 놀랍군요. 고귀하신 알브릭 공작 각하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 직접 발걸음을 하시다니. 부인의 치부가 얼마나 추잡한지 궁금해서라기엔, 행보가 꽤나 적극적이십니다?”“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네놈이 지껄이는 그런 하찮은 가십 때문이 아니라는 걸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군.”아르덴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상대의 비열한 안색을 훑으며 대답했다.사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동행하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클로디아를 떼어놓느라 적잖은 인내심을 소모한 터였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 그녀 같은 불순물을 끼워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자신의 도발에도 공작이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자, 연락책은 짐짓 놀란 척 눈썹을 치켜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호오, 그럼 무슨 이유로 저를 만나겠다고 했을까요?”비아냥거리는 말투와 달리, 연락책의 눈동자에는 상대를 탐색하는 날카로운 살기가 스쳤다.“시간이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네놈들 수장과 직접 협상을 요청한다. 내용은 과거 플로렌스 가문과 녹스가 맺었던 ‘비밀 계약’에 관해서. 이쯤 말하면 알아들었겠지?”수장과의 직접 협상이라니. 상상을 초월하는 단도직입적인 말에 연락책의 입이 떡 벌어졌다.여유롭던 태도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그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
클로디아는 다시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려 입가에 가져갔다.라리엘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만족스럽게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물론 공작님의 의장직과 부인의 친정 문제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정치판이라는 게 그런걸 세세하게 고려하는 곳이 아니잖아요? 뭐, 부인께서는 고상한 꽃처럼 온실 속에만 계시니 이런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시겠지만요.”“클로디아 양. 도대체 무슨…”흔들리는 라리엘의 눈동자를 보며 클로디아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그녀는 이제 자신의 본심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상체를 라리엘 쪽으로 바짝 기울인 클로디아가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한 가지만 더 알려드리자면, 이 모든 위태로운 상황을 공작님께서도 이미 낱낱이 알고 계시다는 거예요. 가엾은 부인을 차마 쉽게 내치지 못하는 공작님의 마음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부인으로서, 남편의 앞길을 막고 있다면 조금은 책임을 통감하고 스스로 결단을 내릴 필요도 있는 것 아닐까요?”라리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클로디아를 쳐다보기만 했다.신년회에서 아르덴을 향해 미소짓던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겹쳐졌다. 그때, 클로디아가 라리엘의 손을 덥석 맞잡았다.“그러니까 부인, 제발 부탁이에요. 자꾸 공작님의 그늘 뒤에 비겁하게 숨기만 하지 말고 당당히 밖으로 나와요. 플로렌스 가문이야 그렇다 쳐도, 아무런 잘못 없는 알브릭 가문까지 물귀신처럼 바닥으로 끌어 내리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얼마나 꼴사납고 이기적인 짓인지 잘 알고 계시죠?”라리엘은 클로디아에게 붙잡힌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역겨울 정도로 부드러운 감촉이었다.그녀는 시선을 들어 클로디아의 탐욕스러운 눈동
“다만요?”베르너가 무거운 음성으로 덧붙였다.“재판을 함께 받으시게 되면 사교계의 평판이나 의회에서의 영향력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나 공작님처럼 높은 자리에 계신 분에게는 더욱더요.”라리엘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바닥에서 차가운 한기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그녀는 불안을 들키지 않으려 들이킨 숨을 아주 천천히 내뱉으며 물었다.“역시 그렇군요. 영향력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일까요?”“최악의 경우에는 의장직에서 물러나야 할지도 모릅니다. 황실에서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작님을 압박하려 들겠지요.”베르너의 목소리는 형집행관의 선고처럼 무겁게 라리엘의 어깨를 눌렀다. 라리엘은 시선을 아래로 툭 떨어뜨린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그녀의 창백해진 안색을 보자 베르너는 그제야 괜한 말을 했다 싶어 급히 말을 보탰다.“하지만 공작님께서는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으실 겁니다. 부인께서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어떻게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공작님께 그 어떤 피해도 가지 않게 할 방법은 없는 건가요?”베르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눈빛에는 안타까움과 원망이 미묘하게 섞여 있었다.“현재로서는… 두 분이 갈라서지 않는 이상, 방법은 없을 겁니다. 알브릭의 이름을 지키려면 플로렌스를 잘라내야 하니까요.”갈라선다. 그 말이 라리엘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무릎 위에 놓인 그녀의 손끝이 바르르 떨려왔다.아르덴을 위해서라면 그렇게라도 해야하는 걸까. 하지만 그를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베르너가 자백서 초안을 완성할 때까지도 라리엘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섬세한 문양이 새겨진 알브릭 공작저의 정문 앞. 클로디아는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서서 거대한 석조 저택을 올려
제국 수도의 화려한 번화가 아래, 오물이 흐르는 하수도관 옆에는 버려진 지하 창고처럼 보이는 거대한 공간이 숨겨져 있었다.습하고 퀴퀴한 공기가 감도는 이곳은 조직원들 사이에서 ‘피난처’라고 불리는, ‘녹스’의 심장부였다.미로 같은 복도 끝, 두꺼운 철문 너머 중앙 방에서 낮고 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쥐새끼들같이 교묘하게도 움직이는군. 그래, 탈레스 그 녀석이 전해달라는 이야기의 요지가 정확히 뭐야?”방 안은 촛불 몇 개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수장의 책상 너머에서 연락책이 마른침을 삼키며 보고를 이어갔다.“요약하자면, 알브릭 공작의 성미상 플로렌스 백작의 죽음을 캐는 일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이미 수사망이 좁혀오고 있으니 본부 차원에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해달라는 간청이었습니다.”“흠…”수장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며 생각에 잠겼다.수천 명의 암살자와 정보원을 거느린 거대 조직의 수장이라기엔, 그의 외형은 의외로 평범하다 못해 왜소하기까지 했다.창백한 안색과 단정한 옷차림은 오히려 하급 관청에서 서류를 만지는 문인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플로렌스 수도원까지 직접 발걸음을 했다면 이미 꽤 많은 것을 알아낸 상태겠군. 탈레스 녀석은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대체 뭘 한 거지?”그의 말투는 지독히 사무적이었다. 분노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 무미건조함에도 앞에 선 연락책은 마치 자신이 질책을 받는 듯 어깨를 움찔했다.“마, 말씀하신 대로 워낙 쥐새끼처럼 움직이는지라… 공작이 수도원에 나타나기 전까지 탈레스는 그가 이미 포기한 줄로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l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라리엘의 무릎 위에서 책을 거두어 제자리에 꽂았다. 그리고는 부서질 세라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안아 올렸다. 잠결에 으응, 하며 그의 품을 파고드는 라리엘의 온기에 아르덴은 숨을 멈췄다. 그녀에게선 여전히 예전 그 온실의 꽃향기가 났다. 그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며, 차가운 서고를 지나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그녀의 침실에 도착해 침대에 눕히는 순간까지도 아르덴은 팔에 힘을 풀지 못했다. 잠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는 이
숨이 조금 가라앉은 뒤에야 라리엘은 옷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닦아냈다. 눈물에 젖은 편지지를 구겨버리는 대신 조심스럽게 종이를 말렸다. 이 얼룩조차 자신의 일부라고 인정하듯. 지금 여기서 주저앉으면 정말로 아르덴의 말대로 '입 다물고 인형처럼' 살게 될 뿐이었다. '울고 있을 시간조차 아까워. 내가 무너지면 우리 가족은 정말 갈 곳이 없어져.' 라리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붉어진 눈가를 화장으로 차분히 가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거울 속에는 더 이상 처량하게 우는 소녀가 없었다.
연회장의 불빛이 하나둘 꺼진 뒤, 라리엘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화려하지만 갑옷처럼 무거웠던 자수정 드레스를 벗어던졌다. 꽉 조여졌던 코르셋이 풀리자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은 여전했다. 시녀들은 늘 그렇듯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편히 쉬십시오, 부인.”이라는 형식적인 인사만을 남기고 조용히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 침실은 완전히 라리엘 혼자만의 공간이 되었다. 촛불 하나만이 위태롭게 타오르는 방 안에서 라리엘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한동안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손은 무릎
성당의 천장에 매달린 수십 개의 샹들리에는 단순한 조명 기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빛의 폭포였고, 그 아래 서 있는 라리엘에게는 날카로운 바늘의 군집이었다. 화려하게 세공된 수백 개의 수정 조각들이 빛을 굴절시킬 때마다 성당 내부의 공기는 비현실적으로 일렁였다. 거울처럼 매끄럽게 닦인 대리석 바닥 위로 부딪혀 산산이 조각나는 빛줄기들은 라리엘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제단으로 향하는 길은 핏빛 이었다. 수천 송이의 장미 꽃잎들이 양탄자처럼 두껍게 깔려 막 꺾어낸 꽃 특유의 짙고 달큰한 향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