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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그림자

مؤلف: nomady
last update تاريخ النشر: 2026-05-15 09:28:49

라리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 역시 그가 설계한 잔인한 연극의 일부일지도 몰랐다.

경계를 늦추게 만든 뒤, 가장 아픈 곳을 찌르기 위한 전조.

그녀는 가운을 벗어 던지고 싶었지만, 몸을 잠식한 한기가 너무도 지독해 결국 그 온기에 기댄 채 몸을 웅크렸다.

잠시 후, 욕실 문이 열리고 아르덴이 나왔다. 그는 상체를 드러낸 채 머리칼을 거칠게 털어내며 방을 가로질렀다. 거울을 통해 그의 모습이 라리엘의 시야에 들어왔다.

군더더기 없이 탄탄한 근육으로 다져진 상체, 어깨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유려한 선 위로 맺힌 물방울이 보석처럼 빛났다.

그는 라리엘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옷장에 걸린 셔츠를 꺼내 입었다.

단추를 하나하나 채우는 그의 손가락은 길고 정교했다. 그 손이 어제 자신의 턱을 잡아 올리며 협박하던 손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우아했다.

마지막 단추를 채우지 않은 채 셔츠 깃을 정리하던 아르덴이 돌연 거울을 통해 라리엘과 시선을 맞췄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지? 곧 하녀들이 들어올 거야. 공작부인이 첫날밤을 바닥에서 지새웠다는 소문을 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움직여."

그의 시선이 라리엘의 입술로 향했다. 밤새 추위에 떨며 깨문 탓에 핏기가 가신 채 짓눌린 입술.

아르덴의 눈매가 아주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주저앉아 있는 라리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눈높이를 맞췄다.

"......."

라리엘은 숨을 들이켰다. 너무 가까웠다.

그의 셔츠 사이로 미처 다 마르지 않은 물기가 느껴졌고, 갓 씻고 나온 남자의 깨끗하고 서늘한 향이 폐부 깊숙이 침투했다. 아르덴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차가운 손가락 끝이 예민한 귓등을 스쳤다. 라리엘은 전율하며 몸을 떨었다.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지만, 그것은 단순히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협적인 긴장감이 그녀의 목을 조여왔다.

"얼굴이 엉망이군. 8시에 식당으로 내려와. 내 일과는 정확하니까, 1분이라도 늦는 건 용납 못 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런 미련 없이 방을 나갔다. 라리엘은 그가 떠난 자리에 남은 잔향을 마시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증오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느낀 긴장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공작저의 식당은 지나치게 넓고 화려했다. 하지만 그 공간을 채우는 것은 온기가 아닌, 압도적인 정적이었다.

라리엘은 하녀들이 준비해준 은은한 상아색 드레스를 입고 식탁 끝에 앉았다. 맞은편 먼 곳에는 아르덴이 앉아 있었다. 그는 이미 신문을 펼쳐 든 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달그락.

포크가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가 식당 안에 날카롭게 울렸다. 라리엘은 눈앞에 놓인 요리에 손도 대지 못한 채 커피잔만 만지작거렸다. 식욕이 있을 리 없었다.

"음식이 입에 안 맞나?"

아르덴이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아니. 그냥... 생각이 좀 많아서."

"생각은 밤에 혼자 있을 때나 해. 지금은 먹어두는 게 좋을 거야. 오늘 네가 소화해야 할 일정이 적지 않으니까."

그는 사무적인 어조로 말을 내뱉으며 신문을 넘겼다. 그의 일과는 철저히 계획되어 있었다.

아침 식사 후에는 집무실로 이동해 영지 관리와 제국 의회 보고서를 검토할 것이고, 오후에는 기사단의 훈련을 참관하거나 외부 인사를 접견할 것이다.

그 무심한 모습은 마치 어제 있었던 화려하고도 끔찍한 결혼식 따위는 그의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듯 보였다. 라리엘은 그 평온함이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은 영혼이 짓이겨진 채 이 지옥 같은 저택에 들어왔는데, 정작 가해자인 그는 너무나 일상적인 아침을 보내고 있었다.

"너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네."

라리엘의 억눌린 목소리에 아르덴이 천천히 신문을 접어 내려놓았다.

"무엇이 말이지?"

"이 모든 상황 말이야. 아버지를 잃고, 가문이 몰락한 여자를 억지로 앉혀두고... 이렇게 평온하게 식사를 하는 게."

아르덴은 우아하게 잔을 들어 남은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는 서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라리엘을 보았다.

"내가 여기서 눈물을 흘리며 사죄라도 하길 바랐나? 아니면 식사를 거르고 네 슬픔에 동참하기라도?"

"그런 뜻이 아니라..."

"라리엘. 너는 내 그림자가 되겠다고 맹세했어. 그림자는 빛이 움직이는 대로 따를 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식탁을 돌아 라리엘의 뒤로 다가왔다. 라리엘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의 압박감에 몸을 경직시켰다.

아르덴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오늘은 저택 안의 고용인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공작부인으로서 관리해야 할 명단을 확인해. 네가 해야 할 일은 그게 전부야."

어제 침실에서 느꼈던 그 기묘한 긴장감이 다시금 그녀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쓸데없는 의심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마. 내 인내심은 그리 길지 않으니까."

라리엘은 그가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비로소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식탁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증오해야 마땅한 남자에게서 느끼는 이 낯선 감각들이 그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려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혀끝을 저미고 지나가는 커피의 쓴맛을 느끼며 그녀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

햇살은 찬란했다.

그 시절의 여름은 지금처럼 뼛속까지 파고드는 냉기가 아니라, 아이들의 뺨을 기분 좋게 달구는 황금빛 온기로 가득 차 있었다.

구름은 마치 누군가 일부러 풀어놓은 양 떼처럼 느릿느릿 흘러갔다.

비가 막 그친 뒤라 공기에는 물기와 흙냄새가 섞여 있었고, 나뭇잎마다 맺힌 물방울은 햇빛을 받아 작은 별처럼 반짝였다.

열한 살의 라리엘은 플로렌스 백작가의 외동딸답게 한껏 치장된 차림이었다.

풍성한 레이스가 달린 분홍색 원피스는 그녀가 달릴 때마다 꽃잎처럼 퍼졌다가 다시 모였다. 갈색 곱슬머리는 리본을 단 채 이리저리 튀어 올랐다.

그녀는 알브릭 공작저의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숨이 찰 때까지 달렸다. 목적지는 하나였다.

비가 온 뒤에만 잠깐 모습을 드러낸다는 연못 위의 무지개.

그녀의 뒤에는 한 소년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었다. 열두 살의 아르덴은 이미 아이보다는 소년에 가까웠다.

또래보다 키가 훌쩍 컸고, 움직임 하나하나에 쓸데없는 동작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만큼은 단 한 순간도 앞을 달리는 소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발밑의 자갈이나 미끄러운 잔디보다, 혹시라도 라리엘이 넘어지지는 않을지, 숨이 가빠지지는 않을지가 더 중요했다.

“아르덴! 빨리 와!”

라리엘이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햇살을 그대로 머금은 듯한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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