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라리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 역시 그가 설계한 잔인한 연극의 일부일지도 몰랐다.
경계를 늦추게 만든 뒤, 가장 아픈 곳을 찌르기 위한 전조. 그녀는 가운을 벗어 던지고 싶었지만, 몸을 잠식한 한기가 너무도 지독해 결국 그 온기에 기댄 채 몸을 웅크렸다. 잠시 후, 욕실 문이 열리고 아르덴이 나왔다. 그는 상체를 드러낸 채 머리칼을 거칠게 털어내며 방을 가로질렀다. 거울을 통해 그의 모습이 라리엘의 시야에 들어왔다. 군더더기 없이 탄탄한 근육으로 다져진 상체, 어깨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유려한 선 위로 맺힌 물방울이 보석처럼 빛났다. 그는 라리엘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옷장에 걸린 셔츠를 꺼내 입었다. 단추를 하나하나 채우는 그의 손가락은 길고 정교했다. 그 손이 어제 자신의 턱을 잡아 올리며 협박하던 손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우아했다. 마지막 단추를 채우지 않은 채 셔츠 깃을 정리하던 아르덴이 돌연 거울을 통해 라리엘과 시선을 맞췄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지? 곧 하녀들이 들어올 거야. 공작부인이 첫날밤을 바닥에서 지새웠다는 소문을 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움직여." 그의 시선이 라리엘의 입술로 향했다. 밤새 추위에 떨며 깨문 탓에 핏기가 가신 채 짓눌린 입술. 아르덴의 눈매가 아주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주저앉아 있는 라리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눈높이를 맞췄다. "......." 라리엘은 숨을 들이켰다. 너무 가까웠다. 그의 셔츠 사이로 미처 다 마르지 않은 물기가 느껴졌고, 갓 씻고 나온 남자의 깨끗하고 서늘한 향이 폐부 깊숙이 침투했다. 아르덴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차가운 손가락 끝이 예민한 귓등을 스쳤다. 라리엘은 전율하며 몸을 떨었다.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지만, 그것은 단순히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협적인 긴장감이 그녀의 목을 조여왔다. "얼굴이 엉망이군. 8시에 식당으로 내려와. 내 일과는 정확하니까, 1분이라도 늦는 건 용납 못 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런 미련 없이 방을 나갔다. 라리엘은 그가 떠난 자리에 남은 잔향을 마시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증오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느낀 긴장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공작저의 식당은 지나치게 넓고 화려했다. 하지만 그 공간을 채우는 것은 온기가 아닌, 압도적인 정적이었다. 라리엘은 하녀들이 준비해준 은은한 상아색 드레스를 입고 식탁 끝에 앉았다. 맞은편 먼 곳에는 아르덴이 앉아 있었다. 그는 이미 신문을 펼쳐 든 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달그락. 포크가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가 식당 안에 날카롭게 울렸다. 라리엘은 눈앞에 놓인 요리에 손도 대지 못한 채 커피잔만 만지작거렸다. 식욕이 있을 리 없었다. "음식이 입에 안 맞나?" 아르덴이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아니. 그냥... 생각이 좀 많아서." "생각은 밤에 혼자 있을 때나 해. 지금은 먹어두는 게 좋을 거야. 오늘 네가 소화해야 할 일정이 적지 않으니까." 그는 사무적인 어조로 말을 내뱉으며 신문을 넘겼다. 그의 일과는 철저히 계획되어 있었다. 아침 식사 후에는 집무실로 이동해 영지 관리와 제국 의회 보고서를 검토할 것이고, 오후에는 기사단의 훈련을 참관하거나 외부 인사를 접견할 것이다. 그 무심한 모습은 마치 어제 있었던 화려하고도 끔찍한 결혼식 따위는 그의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듯 보였다. 라리엘은 그 평온함이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은 영혼이 짓이겨진 채 이 지옥 같은 저택에 들어왔는데, 정작 가해자인 그는 너무나 일상적인 아침을 보내고 있었다. "너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네." 라리엘의 억눌린 목소리에 아르덴이 천천히 신문을 접어 내려놓았다. "무엇이 말이지?" "이 모든 상황 말이야. 아버지를 잃고, 가문이 몰락한 여자를 억지로 앉혀두고... 이렇게 평온하게 식사를 하는 게." 아르덴은 우아하게 잔을 들어 남은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는 서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라리엘을 보았다. "내가 여기서 눈물을 흘리며 사죄라도 하길 바랐나? 아니면 식사를 거르고 네 슬픔에 동참하기라도?" "그런 뜻이 아니라..." "라리엘. 너는 내 그림자가 되겠다고 맹세했어. 그림자는 빛이 움직이는 대로 따를 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식탁을 돌아 라리엘의 뒤로 다가왔다. 라리엘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의 압박감에 몸을 경직시켰다. 아르덴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오늘은 저택 안의 고용인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공작부인으로서 관리해야 할 명단을 확인해. 네가 해야 할 일은 그게 전부야." 어제 침실에서 느꼈던 그 기묘한 긴장감이 다시금 그녀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쓸데없는 의심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마. 내 인내심은 그리 길지 않으니까." 라리엘은 그가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비로소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식탁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증오해야 마땅한 남자에게서 느끼는 이 낯선 감각들이 그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려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혀끝을 저미고 지나가는 커피의 쓴맛을 느끼며 그녀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 햇살은 찬란했다. 그 시절의 여름은 지금처럼 뼛속까지 파고드는 냉기가 아니라, 아이들의 뺨을 기분 좋게 달구는 황금빛 온기로 가득 차 있었다. 구름은 마치 누군가 일부러 풀어놓은 양 떼처럼 느릿느릿 흘러갔다. 비가 막 그친 뒤라 공기에는 물기와 흙냄새가 섞여 있었고, 나뭇잎마다 맺힌 물방울은 햇빛을 받아 작은 별처럼 반짝였다. 열한 살의 라리엘은 플로렌스 백작가의 외동딸답게 한껏 치장된 차림이었다. 풍성한 레이스가 달린 분홍색 원피스는 그녀가 달릴 때마다 꽃잎처럼 퍼졌다가 다시 모였다. 갈색 곱슬머리는 리본을 단 채 이리저리 튀어 올랐다. 그녀는 알브릭 공작저의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숨이 찰 때까지 달렸다. 목적지는 하나였다. 비가 온 뒤에만 잠깐 모습을 드러낸다는 연못 위의 무지개. 그녀의 뒤에는 한 소년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었다. 열두 살의 아르덴은 이미 아이보다는 소년에 가까웠다. 또래보다 키가 훌쩍 컸고, 움직임 하나하나에 쓸데없는 동작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만큼은 단 한 순간도 앞을 달리는 소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발밑의 자갈이나 미끄러운 잔디보다, 혹시라도 라리엘이 넘어지지는 않을지, 숨이 가빠지지는 않을지가 더 중요했다. “아르덴! 빨리 와!” 라리엘이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햇살을 그대로 머금은 듯한 웃음이었다.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한 사교계의 낯익은 얼굴이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로베르 후작 부인 아니신가요? 무슨 일이시죠?”후작 부인은 주변을 한 번 훑어보더니, 다른 사람들의 귀를 피하듯 라리엘의 팔꿈치를 살짝 감싸 쥐고 커다란 화분 옆으로 그녀를 이끌었다.그녀가 들고 있던 깃털 부채를 반쯤 넓게 펼쳐 자신의 입가를 교묘하게 가리고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부인, 요즘 공공연하게 떠도는 그 끔찍한 소문이 정말로 사실인가요? 어휴, 제 귀로 듣고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서 말이에요.”“무슨… 이야기를 들으신건가요?”“그게 그러니까, 돌아가신 플로렌스 백작님 말이에요. 사고로 돌아가신게 아니라 그 댁을 모시던 집사에게 살해당하셨다는게 사실이에요?순간, 라리엘은 머리를 거대한 둔기로 얻어맞은 듯 사고가 완전히 정지되며 멍해졌다.차가운 얼음물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기분이었다. . 후작 부인은 충격으로 창백하게 질려가는 라리엘의 안색을 유심히 살피며 흥미진진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실례가 되는 줄은 알고 있지만, 이런 흉흉한 소문은 당사자에게 확실히 확인하는게 무엇보다 중요하잖아요?”밀려드는 당혹감 너머로 라리엘의 머릿속에 제이드가 나루터 앞에서 했던 말이 번뜩이며 스쳤다.‘그들은 뼛속까지 잔인한 자들입니다. 일이 잘못되어 수사망이 좁혀올 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꼬리를 자를 편리한 카드 한 장이 필요했던 거지요.’그들, ‘녹스’가 퍼뜨린 이야기가 분명했다. 살며시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라리엘은 다급히 표정을 정리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후
아르덴은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어스름한 테라스로 들어섰고, 뒤따라온 클로디아가 유리문을 닫았다.문이 닫히자 화려한 오케스트라 선율과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마치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아득하게 잦아들었다.차가운 겨울밤의 공기가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을 더욱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클로디아는 숄을 한 번 여미고는 고개를 숙였다.“은밀히 전해드리고 싶었는데, 연회장에서 이런 자리를 만들게 되어 송구합니다, 공작님. 누군가 보기라도 하면 공작님께서 난처해지실 테니, 서둘러 말씀드릴게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이 대화가 단순한 안부 인사가 아닌, 오직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은밀한’ 대화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했다.뻔히 보이는 그녀의 속내가 자못 불쾌했지만, 아르덴은 기꺼이 그 연극에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괜찮아. 지켜보는 눈은 없으니 편하게 말해봐.”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클로디아는 기다렸다는 듯 한 걸음 더 다가섰다.바닥에 스치는 드레스 자락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저에게 접근한 그 수상한 남자가 부인에 대해 귀띔해주더군요. 플로렌스의 집사가 생전에 돌아가신 백작님과 심각한 마찰이 있었다고 해요. 정확한 내막은 베일에 싸여 있지만, 아마도 지저분한 금전 문제였던 모양이에요.”그녀는 ‘지저분한’이라는 단어에 미묘하게 힘을 주었다.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상대의 혐오를 자극할 수 있는 지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그녀의 눈동자가 은근히 빛났다.“탐욕에 눈이 먼 집사는 결국 백작님을 살해하고 도망쳤고, 저에게 접근한 그 남자는 집사에게 받아낼 돈이 있어 그를 추적하던 중이었대요.”말을 이어가며 클로디아는 손끝으로 자신의 팔을 천천히 쓸어내렸다.이야기가 점점 자극적으로 흐르자, 그녀의 심장도 덩달아 고조되었다.
1월 1일, 황궁에서 치러지는 신년회는 제국에서 가장 큰 행사인만큼 수많은 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날이었다.황궁 정문 앞은 문장을 새긴 귀족들의 마차 행렬로 끝이 보이지 않았고, 반대편 구석에는 각 가문에서 황실에 바치는 진상품을 실은 수레들이 분주하게 성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그 거대한 소란 속에 섞인 알브릭 공작가의 마차 안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아르덴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자꾸만 무의식적으로 라리엘에게로 흘러갔다.평소 내릴 때가 많았던 그녀의 갈색 고수머리는 우아하게 틀어 올려 섬세한 은핀으로 고정되었고, 그 덕에 고스란히 드러난 새하얀 목덜미가 매끄러운 곡선을 그렸다.가느다란 쇄골 아래로 늘어진 진주 목걸이는 그녀의 호흡에 따라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남청색 드레스 위로 드러난 어깨선과 가녀린 목덜미가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아르덴은 목 안쪽이 바짝 말라붙는 기분이 들었다.이 기묘한 갈증이 무엇인지,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아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시선을 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그의 시선을 느낀 라리엘이 문득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왜 자꾸 그렇게 봐? 어디 이상해? 화장이 번졌나?”그녀가 손등으로 제 뺨을 살짝 짚으며 묻자, 아르덴은 생각이라도 읽힐까 싶어 짤막하게 대답했다.“아니.”라리엘은 그의 반응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잠시 바라보다가, 자신의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손으로 치맛자락을 살짝 정리하며 중얼거렸다.“제일 예쁜 걸로 골라 입은 건데, 별로야?”라리엘이 속상한 듯 눈썹을 까딱이자 아르덴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사실 문제는 ‘별로’인 게 아니라, ‘지나치게 예쁘다&rsqu
아르덴은 라리엘의 손에서 문서를 넘겨받아 등불 아래 바짝 가져다 댔다.만약 레몬즙이나 열에 반응하는 시약을 썼다면, 과거 플로렌스 백작이 발견했을 당시에 이미 갈색으로 변색된 흔적이 남았어야 했다.하지만 그런 자국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이번에는 벽난로의 이글거리는 불빛에 종이를 비춰보며 투과되는 문양이 있는지 확인했지만, 거친 가죽의 결 외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옆에서 트리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원본이 중요하다고 했지, 원본의 내용이 중요하다고 한건 아니잖아요. 그 문서 자체가 의미있는거 아닐까요?그녀는 테이블에 턱을 괸 채 느긋하게 꼬은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아르덴이 그녀를 한번 슬쩍 보고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이 양피지가 무슨 마법의 양피지라도 되지 않는 한, 그럴 일은 없어.”“칫…”트리샤는 결국 입을 삐죽이며 뒤로 물러났다. 라리엘이 다시 문서를 받아들고 찬찬히 들여다보았다.양피지 위에는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한 희미한 얼룩들만이 듬성듬성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아버지가 여기서 뭔가를 발견했다면, 그리고 그걸 아르덴에게 보여주러 오는 길이었다면… 무언가 남아있지 않았을까? 여기에…”그녀는 낮게 중얼거리며 양피지 한복판에 자리한 거뭇한 얼룩 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그녀가 살며시 얼룩을 쓸어내리자, 놀랍게도 검은 자국이 미세하게 번져나갔다. 라리엘의 눈이 커졌다.“아르덴, 이것 좀 봐봐.”그녀는 번져나간 자국을 가리켰다.“이 얼룩말이야. 난 세월에 묻은 때인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냐.”그녀가 다시 한번 양피지를 손끝으로 문지르자, 마치 옅은 기
“난 이런 화려한 곳에서 지켜야 할 식사 예절 같은 건 전혀 모르는데 어쩌죠?”평소와 다름없는 무심한 어조였지만, 그 안에는 아주 미세한 위축감이 섞여 있었다. 라리엘이 편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런 건 신경쓰지 말고 편하게 들어요. 트리샤 씨가 맛있게 먹어주는 게 우리에겐 가장 큰 예의에요.”만약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면 그 말 속에 있는 저의를 파악하느라 머리를 좀 더 굴렸겠지만, 라리엘의 말이었기에 트리샤는 더 생각하지 않았다.그녀는 곧바로 뻣뻣하게 쥐고 있던 포크를 제 손에 익숙한 방식으로 편하게 고쳐 쥐고는 식사를 시작했다.“그럼… 염치 불구하고 잘 먹을게요.”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와 신선한 채소를 입에 넣자, 며칠간 길 위에서 겪었던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아르덴과 라리엘은 그녀가 식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사소한 담소를 나누었다.이윽고 식사가 끝나갈 무렵, 달콤한 디저트 와인이 잔에 채워졌다. 아르덴이 냅킨으로 입가를 가볍게 닦아낸 뒤 차분한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제이드는 어떻게 되었지?”식탁 위의 촛불이 그의 푸른 눈동자에 내려앉아 서늘한 빛을 냈다. 와인을 한 모금 머금어 목을 축인 트리샤가 대답했다.“계획대로 그놈들에게 잘 인도해 줬어요. 며칠에 걸쳐서 은밀하게 거처를 옮기더니, 최종적으로는 아이델의 상인 길드 본부의 지하에 머물게 하더라고요. 보안이 삼엄해서 쥐새끼 한 마리 들락거리기 힘든 곳이죠.”“상인 길드라…”아르덴이 낮게 중얼거리며 와인 잔의 테두리를 가만히 매만졌다. 곁에서 숨을 죽이고 듣고 있던 라리엘이 안쓰러운 기색을 감추지
오라비라는 말에 클로디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그녀는 불만스러운 듯 시선을 내리깔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내 지지 않겠다는 듯 날 선 목소리로 받아쳤다.“나한테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으면서, 그저 시키는 대로 앵무새처럼 물어보라고만 하니까 진전이 없는 거잖아요. 도대체 그 부인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게 뭐죠? 그 보잘것없는 플로렌스 가문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말했잖아. 그건 당신이 알 바 아니라고.”남자의 단호한 거절에 클로디아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이대로 끌려다니다가는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다.오라비도, 가문도, 그리고—자신이 원하는 것조차. 그녀는 조급함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승부수를 던졌다.“상황이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흐르는 건 당신에게도 좋은 일은 아니잖아요? 사실 이건 내가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 알브릭 공작님의 의중이기도 해요.”남자의 눈빛에 미심쩍은 빛이 스쳤다. 클로디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공작님께서는 공작 부인이 혹여 알브릭 가문의 명성에 흠집이라도 내지 않을까 고심이 깊으시더라고요. 만약 그분이 부인의 흠결에 대해 뭔가 실마리라도 잡는다면, 공작 부인의 입지는 점점 좁아질거고… 그렇게 되면 당신들이 하는 일도 수월해지지 않겠어요?”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남자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바깥 멀리서 바람이 스치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부채를 매만지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클로디아의 손끝에 초조함이 서렸다.녹스의 입장에서 알브릭 공작이 거슬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그가 부인에게서 등을 돌려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환영할 일이었다. 남자는 그녀의 제안에 내심 솔깃해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라리엘의 무릎 위에서 책을 거두어 제자리에 꽂았다. 그리고는 부서질 세라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안아 올렸다. 잠결에 으응, 하며 그의 품을 파고드는 라리엘의 온기에 아르덴은 숨을 멈췄다. 그녀에게선 여전히 예전 그 온실의 꽃향기가 났다. 그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며, 차가운 서고를 지나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그녀의 침실에 도착해 침대에 눕히는 순간까지도 아르덴은 팔에 힘을 풀지 못했다. 잠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는 이
숨이 조금 가라앉은 뒤에야 라리엘은 옷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닦아냈다. 눈물에 젖은 편지지를 구겨버리는 대신 조심스럽게 종이를 말렸다. 이 얼룩조차 자신의 일부라고 인정하듯. 지금 여기서 주저앉으면 정말로 아르덴의 말대로 '입 다물고 인형처럼' 살게 될 뿐이었다. '울고 있을 시간조차 아까워. 내가 무너지면 우리 가족은 정말 갈 곳이 없어져.' 라리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붉어진 눈가를 화장으로 차분히 가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거울 속에는 더 이상 처량하게 우는 소녀가 없었다.
연회장의 불빛이 하나둘 꺼진 뒤, 라리엘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화려하지만 갑옷처럼 무거웠던 자수정 드레스를 벗어던졌다. 꽉 조여졌던 코르셋이 풀리자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은 여전했다. 시녀들은 늘 그렇듯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편히 쉬십시오, 부인.”이라는 형식적인 인사만을 남기고 조용히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 침실은 완전히 라리엘 혼자만의 공간이 되었다. 촛불 하나만이 위태롭게 타오르는 방 안에서 라리엘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한동안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손은 무릎
라리엘은 짧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소임이라니? 오늘 내 소임은 너의 살아있는 장식품이 되는 것 아니었어? 충분히 완수했다고 생각하는데.” 날 선 대답에 아르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그는 괜히 먼 정원을 바라보며 짐짓 무심한 투로 덧붙였다. “…안색이 좋지 않군. 연회장의 향기가 너무 독했나?” 그것은 아르덴 나름의 절박한 안부였다. 괜찮으냐고, 아까 그들의 말에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진심이 서툰 질문 속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가시 돋친 말들에 온마음이 할퀴어진 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