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저기 연못에 무지개가 떴어!”
아르덴은 숨을 고르며 달리다가도 그 말을 듣자 속도를 조금 더 냈다. “천천히 가, 라리엘.” 그는 애써 침착한 척 말했지만, 심장은 그녀보다 더 빠르게 뛰고 있었다. “무지개는 도망가지 않아.” “도망가면 어떡해! 비가 그친 지 얼마 안 됐단 말이야!” 라리엘은 결국 연못가에 먼저 도착해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연못 위에는 햇빛이 굴절되어 일곱 빛깔의 띠가 흔들리고 있었다. 물결이 살짝 일 때마다 색은 부서지듯 흩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라리엘은 숨을 죽인 채 그것을 바라보았다. 마치 눈을 깜빡이면 사라질 꿈처럼 느껴졌다. 아르덴은 헐떡이며 도착하자마자 주변을 살폈다. 젖은 흙, 라리엘의 치마 자락, 날카로운 돌멩이.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이 입고 있던 짙은 남색 재킷을 벗어 바닥에 깔았다. “앉아.” 그의 말은 짧았지만 단정했다. “흙 묻으면 백작님께 혼날 거야.” 라리엘은 눈을 크게 뜨더니 금세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는 안 혼내!” 그녀는 일부러 재킷 위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아르덴이 더 걱정이지? 너희 집사 아저씨 무섭잖아.” 라리엘은 장난스럽게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르덴은 못 이기는 척 그녀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두 아이의 어깨가 살짝 맞닿았다. 그 순간, 아르덴은 이유 없이 숨을 멈췄다. 소녀의 체온이 얇은 옷감 너머로 전해졌다. 소년의 몸에서는 갓 베어낸 풀냄새와 공작저 서재에서 오래된 책들이 풍기는 종이 냄새가 섞여 났다. 라리엘은 그 냄새가 좋았다. 안정되는 냄새였다. 언제나 이곳으로 돌아오면 안전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있지, 아르덴.” 라리엘은 연못을 바라본 채 말했다.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너희 집이랑 우리 집은 아주 오래전부터 특별한 사이였대.” 아르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 아버지도 말씀하셨어.” 그는 연못에 비친 무지개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알브릭과 플로렌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래. 서로 등을 맡길 수 있는… 그런.” 라리엘은 그 말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아르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우리도 계속 같이 있는 거야?” 아르덴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의 손끝에는 늘 준비된 작은 물건이 있었다. 정교하게 세공된 은색 설탕 상자. 뚜껑을 열자, 장미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라리엘이 가장 좋아하는 수제 사탕이었다. 아르덴은 사탕 하나를 꺼내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가에 가져갔다. “응.”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입안에 퍼지자 라리엘의 눈이 휘어졌다. 아르덴은 그 표정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마치 그 웃음이 사라질까 봐, 눈으로 붙잡아 두려는 사람처럼. 그는 손을 들어 라리엘의 뺨에 붙은 머리카락 한 올을 살짝 넘겨주었다. 손끝이 떨렸지만, 라리엘은 눈치채지 못했다. “나중에 우리가 어른이 되어도,” 라리엘이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을까?” 그 질문에 아르덴의 눈빛이 깊어졌다. 아이의 장난 같은 말이었지만, 소년은 그 질문을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그는 잠시 연못을 보다가, 다시 라리엘을 바라보았다. “당연하지.” 그의 목소리는 또래 아이답지 않게 단단했다. “내가 약속할게, 라리엘.” 소년은 주먹을 살짝 쥐었다. “네가 어디에 있든, 내가 너를 찾아갈 거야. 그리고 너를 지켜줄게.” 그것은 어린 날의 치기 어린 맹세였지만, 당시의 라리엘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든든한 방패였다. 그녀는 그 말이 너무 당연한 진실처럼 느껴져서, 굳이 다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날 오후, 두 아이는 해가 기울 때까지 정원을 누볐다. 공작저 도서실에서 몰래 훔쳐 온 그림책을 장미나무 그늘 아래에서 함께 읽었고, 부엌에서 갓 구운 쿠키를 슬쩍 가져와 장미 넝쿨 뒤에 숨어 키득거리며 나누어 먹었다. 아르덴은 라리엘이 가시에 찔릴까 봐 언제나 앞장서서 가지를 쳐주었고, 그녀가 지루해하면 아버지에게서 들은 제국의 옛 신화와 영웅담을 들려주었다. 라리엘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늘 같은 생각을 했다. 아르덴은 무엇이든 알고 있고, 무엇이든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저녁노을이 정원을 붉게 물들일 무렵, 플로렌스 백작가의 마차가 대문 앞에 섰다. 라리엘은 아쉬운 얼굴로 아르덴의 손을 꼭 잡았다. “내일 또 올게, 아르덴!” “응.” 아르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릴게.” 마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는 대문 앞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그의 손에는 라리엘이 급하게 엮어 준 소박한 들꽃 화관이 들려 있었다. 그날, 소년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소녀는 그가 지켜야 할 단 하나의 세계였다. 그날 밤, 아르덴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플로렌스의 장미는 언제나 빛난다. 내가 그 빛을 잃지 않게 하겠다.’ 달그락. 멀리서 들려온 작은 소음이 안개처럼 자욱했던 기억을 단숨에 찢어놓았다. 라리엘은 짧은 신음과 함께 눈을 깜빡였다. 환상처럼 일렁이던 황금빛 햇살은 온데간데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찬란한 정원이 아니라, 지나치게 화려해서 오히려 위압감을 주는 공작저의 식탁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맞은편, 방금 전까지 아르덴이 앉아 있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주인을 잃은 찻잔에서 희미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읽다 만 신문만이 구겨진 채 남겨져 있었다. 라리엘은 멍하니 그 빈자리를 응시했다. 회상 속에서 느꼈던 달콤한 장미 사탕의 맛은 어느덧 사라지고, 혀끝에는 식어버린 커피의 지독한 쓴맛만이 화인처럼 남았다. 과거의 다정했던 소년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허상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가문의 파멸을 설계한 뒤, 마침내 도망칠 곳 없는 자신을 이 황금빛 감옥에 가둔 냉혹한 포식자. 그가 남기고 간 서늘한 잔향만이 이 넓은 식당을 지배하고 있었다. 라리엘은 식탁 아래서 주먹을 꽉 쥐었다. 하얗게 질린 손등 위로 미세한 떨림이 일었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떨림을 억눌렀다. ‘내가 너를 찾아갈 거야. 너를 지켜줄게.’ 그 약속은 지켜졌다. 다만, 그 방식이 잔인했을 뿐이다. 그는 정말로 가문이 몰락한 그녀를 찾아왔고, 공작부인이라는 족쇄를 채워 그녀를 자신의 시야 아래 두었다. 아르덴이 떠나며 뱉었던 "그림자가 되라"는 말은, 결국 그녀의 모든 빛을 앗아가겠다는 선고와 다름없었다. ‘다시는… 그때처럼 웃지 않아.’ 라리엘은 주인이 떠난 빈 의자를 노려보며 속으로 서늘한 맹세를 새겼다. 그가 어떤 가면을 쓰든, 이 저택이 얼마나 거대한 무덤이든 상관없었다. 이 저택의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진실의 조각을 찾아내어 반드시 그의 심장을 꿰뚫으리라. 라리엘은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쓴맛이 마치 피의 맛처럼 비릿하게 느껴졌다. 아르덴이 떠난 식당에는 여전히 서늘한 안개와 같은 정적만이 남아 있었다. 알브릭 공작저에서의 첫날 아침은, 그렇게 지독한 증오와 뒤틀린 기억의 향기를 남기며 시작되고 있었다.루시의 천진난만한 대답에 트리샤는 이제야 상황 파악이 끝났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보나마나 시골에서 올라온 티 팍팍 내셨겠구만. 그 아주머니가 장사 수완 발휘해서 아가씨를 살살 놀린 거예요. 그 광장은 일 년 내내 노점상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서 대리석 바닥 구경도 못 할뿐더러, 비둘기 똥이랑 온갖 고약한 오물 냄새가 진동하는 곳이라구요.”청천벽력 같은 폭로에 루시의 얼굴이 순식간에 억울함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마지막 희망을 붙잡듯 목소리를 높였다.“거짓말! 형부도 분명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장구쳐 주셨는데? 형부가 거짓말을 할 리 없잖아요!”“공작님도 한통속인건 안봐도 뻔하네요. 수도 사람들이 그렇게 무섭다니까.”트리샤는 새침하게 말하고는 잘 익은 딸기 하나를 입안에 쏙 집어넣고는 우물거렸다.루시는 믿었던 세계가 무너지는 듯한 울상을 지으며, 구원을 요청하듯 라리엘을 돌아보았다.“언니… 정말이야? 트리샤 언니 말이 다 사실이야?”“하하, 글쎄. 나도 그 광장에는 가본 적이 없어서 확답은 못 하겠네.”라리엘은 동생의 순진함이 귀여우면서도 차마 트리샤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쐐기를 박을 수는 없어 애매하게 웃어넘겼다.잔뜩 일그러진 루시의 미간과 떨리는 눈망울에 자작 부인과 엘리시아, 심지어 입안 가득 딸기를 문 트리샤까지 약속이라도 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평화로운 웃음소리가 봄바람을 타고 응접실 창밖으로 멀리 퍼져 나갔다.해가 뉘엿뉘엿 저물며 붉은 노을이 플로렌스 영지의 부드러운 능선을 가득 채웠다.온 가족이 모여 정성스럽게 차려진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저택은 각자의 휴식 시간으로 접어들었다.자작 부인은 거실 벽
3개월 후, 플로렌스 영지는 완연한 봄의 숨결을 머금고 있었다.이제는 ‘플로렌스 자작령’으로 규모가 줄어들었지만, 저택을 감싸는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따스하고 활기찼다.플로렌스 저택의 집무실 안, 창틈으로 스며드는 포근한 봄 햇살이 책상 위를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과거 아버지가 앉아 무거운 책임을 짊어졌던 책상 앞에 앉은 라리엘은, 이제 제법 익숙한 손놀림으로 두툼한 가죽 장부를 펼쳐 들고 있었다.그녀는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깃펜으로 꼼꼼히 숫자를 기입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장부를 들여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그 곁에는 초점이 흐릿한 눈을 가만히 감은 제이드가 지팡이를 짚은 채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부인, 서쪽 계곡 쪽 농지의 이번 달 세금 수입 현황을 다시 한번 불러주시겠습니까?”라리엘은 장부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차분하게 읽어 내려갔다.“서쪽 농지는 지난달보다 조금 늘었어요, 제이드. 하지만 동쪽 평야 지대는 여전히 회복이 더딘 모양이네요.”제이드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마치 영지의 지도를 그리는 듯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서쪽 농지는 지력이 좋아 봄이 되면 소출이 늘어날 테니 세금을 예년 수준으로 조금 더 거두셔도 무방할 겁니다. 하지만 동쪽 농지는 작년 수해의 여파가 남아있으니, 이번 봄에는 세금을 조금 감면하여 농민들이 씨앗을 살 여유를 주시는 게 좋겠군요.”봄을 맞아 영지 살림을 살펴보러 플로렌스를 방문한 라리엘은 며칠 째 이렇게 제이드와 함께 장부를 들고 씨름하는 중이었다.“아, 그리고 북쪽 과수원 농가에는 ‘객토(客土)’ 작업을 꼭 확인하라고 전하십시오. 봄에 다른 곳의 좋은 흙을 가져다 섞어주지
“…그렇구나.”짧게 내뱉은 말에는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한때 자신을 매섭게 몰아붙이던 이에 대한 연민인지, 이제 더는 방해받지 않을 거라는 안도인지, 아니면 그 둘이 기묘하게 뒤섞인 씁쓸함인지 그녀 스스로도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없었다.잠시 후,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는 것을 막으려는 듯 라리엘이 다시 가벼운 톤으로 물었다.“레이먼 백작님은 병세가 좀 나아지셨을까?”“응. 다음달부터는 의회에도 출석하실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하셨다고 들었어.”“정말 다행이네.”라리엘은 마음의 짐을 한결 덜어낸 듯 아르덴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위로 하얀 달빛이 은은하게 내려앉았다.“있지, 클로디아 양이 지난 번에 날 찾아왔을때 말이야. 네가 의장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귀족들이 더러 있다는 이야기를 내게 해줬어.”처음 듣는 뜻밖의 사실에 아르덴의 턱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라리엘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 여자가 그런 얘길 했어? 그걸 왜 이제야 말해?”만약 그녀가 라리엘을 그런 식으로 압박했다는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조용히 물러나게 수표 따위를 쥐여주는 선처 따위는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가문을 동원해 훨씬 더 혹독하고 처절한 대가를 치르게 했을 것이라는 후회가 가슴 속을 사납게 스쳤다.“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아르덴. 조금만 더 내 말을 들어봐.”라리엘이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사실 난 그때까지… 너나 알브릭 가문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내가 먼저 너를 떠나야 하는 게 아닐까 수없이 고민했어. 그래야만 한다고도
트리샤의 입에서 풋, 하는 짧은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녀는 여유로운 동작으로 품 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이건 그동안 수고한 값이다. 이제 더는 마주칠 일 없었으면 좋겠군.] …간단히 말하자면,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얘기지.”알브릭 가문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봉투가 클로디아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집어 든 클로디아가 인장을 확인하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거짓말하지 마! 당신 말을 어떻게 믿지? 공작님을 직접 뵙고 확인하겠어!”“흠, 글쎄… 정 못 믿겠다면 당신이 직접 공작님을 찾아가봐. 알브릭 저택 앞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는 모욕을 당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것 같네.”마침내 클로디아의 동공이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그녀가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있었다.“전언은 여기까지야. 그럼 난 이만.”트리샤는 넋이 나간 클로디아의 창백한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린 뒤, 마차 문을 열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잠시 후, 숨쉬는 법 조차 잊은 듯이 굳어 있던 클로디아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안에는 오라비의 지긋지긋한 도박 빚을 단숨에 청산하고도 남을 만한 거액의 수표 한 장이 들어있었다.보상이 아니라 단절의 선언이었다.수치심과 패배감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며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어둠 속 마차 안에는 무너져 내리는 한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이 한참동안 흘러나왔다.*재판을 고작 몇 시간 앞둔 깊은 밤, 침대 위에서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던 라리엘은 결국 감고 있던 눈을 가만히 떴다.어둠 속에서도 천장의 화려한 문양이 잔상처럼 어른거렸다. 아무리 눈을 감고
마차 바퀴가 불규칙한 돌길을 지날 때마다 덜컹거리는 진동이 차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이미 해질녘이 된 창밖에는 유흥가의 숨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라리엘은 그 생경한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옆자리로 고개를 돌렸다.그곳엔 잔뜩 날이 선 표정의 트리샤가 앉아 있었다.“무슨 협상이 그래요?”트리샤가 참아왔던 말을 가시 돋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예상치 못한 매서운 반응에 라리엘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트리샤를 가만히 쳐다보았다.“응? 내가 혹시 놓친 조건이라도 있었나요? 문서에 빠진 조항이라도…?”“조건이고 조항이고 간에, 얻어낸 게 하나도 없잖아요! 이왕 녹스의 수장을 만났으면, 부인 아버지의 목숨값으로 돈이라도 잔뜩 요구했어야죠!”트리샤는 한 손을 펴서 반대편 손바닥을 탕탕 치며 분을 토해냈다. 라리엘은 잠시 멍하니 그녀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했다.“얻어낸 게 없다니요. 약탈금에 제이드, 그리고 트리샤 씨까지. 무려 세 가지나 얻어냈는걸요?”라리엘은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 보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트리샤는 그 맑은 눈동자를 쳐다보다가 도리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한층 풀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러니까 그게 말이 되냐구요. 보상은 커녕, 짐짝을 둘이나 떠안은 셈이잖아요.”“무슨 소리에요? 난 충분히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짐짝이라니, 트리샤 씨는 내 친구 아니었어요?”친구라니.트리샤는 그 말에 또 한번 토를 달려고 숨을 한껏 들이켰다가, 라리엘의 확신에 찬 눈빛을 보고는 그대로 말을 삼켜버렸다.라리엘은 그런 트리샤를 짐짓 모른체 하고는 생글생글 웃으며
미첼로가 굳이 제이드의 이름을 들먹인 것은 라리엘을 떠보려는 의도였다.아버지의 죽음에 일조한 가문의 배신자를 구하려는 그녀의 본심이 순수하게 궁금했던 것이다.잠시 침묵을 지키던 미첼로는 조금 전까지의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고 의자에 등을 붙여 바르게 앉았다. 그는 패배를 인정하는 도박사처럼 가볍게 양손을 들어 보였다.“좋습니다. 더는 제가 고집을 부릴 방도가 없군요. 부인의 요구사항을 명확하게 정리해 보시지요.”그토록 원하던 미첼로의 항복 선언이었으나, 막상 그의 입에서 수락의 말이 떨어지자 라리엘은 찰나의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정말 이대로 끝인 걸까?'그녀는 눈앞에 앉은 미첼로의 미세한 근육 변화와 눈짓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살피며 입을 열었다.“…아까 전에도 분명히 말씀드렸듯이, 레오폴트 약탈금의 반환은 녹스에서 전적으로 책임집니다. 그리고, 미첼로 씨가 강조하셨던 그 ‘기브 앤 테이크’를 적용해 드리죠. 우리가 법정에서 녹스의 존재와 이 계약서의 실체를 발설하지 않는 대신, 제이드 크로이츠를 즉각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세요. 당신들이 우리 아버지에게 저지른 그 끔찍한 죄악에 대한 대가는, 그의 딸인 트리샤 크로이츠의 완전한 자유로 받겠습니다.”미첼로는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이내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하시죠. 거래 성립입니다.”미첼로는 녹스의 수장답게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서랍에서 고급 양피지를 꺼냈다.얼마간 깃펜이 종이 위를 달리는 사각거리는 방 안에 울려퍼졌다. 새로운 계약서 작성이 끝난 후, 그는 마지막으로 라리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수완이 보통이 아니시군요, 부인.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도 꼭 ‘거래&r
의회에서 돌아온 아르덴의 마차가 저택 정문에 들어선 것은 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였다. 아르덴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망토를 하인에게 넘겼다. 차가운 밤공기를 뚫고 저택으로 들어온 그의 모습에는 금실이 수놓인 어깨 장식과 단정한 칼집, 그리고 하루 종일 그를 조여 왔을 격식과 피로가 한데 엉겨 있었다. 예복도 채 벗지 않은 채 그는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라리엘은 이미 식탁 앞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기다렸다기보다는 도살장에 끌려온 짐승처럼 그가 올 시간만을 헤아리며 경직되어 있었다. 촛불은
아침 식사가 끝난 후, 식당에 남겨진 것은 차갑게 식은 커피 향기와 라리엘의 떨리는 숨소리뿐이었다. 그녀는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정돈했다. 이제부터는 슬픔이나 분노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었다. 알브릭 공작저라는 거대한 괴물의 뱃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우선 이 내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해야 했다. 식당 문을 열고 나가자, 어제 연회장에서 보았던 중년의 남자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빳빳하게 다려진 연미복, 차가운 은테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예리한 눈매. 알브릭 가문의 가신이자 대대로 공
라리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 역시 그가 설계한 잔인한 연극의 일부일지도 몰랐다. 경계를 늦추게 만든 뒤, 가장 아픈 곳을 찌르기 위한 전조. 그녀는 가운을 벗어 던지고 싶었지만, 몸을 잠식한 한기가 너무도 지독해 결국 그 온기에 기댄 채 몸을 웅크렸다. 잠시 후, 욕실 문이 열리고 아르덴이 나왔다. 그는 상체를 드러낸 채 머리칼을 거칠게 털어내며 방을 가로질렀다. 거울을 통해 그의 모습이 라리엘의 시야에 들어왔다. 군더더기 없이 탄탄한 근육으로 다져진 상체, 어깨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유려한 선 위로 맺힌 물방울이
결혼식은 기괴할 만큼 조용하게 끝났다. 사람들의 박수는 의무적이었고, 던져진 꽃가루는 장례식의 헌화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연회장으로 옮겨온 뒤에도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화려한 음악과 산해진미가 차려졌지만, 공기는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아르덴은 라리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는 연회장의 귀족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훑었다. 그러다 돌연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표정 관리 좀 하지.”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를 긁었다. 그의 숨결이 닿는 곳마다 소름이 돋았다. “누가 보면 장례식인 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