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저기 연못에 무지개가 떴어!”
아르덴은 숨을 고르며 달리다가도 그 말을 듣자 속도를 조금 더 냈다. “천천히 가, 라리엘.” 그는 애써 침착한 척 말했지만, 심장은 그녀보다 더 빠르게 뛰고 있었다. “무지개는 도망가지 않아.” “도망가면 어떡해! 비가 그친 지 얼마 안 됐단 말이야!” 라리엘은 결국 연못가에 먼저 도착해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연못 위에는 햇빛이 굴절되어 일곱 빛깔의 띠가 흔들리고 있었다. 물결이 살짝 일 때마다 색은 부서지듯 흩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라리엘은 숨을 죽인 채 그것을 바라보았다. 마치 눈을 깜빡이면 사라질 꿈처럼 느껴졌다. 아르덴은 헐떡이며 도착하자마자 주변을 살폈다. 젖은 흙, 라리엘의 치마 자락, 날카로운 돌멩이.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이 입고 있던 짙은 남색 재킷을 벗어 바닥에 깔았다. “앉아.” 그의 말은 짧았지만 단정했다. “흙 묻으면 백작님께 혼날 거야.” 라리엘은 눈을 크게 뜨더니 금세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는 안 혼내!” 그녀는 일부러 재킷 위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아르덴이 더 걱정이지? 너희 집사 아저씨 무섭잖아.” 라리엘은 장난스럽게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르덴은 못 이기는 척 그녀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두 아이의 어깨가 살짝 맞닿았다. 그 순간, 아르덴은 이유 없이 숨을 멈췄다. 소녀의 체온이 얇은 옷감 너머로 전해졌다. 소년의 몸에서는 갓 베어낸 풀냄새와 공작저 서재에서 오래된 책들이 풍기는 종이 냄새가 섞여 났다. 라리엘은 그 냄새가 좋았다. 안정되는 냄새였다. 언제나 이곳으로 돌아오면 안전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있지, 아르덴.” 라리엘은 연못을 바라본 채 말했다.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너희 집이랑 우리 집은 아주 오래전부터 특별한 사이였대.” 아르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 아버지도 말씀하셨어.” 그는 연못에 비친 무지개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알브릭과 플로렌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래. 서로 등을 맡길 수 있는… 그런.” 라리엘은 그 말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아르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우리도 계속 같이 있는 거야?” 아르덴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의 손끝에는 늘 준비된 작은 물건이 있었다. 정교하게 세공된 은색 설탕 상자. 뚜껑을 열자, 장미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라리엘이 가장 좋아하는 수제 사탕이었다. 아르덴은 사탕 하나를 꺼내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가에 가져갔다. “응.”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입안에 퍼지자 라리엘의 눈이 휘어졌다. 아르덴은 그 표정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마치 그 웃음이 사라질까 봐, 눈으로 붙잡아 두려는 사람처럼. 그는 손을 들어 라리엘의 뺨에 붙은 머리카락 한 올을 살짝 넘겨주었다. 손끝이 떨렸지만, 라리엘은 눈치채지 못했다. “나중에 우리가 어른이 되어도,” 라리엘이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을까?” 그 질문에 아르덴의 눈빛이 깊어졌다. 아이의 장난 같은 말이었지만, 소년은 그 질문을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그는 잠시 연못을 보다가, 다시 라리엘을 바라보았다. “당연하지.” 그의 목소리는 또래 아이답지 않게 단단했다. “내가 약속할게, 라리엘.” 소년은 주먹을 살짝 쥐었다. “네가 어디에 있든, 내가 너를 찾아갈 거야. 그리고 너를 지켜줄게.” 그것은 어린 날의 치기 어린 맹세였지만, 당시의 라리엘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든든한 방패였다. 그녀는 그 말이 너무 당연한 진실처럼 느껴져서, 굳이 다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날 오후, 두 아이는 해가 기울 때까지 정원을 누볐다. 공작저 도서실에서 몰래 훔쳐 온 그림책을 장미나무 그늘 아래에서 함께 읽었고, 부엌에서 갓 구운 쿠키를 슬쩍 가져와 장미 넝쿨 뒤에 숨어 키득거리며 나누어 먹었다. 아르덴은 라리엘이 가시에 찔릴까 봐 언제나 앞장서서 가지를 쳐주었고, 그녀가 지루해하면 아버지에게서 들은 제국의 옛 신화와 영웅담을 들려주었다. 라리엘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늘 같은 생각을 했다. 아르덴은 무엇이든 알고 있고, 무엇이든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저녁노을이 정원을 붉게 물들일 무렵, 플로렌스 백작가의 마차가 대문 앞에 섰다. 라리엘은 아쉬운 얼굴로 아르덴의 손을 꼭 잡았다. “내일 또 올게, 아르덴!” “응.” 아르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릴게.” 마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는 대문 앞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그의 손에는 라리엘이 급하게 엮어 준 소박한 들꽃 화관이 들려 있었다. 그날, 소년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소녀는 그가 지켜야 할 단 하나의 세계였다. 그날 밤, 아르덴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플로렌스의 장미는 언제나 빛난다. 내가 그 빛을 잃지 않게 하겠다.’ 달그락. 멀리서 들려온 작은 소음이 안개처럼 자욱했던 기억을 단숨에 찢어놓았다. 라리엘은 짧은 신음과 함께 눈을 깜빡였다. 환상처럼 일렁이던 황금빛 햇살은 온데간데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찬란한 정원이 아니라, 지나치게 화려해서 오히려 위압감을 주는 공작저의 식탁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맞은편, 방금 전까지 아르덴이 앉아 있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주인을 잃은 찻잔에서 희미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읽다 만 신문만이 구겨진 채 남겨져 있었다. 라리엘은 멍하니 그 빈자리를 응시했다. 회상 속에서 느꼈던 달콤한 장미 사탕의 맛은 어느덧 사라지고, 혀끝에는 식어버린 커피의 지독한 쓴맛만이 화인처럼 남았다. 과거의 다정했던 소년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허상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가문의 파멸을 설계한 뒤, 마침내 도망칠 곳 없는 자신을 이 황금빛 감옥에 가둔 냉혹한 포식자. 그가 남기고 간 서늘한 잔향만이 이 넓은 식당을 지배하고 있었다. 라리엘은 식탁 아래서 주먹을 꽉 쥐었다. 하얗게 질린 손등 위로 미세한 떨림이 일었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떨림을 억눌렀다. ‘내가 너를 찾아갈 거야. 너를 지켜줄게.’ 그 약속은 지켜졌다. 다만, 그 방식이 잔인했을 뿐이다. 그는 정말로 가문이 몰락한 그녀를 찾아왔고, 공작부인이라는 족쇄를 채워 그녀를 자신의 시야 아래 두었다. 아르덴이 떠나며 뱉었던 "그림자가 되라"는 말은, 결국 그녀의 모든 빛을 앗아가겠다는 선고와 다름없었다. ‘다시는… 그때처럼 웃지 않아.’ 라리엘은 주인이 떠난 빈 의자를 노려보며 속으로 서늘한 맹세를 새겼다. 그가 어떤 가면을 쓰든, 이 저택이 얼마나 거대한 무덤이든 상관없었다. 이 저택의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진실의 조각을 찾아내어 반드시 그의 심장을 꿰뚫으리라. 라리엘은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쓴맛이 마치 피의 맛처럼 비릿하게 느껴졌다. 아르덴이 떠난 식당에는 여전히 서늘한 안개와 같은 정적만이 남아 있었다. 알브릭 공작저에서의 첫날 아침은, 그렇게 지독한 증오와 뒤틀린 기억의 향기를 남기며 시작되고 있었다.라리엘은 떨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차분하게 입을 뗐다.“이 아이는 내가 어딜 가든 그림자처럼 함께하는 전속 시종이에요. 설마 녹스의 수장께서는 이 방 안에 연약한 여성 한 명이 늘어나는 것조차 두려워하실 만큼 겁이 많으신 건 아니겠지요?”라리엘의 도발적인 어조에 문지기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트리샤는 그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잠자코 서 있었다.“잠시만 기다리십시오.”문지기 하나가 허락을 구하러 들어갔다. 잠시 후 문을 열고 나온 그는 퉁명스럽게 덧붙였다.“시종은 철저한 몸수색을 받은 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트리샤는 아무런 저항 없이 양팔을 벌려 몸수색을 받아들였다.문지기의 무례한 손길이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훑었으나, 트리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무미건조한 표정을 유지했다.수색을 마친 후, 라리엘과 트리샤는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등 뒤에서 문이 쾅 닫히며 문지기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하여간, 귀부인들이란. 시녀 손을 안 빌리면 한 걸음도 못 움직인다니까.”실내는 복도의 저속한 소음이 완벽히 차단된 채, 기묘할 정도로 정적이고 고풍스러웠다.벨벳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희미한 빛이 방 안의 호화로운 가구들을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다.녹스의 수장은 창가에 서서 건물 아래 대기 중인 알브릭 가문의 기사들을 무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라리엘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라리엘은 순간 숨을 들이켰다.뒷골목의 제왕이라기에 흉터 가득한 거구의 사내를 예상했건만, 눈앞의 사내는 의외로 왜소하고 창백한 인상이었다.학자처럼 정갈한 차림새였지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만큼은 독사의 그것처럼 서늘했다. 수장은 천천히 다가와 예의를
수도 중앙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의 하류, 축축한 물비린내가 진동하는 다리 밑은 대낮에도 볕이 들지 않는 음습한 요새와 같았다.머리 위로는 마차가 지나가는 둔탁한 진동이 울리고, 발밑으로는 검은 강물이 철벅거리며 기괴한 소리를 내고 있는 가운데 아르덴은 마치 조각상처럼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서 있었다.잠시 후, 어둠 속에서 마른 체구의 남자가 비죽이 얼굴을 내밀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이거 놀랍군요. 고귀하신 알브릭 공작 각하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 직접 발걸음을 하시다니. 부인의 치부가 얼마나 추잡한지 궁금해서라기엔, 행보가 꽤나 적극적이십니다?”“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네놈이 지껄이는 그런 하찮은 가십 때문이 아니라는 걸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군.”아르덴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상대의 비열한 안색을 훑으며 대답했다.사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동행하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클로디아를 떼어놓느라 적잖은 인내심을 소모한 터였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 그녀 같은 불순물을 끼워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자신의 도발에도 공작이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자, 연락책은 짐짓 놀란 척 눈썹을 치켜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호오, 그럼 무슨 이유로 저를 만나겠다고 했을까요?”비아냥거리는 말투와 달리, 연락책의 눈동자에는 상대를 탐색하는 날카로운 살기가 스쳤다.“시간이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네놈들 수장과 직접 협상을 요청한다. 내용은 과거 플로렌스 가문과 녹스가 맺었던 ‘비밀 계약’에 관해서. 이쯤 말하면 알아들었겠지?”수장과의 직접 협상이라니. 상상을 초월하는 단도직입적인 말에 연락책의 입이 떡 벌어졌다.여유롭던 태도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그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
클로디아는 다시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려 입가에 가져갔다.라리엘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만족스럽게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물론 공작님의 의장직과 부인의 친정 문제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정치판이라는 게 그런걸 세세하게 고려하는 곳이 아니잖아요? 뭐, 부인께서는 고상한 꽃처럼 온실 속에만 계시니 이런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시겠지만요.”“클로디아 양. 도대체 무슨…”흔들리는 라리엘의 눈동자를 보며 클로디아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그녀는 이제 자신의 본심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상체를 라리엘 쪽으로 바짝 기울인 클로디아가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한 가지만 더 알려드리자면, 이 모든 위태로운 상황을 공작님께서도 이미 낱낱이 알고 계시다는 거예요. 가엾은 부인을 차마 쉽게 내치지 못하는 공작님의 마음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부인으로서, 남편의 앞길을 막고 있다면 조금은 책임을 통감하고 스스로 결단을 내릴 필요도 있는 것 아닐까요?”라리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클로디아를 쳐다보기만 했다.신년회에서 아르덴을 향해 미소짓던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겹쳐졌다. 그때, 클로디아가 라리엘의 손을 덥석 맞잡았다.“그러니까 부인, 제발 부탁이에요. 자꾸 공작님의 그늘 뒤에 비겁하게 숨기만 하지 말고 당당히 밖으로 나와요. 플로렌스 가문이야 그렇다 쳐도, 아무런 잘못 없는 알브릭 가문까지 물귀신처럼 바닥으로 끌어 내리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얼마나 꼴사납고 이기적인 짓인지 잘 알고 계시죠?”라리엘은 클로디아에게 붙잡힌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역겨울 정도로 부드러운 감촉이었다.그녀는 시선을 들어 클로디아의 탐욕스러운 눈동
“다만요?”베르너가 무거운 음성으로 덧붙였다.“재판을 함께 받으시게 되면 사교계의 평판이나 의회에서의 영향력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나 공작님처럼 높은 자리에 계신 분에게는 더욱더요.”라리엘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바닥에서 차가운 한기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그녀는 불안을 들키지 않으려 들이킨 숨을 아주 천천히 내뱉으며 물었다.“역시 그렇군요. 영향력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일까요?”“최악의 경우에는 의장직에서 물러나야 할지도 모릅니다. 황실에서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작님을 압박하려 들겠지요.”베르너의 목소리는 형집행관의 선고처럼 무겁게 라리엘의 어깨를 눌렀다. 라리엘은 시선을 아래로 툭 떨어뜨린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그녀의 창백해진 안색을 보자 베르너는 그제야 괜한 말을 했다 싶어 급히 말을 보탰다.“하지만 공작님께서는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으실 겁니다. 부인께서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어떻게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공작님께 그 어떤 피해도 가지 않게 할 방법은 없는 건가요?”베르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눈빛에는 안타까움과 원망이 미묘하게 섞여 있었다.“현재로서는… 두 분이 갈라서지 않는 이상, 방법은 없을 겁니다. 알브릭의 이름을 지키려면 플로렌스를 잘라내야 하니까요.”갈라선다. 그 말이 라리엘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무릎 위에 놓인 그녀의 손끝이 바르르 떨려왔다.아르덴을 위해서라면 그렇게라도 해야하는 걸까. 하지만 그를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베르너가 자백서 초안을 완성할 때까지도 라리엘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섬세한 문양이 새겨진 알브릭 공작저의 정문 앞. 클로디아는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서서 거대한 석조 저택을 올려
제국 수도의 화려한 번화가 아래, 오물이 흐르는 하수도관 옆에는 버려진 지하 창고처럼 보이는 거대한 공간이 숨겨져 있었다.습하고 퀴퀴한 공기가 감도는 이곳은 조직원들 사이에서 ‘피난처’라고 불리는, ‘녹스’의 심장부였다.미로 같은 복도 끝, 두꺼운 철문 너머 중앙 방에서 낮고 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쥐새끼들같이 교묘하게도 움직이는군. 그래, 탈레스 그 녀석이 전해달라는 이야기의 요지가 정확히 뭐야?”방 안은 촛불 몇 개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수장의 책상 너머에서 연락책이 마른침을 삼키며 보고를 이어갔다.“요약하자면, 알브릭 공작의 성미상 플로렌스 백작의 죽음을 캐는 일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이미 수사망이 좁혀오고 있으니 본부 차원에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해달라는 간청이었습니다.”“흠…”수장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며 생각에 잠겼다.수천 명의 암살자와 정보원을 거느린 거대 조직의 수장이라기엔, 그의 외형은 의외로 평범하다 못해 왜소하기까지 했다.창백한 안색과 단정한 옷차림은 오히려 하급 관청에서 서류를 만지는 문인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플로렌스 수도원까지 직접 발걸음을 했다면 이미 꽤 많은 것을 알아낸 상태겠군. 탈레스 녀석은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대체 뭘 한 거지?”그의 말투는 지독히 사무적이었다. 분노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 무미건조함에도 앞에 선 연락책은 마치 자신이 질책을 받는 듯 어깨를 움찔했다.“마, 말씀하신 대로 워낙 쥐새끼처럼 움직이는지라… 공작이 수도원에 나타나기 전까지 탈레스는 그가 이미 포기한 줄로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l
평소의 우아함은 간데없이 삐걱거리는 그녀의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아르덴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그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며 라리엘의 가느다란 허리에 손을 감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뭘 그렇게 뻣뻣하게 굳어 있어? 긴장한 거야?”“기, 긴장이라니? 하, 하나도 긴장 안했는데?”라리엘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지만, 그녀의 손은 이미 아르덴의 옷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우, 우리는 부부잖아. 부부라면 당연히 한 침대에서… 그러니까…그게 이상한 일도 아니고…”말을 이어갈수록 얼굴이 점점 붉어진 라리엘은 결국 말을 맺지 못한 채 고개를 숙여버렸다.낮게 웃음을 터뜨린 아르덴은 반대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다시 한번 그녀에게 입을 맞춘 뒤 나직하게 속삭였다.“사실 난 조금 긴장돼.”“... 정말?”그의 뜻밖의 고백에, 굳어 있던 라리엘의 어깨가 조금 풀어졌다.그러고 보니 그의 푸른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르덴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는 곧 라리엘의 눈가, 콧망울, 부드러운 볼을 따라 자잘하게 입을 맞추며 그녀를 천천히 침대 위로 눕혔다.“치, 거짓말쟁이. 전혀 긴장한 얼굴이 아니잖아. 또 나 놀리는 거지?’“그런 속마음을 얼굴에 다 티 낼 수는 없잖아. 공작의 체면이 있는데.”아르덴은 흐트러진 라리엘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다정하게 눈을 맞췄다.신년회에서의 화려한 모습도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이렇게 화장기 없는 얼굴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라리엘은 비교할 수 없을 만
교묘한 비아냥이었다. 아르덴의 ‘자비’와 라리엘의 ‘처지’를 동시에 건드리는 말에 라리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때, 아르덴이 그녀의 허리를 자기 품으로 더 깊숙이 끌어당기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자비라니요, 백작. 나는 그저 내게 어울리는 가장 고귀한 꽃을 내 화원에 옮겨두었을 뿐입니다. 라리엘은 이제 플로렌스가 아니라 알브릭의 이름으로 빛날 테니까요.” 아르덴은 말을 마친 뒤, 보란 듯이 그녀의 목덜미 근처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 넘겼다. 손끝이 민감한 피부를 스치자 라리엘은 소름이 돋
라리엘은 서신을 쥔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참아냈다. 아버지는 죽기 직전까지도 아르덴을 ‘아들과 다름없는 친구’로 믿고 있었다. 자신의 가문이 가진 위험한 비밀까지 공유할 정도로 그를 신뢰했다. 그런데 아르덴은? 그는 이 서신을 받은 직후에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가문을 파멸시킨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와 함께 아르덴이 집어삼켜진 것일까? 라리엘은 서신을 소중하게 접어 품 안 깊숙이 숨겼다. 지금은 이것을 들고 아르덴을 추궁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창고를
그것으로 족했다. 어차피 자신이 죽인것과 다름 없었다. 자신이 더 깊이 파헤치지만 않았더라도, 백작에게 그런 것을 요청하지만 않았더라도 백작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녀가 진실을 알게 되면 분명 더 깊이 파헤치려 들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그녀 또한 표적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백작을 죽인 세력의 실체가 아직 안개속에 있다는 사실이 그의 피를 말리게 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오해한 채 증오하는 편이 나았다. 친구이자 스승의 딸에게 씌워진 비극적인 연극. 그 모든 비난과 저주는 자신 하나로 충분했다.
“하아…… 하…….” 거칠게 몰아쉬는 숨이 방금 전 아르덴이 서 있던 공간의 잔열을 집어삼켰다. 심장이 늑골을 부수고 나올 것처럼 뛰었다.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뺨을 타고 흐르던 그의 서늘한 숨결, 얇은 잠옷 너머로 전해졌던 손바닥의 지독한 열기, 그리고 찰나의 순간 자신을 꿰뚫었던 눈빛. 그 모든 감각이 사슬처럼 그녀의 전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라리엘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그의 숨결이 닿았던 자리가 여전히 화끈거렸다. 마치 낙인이 찍힌 것 같았다. ‘자극하지 말라고?’ 그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