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결혼식은 기괴할 만큼 조용하게 끝났다. 사람들의 박수는 의무적이었고, 던져진 꽃가루는 장례식의 헌화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연회장으로 옮겨온 뒤에도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화려한 음악과 산해진미가 차려졌지만, 공기는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아르덴은 라리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는 연회장의 귀족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훑었다. 그러다 돌연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표정 관리 좀 하지.”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를 긁었다. 그의 숨결이 닿는 곳마다 소름이 돋았다. “누가 보면 장례식인 줄 알겠어. 남들이 우리 사이를 의심하길 바라는 건가?” 라리엘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겐 장례식이나 다름없으니까. 네가 죽인 우리 아버지, 그리고 오늘로 완전히 죽어버린 나의 자유를 애도하는 자리지. 이보다 더 적절한 표정이 어디 있겠어?” “사고였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지.” “네 말을 믿느니 차라리 길가에 짖는 개를 믿겠어.” 라리엘이 낮게 쏘아붙이자, 아르덴의 푸른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는 마치 연인에게 귓속말을 하듯 다정한 자세를 취하며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착각하지 마, 라리엘. 제안을 한 건 나지만, 그걸 선택한 건 너야. 네 가문의 추락을 막기 위해 네 자신을 팔아넘긴 건 네 의지였다고.” “네가 우리 가문의 모든 보급로를 끊고 고립시키지 않았다면, 내가 그런 선택을 했을 것 같아?” 아르덴은 비릿하게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주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환호했지만, 라리엘은 구역질이 나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협박이 아니라 거래지. 나는 그저 갈 곳 없는 어린양에게 울타리를 제공한 것뿐이야. 물론, 그 대가가 평생의 자유라는 점은 변함없지만.”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기계적인 손길이었다. “너는 ‘공작부인’이라는 절대적인 방패를 얻었고, 나는… 성가신 인질 하나를 내 시야 아래 두게 된 셈이니까. 서로 밑질 것 없는 장사 아닌가?” 그의 품에서 나는 독한 향수 냄새가 라리엘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그녀는 그를 거칠게 밀쳐내고 싶었지만, 수백 쌍의 눈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괴물의 품에 갇힌 가련한 짐승처럼, 숨을 몰아쉬며 가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연회가 끝나고 마침내 당도한 알브릭 공작저. 그곳은 거대한 무덤 같았다. 집안의 모든 장식물은 위압적이었고, 복도마다 걸린 역대 공작들의 초상화는 살아있는 눈으로 라리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듯했다. 공작저에서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주 침실. 그곳은 지나치게 넓어 오히려 공허했다. 라리엘은 무거운 드레스를 입은 채 침대 끝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육중한 오크 문이 돌아가며 내는 끼익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아르덴이었다. 그는 예복 상의를 벗어 던진 채 셔츠 차림으로 방에 들어섰다. “아직 안 잤군.” “말했을 텐데. 너와 한 침대를 쓰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아르덴은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반대편 침대에 걸터앉았다. “착각하지 마. 나도 너한테 관심 없어.” 그는 그대로 등을 돌려 누웠다. “하지만 내일 아침까지 이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마. 밖에는 고용된 감시자들이 깔려 있어. 첫날밤부터 소문이 나면 피곤해지는 건 나뿐만이 아닐 테니까.” 라리엘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와 주저앉았다. 구겨진 실크 드레스가 차가운 바닥에 넓게 퍼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고 어둠 속에서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창밖에서는 축복받지 못한 이 결합을 조롱하듯 거센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6개월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날 밤처럼, 하늘은 낮게 가라앉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반드시… 반드시 너의 가면을 벗겨주겠어.’ 그녀는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이 성은 감옥이지만, 동시에 그녀에게는 사냥터이기도 했다. 적의 심장부로 들어온 이상, 그녀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아르덴이 숨기고 있는 그날의 진실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이 지옥 같은 연극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같은 방, 같은 침대 위에서 두 사람의 호흡이 엇갈렸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심리적 거리는 대륙 끝과 끝보다도 멀었다. 서로를 향한 칼날을 품에 숨긴 채, 알브릭 공작저의 길고 차가운 밤이 비릿한 빗소리와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칠흑 같던 밤이 걷히고, 창밖으로 희부연 새벽빛이 스며들었다. 어둠 속에서 라리엘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밤새 잠들지 못했다. 등 뒤로 느껴지는 아르덴의 존재는 잠시도 그녀를 편안하게 두지 않았다. 그의 규칙적인 숨소리, 미세하게 감도는 체온, 그리고 넓은 침대 저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존재감이 라리엘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켰다. 그녀는 끝내 침대에 눕지 못하고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주저앉아 밤을 지새웠다. 얇은 실크 드레스는 새벽의 한기에 젖어 몸에 착 달라붙었고, 살결에는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육체적인 추위보다 그녀를 괴롭힌 것은 이 방안을 가득 채운 기묘한 침묵이었다. 문득,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라리엘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잠시 후, 매트리스가 솟아오르는 소리와 함께 침대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라리엘은 고개를 숙인 채 애써 숨을 죽였다. 그녀의 등 뒤로 서늘한, 동시에 지독하게 뜨거운 시선이 꽂혔다. "밤새도록 거기서 잤나?" 낮고 잠기운이 섞여 긁히는 듯한 목소리. 예상했던 비웃음이나 비난은 아니었다. 라리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하얗게 질린 그녀의 목덜미가 드러났다. 서벅거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라리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자신을 강제로 일으켜 세우거나, 이 치욕스러운 몰골을 비웃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촉감이었다. 툭, 하고 어깨 위로 묵직하고 따뜻한 것이 내려앉았다. 아르덴이 밤새 덮고 있던 두툼한 가운이었다. 그의 체온이 고스란히 남은 천이 라리엘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독한 향수 냄새가 아닌, 그에게서 나는 서늘한 침엽수 향과 살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바닥은 차다. 감기에라도 걸리면 번거로워져." 그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를 지나쳐 욕실로 향했다. 라리엘은 어깨에 얹힌 가운의 무게를 느끼며 멍하니 바닥을 응시했다. '번거로워진다'는 차가운 말과는 대조적으로, 가운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지나치게 다정했다. 이 남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가문을 몰락시키고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수가, 왜 이제 와서 이런 사소한 배려를 던지는 것일까.몇 시간 뒤, 방안 가득 찬란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아르덴은 눈을 떴다. 지독한 악몽이었다.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뒤섞인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헤매는 꿈. 평소라면 식은땀에 젖어 불쾌하게 깨어났을 아침이었지만, 오늘 밤은 이상하게도 마지막 기억이 따뜻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었던, 그 다정한 감각.그는 숨을 멈춘 채 옆을 돌아보았다. 라리엘이 자신의 손을 양손으로 소중하게 감싸 쥔 채, 그의 팔 근처에 머리를 기대고 깊은 잠에 들어 있었다. 햇살을 받은 그녀의 속눈썹이 눈가에 부드러운 그림자를 드리웠고,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그녀의 어깨가 평화로워 보였다.아르덴은 지난 기억을 가까스로 떠올렸다. 어젯밤, 라리엘이 곁에 눕는 순간부터 그의 감각은 비정상적으로 곤두서 있었다. 얇은 이불 너머로 느껴지는 그녀의 작은 몸놀림, 공기 중에 흩날리는 은은한 향기. 그것들은 아르덴의 이성을 끊임없이 시험했다.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기고 싶은 본능적인 갈망을 억누르기 위해 잠들 때 까지도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그녀는 너를 증오한다', '너는 그녀의 아버지를 지키지 못한 죄인이다' 를 머릿속으로 수천 번 되새기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런 엄청난 자제력 끝에 겨우 잠이 들었을 때 악몽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자신을 건져 올린 것은, 다름 아닌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그녀의 손길이었다.아르덴은 굳어버린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자신은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녀의 아버지를 언급하며 위신을 운운했고, 그녀를 도구라 부르며 고립시켰다. 그런데 그녀는 왜 이 끔찍한 악마의 손을 잡아준 것일까.그의 가슴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통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죄책감이었고, 동시에 차마 입 밖으로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문이 열리고, 아르덴이 들어왔다. 평소 집무실 옆 작은 방에서 머물던 그가 이 방의 문턱을 넘는 것은 결혼 첫날밤 이후 처음이었다. 그는 걸치고 있던 제복 상의를 벗어 의자에 던지듯 걸치며 미간을 찌뿌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며칠간의 냉랭함과는 다른, 지독하게 어색하고 민망한 기류가 흘렀다.“…고모님이 복도 끝 방에 머무시니 어쩔 수 없군.”아르덴은 침대 근처로 다가오다 말고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이 침대 밑 대리석 바닥을 향했다. 결혼 첫날밤, 침대 아래 바닥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던 라리엘의 모습이 떠오른 듯했다.아르덴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로 내뱉었다.“오늘은 내가 바닥에서 자지. 네가 또 바닥에서 자다가 다음 날 병이라도 나면, 고모님께 내가 학대라도 한다고 광고하는 꼴이 될 테니까.”그의 배려는 여전히 가시 돋친 말에 담겨 있었다. 라리엘은 그 비아냥 섞인 말투에 울컥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을 걱정해서라기보다는 그저 '고모님의 눈'과 '알브릭의 체면' 때문이라는 그 태도는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됐어. 네가 바닥에서 주무시는 걸 고모님이 아시기라도 하면 그게 더 큰일이지. 쓸데없는 고집 피우지 말고 그냥 침대로 올라와.”“라리엘.”“괜찮으니까 올라오라고. 네 말대로 병이라도 나면 곤란하니까.”라리엘이 지지 않고 쏘아붙이며 침대 한쪽 끝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아르덴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결국 마지못한 듯 침대 반대편으로 다가와 몸을 뉘었다.탁, 소리와 함께 촛불이 꺼졌다.정적이 찾아오자, 감각은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졌다. 서로의 숨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라리엘은 괜히 의식하지 않는 척, 지극히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가장하며
만찬이 끝나고 헤르트루드가 방으로 물러간 뒤, 복도에는 다시 아르덴과 라리엘 두 사람만 남았다.“……손을 놓지 않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아르덴이 낮게 읊조렸다. 목소리에는 여전히 가시가 돋쳐 있었지만, 어쩐지 평소만큼 날카롭지는 않았다. 라리엘은 그를 돌아보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연기를 하라면서. 고모님을 속이려면 그 정도의 '오만하고 친절한 공작' 이미지는 필요했을 뿐이야.”“라리엘.”아르덴이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다 멈칫했다. 허공에서 멈춘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라리엘은 그를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내일 고모님과의 산책은 걱정 마. 네가 원하는 '완벽한 아내'의 모습을 보여드릴 테니까.”닫히는 문 뒤로 아르덴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밤사이 비라도 스쳐 간 듯, 가을 아침의 공기는 맑고 선선했다. 정원의 나무들은 아직 잎을 완전히 떨구지는 않았지만, 초록 사이사이로 황금빛과 붉은빛이 스며들어 계절이 깊어졌음을 조용히 알리고 있었다. 약속대로 헤르트루드 고모는 이른 아침부터 라리엘을 불러냈다. 아르덴은 정무가 바쁘다는 핑계로 서재에 틀어박혔고, 덕분에 두 여인만의 산책이 시작되었다.“자, 라리엘. 이 늙은이 보폭이 좀 빠르지? 무릎이 성할 때 부지런히 걸어둬야 하거든.”헤르트루드는 화려한 털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정원길을 누볐다. 라리엘은 숨을 고르며 그녀의 곁을 지켰다.공작저의 후원은 가을 햇살 아래서 한층 또렷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기하학적으로 다듬어진 회양목 울타리 사이로, 고결한 자태를 뽐내는 백색 대리석 조각상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났다. 중앙 분수대에서는 차가운 물줄기가 수정처럼 솟구쳐
마차가 멈추자마자 아르덴은 시종의 부축도 받지 않은 채 먼저 내렸다. 그는 뒤따라 내리는 라리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성큼성큼 본관으로 향했다.“부인, 방까지 모시겠습니다.”하녀장 마르타가 다가왔지만, 라리엘은 고개를 저었다.라리엘은 차가운 복도를 걸어 자신의 침실로 돌아갔다. 화려한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홀로 침대에 누웠다. 피로가 밀려왔지만 마차 안에서 느꼈던 그의 열기와 독설이 뒤섞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증오와 슬픔, 그리고 알 수 없는 상실감이 그녀를 짓눌렀다.후작저에서 돌아온 아르덴은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섰다.어두운 방 안, 촛불 하나 켜지지 않은 공간에서 그는 거칠게 크라바트를 풀어 헤쳤다. 숨이 막혔다. 그녀를 몰아세울 때마다 제 가슴이 먼저 무너지는 감각을 참아내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었다.똑똑.정적을 깨는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집사 베르너였다.“들어와.”베르너는 조용히 들어와 아르덴에게 두툼한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공작님, 지시하신 대로 플로렌스 백작님의 마지막 행적을 조사했습니다.”아르덴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서류 봉투를 낚아채듯 받은 그는 촛불을 켜고 내용을 훑기 시작했다. 종이를 넘기는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조사 결과는?”“공작님의 짐작이 맞았습니다. 백작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그 문헌'의 원본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현장에 그 원본이 없다는 건…”베르너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백작님을 살해한 목적이 ‘그 문헌’이라 짐작됩니다.”아르덴은 눈을 감았다. 라리엘이 그토록 증오하는 자신, 그리고
라리엘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의 생전 모습과 겹쳐 보이는 인자한 노신사였다. 그녀의 얼굴에 놀람과 반가움이 동시에 떠올랐다.“에드먼드 남작님!”아버지의 오랜 벗이자, 가문이 몰락하기 전 자주 저택을 방문했던 지인이었다. 차가운 공작저에서 홀로 싸워오던 라리엘에게 그의 등장은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와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남작님을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소식이 끊겨서 얼마나 걱정했는지……”“나야말로 백작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르네.”그의 시선에는 진심어린 애도가 담겨있었다.“자네가 이런… 갑작스러운 혼처를 맞이했다는 이야기에 걱정이 많았지. 백작께서 살아계셨다면 결코ㅡ”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기가 미묘하게 갈라졌다.“남작.”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대화를 가로질렀다. 어느새 다가온 아르덴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라리엘의 곁에 섰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어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동작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분명했다. 그것은 ‘내 영역 안의 것을 건드리지 마라’는 경고였다.“공작님, 저는 그저 오랜 인연으로 안부를 묻던 중이었습니다.”에드먼드 남작의 목소리는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미세한 떨림을 숨기지는 못했다. 아르덴은 눈매를 가늘게 뜨며 남작을 내려다보았다.“남작의 염려에 감사하군. 하지만 내 아내의 안위는 알브릭의 기사들과 내가 온전히 책임지고 있으니, 남작께서 밤잠을 설치며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네.”그의 말투는 정중했으나 칼날처럼 예리했다.“오히려 지금은 과음하신
마차를 타고 후작저로 가는 동안 아르덴은 신문을 읽는 척하고 있었으나, 시선은 내내 라리엘의 잘게 떨리는 손가락에 머물러 있었다.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옆모습은 당당해 보였지만, 가늘게 떨리는 긴 속눈썹까지 숨기지는 못했다.아르덴은 신문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당장이라도 저 가녀린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다정함은 독이 될 뿐이었기에, 아르덴은 수차례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갈등하던 그의 시선이 마침내 라리엘의 눈가에 맺힌 작은 불안을 포착한 순간, 이성은 결국 본능에 자리를 내주었다.아르덴이 무심하게 손을 뻗어 라리엘의 차가운 손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아르덴을 바라보았다.“...뭐야?”놀람과 경계가 뒤섞인 목소리였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그 온기가 닿는 순간 라리엘의 몸이 굳었지만, 아르덴은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창밖을 보며 차갑게 내뱉었다.“착각하지 마. 네 손이 하도 사시나무 떨 듯 떨리는 통에 마차가 흔들리는 것 같아 잡은 것뿐이니까.”“……뭐라고?”“그렇게 겁에 질린 표정으로 들어갔다간, 헤르만 후작 부인이 내 안목을 의심할 거야. 알브릭의 안주인이 고작 그 정도 담력밖에 안 된다면, 나도 곤란해지지 않겠어?”비정한 독설이었다. 걱정이 아니라 마치 품평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에 라리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이거 놔. 내 담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네 옆이 지나치게 숨 막혀서 그런 거니까.”이를 악물며 말한 라리엘이 손을 확 빼내려 했지만, 아르덴은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깍지를 끼듯 더욱 단단히 맞잡았다.“놓으라고 해서 놓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닐 텐데. 밖에서 사람들은 우리의 이 맞잡은 손을 보며 알브릭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