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결혼식은 기괴할 만큼 조용하게 끝났다. 사람들의 박수는 의무적이었고, 던져진 꽃가루는 장례식의 헌화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연회장으로 옮겨온 뒤에도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화려한 음악과 산해진미가 차려졌지만, 공기는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아르덴은 라리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는 연회장의 귀족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훑었다. 그러다 돌연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표정 관리 좀 하지.”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를 긁었다. 그의 숨결이 닿는 곳마다 소름이 돋았다. “누가 보면 장례식인 줄 알겠어. 남들이 우리 사이를 의심하길 바라는 건가?” 라리엘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겐 장례식이나 다름없으니까. 네가 죽인 우리 아버지, 그리고 오늘로 완전히 죽어버린 나의 자유를 애도하는 자리지. 이보다 더 적절한 표정이 어디 있겠어?” “사고였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지.” “네 말을 믿느니 차라리 길가에 짖는 개를 믿겠어.” 라리엘이 낮게 쏘아붙이자, 아르덴의 푸른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는 마치 연인에게 귓속말을 하듯 다정한 자세를 취하며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착각하지 마, 라리엘. 제안을 한 건 나지만, 그걸 선택한 건 너야. 네 가문의 추락을 막기 위해 네 자신을 팔아넘긴 건 네 의지였다고.” “네가 우리 가문의 모든 보급로를 끊고 고립시키지 않았다면, 내가 그런 선택을 했을 것 같아?” 아르덴은 비릿하게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주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환호했지만, 라리엘은 구역질이 나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협박이 아니라 거래지. 나는 그저 갈 곳 없는 어린양에게 울타리를 제공한 것뿐이야. 물론, 그 대가가 평생의 자유라는 점은 변함없지만.”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기계적인 손길이었다. “너는 ‘공작부인’이라는 절대적인 방패를 얻었고, 나는… 성가신 인질 하나를 내 시야 아래 두게 된 셈이니까. 서로 밑질 것 없는 장사 아닌가?” 그의 품에서 나는 독한 향수 냄새가 라리엘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그녀는 그를 거칠게 밀쳐내고 싶었지만, 수백 쌍의 눈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괴물의 품에 갇힌 가련한 짐승처럼, 숨을 몰아쉬며 가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연회가 끝나고 마침내 당도한 알브릭 공작저. 그곳은 거대한 무덤 같았다. 집안의 모든 장식물은 위압적이었고, 복도마다 걸린 역대 공작들의 초상화는 살아있는 눈으로 라리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듯했다. 공작저에서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주 침실. 그곳은 지나치게 넓어 오히려 공허했다. 라리엘은 무거운 드레스를 입은 채 침대 끝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육중한 오크 문이 돌아가며 내는 끼익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아르덴이었다. 그는 예복 상의를 벗어 던진 채 셔츠 차림으로 방에 들어섰다. “아직 안 잤군.” “말했을 텐데. 너와 한 침대를 쓰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아르덴은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반대편 침대에 걸터앉았다. “착각하지 마. 나도 너한테 관심 없어.” 그는 그대로 등을 돌려 누웠다. “하지만 내일 아침까지 이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마. 밖에는 고용된 감시자들이 깔려 있어. 첫날밤부터 소문이 나면 피곤해지는 건 나뿐만이 아닐 테니까.” 라리엘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와 주저앉았다. 구겨진 실크 드레스가 차가운 바닥에 넓게 퍼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고 어둠 속에서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창밖에서는 축복받지 못한 이 결합을 조롱하듯 거센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6개월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날 밤처럼, 하늘은 낮게 가라앉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반드시… 반드시 너의 가면을 벗겨주겠어.’ 그녀는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이 성은 감옥이지만, 동시에 그녀에게는 사냥터이기도 했다. 적의 심장부로 들어온 이상, 그녀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아르덴이 숨기고 있는 그날의 진실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이 지옥 같은 연극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같은 방, 같은 침대 위에서 두 사람의 호흡이 엇갈렸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심리적 거리는 대륙 끝과 끝보다도 멀었다. 서로를 향한 칼날을 품에 숨긴 채, 알브릭 공작저의 길고 차가운 밤이 비릿한 빗소리와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칠흑 같던 밤이 걷히고, 창밖으로 희부연 새벽빛이 스며들었다. 어둠 속에서 라리엘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밤새 잠들지 못했다. 등 뒤로 느껴지는 아르덴의 존재는 잠시도 그녀를 편안하게 두지 않았다. 그의 규칙적인 숨소리, 미세하게 감도는 체온, 그리고 넓은 침대 저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존재감이 라리엘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켰다. 그녀는 끝내 침대에 눕지 못하고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주저앉아 밤을 지새웠다. 얇은 실크 드레스는 새벽의 한기에 젖어 몸에 착 달라붙었고, 살결에는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육체적인 추위보다 그녀를 괴롭힌 것은 이 방안을 가득 채운 기묘한 침묵이었다. 문득,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라리엘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잠시 후, 매트리스가 솟아오르는 소리와 함께 침대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라리엘은 고개를 숙인 채 애써 숨을 죽였다. 그녀의 등 뒤로 서늘한, 동시에 지독하게 뜨거운 시선이 꽂혔다. "밤새도록 거기서 잤나?" 낮고 잠기운이 섞여 긁히는 듯한 목소리. 예상했던 비웃음이나 비난은 아니었다. 라리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하얗게 질린 그녀의 목덜미가 드러났다. 서벅거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라리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자신을 강제로 일으켜 세우거나, 이 치욕스러운 몰골을 비웃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촉감이었다. 툭, 하고 어깨 위로 묵직하고 따뜻한 것이 내려앉았다. 아르덴이 밤새 덮고 있던 두툼한 가운이었다. 그의 체온이 고스란히 남은 천이 라리엘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독한 향수 냄새가 아닌, 그에게서 나는 서늘한 침엽수 향과 살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바닥은 차다. 감기에라도 걸리면 번거로워져." 그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를 지나쳐 욕실로 향했다. 라리엘은 어깨에 얹힌 가운의 무게를 느끼며 멍하니 바닥을 응시했다. '번거로워진다'는 차가운 말과는 대조적으로, 가운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지나치게 다정했다. 이 남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가문을 몰락시키고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수가, 왜 이제 와서 이런 사소한 배려를 던지는 것일까.루시의 천진난만한 대답에 트리샤는 이제야 상황 파악이 끝났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보나마나 시골에서 올라온 티 팍팍 내셨겠구만. 그 아주머니가 장사 수완 발휘해서 아가씨를 살살 놀린 거예요. 그 광장은 일 년 내내 노점상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서 대리석 바닥 구경도 못 할뿐더러, 비둘기 똥이랑 온갖 고약한 오물 냄새가 진동하는 곳이라구요.”청천벽력 같은 폭로에 루시의 얼굴이 순식간에 억울함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마지막 희망을 붙잡듯 목소리를 높였다.“거짓말! 형부도 분명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장구쳐 주셨는데? 형부가 거짓말을 할 리 없잖아요!”“공작님도 한통속인건 안봐도 뻔하네요. 수도 사람들이 그렇게 무섭다니까.”트리샤는 새침하게 말하고는 잘 익은 딸기 하나를 입안에 쏙 집어넣고는 우물거렸다.루시는 믿었던 세계가 무너지는 듯한 울상을 지으며, 구원을 요청하듯 라리엘을 돌아보았다.“언니… 정말이야? 트리샤 언니 말이 다 사실이야?”“하하, 글쎄. 나도 그 광장에는 가본 적이 없어서 확답은 못 하겠네.”라리엘은 동생의 순진함이 귀여우면서도 차마 트리샤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쐐기를 박을 수는 없어 애매하게 웃어넘겼다.잔뜩 일그러진 루시의 미간과 떨리는 눈망울에 자작 부인과 엘리시아, 심지어 입안 가득 딸기를 문 트리샤까지 약속이라도 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평화로운 웃음소리가 봄바람을 타고 응접실 창밖으로 멀리 퍼져 나갔다.해가 뉘엿뉘엿 저물며 붉은 노을이 플로렌스 영지의 부드러운 능선을 가득 채웠다.온 가족이 모여 정성스럽게 차려진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저택은 각자의 휴식 시간으로 접어들었다.자작 부인은 거실 벽
3개월 후, 플로렌스 영지는 완연한 봄의 숨결을 머금고 있었다.이제는 ‘플로렌스 자작령’으로 규모가 줄어들었지만, 저택을 감싸는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따스하고 활기찼다.플로렌스 저택의 집무실 안, 창틈으로 스며드는 포근한 봄 햇살이 책상 위를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과거 아버지가 앉아 무거운 책임을 짊어졌던 책상 앞에 앉은 라리엘은, 이제 제법 익숙한 손놀림으로 두툼한 가죽 장부를 펼쳐 들고 있었다.그녀는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깃펜으로 꼼꼼히 숫자를 기입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장부를 들여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그 곁에는 초점이 흐릿한 눈을 가만히 감은 제이드가 지팡이를 짚은 채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부인, 서쪽 계곡 쪽 농지의 이번 달 세금 수입 현황을 다시 한번 불러주시겠습니까?”라리엘은 장부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차분하게 읽어 내려갔다.“서쪽 농지는 지난달보다 조금 늘었어요, 제이드. 하지만 동쪽 평야 지대는 여전히 회복이 더딘 모양이네요.”제이드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마치 영지의 지도를 그리는 듯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서쪽 농지는 지력이 좋아 봄이 되면 소출이 늘어날 테니 세금을 예년 수준으로 조금 더 거두셔도 무방할 겁니다. 하지만 동쪽 농지는 작년 수해의 여파가 남아있으니, 이번 봄에는 세금을 조금 감면하여 농민들이 씨앗을 살 여유를 주시는 게 좋겠군요.”봄을 맞아 영지 살림을 살펴보러 플로렌스를 방문한 라리엘은 며칠 째 이렇게 제이드와 함께 장부를 들고 씨름하는 중이었다.“아, 그리고 북쪽 과수원 농가에는 ‘객토(客土)’ 작업을 꼭 확인하라고 전하십시오. 봄에 다른 곳의 좋은 흙을 가져다 섞어주지
“…그렇구나.”짧게 내뱉은 말에는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한때 자신을 매섭게 몰아붙이던 이에 대한 연민인지, 이제 더는 방해받지 않을 거라는 안도인지, 아니면 그 둘이 기묘하게 뒤섞인 씁쓸함인지 그녀 스스로도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없었다.잠시 후,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는 것을 막으려는 듯 라리엘이 다시 가벼운 톤으로 물었다.“레이먼 백작님은 병세가 좀 나아지셨을까?”“응. 다음달부터는 의회에도 출석하실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하셨다고 들었어.”“정말 다행이네.”라리엘은 마음의 짐을 한결 덜어낸 듯 아르덴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위로 하얀 달빛이 은은하게 내려앉았다.“있지, 클로디아 양이 지난 번에 날 찾아왔을때 말이야. 네가 의장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귀족들이 더러 있다는 이야기를 내게 해줬어.”처음 듣는 뜻밖의 사실에 아르덴의 턱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라리엘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 여자가 그런 얘길 했어? 그걸 왜 이제야 말해?”만약 그녀가 라리엘을 그런 식으로 압박했다는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조용히 물러나게 수표 따위를 쥐여주는 선처 따위는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가문을 동원해 훨씬 더 혹독하고 처절한 대가를 치르게 했을 것이라는 후회가 가슴 속을 사납게 스쳤다.“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아르덴. 조금만 더 내 말을 들어봐.”라리엘이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사실 난 그때까지… 너나 알브릭 가문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내가 먼저 너를 떠나야 하는 게 아닐까 수없이 고민했어. 그래야만 한다고도
트리샤의 입에서 풋, 하는 짧은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녀는 여유로운 동작으로 품 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이건 그동안 수고한 값이다. 이제 더는 마주칠 일 없었으면 좋겠군.] …간단히 말하자면,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얘기지.”알브릭 가문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봉투가 클로디아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집어 든 클로디아가 인장을 확인하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거짓말하지 마! 당신 말을 어떻게 믿지? 공작님을 직접 뵙고 확인하겠어!”“흠, 글쎄… 정 못 믿겠다면 당신이 직접 공작님을 찾아가봐. 알브릭 저택 앞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는 모욕을 당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것 같네.”마침내 클로디아의 동공이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그녀가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있었다.“전언은 여기까지야. 그럼 난 이만.”트리샤는 넋이 나간 클로디아의 창백한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린 뒤, 마차 문을 열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잠시 후, 숨쉬는 법 조차 잊은 듯이 굳어 있던 클로디아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안에는 오라비의 지긋지긋한 도박 빚을 단숨에 청산하고도 남을 만한 거액의 수표 한 장이 들어있었다.보상이 아니라 단절의 선언이었다.수치심과 패배감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며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어둠 속 마차 안에는 무너져 내리는 한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이 한참동안 흘러나왔다.*재판을 고작 몇 시간 앞둔 깊은 밤, 침대 위에서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던 라리엘은 결국 감고 있던 눈을 가만히 떴다.어둠 속에서도 천장의 화려한 문양이 잔상처럼 어른거렸다. 아무리 눈을 감고
마차 바퀴가 불규칙한 돌길을 지날 때마다 덜컹거리는 진동이 차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이미 해질녘이 된 창밖에는 유흥가의 숨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라리엘은 그 생경한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옆자리로 고개를 돌렸다.그곳엔 잔뜩 날이 선 표정의 트리샤가 앉아 있었다.“무슨 협상이 그래요?”트리샤가 참아왔던 말을 가시 돋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예상치 못한 매서운 반응에 라리엘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트리샤를 가만히 쳐다보았다.“응? 내가 혹시 놓친 조건이라도 있었나요? 문서에 빠진 조항이라도…?”“조건이고 조항이고 간에, 얻어낸 게 하나도 없잖아요! 이왕 녹스의 수장을 만났으면, 부인 아버지의 목숨값으로 돈이라도 잔뜩 요구했어야죠!”트리샤는 한 손을 펴서 반대편 손바닥을 탕탕 치며 분을 토해냈다. 라리엘은 잠시 멍하니 그녀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했다.“얻어낸 게 없다니요. 약탈금에 제이드, 그리고 트리샤 씨까지. 무려 세 가지나 얻어냈는걸요?”라리엘은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 보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트리샤는 그 맑은 눈동자를 쳐다보다가 도리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한층 풀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러니까 그게 말이 되냐구요. 보상은 커녕, 짐짝을 둘이나 떠안은 셈이잖아요.”“무슨 소리에요? 난 충분히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짐짝이라니, 트리샤 씨는 내 친구 아니었어요?”친구라니.트리샤는 그 말에 또 한번 토를 달려고 숨을 한껏 들이켰다가, 라리엘의 확신에 찬 눈빛을 보고는 그대로 말을 삼켜버렸다.라리엘은 그런 트리샤를 짐짓 모른체 하고는 생글생글 웃으며
미첼로가 굳이 제이드의 이름을 들먹인 것은 라리엘을 떠보려는 의도였다.아버지의 죽음에 일조한 가문의 배신자를 구하려는 그녀의 본심이 순수하게 궁금했던 것이다.잠시 침묵을 지키던 미첼로는 조금 전까지의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고 의자에 등을 붙여 바르게 앉았다. 그는 패배를 인정하는 도박사처럼 가볍게 양손을 들어 보였다.“좋습니다. 더는 제가 고집을 부릴 방도가 없군요. 부인의 요구사항을 명확하게 정리해 보시지요.”그토록 원하던 미첼로의 항복 선언이었으나, 막상 그의 입에서 수락의 말이 떨어지자 라리엘은 찰나의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정말 이대로 끝인 걸까?'그녀는 눈앞에 앉은 미첼로의 미세한 근육 변화와 눈짓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살피며 입을 열었다.“…아까 전에도 분명히 말씀드렸듯이, 레오폴트 약탈금의 반환은 녹스에서 전적으로 책임집니다. 그리고, 미첼로 씨가 강조하셨던 그 ‘기브 앤 테이크’를 적용해 드리죠. 우리가 법정에서 녹스의 존재와 이 계약서의 실체를 발설하지 않는 대신, 제이드 크로이츠를 즉각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세요. 당신들이 우리 아버지에게 저지른 그 끔찍한 죄악에 대한 대가는, 그의 딸인 트리샤 크로이츠의 완전한 자유로 받겠습니다.”미첼로는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이내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하시죠. 거래 성립입니다.”미첼로는 녹스의 수장답게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서랍에서 고급 양피지를 꺼냈다.얼마간 깃펜이 종이 위를 달리는 사각거리는 방 안에 울려퍼졌다. 새로운 계약서 작성이 끝난 후, 그는 마지막으로 라리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수완이 보통이 아니시군요, 부인.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도 꼭 ‘거래&r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라리엘의 무릎 위에서 책을 거두어 제자리에 꽂았다. 그리고는 부서질 세라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안아 올렸다. 잠결에 으응, 하며 그의 품을 파고드는 라리엘의 온기에 아르덴은 숨을 멈췄다. 그녀에게선 여전히 예전 그 온실의 꽃향기가 났다. 그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며, 차가운 서고를 지나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그녀의 침실에 도착해 침대에 눕히는 순간까지도 아르덴은 팔에 힘을 풀지 못했다. 잠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는 이
숨이 조금 가라앉은 뒤에야 라리엘은 옷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닦아냈다. 눈물에 젖은 편지지를 구겨버리는 대신 조심스럽게 종이를 말렸다. 이 얼룩조차 자신의 일부라고 인정하듯. 지금 여기서 주저앉으면 정말로 아르덴의 말대로 '입 다물고 인형처럼' 살게 될 뿐이었다. '울고 있을 시간조차 아까워. 내가 무너지면 우리 가족은 정말 갈 곳이 없어져.' 라리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붉어진 눈가를 화장으로 차분히 가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거울 속에는 더 이상 처량하게 우는 소녀가 없었다.
연회장의 불빛이 하나둘 꺼진 뒤, 라리엘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화려하지만 갑옷처럼 무거웠던 자수정 드레스를 벗어던졌다. 꽉 조여졌던 코르셋이 풀리자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은 여전했다. 시녀들은 늘 그렇듯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편히 쉬십시오, 부인.”이라는 형식적인 인사만을 남기고 조용히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 침실은 완전히 라리엘 혼자만의 공간이 되었다. 촛불 하나만이 위태롭게 타오르는 방 안에서 라리엘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한동안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손은 무릎
라리엘은 짧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소임이라니? 오늘 내 소임은 너의 살아있는 장식품이 되는 것 아니었어? 충분히 완수했다고 생각하는데.” 날 선 대답에 아르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그는 괜히 먼 정원을 바라보며 짐짓 무심한 투로 덧붙였다. “…안색이 좋지 않군. 연회장의 향기가 너무 독했나?” 그것은 아르덴 나름의 절박한 안부였다. 괜찮으냐고, 아까 그들의 말에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진심이 서툰 질문 속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가시 돋친 말들에 온마음이 할퀴어진 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