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결혼식은 기괴할 만큼 조용하게 끝났다. 사람들의 박수는 의무적이었고, 던져진 꽃가루는 장례식의 헌화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연회장으로 옮겨온 뒤에도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화려한 음악과 산해진미가 차려졌지만, 공기는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아르덴은 라리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는 연회장의 귀족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훑었다. 그러다 돌연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표정 관리 좀 하지.”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를 긁었다. 그의 숨결이 닿는 곳마다 소름이 돋았다. “누가 보면 장례식인 줄 알겠어. 남들이 우리 사이를 의심하길 바라는 건가?” 라리엘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겐 장례식이나 다름없으니까. 네가 죽인 우리 아버지, 그리고 오늘로 완전히 죽어버린 나의 자유를 애도하는 자리지. 이보다 더 적절한 표정이 어디 있겠어?” “사고였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지.” “네 말을 믿느니 차라리 길가에 짖는 개를 믿겠어.” 라리엘이 낮게 쏘아붙이자, 아르덴의 푸른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는 마치 연인에게 귓속말을 하듯 다정한 자세를 취하며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착각하지 마, 라리엘. 제안을 한 건 나지만, 그걸 선택한 건 너야. 네 가문의 추락을 막기 위해 네 자신을 팔아넘긴 건 네 의지였다고.” “네가 우리 가문의 모든 보급로를 끊고 고립시키지 않았다면, 내가 그런 선택을 했을 것 같아?” 아르덴은 비릿하게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주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환호했지만, 라리엘은 구역질이 나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협박이 아니라 거래지. 나는 그저 갈 곳 없는 어린양에게 울타리를 제공한 것뿐이야. 물론, 그 대가가 평생의 자유라는 점은 변함없지만.”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기계적인 손길이었다. “너는 ‘공작부인’이라는 절대적인 방패를 얻었고, 나는… 성가신 인질 하나를 내 시야 아래 두게 된 셈이니까. 서로 밑질 것 없는 장사 아닌가?” 그의 품에서 나는 독한 향수 냄새가 라리엘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그녀는 그를 거칠게 밀쳐내고 싶었지만, 수백 쌍의 눈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괴물의 품에 갇힌 가련한 짐승처럼, 숨을 몰아쉬며 가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연회가 끝나고 마침내 당도한 알브릭 공작저. 그곳은 거대한 무덤 같았다. 집안의 모든 장식물은 위압적이었고, 복도마다 걸린 역대 공작들의 초상화는 살아있는 눈으로 라리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듯했다. 공작저에서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주 침실. 그곳은 지나치게 넓어 오히려 공허했다. 라리엘은 무거운 드레스를 입은 채 침대 끝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육중한 오크 문이 돌아가며 내는 끼익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아르덴이었다. 그는 예복 상의를 벗어 던진 채 셔츠 차림으로 방에 들어섰다. “아직 안 잤군.” “말했을 텐데. 너와 한 침대를 쓰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아르덴은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반대편 침대에 걸터앉았다. “착각하지 마. 나도 너한테 관심 없어.” 그는 그대로 등을 돌려 누웠다. “하지만 내일 아침까지 이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마. 밖에는 고용된 감시자들이 깔려 있어. 첫날밤부터 소문이 나면 피곤해지는 건 나뿐만이 아닐 테니까.” 라리엘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와 주저앉았다. 구겨진 실크 드레스가 차가운 바닥에 넓게 퍼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고 어둠 속에서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창밖에서는 축복받지 못한 이 결합을 조롱하듯 거센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6개월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날 밤처럼, 하늘은 낮게 가라앉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반드시… 반드시 너의 가면을 벗겨주겠어.’ 그녀는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이 성은 감옥이지만, 동시에 그녀에게는 사냥터이기도 했다. 적의 심장부로 들어온 이상, 그녀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아르덴이 숨기고 있는 그날의 진실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이 지옥 같은 연극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같은 방, 같은 침대 위에서 두 사람의 호흡이 엇갈렸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심리적 거리는 대륙 끝과 끝보다도 멀었다. 서로를 향한 칼날을 품에 숨긴 채, 알브릭 공작저의 길고 차가운 밤이 비릿한 빗소리와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칠흑 같던 밤이 걷히고, 창밖으로 희부연 새벽빛이 스며들었다. 어둠 속에서 라리엘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밤새 잠들지 못했다. 등 뒤로 느껴지는 아르덴의 존재는 잠시도 그녀를 편안하게 두지 않았다. 그의 규칙적인 숨소리, 미세하게 감도는 체온, 그리고 넓은 침대 저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존재감이 라리엘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켰다. 그녀는 끝내 침대에 눕지 못하고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주저앉아 밤을 지새웠다. 얇은 실크 드레스는 새벽의 한기에 젖어 몸에 착 달라붙었고, 살결에는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육체적인 추위보다 그녀를 괴롭힌 것은 이 방안을 가득 채운 기묘한 침묵이었다. 문득,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라리엘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잠시 후, 매트리스가 솟아오르는 소리와 함께 침대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라리엘은 고개를 숙인 채 애써 숨을 죽였다. 그녀의 등 뒤로 서늘한, 동시에 지독하게 뜨거운 시선이 꽂혔다. "밤새도록 거기서 잤나?" 낮고 잠기운이 섞여 긁히는 듯한 목소리. 예상했던 비웃음이나 비난은 아니었다. 라리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하얗게 질린 그녀의 목덜미가 드러났다. 서벅거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라리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자신을 강제로 일으켜 세우거나, 이 치욕스러운 몰골을 비웃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촉감이었다. 툭, 하고 어깨 위로 묵직하고 따뜻한 것이 내려앉았다. 아르덴이 밤새 덮고 있던 두툼한 가운이었다. 그의 체온이 고스란히 남은 천이 라리엘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독한 향수 냄새가 아닌, 그에게서 나는 서늘한 침엽수 향과 살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바닥은 차다. 감기에라도 걸리면 번거로워져." 그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를 지나쳐 욕실로 향했다. 라리엘은 어깨에 얹힌 가운의 무게를 느끼며 멍하니 바닥을 응시했다. '번거로워진다'는 차가운 말과는 대조적으로, 가운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지나치게 다정했다. 이 남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가문을 몰락시키고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수가, 왜 이제 와서 이런 사소한 배려를 던지는 것일까.“난 이런 화려한 곳에서 지켜야 할 식사 예절 같은 건 전혀 모르는데 어쩌죠?”평소와 다름없는 무심한 어조였지만, 그 안에는 아주 미세한 위축감이 섞여 있었다. 라리엘이 편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런 건 신경쓰지 말고 편하게 들어요. 트리샤 씨가 맛있게 먹어주는 게 우리에겐 가장 큰 예의에요.”만약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면 그 말 속에 있는 저의를 파악하느라 머리를 좀 더 굴렸겠지만, 라리엘의 말이었기에 트리샤는 더 생각하지 않았다.그녀는 곧바로 뻣뻣하게 쥐고 있던 포크를 제 손에 익숙한 방식으로 편하게 고쳐 쥐고는 식사를 시작했다.“그럼… 염치 불구하고 잘 먹을게요.”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와 신선한 채소를 입에 넣자, 며칠간 길 위에서 겪었던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아르덴과 라리엘은 그녀가 식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사소한 담소를 나누었다.이윽고 식사가 끝나갈 무렵, 달콤한 디저트 와인이 잔에 채워졌다. 아르덴이 냅킨으로 입가를 가볍게 닦아낸 뒤 차분한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제이드는 어떻게 되었지?”식탁 위의 촛불이 그의 푸른 눈동자에 내려앉아 서늘한 빛을 냈다. 와인을 한 모금 머금어 목을 축인 트리샤가 대답했다.“계획대로 그놈들에게 잘 인도해 줬어요. 며칠에 걸쳐서 은밀하게 거처를 옮기더니, 최종적으로는 아이델의 상인 길드 본부의 지하에 머물게 하더라고요. 보안이 삼엄해서 쥐새끼 한 마리 들락거리기 힘든 곳이죠.”“상인 길드라…”아르덴이 낮게 중얼거리며 와인 잔의 테두리를 가만히 매만졌다. 곁에서 숨을 죽이고 듣고 있던 라리엘이 안쓰러운 기색을 감추지
오라비라는 말에 클로디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그녀는 불만스러운 듯 시선을 내리깔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내 지지 않겠다는 듯 날 선 목소리로 받아쳤다.“나한테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으면서, 그저 시키는 대로 앵무새처럼 물어보라고만 하니까 진전이 없는 거잖아요. 도대체 그 부인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게 뭐죠? 그 보잘것없는 플로렌스 가문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말했잖아. 그건 당신이 알 바 아니라고.”남자의 단호한 거절에 클로디아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이대로 끌려다니다가는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다.오라비도, 가문도, 그리고—자신이 원하는 것조차. 그녀는 조급함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승부수를 던졌다.“상황이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흐르는 건 당신에게도 좋은 일은 아니잖아요? 사실 이건 내가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 알브릭 공작님의 의중이기도 해요.”남자의 눈빛에 미심쩍은 빛이 스쳤다. 클로디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공작님께서는 공작 부인이 혹여 알브릭 가문의 명성에 흠집이라도 내지 않을까 고심이 깊으시더라고요. 만약 그분이 부인의 흠결에 대해 뭔가 실마리라도 잡는다면, 공작 부인의 입지는 점점 좁아질거고… 그렇게 되면 당신들이 하는 일도 수월해지지 않겠어요?”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남자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바깥 멀리서 바람이 스치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부채를 매만지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클로디아의 손끝에 초조함이 서렸다.녹스의 입장에서 알브릭 공작이 거슬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그가 부인에게서 등을 돌려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환영할 일이었다. 남자는 그녀의 제안에 내심 솔깃해하면서도, 겉으로는
응접실은 클로디아가 남기고 간 진한 향수 냄새로 가득했다.달콤하면서도 지나치게 짙은 향이 공기 속에 눌어붙은 듯 맴돌았다. 아르덴은 닫힌 문을 향해 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그의 눈동자는 차갑게 식어, 마치 복잡한 체스판의 다음 수를 계산하듯 날카롭게 가라앉아 있었다.“아르덴.”부드러운 목소리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정적을 깼다.아르덴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선 라리엘이 보였다. 그녀가 아르덴의 팔을 가만히 잡았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레이먼 백작님이 안좋은 소식이라도 전하신 거야?”“아니, 그건 아니고…”아르덴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라리엘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가 조금 전까지 거짓과 계략으로 가득했던 그의 마음을 사정없이 찔러왔다.차갑게 정리되어 있던 사고가 그 온기에 부딪혀 미묘하게 흐트러졌다. 아르덴은 찰나의 순간 고민했다. 지금 사실대로 말할 것인가, 아니면 조금만 더 미룰 것인가.그는 한 번 시선을 떨구었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결심하듯 입을 열었다.“라리엘. 여기 좀 앉아봐. 할 이야기가 있어.”“응? 정말 무슨 일이 있는거야?”라리엘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르덴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부드럽게 이끌어 소파에 앉힌 뒤, 자신도 맞은편에 깊숙이 몸을 묻고 앉았다.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레이먼 백작 영애 말이야. 지금까지 그녀와 단둘이 있을 때 어떤 이야기들을 나눴어?”갑작스러운 질문에 라리엘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깜빡였다.“음
그녀는 고개를 들고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았다.공작의 눈에 자신이 오직 가문을 걱정하는 가냘픈 여인으로만 비치길 간절히 바라는 몸짓이었다.“새로운 정보라기보다는…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공작 부인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공작님께서 혹여 무언가 알아내신 것이 있을까 하여 걱정스러운 마음에 들렀을 뿐입니다.”아르덴은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치며 따분하다는 듯 대꾸했다.“글쎄… 자네 말을 듣고 사람들을 시켜 공작 부인과 플로렌스 가문을 샅샅이 훑었지만, 달리 흠잡을 만한 건 없던데.”아르덴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오히려 수상한 자들이 부인의 뒤를 캐고 있다는 자네 말이 진짜인지 의구심이 드는군.”그의 말에 클로디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그럴 리가요! 제가 드린 말씀은 모두 추호의 거짓 없는 사실입니다. 아주 수상하고 질 나빠 보이는 사내였어요. 그자가 부인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의 소름 끼치는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아르덴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그래? 그렇다면 그 자를 내가 직접 만나게 해줄 수는 없나? 정체가 무엇인지, 그 자가 알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직접 물어보고 싶은데.”클로디아는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달싹였다.그녀는 한참을 주저하며 손에 쥔 손수건을 짓이겼다. 아르덴은 그녀의 손에 시선을 두고 조용히 기다렸다. 결국 클로디아는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송구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만약 제가 공작님께 이 일을 알렸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되면, 제 목숨뿐만
이튿날 정오가 지날 무렵, 이른 아침부터 의회 일정을 소화하고 돌아온 아르덴은 집무실에서 베르너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며칠 뒤면 해가 바뀌고 신년이 시작된다.제국의 모든 권력 지형이 재편되는 민감한 시기인 만큼, 그의 책상에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그래도 공작님께서 신경 쓰시던 북부 관세 개정안이 자리를 잘 잡아서 다행입니다. 거세게 반발하던 귀족들도 기세가 한풀 꺾였으니, 내년에는 계획하셨던 대로 좀 더 유연하게 법안을 시행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응. 올라온 보고서의 숫자대로만 흘러가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다만, 겉으로는 수그러든 척하는 귀족들이 은밀히 황실의 그림자 아래 모여 지속적으로 개정안의 허점을 쑤셔대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라면 문제였다.보고서를 훑는 아르덴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그들이 속삭이는 감언이설 속에서, 과연 황제는 진실과 거짓을 어디까지 가려낼 수 있을 것인가.그때, 하인 한 명이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공작님, 레이먼 백작 영애가 방문하셨습니다. 공작님을 긴히 뵙고자 응접실에서 대기 중이십니다.”베르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르덴의 얼굴로 향했다. 아르덴은 서류를 쥔 손을 멈추고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미간 사이에 아주 희미하게 잡힌 주름과 나른하게 내리뜬 눈꺼풀에서는 숨길 수 없는 따분함이 묻어났다.마치 재미없는 연극의 서막을 억지로 지켜봐야 하는 관객의 얼굴이었다. 그는 귀찮다는 듯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더니 하인을 향해 말했다.“곧 가겠다고 전해.”하인이 문을 닫고 나가자 아르덴이 의자에 비스듬히 앉은 채로 낮게 투덜거렸다.“...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성격이 급한 여자
“흥미롭군.”그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그녀가 쥔 패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패가 어떤 위협이 될지 가늠해보는 그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다시 깊은 사유의 늪에 빠져든 아르덴을 바라보던 베르너는 그의 안색에 드리운 짙은 피로를 읽어냈다.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공작님. 오늘 아침에는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신 데다, 곧장 밀린 보고서를 검토하시느라 기력이 많이 소진되셨을 겁니다. 잠시 다과라도 준비해 드릴 테니 휴식을 취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베르너의 목소리에 아르덴은 잠겨있던 생각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그는 뻐근한 목을 돌리며 기지개를 크게 한 번 켰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달콤한 다과 따위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베르너의 제안을 거절하려던 찰나, 소파 한편에 가지런히 놓인 숄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어젯밤 라리엘이 두고 간 숄이었다.아르덴의 표정이 순식간에 부드럽게 풀리며 빙긋 미소가 번졌다.“다과는 됐고, 잠깐 쉬고 싶긴 하군. 자네는 이만 나가봐.”아르덴의 눈길이 머무는 곳이 어디인지 확인한 베르너는 새어 나오려는 미소를 짐짓 엄숙한 표정 뒤로 감췄다.“네, 공작님.”그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조용히 집무실을 빠져나갔다.*지평선 너머로 몸을 낮춘 해가 두꺼운 벨벳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바닥에 비스듬한 황금빛 궤적을 그려냈다.하루종일 마르타와 저택 곳곳을 누비며 밀린 살림을 점검한 라리엘은 이제 막 침실로 돌아온 참이었다.그녀는 창가 한쪽에 놓인 작은 티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손때 묻은 책 한 권을 펼쳐 들었다.평소 같으면 은은한 차 향기와 종이 넘기는 소리에 파묻혀 안온한 휴
교묘한 비아냥이었다. 아르덴의 ‘자비’와 라리엘의 ‘처지’를 동시에 건드리는 말에 라리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때, 아르덴이 그녀의 허리를 자기 품으로 더 깊숙이 끌어당기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자비라니요, 백작. 나는 그저 내게 어울리는 가장 고귀한 꽃을 내 화원에 옮겨두었을 뿐입니다. 라리엘은 이제 플로렌스가 아니라 알브릭의 이름으로 빛날 테니까요.” 아르덴은 말을 마친 뒤, 보란 듯이 그녀의 목덜미 근처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 넘겼다. 손끝이 민감한 피부를 스치자 라리엘은 소름이 돋
라리엘은 서신을 쥔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참아냈다. 아버지는 죽기 직전까지도 아르덴을 ‘아들과 다름없는 친구’로 믿고 있었다. 자신의 가문이 가진 위험한 비밀까지 공유할 정도로 그를 신뢰했다. 그런데 아르덴은? 그는 이 서신을 받은 직후에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가문을 파멸시킨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와 함께 아르덴이 집어삼켜진 것일까? 라리엘은 서신을 소중하게 접어 품 안 깊숙이 숨겼다. 지금은 이것을 들고 아르덴을 추궁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창고를
그것으로 족했다. 어차피 자신이 죽인것과 다름 없었다. 자신이 더 깊이 파헤치지만 않았더라도, 백작에게 그런 것을 요청하지만 않았더라도 백작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녀가 진실을 알게 되면 분명 더 깊이 파헤치려 들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그녀 또한 표적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백작을 죽인 세력의 실체가 아직 안개속에 있다는 사실이 그의 피를 말리게 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오해한 채 증오하는 편이 나았다. 친구이자 스승의 딸에게 씌워진 비극적인 연극. 그 모든 비난과 저주는 자신 하나로 충분했다.
“하아…… 하…….” 거칠게 몰아쉬는 숨이 방금 전 아르덴이 서 있던 공간의 잔열을 집어삼켰다. 심장이 늑골을 부수고 나올 것처럼 뛰었다.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뺨을 타고 흐르던 그의 서늘한 숨결, 얇은 잠옷 너머로 전해졌던 손바닥의 지독한 열기, 그리고 찰나의 순간 자신을 꿰뚫었던 눈빛. 그 모든 감각이 사슬처럼 그녀의 전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라리엘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그의 숨결이 닿았던 자리가 여전히 화끈거렸다. 마치 낙인이 찍힌 것 같았다. ‘자극하지 말라고?’ 그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