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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화

Author: 레몬과 향수
유정혁은 안으로 들어오는 유지영을 보자마자,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큰언니, 아버지는 평생 할머니 곁을 떠나신 적이 없어요. 분가로 마음이 쓰여 몇 마디 당부하신 것뿐인데 말이 너무 심하네요. 설마 할머니마저 내쫓을 생각인가요?”

유선주는 울컥 화가 치밀어 쏘아붙였다.

큰댁과 완전히 틀어진 이상 더는 적의를 숨길 이유도 없었다.

그 말에 유씨 노부인도 콧방귀를 뀌며 불만을 드러냈다.

“할머니를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저입니다. 제가 왜 할머니를 내쫓으려 한단 말인가요?”

유지영은 억울하다는 듯 맞받아쳤다.

그 말에 유씨 노부인은 마차 사고 당일의 위기와, 차남네가 말에게 독을 먹인 일을 떠올렸다.

유선주를 바라보는 노부인의 눈길에서 온기가 싹 가셨다.

“선주야, 비록 분가를 했을지언정 지영이는 엄연히 맏언니이다. 무례하게 굴면 안 되지!”

오히려 꾸중을 듣게 되자 유선주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변명하려 했으나 유정혁이 눈치를 줘서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할머니의 가르침을 명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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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안을 거슬러   제768화

    며칠 후, 기씨 노부인의 생신 연회가 열렸다.예상대로 사람들의 이목은 둘째네로 쏠렸다. 수많은 이들이 기장준을 바라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유영 군주 역시 귀중한 선물을 보냈다. 기씨 노부인은 선물을 받아 곧장 곁의 시녀에게 넘겼다."군주가 마음을 많이 썼구나."입으로는 칭찬했으나 다분히 건성인 태도였다.유영은 내색하지 않고 큰부인 곁을 지켰다.큰부인 연씨는 둘째네의 출세를 시기하지 않았다. 수년간 성씨와 줄곧 사이가 좋았고, 이 자리가 어떻게 온 것인지 내막을 알고 있었다. 연씨는 진심으로 둘째네의 경사를 기뻐했다.하지만 셋째네의 표정은 별로 좋지 못했다.이날 연회에는 조령 장공주도 참석했다. 수많은 빈객이 기씨 노부인의 생신을 축하하러 모여들어 장내는 무척 북적였다.성씨는 조령 장공주를 향해 가볍게 눈인사를 보냈다.조령 장공주는 뜻을 알아차리고 손수건으로 입술을 가린 채 헛기침을 했다. 유영 군주도 신호를 눈치채고 시어머니인 연씨의 곁에 바짝 붙어 있었다.잠시 후."큰, 큰일 났습니다!"시녀 한 명이 허둥지둥 달려와 성씨를 찾았다."허씨 가문의 셋째 아가씨와 저희 공자께서……."잔뜩 긴장한 시녀의 목소리에 성씨는 짐짓 못 들은 척했다.곁에 있던 셋째 부인 원씨가 벌떡 일어나 목청을 높였다."장준이와 허씨 가문의 셋째 아가씨가 어찌 되었다고?"앙칼진 목소리에 사람들은 의아한 눈길로 원씨를 바라보았다.성씨는 난처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동서가 잘못 들었네. 장준이가 아니라…….""형님. 방금 시녀가 우리 공자라고 하는 걸 제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셋째 부인은 주위를 쓱 둘러보더니 성씨를 향해 은근한 눈짓을 보냈다."형님은 어서 가보세요. 이곳은 제가 맡을 테니."기씨 노부인도 성씨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어서 가보거라."성씨가 막 일어서려던 찰나, 등 뒤에서 다급한 비명이 들려왔다."사람 살려요! 저희 아가씨가 호수에 빠졌습니다!"소리는 바로 뒤편 후원에서 들려왔다.사람들은 곧장 뒤편 호숫가로 걸음을

  • 피안을 거슬러   제767화

    유지영은 목소리를 낮춰 장공주의 귓가에 대고 몇 마디 속삭였다. 이를 들은 조령 장공주는 눈빛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기씨 가문의 내막을 어찌 이리 훤히 꿰고 있는 것이냐?""장공주 전하, 저희는 동맹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기씨 가문의 둘째 부인을 불러두었습니다."그 말을 들은 조령 장공주는 다소 의아해했다. 유지영은 기씨 가문의 둘째 부인이 허씨 가문을 고발하기 위해 친아들인 기장준을 제 손으로 때려 만신창이로 만들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조령 장공주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그 부인 역시 오랫동안 울분을 삭여왔던 모양이군. 일이 성사된다면, 내 반드시 둘째 부인에게 후하게 보답하겠다."반 시진 후, 기씨 가문 둘째 부인 성씨가 당도했다. 문을 열고 방 안의 두 사람을 확인한 성씨는 흠칫 놀라며 몸을 굽혀 예를 올렸다."장공주 전하, 현왕비 마마를 뵙습니다.""기 부인, 예는 거두십시오. 부인을 급히 모신 것은 상의할 일이 있어서입니다."유지영은 굳이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이미 한 번 손을 잡은 적이 있으니, 피차 어색할 것은 없었다.성씨는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현왕비 마마, 농담도 지나치십니다. 저택의 후원에 틀어박혀 지내는 아녀자가 무슨 재주가 있어 마마를 돕겠습니까.""둘째 부인께서는 기씨 가문에서 분가하여 독립하고 싶지 않으십니까?"유지영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성씨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두 사람의 진지한 안색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결심한 듯 자리에 앉으며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원합니다!"조령 장공주는 그 모습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세 아들이 분가를 원한다 해도, 그 깐깐한 노친네가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 입 밖에 내지 못할 터. 내가 보기에 둘째 부인의 수완이라면 한 집안의 안주인 노릇을 하기에 차고 넘치네. 넷째 공자의 결단력 또한 내 높이 사고 있지. 기씨 가문에 얽매여 사느니, 차라리 독립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기씨 둘째 부인은 쓴웃음을 지었다."장공주 전하께서는

  • 피안을 거슬러   제766화

    밤이 깊어졌다.유지영은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아도 모든 걸 체념한 듯한 유영 군주의 얼굴이 떠올라, 쉽사리 잠에 들 수 없었다.그녀는 아예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뒤에서 배현준이 팔을 뻗어 허리를 감쌌다."내일 조회가 끝나면 기장훈을 만나보마."그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유지영은 고개를 저었다."문제는 기 공자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그가 진정으로 유영의 편이 되어줄 생각이었다면 첩실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은 혼인한 지 겨우 일 년 남짓 되었다. 비록 유영은 유산을 했으나 몸 상태가 나쁘지 않아, 이삼 년 몸을 추스르면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었다.하지만 기씨 가문은 겉으로 아무 말도 안 하면서 속으로 딴마음을 품고 있었다.만약 기가의 삼남댁이 작위를 차지한다면 큰부인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기장훈은 기 부인이 정성을 다해 키운 아들로 모자간의 정이 각별했다.배현준은 자리에 앉아 무릎에 손을 얹고 생각에 잠겼다."큰부인이 젊은 시절 고생을 꽤나 했지. 본래 승부욕도 강한 성격이다. 기장훈은 여섯째만큼 어르신의 총애를 받지 못해 줄곧 견제를 받다가 최근 몇 년 새 상황이 조금 나아졌지."유지영은 겉옷을 걸치고 배현준을 마주 보았다.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기씨 어르신은 이제 조정에 관여하지 않지만, 대단한 수완가라 들었습니다."유지영은 기씨 둘째 부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이치에 밝고 결단력 있는 여인이었다. 지난 번 일로 유지영은 둘째 부인에게 큰 신세를 졌고, 아직 보답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그저 고집불통 노인네일 뿐이다."배현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고민이 깊어진 유지영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 시진 넘게 기씨 가문의 내막을 들으며 상황을 정리했다."기씨 가문의 여섯째는 어떤 자입니까?"배현준이 대답했다."어른들의 보호를 받고 자라 평소에는 조용히 지낸다. 겉으로는 병약한 공자 행세를 하지만 속은 다르지. 내가 열 살 무렵, 그

  • 피안을 거슬러   제765화

    말을 마친 북영주는 의자에 기대앉았다. 눈매에는 오만함과 자신감이 가득했다."본 공주가 자녕궁에 갇혀 있긴 했으나, 태후는 나를 극진히 대접했지."그날 자녕궁에 문안을 갔을 때, 허비는 서 태후가 북영주를 얼마나 각별히 대우하는지 똑똑히 보았었다.허비는 희미하게 웃으며 사람을 시켜 편전을 치우게 하고, 북영주에게 궁녀 두 명을 내어주었다."팔공주가 익곤궁을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주겠네."북영주는 그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허비가 내 협조를 구하고 싶다면 그리 간단치는 않을 거야. 내게도 성의를 보여야지."그녀는 문가로 걸어가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내 목소리를 높였다."내 조건은 단 하나야."허비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현왕의 평비가 되어 유지영과 동등한 자리에 오르는 것!"말을 마친 북영주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그녀가 내건 조건에 허비는 미간을 구겼다. 현왕을 설득하여 평비를 들이게 하는 것은 황자를 낳는 것 못지않게 까다로운 일이었다."마마, 팔공주가 정녕 그런 재주가 있긴 한 겁니까?"궁녀가 의아한 듯 묻자, 허비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일단은 귀하게 모시고 너는 이따가 허씨 가문에 다녀오너라. 어머니께 전할 말이 있다.""예, 마마."북영주가 허비의 궁으로 들어간 후, 허씨 가문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지영은 이를 모르는 척하며 가끔 장공주부를 찾아 유영 군주를 살폈다.유영은 안색이 예전보다 훨씬 좋아져서 유지영도 마음이 한결 놓였다."기씨 가문에서 매일 사람을 보내고 있습니다. 내 상태도 점점 안정을 되찾고 있고요."유영은 오히려 유지영을 위로했다."며칠 전에 제 측근 한 명을 기씨 가문으로 보내 첩실로 삼게 했지요. 조만간 두 명 정도 더 들일 생각입니다."군주는 태연하게 말했지만, 유지영은 왠지 가슴이 먹먹해졌다."왜 그렇게까지 관대하게 구는 겁니까?""결국 내가 이 일로 기씨 가문에 큰 빚을 졌습니다. 부군의 마음을 달래는 것도 중요하지만,

  • 피안을 거슬러   제764화

    건양제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고는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허비는 용기를 내어 간청했다."신첩이 듣기로 팔공주는 의술에 능하다 들었습니다. 신첩은 그저…… 아이를 갖고 싶습니다."허비는 새빨간 얼굴을 하고서도 솔직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고요한 익곤궁 내전에는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달그락.건양제가 찻잔을 내려놓았다.허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신첩은 입궁한 이래 줄곧 서로 의지하며 살아갈 핏줄을 원했습니다. 그저 아이에게 시와 서화를 가르치며 곁에 두고 싶을 뿐, 딴 마음은 없습니다. 부디 신첩의 소원을 들어주십시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건양제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한숨을 내쉬며 허비를 부축해 일으켰다."그건 내가 조금 더 생각해 보마."그때 상 내관이 안으로 들었다."폐하, 조회에 드실 시간입니다."건양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비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밤을 새웠으니 푹 쉬거라."말을 마친 건양제는 밖으로 나갔다.허비는 무릎을 굽혀 황제를 배웅했다. 건양제가 멀어진 뒤에야 그녀는 궁녀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마마, 너무 직설적인 요구인데 폐하께서 승낙하시겠습니까?"허비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녀 역시 건양제가 허락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북영주를 데려올 명분을 찾을 수 없었다. 일개 후궁이 북신의 팔공주와 무슨 연관이 있겠는가. 차라리 솔직하게 털어놓는 편이 나았다.건양제는 익곤궁을 나선 뒤,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고는 상 내관에게 툭 던졌다."어선방에 일러서 어마마마께서 좋아하시는 장미떡과 부용떡을 올리고 보양식도 달여 올리라 하거라."상 내관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연회가 끝난 뒤, 자녕궁에 들렀언 건양제가 딱딱하게 굳은 다과를 맛보고 미간을 찌푸리던 모습이 떠올랐다.*오시.조회를 마친 건양제는 다시 자녕궁으로 향했다. 하지만 반 시진쯤 머물다 쫓겨나고 말았다

  • 피안을 거슬러   제763화

    조령 장공주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허씨 노부인에게 쏠렸다.내로라하는 가문에서 후대의 혼담을 꺼낼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법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몸이 허약한 것은 기피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허씨 가문은 오히려 몸이 약한 육가의 적장녀와 굳이 혼약을 맺으려 하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허씨 노부인."조령 장공주가 재촉하듯 불렀다.허씨 노부인은 입을 달싹이며 망설이다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저희 가문은 육 소저가 재색을 겸비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몸이 병약한 줄은 미처 몰라 이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노부인은 건양제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폐하, 비록 그렇다 해도 저는 손자를 위해 육 소저를 손주며느리로 맞이하고 싶습니다!"바닥에 머리를 거듭 찧은 탓에 노부인의 이마는 금세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허비도 치맛자락을 쥐고 바닥에 꿇어앉아 눈물을 쏟았다."폐하, 그저 사소한 오해일 뿐인데 어찌 장공주와 현왕 부부까지 나서서 신첩을 이리 몰아세우는 것입니까."허비는 고개를 든 채 눈물을 흘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며칠째 은총을 입고 있는 터라, 건양제가 현왕을 어디까지 감싸고도는지 시험해보고 싶은 속셈도 있었다."신첩이 먼저 혼사를 청한 것이 이런 식으로 곡해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허비는 서러운 얼굴로 건양제의 옷소매를 붙잡았다.건양제는 허비의 손을 가볍게 뿌리치고 미간을 찌푸린 채 허씨 노부인을 내려다보았다."방금 노부인이 말한 그 소문이라는 게 무엇인지 말해보라."군왕의 싸늘한 위압감에 허씨 노부인은 숨이 막혔다. 노부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건양제의 곁에 앉은 서 태후를 힐끗 쳐다보았다.서 태후는 싸늘한 눈빛을 하고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순간 노부인은 등골이 오싹해졌다."제가 우연히 듣기로 육씨 가문과 현왕비는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막역한 사이라고 합니다."하지만 자세한 관계에 대해서는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그럴듯한 변명으로 적당히 얼버무린 것이다.이를 본 건양제는 속을

  • 피안을 거슬러   제2화

    종령각 이층 누각.유지영은 부스스 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이곳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 유난히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회랑 아래에서는 하인들이 정원을 단장하며 내일 있을 성년례가 떠들썩할 거라며 수근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 눌렀다. 아픔이 몰려왔고, 곧바로 이 모든 게 꿈이 아님을 직감했다.그녀는 죽임을 당한 뒤 성년례 하루 전으로 돌아온 것이었다.이때 밖에서 고씨 어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가씨, 부인께서 대전으로 들라 하십니다. 경성에서 사람이 온 듯합니다.”전생의 배준형도 성년

  • 피안을 거슬러   제1화

    7월의 장안 거리는 굉장히 시끌벅적했다.마차 한 대가 성문 입구에서 멈추었다.털썩!유지영은 온몸이 꽁꽁 묶인 채 마대에 담겨 바닥에 내던져졌다. 온몸으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특히 하반신에서는 찢어질 듯한 고통이 계속되고 있었다.“읍….”지나가던 백성들이 소리를 듣고 마대를 풀어주었다.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사내의 옷가지를 걸친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하얗고 가는 목덜미 아래에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이 사람은 정왕 세자비 아닌가?”누군가가 유지영을 알아보고 비명을 질렀다.“옷매무새가 이 모양인 것을 보아 불결

  • 피안을 거슬러   제10화

    동금은 원래 표사의 딸이었으나 부모를 잃은 뒤 전당포에 팔려간 데다가, 전생에서는 실족사로 죽기까지 했다.충성을 맹세한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전생에 유지영을 배신하지는 않았다.매일 고된 일을 하는 사람이라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송씨에게서 문서를 기어코 받아낸 것을 보면 눈치도 빠르고 수완도 있는 듯했다.나머지는 아직 관찰 대상이었다.“오늘부터 종령각을 배신하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다.”유지영은 근엄한 표정으로 엄명을 내렸다.나머지 사람들은 주향 일당이 내쳐지는 것을 보았기에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방으로

  • 피안을 거슬러   제9화

    “선주는 참 복도 많아요. 이 집안의 복덩이라니까요.”이내 셋째 부인이 아부를 떨기 시작하자, 송씨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지영아, 그동안 경왕 세자의 평판이 어떤지 너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혼인한 뒤에는 조용히 지낼 수 있도록 네가 잘 붙들어야 한다. 어차피 훗날 경왕부 작위를 잇게 되면 먹고사는 걱정은 없을 테니, 제발 사고를 쳐서 우리 집안에 피해가 가는 일만은 없게 하거라.”유지영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당장 침소로 돌아가 한숨 자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다행히도 노부인이 이제 돌아가도 좋다는 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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