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때 이른 초여름의 열기가 훅 끼치던 5월의 어느 주말 오후.
나는 오랜만에 예전 학교 친구들인 현재, 승훈과 동네 햄버거 가게에 마주 앉아 있었다. "야, 윤태경. 전학 간 학교는 좀 살 만하냐? 너 하나 보겠다고 평택에서부터 올라오느라 뒤지는 줄 알았다." 현재가 감자튀김을 씹으며 툴툴거렸다. "미안, 멀리까지 와줘서 진짜 고맙다." 나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예전 학교에서 지독한 괴롭힘에 시달리다 못해, 도망치듯 타 지역으로 전학을 오며 홀로 자취까지 시작한 터라 친구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승훈이가 주변을 힐끗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예전 학교에서 너 괴롭히던 박상태 알지? 걔랑 친하게 지내던 최지훈이라는 놈이 지금 네가 다니는 성진고에 있댄다. 박상태 부탁받고 너 학교 오자마자 조지겠다고 엄청 벼르고 있었다더라." 최지훈. 그 이름을 듣자,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근데 대박인 게 뭔지 아냐?" 승훈이 낄낄거리며 콜라를 빨아들였다. "며칠 전에 그 최지훈 패거리가 너네 학교 짱이라는 어떤 미친 여학생한테 개박살이 났대. 아주 반 죽음이 돼서 쫄아가지고, 요즘 학교에서 쥐 죽은 듯이 다닌다더라. 이름이 이시은이라던가..." 입에 물고 있던 감자튀김이 테이블 위로 툭 떨어졌다. 지난번, 쉬는 시간에 매점 뒤에서 나를 둘러싸고 시비를 걸던 2학년 동급생들. 시은이가 자비 없이 짓밟아버렸던 그 무리의 우두머리가… 바로 최지훈이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툭 떨어진 감자튀김만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입안이 바싹 말라붙고,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만이 귓가를 미친 듯이 때리기 시작했다. . . 며칠 뒤 교실. 쉬는 시간, 교실 뒷자리에서 떠들던 김태호 패거리가 갑자기 내 쪽을 보며 손뼉을 쳤다. "야! 이번 주 토요일 이시은 생일이잖아. 윤태경 너 자취하지? 부모님도 없겠다, 이번 생일파티는 네 방에서 하면 딱이네!" 태호의 억지에 내가 당황해 굳어버리자, 엎드려 있던 시은이가 고개를 들었다. "야. 됐어." 시은이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며 나를 힐끗 노려보았다. "저 새끼 집 보나 마나 좁아터지고 냄새날 텐데 거길 뭐 하러 가." 하지만 태호 무리가 일제히 나를 에워싸고 험악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나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주먹만 꽉 쥔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아, 이시은 네가 몰라서 그래. 셔틀 방이 원래 존나 아늑하고 편해. 야, 윤태경. 토요일 콜이지?" 태호가 내 어깨를 꽉 쥐며 묻자, 나는 결국 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시은이는 한심하다는 듯 미간을 팍 구기며 쯧, 하고 짧게 혀를 찼다. "빵셔틀. 너도 목숨 연명하려면 생일 선물 쌈빡한 거 하나 바쳐야지?" 태호가 내 목에 팔을 두르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내가 딱 골라주는 이 특급 아이템만 바치면, 너 바로 셔틀 1등급 승진이다." . . 결전의 토요일 저녁. 내 작고 조용한 자취방은 일진 무리들의 시끌벅적한 생일 파티장이 되어버렸다. 케이크의 촛불을 끄고, 본격적인 선물 증정식이 이어졌다. "자, 시은아. 이건 우리 패거리가 돈 모아서 산 향수다." "어." 시은이가 치킨을 뜯으며 무심하게 선물을 받아 챙기자, 태호가 낄낄대며 나를 가리켰다. "야, 윤태경! 넌 우리 대가리한테 뭐 바칠 거냐? 빈손은 아니겠지?"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방구석에 숨겨두었던 작은 상자를 쭈뼛거리며 내밀었다. "생일 축하해…." "...웬일로 돈 좀 썼냐." 시은이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포장지를 뜯어냈다. 상자 뚜껑이 열리고, 그녀가 내용물을 끄집어냈다. 순간, 상자 안에서 툭 하고 딸려 나온 것은 아주 작고 아슬아슬한 새빨간 천 조각… 비키니 수영복이었다. "……." 시끄럽던 자취방 안이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푸하하하하하!!! 미친!! 야, 윤태경!! 너 돌았냐?!!" "와, 저 새끼 완전 변태네! 와하하하!!" 태호와 무리들이 배를 잡고 바닥을 뒹굴며 폭소를 터뜨렸다. 그제야 나는 태호의 악질적인 장난에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땀이 쫙 흘러내렸다. 시은이는 새빨간 비키니 조각을 손에 든 채 말이 없었다. 폭소하던 태호 무리의 웃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방 안의 공기가 급격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시은이의 서늘한 시선이 태호와 나를 번갈아 향했다. "김태호. 네가 시켰냐?" "아니! 윤태경 저 변태가 직접 골랐을 텐데?!" 태호가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시은이의 싸늘한 눈동자가 내게 와서 박혔다. 나는 사색이 되어 변명조차 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당장이라도 주먹이 날아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시은이는 짧게 혀를 한 번 쯧, 차더니 손에 들고 있던 수영복을 상자 안에 대충 쑤셔 넣었다. "…색깔은 맘에 드네." 그녀는 상자를 가방 안에 넣고는 맥주 캔을 집어 들었다. "더 쪼개는 새끼들 아가리 찢어버린다. 조용히 처먹어." 그 무심하고 살벌한 한마디에 방 안의 모두가 입을 다물고 얌전히 치킨을 뜯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바닥을 짚고 있던 두 팔에 툭 힘을 풀었다. 폭풍 같던 생일파티가 지나가고, 녀석들이 거실 한구석에서 내 플스2를 켜고 욕설을 내뱉으며 패드를 두드리고 있을 때였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내 옆으로 다가온 시은이가 빈 캔맥주를 만지작거리며 툭, 입을 열었다. "야, 변태." "어, 어?" "너 원래 공부할 시간일 텐데. 애들 때문에 시끄럽겠다." "아니야. 오늘 같은 날은 안 해도 돼." 내가 멋쩍게 대답하자, 시은이가 캔맥주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넌 왜 그렇게 맨날 코피 터지게 공부하냐?"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당장 뭐가 되고 싶다기보다는… 그냥 이렇게라도 안 하면 평생 남들 눈치나 보면서 살까 봐." 내 찌질하고 솔직한 대답에 시은이는 비웃지 않았다. 그녀는 무릎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 채 허공을 응시했다. "부럽네."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나는 미래가 그냥… 새카만 절벽 같은데." 그 텅 빈 고백에, 나는 며칠 전 비 내리는 날 좁은 방구석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던 그녀의 웅크린 뒷모습을 떠올렸다. "시은아." "왜." "그... 혹시 필요하면 공부라도 내가 도와줄게." "……." 게임기 소음이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거실. 시은이는 턱을 괸 채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무심하고 차가운 그 눈동자 속에 아주 미세한 일렁임이 스쳐 지나갔다. 이내 그녀가 시선을 거두고 픽, 헛웃음을 흘렸다. "미친 새끼." 그녀는 짧은 욕설을 툭 내뱉고는 다시 맥주 캔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늘 날이 서 있던 그녀의 옆얼굴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묘하게 누그러져 보였다.5월의 끝자락. 초여름의 끈적한 열기가 교정에 내려앉은 오후였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구관 복도를 순찰하던 내 곁으로, 아이들과 매점을 다녀오던 시은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걸음을 나란히 했다. 그녀는 다른 녀석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것을 확인하더니, 뾰족한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오늘 무슨 날인지 알지?" 기대감이 잔뜩 서린 까만 눈동자. 하지만 나는 애써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오늘? 목요일이잖아. 분리수거 하는 날." 내 건조한 대답에 시은이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집어삼키더니, 입술을 삐죽 내밀며 내 셔츠 소매를 꼬집듯 틀어쥐었다. "그래, 분리수거나 실컷 해라, 윤태경. 재활용도 안 되는 인간아." 시은이는 뾰루퉁한 얼굴로 휙 돌아서서 교실을 향해 쿵쿵거리며 걸어갔다. 나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애써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아야만 했다. .. [시은아, 나 오늘 교무실에 급한 업무가 좀 남아서. 도어록 비밀번호 치고 먼저 들어가 있어.] 시은이에게 거짓말 문자를 남겨둔 나는, 지금 내 자취방 한가운데서 앞치마를 두른 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형광등은 끄고 구석의 노란 스탠드 조명들만 켜두어 방 안을 제법 그럴싸한 무드로 꾸며놓은 참이었다. 가스레인지 위에는 아침부터 푹 끓인 미역국과 갈비찜 냄새가 달큰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테이블 중앙에는 단맛이 적고 묵직한 바디감이 일품인 레드 와인의 코르크를 따서 열어두고, 얇고 유려한 곡선의 크리스털 와인잔 두 개를 나란히 세팅했다. 평소 같으면 늘어난 반바지에 티셔츠 차
창고 밖에서는 김 선생의 구두 발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정적 속,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어둠 속에서도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는 시은이의 까만 눈동자와 끈질기게 시선이 얽혀들었다.시은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나는 그녀의 얇은 허리를 감아안으며 그대로 입술을 덮었다."읏…."시은이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려던 놀란 숨을 내가 깊게 삼켰다.그녀의 두 팔이 자연스럽게 내 목을 감아왔다.문밖에서 김 선생이 창고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덜그럭 소리가 들려왔지만, 조심스럽던 입맞춤은 그 위태로운 긴장감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짙고 거칠어졌다.서로의 숨이 얽히는 소리만이 좁은 창고 안을 뜨겁게 채우고 있었다.얼마나 지났을까."밖으로 갔나…."김 선생의 중얼거림과 함께 구두 발소리가 계단 아래로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우리는 천천히 입술을 떼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어둠 속에서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나는 시은이의 어깨를 가볍게 쥐고 물었다."어쩌자고 애들하고 술을 마셨어. 들키면 어쩌려고."내 물음에 시은이는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스윽 닦아내며 작게 헛기침을 했다."수아가 가방에 몰래 챙겨왔더라고. 안 마시려고 했는데… 옛날 생각도 좀 나고, 오늘 기분도 좋아서 나도 모르게 반 병이나 마셔버렸네."시은이의 대답에 내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10년 전, 우리의 수학여행 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10년 전 그날 밤도 그랬다.방에서 비밀리에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을 때, 복도 끝에서 '미친개' 학생주임의 서슬
고등학교 시절의 꽃, 수학여행. 목적지는 탁 트인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동해 바다였다. 숙소인 해변가 리조트에 짐을 풀고 백사장으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멀찍이 그늘에 서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은이는 28살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파도를 피해 도망치며 쉴 새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있던 시은이가 나를 발견했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장난기로 반짝이더니, 옆에 있던 민재와 아이들을 불러모아 무언가를 속닥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야! 호랑이 쌤 덮쳐!!" 시은이의 외침과 함께,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나를 향해 돌진해왔다. "어, 어? 야, 너희들 뭐 하는… 으아악!" 반항할 새도 없이 녀석들에게 팔다리가 들린 나는 그대로 얕은 바닷물 속으로 속절없이 내동댕이쳐졌다. 짠물이 코로 훅 들어왔다. 물기를 털어내며 기가 막혀 허우적거리자, 내 코앞에서 배를 잡고 숨이 넘어가게 웃고 있는 시은이가 보였다.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은 채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호랑이 선생님! 바닷물 시원하죠?!" 나는 겉옷을 대충 벗어 던지고 물장구를 치며 아이들 틈으로 뛰어들었다. 시은이는 내 물세례를 피하며 비명을 지르고 도망쳤고, 나는 그런 그녀의 뒤를 쫓으며 원 없이 웃었다. 선생의 체면 같은 건 이미 파도에 휩쓸려간 지 오래였다. .. 문제는 저녁 장기자랑을 불과 몇 시간 앞둔 때 터졌다. "아악!" 리조트 로비 계단에서 장난을 치며 뛰어내려 오던 민재가 발목을 심하게 접질린 것이다.
5월 15일, 스승의 날. 출근길, 평소라면 무거운 공기만 감돌았을 교무실 복도였지만 오늘만큼은 내 발걸음도 미세하게 가벼웠다. 하지만 그 소박한 기대는 2층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산산조각이 났다. "이지안! 전학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남의 학교 애들을 패고 다녀?!" 복도 한가운데서 생활지도부장 김 선생이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 앞에는 코피가 터진 채 훌쩍이는 민재, 잔뜩 겁에 질려 눈물을 훔치는 수아, 그리고 짝다리를 짚고 선 시은이가 있었다.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시은이의 상태부터 살폈다. 찢어진 셔츠와 긁힌 뺨.하지만 빳빳하게 든 그녀의 고개엔 일말의 반성 대신 차가운 냉기만이 서려 있었다. "김 선생님. 아침부터 무슨 일입니까." 내가 다가가 앞을 막아서자, 김 선생이 삿대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윤 선생 마침 잘 왔소. 이 전학생 녀석이 등굣길 골목에서 옆 학교 애들 셋을 피떡으로 만들어 놨어!놈들 다 구급차 실려 가게 생겼다고!" "선생님, 아니에요!" 김 선생의 호통에 수아가 눈물을 훔치며 소리쳤다. "그 새끼들이 먼저 민재 때리고 제 머리채까지 잡았단 말이에요!지나가던 3학년 선배들은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지안이가 뛰어들어서 저희 살려준 거예요!" 수아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내 시선이 복도 끝으로 향했다. 며칠 전 점심시간, 시은에게 담배를 건넸던 3학년 무리가 창틀에 기대어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중 우두머리 격인 녀석이 시은과 눈이 마주치자 씩 웃으며 짧게 고개를 까닥이고는 계단 밑으로 사라졌다. "이유가 어찌 됐든 폭력은 폭력이야! 당장 징계위원회 열어서…."
좁은 자취방에서 서로의 온기를 확인했던 그 뜨거웠던 밤 이후, 학교에서의 우리는 전보다 훨씬 더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줄타기를 시작했다. 겉으로는 여전히 무자비한 '호랑이 담임'과 '구제 불능 전학생'이었지만, 교차하는 시선 속에는 오직 둘만이 아는 은밀한 열기가 맴돌고 있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복도 순찰을 돌던 나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복도 저편에서 걸어오는 시은이의 모습 때문이었다. 나는 멈칫하며, 그녀의 짙은 립스틱과 지나치게 짧은 치마를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복장 불량. 학생부 문서보관실로 따라와." 나는 차갑게 명령하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시은이는 아이들이 보는 앞이라 작게 콧방귀를 뀌었지만, 이내 묵묵히 내 뒤를 따랐다. 창문 하나 없이 캐비닛만 빼곡하게 들어찬 좁고 어두운 문서보관실. 시은이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철컥, 소리가 나도록 문을 잠가버렸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서서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뒷걸음질 치던 시은이의 등이 차가운 캐비닛에 닿았다. 나는 양팔을 뻗어 캐비닛을 짚고, 그녀를 내 넓은 어깨와 가슴팍 사이의 그림자 안에 완벽하게 가두어버렸다. 시은이가 얼굴을 들려던 찰나,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에 발린 짙은 립스틱을 스윽, 거칠게 문질러 닦아냈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이런 진한 화장에 치마를 줄여." 나의 짙고 억눌린 목소리가 좁은 방 안을 울렸다. "아무리 수사 때문이라도, 내 눈 돌아가는 꼴 보고 싶어?"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시은이가 어이없다는 듯 따져 물었다. "아니, 왜 10년 전하고 비밀번호가 똑같아? 1204. 설마 하고 눌러봤는데 덜컥 열려서 소름돋았네. 어쩌려고 비번도 안 바꾸고 살아, 위험하게." 그녀의 타박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깨를 으쓱했다. "너 언제든 들어오라고 안 바꾼 건데." 내 무심한 대답에 시은이의 잔소리가 뚝 끊겼다. 그녀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이내 붉어진 귀끝을 숨기려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바닥으로 피했다. 나는 그 틈을 타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 씻고 와. 밥 해줄게." 도마 위에서 양파와 소고기를 써는 동안, 시은이는 식탁에 턱을 괴고 앉아 내 뒷모습을 빤히 구경했다. "야, 고기 냄새 장난 아니다. 근데 우리 이 좋은 안주에 술은 없어?" 시은이가 짓궂은 눈웃음을 지으며 묻자, 나는 프라이팬의 불을 줄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우리 진짜 알코올 중독인 거 아니냐. 만날 때마다 술이네." "뭐 어때. 형사가 흉악범들 상대하려면 알코올 소독은 필수야." 뻔뻔한 대답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주방 구석의 작은 와인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눕혀두었던 레드와인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왔다. "그래, 뭐 내일 주말이니까." 내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묵직한 와인병을 보며 시은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오, 뭔가 좀 비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