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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제8화: 찢어진 셔츠, 그리고 구겨진 카네이션

Author: 오필리아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9 22:00:36

5월 15일, 스승의 날.

출근길, 평소라면 무거운 공기만 감돌았을 교무실 복도였지만 오늘만큼은 내 발걸음도 미세하게 가벼웠다.

하지만 그 소박한 기대는 2층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산산조각이 났다.

"이지안! 전학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남의 학교 애들을 패고 다녀?!"

복도 한가운데서 생활지도부장 김 선생이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 앞에는 코피가 터진 채 훌쩍이는 민재, 잔뜩 겁에 질려 눈물을 훔치는 수아, 그리고 짝다리를 짚고 선 시은이가 있었다.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시은이의 상태부터 살폈다.

찢어진 셔츠와 긁힌 뺨.

하지만 빳빳하게 든 그녀의 고개엔 일말의 반성 대신 차가운 냉기만이 서려 있었다.

"김 선생님. 아침부터 무슨 일입니까."

내가 다가가 앞을 막아서자, 김 선생이 삿대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윤 선생 마침 잘 왔소. 이 전학생 녀석이 등굣길 골목에서 옆 학교 애들 셋을 피떡으로 만들어 놨어!

놈들 다 구급차 실려 가게 생겼다고!"

"선생님, 아니에요!"

김 선생의 호통에 수아가 눈물을 훔치며 소리쳤다.

"그 새끼들이 먼저 민재 때리고 제 머리채까지 잡았단 말이에요!

지나가던 3학년 선배들은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지안이가 뛰어들어서 저희 살려준 거예요!"

수아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내 시선이 복도 끝으로 향했다.

며칠 전 점심시간, 시은에게 담배를 건넸던 3학년 무리가 창틀에 기대어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중 우두머리 격인 녀석이 시은과 눈이 마주치자 씩 웃으며 짧게 고개를 까닥이고는 계단 밑으로 사라졌다.

"이유가 어찌 됐든 폭력은 폭력이야! 당장 징계위원회 열어서…."

김 선생이 다시 목소리를 높이려는 찰나,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김 선생님. 제 반 학생입니다."

내 견고한 목소리에 김 선생의 턱관절이 굳어졌다.

"집단 구타를 당하고 있던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뛰어든 겁니다. 명백한 정당방위입니다."

"뭐, 뭐요? 윤 선생 지금 제정신이야?"

"만약 그쪽 양아치들이 억지를 부린다면, 담임인 제가 직접 나서겠습니다. 놈들을 특수폭행 혐의로 정식 고발할 테니, 징계위원회를 여시려거든 여시죠. 끝까지 가겠습니다."

내 단호한 선언과 매서운 눈빛에 김 선생은 헛기침을 하더니, "당신 반 애들 관리는 당신이 알아서 해!"라는 핑계를 남기고 홱 돌아가 버렸다.

나는 엉망이 된 세 녀석의 어깨를 툭툭 치며 보건실로 보냈다.

아침부터 전쟁을 치르고 나니 교무실 분위기는 살얼음판이 되었고, 스승의 날의 낭만 같은 건 이미 먼지처럼 날아가 버린 뒤였다.

.

.

어느덧 하교를 알리는 종례 시간.

"자, 다들 딴 데로 새지 말고 바로 집으로 가라. 아침에 험한 꼴 본 녀석들은 푹 쉬고. 종례 끝."

내가 피곤한 눈을 비비며 출석부를 덮고 교실 앞문을 나서려던 찰나였다.

"선생님, 잠시만요."

창가 자리에 앉아있던 시은이가 불쑥 일어났다.

반 아이들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그녀가 뚜벅뚜벅 교탁 앞으로 걸어 나왔다.

시은이가 뚜벅뚜벅 교탁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아이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각도에서 내 셔츠 주머니에 무언가를 꾹 찔러 넣었다.

아침의 난투극 탓인지 투명 포장지가 심하게 구겨진 빨간 카네이션이었다.

"…아침부터 사고 치고 속 썩여서 죄송해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시선을 내리깐 그녀의 귀끝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시은이의 행동을 신호탄으로, 민재와 수아가 교탁으로 뛰어나와 롤링 페이퍼를 건넸다.

"선생님! 아침에 저희 지켜주셔서 진짜 감사합니다!"

"호랑이 쌤! 스승의 날 축하드려요!"

그 뒤를 이어 반 아이들이 일제히 책상을 치며 함성을 질렀다.

가슴팍에 달린 구겨진 카네이션에서 옅은 비누 향이 났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씰룩이는 입꼬리를 꾹 눌러 참았다.

.

.

하교 시간 직후.

교문에서 두 블록 떨어진 한적한 골목길.

내 차 조수석 문이 열리고 바람막이를 걸쳐 입은 시은이가 올라탔다.

철컥.

안전벨트를 매는 그녀를 보며 내가 먼저 조수석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다친 데는 없어?"

내 조심스러운 물음에 시은이는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뺨 살짝 긁힌 게 다야. 애들 맞는 거 보니까 눈이 돌아서 뵈는 게 없었어."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하얀 뺨에 그어진 옅은 생채기를 조심스럽게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잘했어. 그래도 다치진 마."

"근데 웃긴 건, 아까 하교할 때 3학년 그놈이 따로 부르더라. 자기들 단톡방에 초대해 주겠다고. 내일부터 진짜 그놈들 아지트에 합류할 것 같아."

위험한 적진 한가운데로 발을 들이게 된다는 뜻이었다.

무거운 긴장감이 차 안을 스쳤지만, 나는 불안을 억누르며 송풍구 거치대 위에 소중하게 꽂아둔 붉은 카네이션을 바라보았다.

시은이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 꼬깃꼬깃한 꽃잎에 머물렀다.

"아씨… 꽃 다 구겨졌네. 원래는 엄청 멋있게 주고 싶었는데."

"내 인생 최고의 카네이션이야. …근데 시은아, 진짜 바로 찾아봬도 괜찮겠어?"

내 물음에 차창 밖을 내다보던 시은이의 손가락이 바람막이 지퍼를 만지작거렸다.

"오늘 스승의 날이잖아."

낮게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에 10년의 묵직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나 경찰 되고 나서 꼭 한번 뵙고 싶었어. 오늘 아니면 또 언제 용기 내겠냐."

핸들을 쥔 내 손에 조용히 힘이 들어갔다.

"가자. 선생님도 너 엄청 보고 싶어 하셨어."

내가 엑셀을 밟아 막 차를 출발시키려던 찰나, 시은이의 주머니에서 요란하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시은이의 입가에, 평소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기특하고도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어, 그래. 바빠 죽겠는데 무슨 스승의 날이라고 전화까지 해, 징그럽게."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는 말투였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씩씩하게 재잘거리는 여자아이의 목소리를 듣는 시은이의 눈매는 한없이 다정하게 휘어져 있었다.

"선물은 됐으니까 거기서 구르는 거나 요령 피우지 말고 똑바로 해. 다치지 말고. 그래, 끊는다."

통화를 마치고 휴대폰을 내려놓는 그녀를 보며,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누구야? 경찰서 후배야?"

"아니. 내 수제자."

시은이가 자랑스럽게 코끝을 찡긋하며 대답했다.

"수제자? 네가 제자가 있어? 스승의 날이라고 전화까지 올 정도면 보통 인연이 아닌가 본데."

"훗, 네가 몰라서 그렇지. 내가 작년에 서울에 있을 때 말이야—"

시은이는 기다렸다는 듯 조수석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대며 무용담을 보따리 풀듯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 년 전 서울에서 겪었다는 그녀의 기상천외한 활약상을 반주 삼아, 우리의 차는 정인숙 선생님이 계신 조용한 주택가를 향해 달렸다.

.

.

붉은 노을이 내려앉은 조용한 주택가.

아담한 마당이 딸린 하얀 단독주택 앞에 차가 멈춰 섰다.

대문 앞에 선 시은이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시은아."

내가 그녀의 차갑게 식은 손을 부드럽게 쥐어주자, 시은이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딩동-

맑은 초인종 소리가 울리고,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며 중년 여성이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세월이 흘러 눈가에 주름은 깊어졌지만, 여전히 꼿꼿하고 단정한 풍채의 정인숙 선생님이었다.

"어머, 태경이 왔니? 스승의 날이라고 또 바쁜 놈이 여기까지…."

문을 열며 반갑게 웃으시던 정 선생님의 목소리가 일순간 뚝 끊겼다.

선생님의 시선이 내 곁에 우두커니 서 있는 시은이에게 닿은 순간이었다.

"…너……."

선생님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랗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은이니? 정말로… 시은이야?"

선생님의 젖어 드는 떨리는 목소리에, 꼿꼿하게 서 있으려 애쓰던 시은이의 어깨가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시은이는 입술을 꽉 깨물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선생님… 늦게 찾아봬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 한마디가 떨어지기 무섭게, 정인숙 선생님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겨 시은이를 두 팔로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으셨다.

"이 녀석아… 잘 컸구나. 이렇게 무사히 잘 커서 와줬어…."

선생님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그 새벽에 네가 남기고 간 쪽지 붙들고 내가 얼마나 가슴을 쳤는지 아니…. 미안하다, 시은아. 내가 끝까지 널 붙잡았어야 했는데…."

시은이 역시 선생님의 품에 얼굴을 묻고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아니에요… 선생님 덕분에 저 안 삐뚤어지고 잘 살았어요. 저… 경찰 됐어요, 선생님…."

정 선생님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떼어내고, 시은이의 젖은 얼굴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쓸어내리셨다.

"경찰이라니… 세상에, 우리 시은이가 경찰이 됐어…."

호랑이 선생이 되어 은사의 뒤를 잇고 있는 제자와, 세상의 가시를 뚫고 당당한 경찰이 되어 돌아온 제자.

마당에 불어오는 따스한 5월의 저녁 바람 속에서, 10년 전 그 차가웠던 교무실 바닥에 흩뿌려졌던 슬픔과 상처가 마침내 온전한 빛으로 치유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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