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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화. 두 해 끝에 밝아온 아침

last update Veröffentlichungsdatum: 29.10.2026 04:06:42

약속한 두 해 동안 햇살은 단 한 번도 대충 도진의 곁에 있지 않았다.

계약으로 시작했어도 함께 있는 동안만큼은 진심이었다.

도진이 새벽에 다쳐 들어온 날이면 잔소리부터 하면서도 약상자를 꺼냈다.

“또 어디서 처맞고 왔어.”

“내가 때렸지.”

“그럼 왜 오빠가 피 나.”

입으로는 구박하면서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았다. 도진이 아프다고 하면 더 세게 누르며 까르륵 웃었다.

생일에는 직접 케이크를 사왔다.

초가 몇 개인지 세지 말라며 숫자초 하나만 꽂았고, 술 대신 미역국을 내놓았다.

“조직 두목도 생일엔 미역국 먹어야 돼.”

“네가 끓였어?”

“사왔지.”

“그럴 줄 알았다.”

그래도 둘은 마주 앉아 촛불을 껐다.

잠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햇살은 다른 사람을 떠올리지 않았다.

도진을 바라봤고, 도진의 이름을 불렀다.

끝이 정해져 있다는 이유로 마음까지 아끼지는 않았다.

도진 역시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욕심이 났다.

그 사이 햇살은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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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120화. 오래 빈 자리에 부는 바람

    저녁밥상에는 된장찌개 냄새가 짙었다. 예주는 우식 앞에 고등어를 밀어놓고 한참 말이 없었다. 숟가락을 들었다 놓은 끝에 먼저 입을 열었다. “우식아.” “응.” “너 선 한번 봐라.” 우식의 숟가락이 멈췄다. 춘덕도 국을 뜨다 슬쩍 아들을 봤다. 예주는 모른 척 반찬통 뚜껑을 열었다. “읍내 약국집 딸이란다. 나이도 너랑 비슷허고, 사람도 참하대.” “안 봐.” 짧았다. 예주는 예상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또 그것이냐.” 우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그럴래.” “뭘.” “햇살이 기다리는 거.” 우식의 눈이 천천히 들렸다. 예주는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왔음 진작 왔어.” 밥상 위가 조용해졌다. “그 애가 너 잊었단 말이 아니다. 서울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제.” 예주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근디 벌써 몇 년이냐.” 우식은 밥을 한 숟갈 떠 입에 넣었다. 씹는 동안에도 말은 없었다. 예주가 다시 말했다. “기다리는 것도 사람이 살아가면서 해야지. 니 인생을 통째로 세워놓고 기다리믄 쓰겄냐.” 춘덕이 낮게 헛기침했다. “여보.” “내가 틀린 말 했어?” “밥 먹을 때 좀 살살 혀.” “맨날 살살 하다 저놈 머리 희어지겄어.” 우식은 고등어 가시를 조용히 발라냈다. 예주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한 번만 만나봐. 맘에 안 들면 안 만나면 되잖여.” “싫어.” “얼굴도 안 보고?” “응.” “이유가 뭐냐.” 우식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좋아하는 사람 있어.” 예주의 눈썹이 푹 내려갔다. “그 사람 여기 없잖아.” “있다고 없어지는 건 아니야.” 예주는 입을 다물었다. 춘덕도 더는 숟가락을 움직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응, 아니, 됐어로 끝냈을 아들이었다. 그런 우식이 저렇게 긴 말을 했다. “엄마가 햇살이 싫어서 이러는 줄 아냐.” “아니.” “나도 그 애 보고 싶어.” 예주의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119화. 저녁바람이 머문 자리

    그해 시골에는 유난히 비가 적었다. 논둑은 일찍 마르고, 소들이 밟고 지나간 흙길에서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른 먼지가 일었다. 우식은 해가 기울 무렵까지 축사에 남아 있었다. 사료통을 확인하고 물통을 갈고, 마지막 송아지 상태까지 살핀 뒤에야 장화를 벗었다. “야, 소우식!”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춘식이었다. 마트 봉지를 한 손에 들고 논길을 건너오는데, 그 뒤로 노향도 따라오고 있었다. “니 오늘도 밥 안 묵었제?” 우식은 대답 대신 축사 문을 닫았다. “먹어.” “언제.” “아까.” 춘식이 노향을 돌아봤다. “거 봐라. 저 새끼 아까라믄 점심인지 새참인지 아무도 모른당께.” 노향이 웃으며 봉지를 빼앗았다. “아주머니가 반찬 가져다주래. 그리고 너 또 허리 아프다고 했다며?” “안 아파.” “예주 아주머니는 아프다던데.” 우식은 말없이 봉지를 받아 들었다. 그 안에는 장조림과 부침개, 잘 익은 참외가 들어 있었다. 춘식이 혀를 찼다. “넌 서른 다 돼가는 놈이 맨날 엄니가 반찬 챙겨줘야 쓰겄냐.” 우식이 춘식을 봤다. “너도 먹잖아.” 노향이 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춘식은 입을 다물었다가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노향이가 챙겨주기도 허거든?” “내가 언제?” “어제 김밥.” “그건 네가 세 줄이나 달라고 해서 준 거고.” “그게 챙겨준 거제.” 둘이 티격거리는 동안 우식은 먼저 걷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낮은 담장과 논 사이로 난 길. 오래된 느티나무. 그리고 조금 더 가면 나오는 빈집. 우식의 걸음이 아주 잠깐 느려졌다. 오빛나와 오햇살이 살았던 집이었다. 사람이 떠난 지 오래였지만 집은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담장 아래에는 올해도 들꽃이 피었다. 노란 꽃 몇 송이가 저녁바람에 흔들렸다. 춘식이 뒤에서 말했다. “올해도 폈네.” 우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노향도 빈집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연락은 아직 없어?”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118화. 돌아온 자리의 온도

    현관문 앞에 선 햇살은 한동안 열쇠를 돌리지 못했다. 두 해 전 떠날 때와 같은 문이었다.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숨을 한번 고른 뒤 천천히 문을 열었다. 철컥. 익숙한 냄새가 먼저 밀려왔다. 햇살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집 안을 바라봤다. “나왔어~.” 밝게 꺼낸 목소리가 조용한 거실에 퍼졌다. 대답은 없었다. 그래도 햇살은 웃었다. “계진성. 나 왔다고.” 소파 등받이에는 진성이 입던 검은 후드가 그대로 걸려 있었다. 식탁 위치도, 창가의 이젤도, 스케치북을 올려두던 작은 탁자도 변한 게 없었다. 장미가 약속대로 집을 지켜준 모양이었다. 먼지만 없었다. 그뿐이었다. 어제까지 누군가 살고 있었던 집처럼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햇살은 천천히 거실을 걸었다. 창가에는 나무 들꽃도 그대로였다. 손끝으로 꽃잎을 한번 쓸었다. “안 시들었네.”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꽃을 처음 만들어준 사람은 우식이었다. 그리고 그 꽃을 바라보며 다시 그림을 시작하라고 이젤을 사다 놓은 사람은 진성이었다. 햇살은 한동안 그 앞에 서 있다가 침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발걸음이 잠깐 멎었다. 침대. 베개 두 개. 진성이 쓰던 자리. 모두 그대로였다. 햇살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매트리스가 몸 아래로 천천히 꺼졌다. 예전처럼 옆자리를 한번 손으로 더듬었다. 차가웠다. “나 졸업했어.”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오빠가 하랬던 거 다 했어.” 대답은 없었다. “검정고시도 붙었고, 대학도 갔고, 졸업도 했고.” 햇살은 피식 웃었다. “나 좀 대단하지?”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 눈물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 떠나 있던 자기 자리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햇살은 진성이 쓰던 베개를 끌어안았다. “나 좀 잘게.” 그날 햇살은 오랜만에 깊이 잠들었다. 꿈도 꾸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는 오후였다. 창문 사이로 햇빛이 길게 들어와 있었다. 햇살은 한동안 멍하니 누워 있다가 몸을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117화. 두 해 끝에 밝아온 아침

    약속한 두 해 동안 햇살은 단 한 번도 대충 도진의 곁에 있지 않았다. 계약으로 시작했어도 함께 있는 동안만큼은 진심이었다. 도진이 새벽에 다쳐 들어온 날이면 잔소리부터 하면서도 약상자를 꺼냈다. “또 어디서 처맞고 왔어.” “내가 때렸지.” “그럼 왜 오빠가 피 나.” 입으로는 구박하면서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았다. 도진이 아프다고 하면 더 세게 누르며 까르륵 웃었다. 생일에는 직접 케이크를 사왔다. 초가 몇 개인지 세지 말라며 숫자초 하나만 꽂았고, 술 대신 미역국을 내놓았다. “조직 두목도 생일엔 미역국 먹어야 돼.” “네가 끓였어?” “사왔지.” “그럴 줄 알았다.” 그래도 둘은 마주 앉아 촛불을 껐다. 잠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햇살은 다른 사람을 떠올리지 않았다. 도진을 바라봤고, 도진의 이름을 불렀다. 끝이 정해져 있다는 이유로 마음까지 아끼지는 않았다. 도진 역시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욕심이 났다. 그 사이 햇살은 대학도 졸업했다. 졸업장을 받아든 날 도진은 꽃다발보다 먼저 두툼한 봉투를 내밀었다가 햇살에게 등짝을 맞았다. “누가 졸업 선물로 돈을 줘.” “싫으면 줘.” “싫다고는 안 했어.” 그날도 둘은 오래 웃었다. 그리고 약속한 마지막 밤이 왔다. 둘은 침대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말을 하다가 입을 맞췄고, 웃다가 다시 서로를 끌어안았다. 새벽이 몇 번이나 깊어졌다가 창밖이 푸르게 밝아올 때까지 둘 사이의 온기는 식지 않았다. 아침이 됐을 때 햇살은 도진의 팔을 베고 누워 있었다. 도진이 낮게 물었다. “진짜 연장 안 되냐?” 햇살은 눈도 뜨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응.” “칼같네.” 그제야 눈을 뜬 햇살이 도진을 올려다봤다. “팔자 사나운 년하고 뭣하러 더 살아.” “내가 괜찮다는데.” “나는 안 괜찮아.” 도진의 눈빛이 잠깐 굳었다. 햇살은 웃으며 그의 턱을 잡았다. “약속은 약속이지.” 그리고 입을 맞췄다. 짧지 않았다. 두 해 동안 익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116화. 바람이 머문 물가

    진건을 보내고 난 뒤, 태만은 진주와의 이혼 절차까지 끝냈다. 도장을 찍는 순간에도 이상할 만큼 아무 감정이 없었다. 오래 끌어온 결혼이 끝났는데 후련하지도, 허무하지도 않았다. 그저 너무 늦었다는 생각만 들었다. 진주는 마지막까지 소리쳤다. 건이까지 보내놓고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태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말에 대답할 자격이 자기에게 있는지도 몰랐다. 서류를 정리한 날, 태만은 차를 몰고 한참을 달렸다. 사람이 드문 물가였다. 오래전 빛나의 재를 뿌렸던 곳. 그날도 바람이 불었고, 오늘도 같은 방향으로 물결이 밀려왔다. 태만은 차에서 내려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손에는 꽃 한 다발이 들려 있었다. 화려한 꽃은 아니었다. 길가에서 산 작고 수수한 흰 꽃이었다. 물가 가까이 내려가 꽃을 내려놓았다. “빛나야.”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목이 막혔다. 예전에는 너무 쉽게 불렀던 이름이었다. 햇살이 어릴 때 셋이 함께 웃던 날에도. 몰래 찾아간 시골집 마당에서도. 떠날 때마다 금방 다시 온다고 말하던 순간에도. 태만은 무릎을 굽혀 물가에 앉았다. “미안해.”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외롭게 해서.” 목소리가 갈라졌다. “혼자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태만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처음 진주의 협박을 받았을 때는 물러나는 게 빛나와 햇살을 지키는 일이라고 믿었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조금만 더 기다리면 자기가 전부 정리해서 돌아갈 수 있다고. 그 조금이 몇 년이 됐다. 빛나는 기다리다 무너졌고, 햇살은 자기 손으로 떼어놓았다. 그리고 결국 아무도 지키지 못했다. “그때 그냥 밀고 나갔어야 했는데.”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흘렀다. “무서워도 너한테 갔어야 했는데.” 태만은 고개를 들었다. 잔잔한 물 위로 햇빛이 부서졌다. “네가 나한테 당장 오라고 했을 때.” 숨을 삼켰다. “왜 나는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했을까.” 빛나가 했던 말이 이제야 선명했다. 그 말이 제일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115화. 붉은 구두가 돌아온 밤

    앨리의 문이 열리자 카운터에 있던 장미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새빨간 드레스. 새빨간 구두. 입술까지 붉게 칠한 햇살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오햇살?” 햇살은 대답 대신 성큼성큼 다가갔다. 장미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두 팔로 허리를 끌어안았다. “언니.” “너 여기 왜 왔어.” 장미의 목소리가 바로 낮아졌다. “내가 2년 동안 오지 말랬지? 아니, 네가 안 온다며.” 햇살은 장미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까르륵 웃었다. “나 오늘 손님이야.” “뭐?” “손님.” 고개를 든 햇살이 눈을 휘었다. “도진 오빠도 올 거야~.” 장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햇살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너 장례식 갔다 왔지.” “응.” “무슨 일 있었어.” “많았지.” “울었어?” 햇살은 웃었다. “아니.” 그 대답이 장미의 얼굴을 더 굳게 만들었다. “진짜 하나도?” “응.” “오햇살.” “언니.” 햇살이 다시 품으로 파고들었다. “오늘은 묻지 마.” 장미의 손이 천천히 햇살 등을 감쌌다. “……그래.” “술이나 줘.” “너 술 처먹으려고 여기까지 왔냐.” “응. 비싼 걸로.” “미친년.” “손님한테 서비스가 왜 그래?” 장미가 결국 코웃음을 쳤다. “돈은 있냐?” “우리 도진 오빠 돈 많아.” “남의 돈으로 큰소리는.” “애인 포함비.” 햇살이 능청스럽게 말하며 단골방 하나를 가리켰다. “거기 써도 돼?” “오늘만.” “역시 우리 언니.” 햇살은 장미 팔에 매달린 채 방으로 들어갔다. 평소 자기가 손님을 받던 방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소파 가운데에 털썩 앉아 다리를 꼬았다. “이상하다.” 장미가 술병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뭐가.” “맨날 저쪽에 앉았는데.” 햇살이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오늘은 여기 앉으니까.” 장미는 아무 말 없이 잔을 꺼냈다. 햇살은 붉은 구두를 벗어 소파 아래로 밀어놓았다. 맨발이 되자 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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