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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화면 너머로 흘려보낸 균열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2 15:00:21

회사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낮 동안 분주하게 움직이던 직원들의 발걸음과 대화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지만,

건우에게는 그 모든 것이 얇은 막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익숙한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그 안에 숨어 있는 균열이 더 또렷하게 보였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층수가 올라갈수록 숫자가 하나씩 바뀌었고, 그 단순한 변화가 오히려 긴장감을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

문이 열리자 복도가 나타났다.

형이 매일 걸어 다니던 길이었다.

건우는 잠시 그 복도를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하나는 그의 옆을 따라 걸었고, 서하는 조금 뒤에서 느리게 발걸음을 맞췄다.

사무실 문을 열자 직원 몇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오셨습니까.”

짧은 인사가 오갔다.

건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로 향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출근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도는 완전히 달랐다.

자리에 앉은 건우는 노트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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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수의 밤   231. 이게 틀렸다는 걸 보여주는 수밖에

    여자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 흔한 질문은 아니라는 반응이었다. 그녀는 잠깐 생각하는 시간을 둔 뒤 입을 열었다.“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다만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습니다.”그녀는 말을 더 길게 붙이지 않았다. 설명을 늘리기보다, 결론만 남기는 쪽을 택한 느낌이었다.건우는 더 묻지 않았다.어느 쪽을 선택하든 결국 하나가 밀려난다는 구조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였고, 차이가 있다면 속도나 방식 정도일 뿐이라는 걸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그는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말했다.“결국 하나만 남긴다는 얘기로 들리네요.”여자는 이번에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부정하지 않는 침묵은, 때로는 긍정보다 더 분명하게 들릴 때가 있다.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서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건우야.”목소리는 낮았지만, 이전보다 조금 더 또렷했다.건우가 시선을 돌리자, 서하는 장치가 아니라 건우를 보고 있었다.“아까 했던 말, 기억하지.”그녀는 확인하듯 말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 위에서 꺼낸 문장이었다.“둘 다 안 버린다고 했잖아.”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방 안 공기가 다시 한 번 달라졌다.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을 번갈아 보는 시선이 조금 더 신중해졌다.건우는 서하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냈다.“기억해.”짧게 끊지 않고, 그대로 이어갔다.“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고.”서하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여기서도 같은 말 할 수 있어?”이 질문은 이전과 다르게 무게가 있었다. 단순히 감정적으로 꺼낸 말이 아니라, 지금 보고 있는 구조 앞에서도 그 선택을 유지할 수 있느냐를 묻고 있었다.건우는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여기서도 똑같아.”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상황 바뀌었다고 말 바꾸는 쪽으로는 안 간다.”서하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다만 숨을 천천히 내쉬면서, 방금 들은 말을 자기 안에서 한 번 더 굴리는 것처럼 보였다.“그럼

  • 형수의 밤   230. 더는 물러서지 않는다

    “점점 나오기 어려워지죠.”건우는 더 묻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서하는 그 화면을 오래 보지 않았다. 오히려 건우를 보고 있었다. 마치 그 장치를 통해 자기 상태를 확인하는 것보다, 이걸 본 건우가 어떤 얼굴을 하는지 먼저 확인하고 싶은 사람처럼. 건우는 그 시선을 느끼고도 바로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아주 천천히 손을 장치에서 뗐다. 화면은 몇 초 더 남아 있다가, 다시 흐릿해지며 처음처럼 의미를 읽기 어려운 상태로 돌아갔다.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그 조용함은 아까와는 달랐다.설명 이전의 침묵이 아니라, 보고 난 뒤의 침묵이었다. 사람은 눈으로 확인한 뒤엔 같은 방식으로 모른 척할 수 없다. 건우는 그걸 너무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그 순간, 처음으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이곳은 치료하는 곳이 아니다.희망을 주는 곳도 아니다.그저, 누가 더 오래 남을 수 있는지를 조용히 보여주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곳이다.그게 건우에겐 무엇보다 불쾌했다.그래서 오히려 더 물러서기 싫어졌다.방 안에 내려앉은 침묵은 조금 전과는 성질이 달라져 있었다. 아직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이미 서로가 봐버린 것이 있다는 사실이 공간 전체를 눌러두고 있었다. 건우는 장치에서 시선을 떼고도 한동안 같은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앞에는 아무것도 떠 있지 않았지만, 방금까지 화면 위에 남아 있던 흐름이 머릿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한쪽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퍼져 있었고, 다른 한쪽은 같은 공간 안에서 계속 경계를 흔들며 자리를 밀어내려는 듯한 움직임을 반복하고 있었다.그는 손을 천천히 내리며 숨을 고른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여자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처음 마주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시선의 결이 달라져 있었다. 처음에는 상태를 확인하는 눈이었다면, 지금은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확인만 하는 눈에 가까웠다. 무엇을 설명할지

  • 형수의 밤   229. 얼마나 남아 있는가

    여자는 그 말에 별 반응 없이 문을 열었다.안쪽에서 흘러나온 공기는 복도보다 더 차갑지는 않았지만, 묘하게 더 무거웠다. 건우는 문턱을 넘으면서 이상하게도 형을 떠올렸다. 윤신우가 정말 여기까지 왔었다면, 그도 이런 공기를 맡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아마 같은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더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그런데 형은 결국 들어갔다. 그리고 그 뒤에 어떤 선택을 했는지, 건우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방 안은 생각보다 넓지 않았다. 가운데 놓인 테이블 하나와, 그 양쪽에 의자 두 개. 벽은 비어 있었고, 조명은 밝지 않았다. 눈이 조금만 적응하면 불편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마음을 놓게 만들 정도로 친절한 빛도 아니었다. 건우는 그 방을 한 바퀴 훑어본 뒤, 결국 의자에 앉지 않았다. 여자가 “앉으셔도 됩니다”라고 말했지만, 그는 그 자리가 마치 어떤 절차를 시작하자는 신호처럼 느껴져서 쉽게 몸을 낮출 수가 없었다.서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왔지만, 건우와 나란히 서 있지도 않았고, 맞은편 의자에 앉지도 않았다. 테이블에서 한 걸음쯤 비켜선 자리에서 조용히 방 안을 보고 있었다. 마치 누가 먼저 자기 자리를 정하느냐를 보고 있는 사람처럼.여자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별다른 권유 없이 테이블 위에 작은 장치를 하나 올려두었다. 손바닥만 한 얇은 기기였다. 병원에서 쓰는 계측 장비처럼 생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전혀 낯선 모양도 아니었다. 화면은 꺼져 있었고,버튼도 눈에 띄지 않았다. 오히려 그 무심한 생김새가 더 신경을 건드렸다. 과시하려는 장비는 아니었고, 그래서 더 실제처럼 느껴졌다.건우는 장치를 보다가 여자를 봤다.“이걸로 뭘 본다는 겁니까.”여자는 말수를 아끼는 사람처럼 짧게 대답했다.“지금 얼마나 남아 있는지요.”건우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는 문장인데, 일부러 반만 꺼낸 것 같았기 때문이다.“누가.”그가 곧바로 되

  • 형수의 밤   228. 지나친 평범함의 서스펜스

    목소리는 정면이 아니라 옆에서 들렸다.건우가 고개를 돌리자, 로비 구석이라고 해야 할지 데스크 뒤라고 해야 할지 애매한 위치에 여자가 서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땐 직원인지 상담사인지 구분이 안 됐는데, 가까이서 봐도 인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서른 중반 같기도 하고, 마흔 초반 같기도 했다. 너무 젊지도 늙지도 않은 그래서 기억에 또렷이 남지 않을 법한 얼굴. 단정한 셔츠에 짙은 재킷을 걸친 차림도 평범했고, 목소리도 높낮이가 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지나친 평범함이 오히려 더 신경을 거슬렀다. 사람은 보통 자기 감정을 감추더라도 어딘가에 흔적을 남기게 마련인데, 그녀는 그런 흔적조차 최대한 남기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보였다.여자는 건우를 보고, 이어 서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시선이 아주 짧게 멈췄다가 다시 돌아오는 순간을 건우는 놓치지 않았다. 확인하는 눈이었다. 누가 왔는지, 어떤 상태로 왔는지, 이미 어느 정도 듣고 있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눈. 건우는 인사 대신 곧바로 물었다.“여기 맞습니까.”여자는 대답 대신 아주 옅은 고개 끄덕임을 보였다.“안쪽으로 안내드리겠습니다.”그 말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누가 보냈는지, 왜 왔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 과정조차 생략돼 있었다. 건우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많이 알고 있다는 뜻이거나, 혹은 너무 적게 알고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는 뜻일 테니까. 어느 쪽이든 정상적인 곳의 태도는 아니었다.그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는 그런 건우를 재촉하지도 않았다.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먼저 그 침묵을 깬 건 건우였다.“여긴 뭘 하는 데죠.”여자는 잠깐 그를 바라봤다. 질문 자체는 단순한데, 지금 그녀가 어떤 말로 대답하느냐에 따라 이 장소의 정체가 달라질 수도 있는 종류의 질문이었다.그런데 그녀가 실제로 내놓은 대답은 예상보다 짧았고, 그래서 더 불편했다.“고르는 데예요.”건우는 눈을 좁혔다.

  • 형수의 밤   227. 안쪽의 공기

    센터라고 불러야 할지, 그냥 오래된 건물이라고 불러야 할지 애매한 그 장소는, 가까이 갈수록 오히려 더 형태를 감췄다. 도로에서 처음 봤을 때는 단순히 간판 없는 건물 정도로만 느껴졌는데, 막상 차를 세우고 내린 뒤 걸어서 다가가자 이상하게도 시선이 미끄러졌다. 병원도 아니고, 사무실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거 공간처럼 생활감이 묻어나는 것도 아닌데, 딱 잘라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모양새였다. 애매하다는 건 대개 무해한 인상을 주기 마련인데, 이곳은 오히려 반대였다.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더 신경을 긁는 종류의 애매함.건우는 차 문을 닫고 나서도 잠깐 그대로 서 있었다. 엔진이 멎고, 차체 안에 갇혀 있던 미세한 진동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바깥 공기가 제대로 피부에 닿았다. 늦은 밤은 아니었지만 해가 완전히 남아 있는 시간도 아니라서, 건물 외벽에 걸린 그림자들이 지나치게 길게 보였다. 사람의 흔적이 적은 곳은 대개 소리부터 달라지는데, 여기도 그랬다. 멀리서 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그건 이 장소와 상관없는 바깥세상의 소리였고, 바로 근처엔 사람이 내는 생활음이 거의 없었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도, 계단을 오르내리는 발소리도, 휴대폰 붙들고 웃는 목소리도 없었다. 건물은 서 있었지만, 그 안에서 시간이 움직이는 느낌이 잘 들지 않았다.서하는 차에서 내린 뒤로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건우보다 반 걸음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는데, 그 거리감이 이상하게 자연스러웠다. 누가 먼저 앞장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가 누구를 끌고 가는 것도 아닌 상태. 같이 걷고 있지만 같은 리듬으로 걷고 있다는 감각이 분명했다. 건우는 입구 앞에 멈춰 선 채 유리문을 올려다보았다. 안쪽이 전혀 안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선명히 들여다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반투명 필름이 붙은 듯 흐릿했고, 실내등도 밝지 않아서 바깥에서 보면 그저 어둑한 윤곽만 겹쳐 보였다.그는 문 손잡이에 손을 올리기 전에 아주 짧

  • 형수의 밤   226. 둘 다 안 버린다

    “형.”건우가 낮게 말했다.서하는 고개를 아주 조금 돌렸다.“여기까지 왔지.”그 문장은 질문이 아니었다.이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의 말이었다.서하는 짧게 대답했다.“왔겠지.”건우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그 대신 손잡이를 조금 더 세게 잡았다.“그럼 우리도 가보면 되겠네.”그 말은 단순했다.그래서 더 확실했다.서하는 그걸 듣고 잠깐 웃었다.소리는 없었지만,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너 진짜…”말을 꺼냈다가, 끝까지 잇지 않았다.대신 고개를 저었다.“알겠다.”그 한 마디로 충분했다.건우는 더 확인하지 않았다.문을 열었다.바깥 공기가 바로 안으로 들어왔다.조금 차가웠고, 집 안보다 가벼웠다.건우는 한 걸음 밖으로 나갔다.서하는 바로 뒤를 따라 나왔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그 소리는 생각보다 작았는데, 이상하게 되돌아가기 어려워진 느낌만큼은 분명하게 남았다.둘은 말을 하지 않았다.차로 걸어가는 동안, 시선도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하지만,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이건 선택이 끝난 뒤의 움직임이었다.그리고, 둘 다 알고 있었다.이건 협력이 아니라, 서로를 끌고 들어가는 쪽에 가까운 선택이라는 걸.차 안은 조용했다.엔진이 돌아가는 소리와, 타이어가 도로를 긁는 소리만 일정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라디오도 켜지지 않았고, 내비게이션 안내도 일부러 꺼둔 상태였다. 필요 없는 소리는 전부 걷어낸 채, 둘 사이에 남아 있는 건 오직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감각뿐이었다.건우는 앞만 보고 있었다.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손목이 단단하게 굳어 있는 건 스스로도 느껴졌다. 속도를 일부러 올리지도, 그렇다고 늦추지도 않았다. 지금은 빨리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멈추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옆자리는 조용했다.서하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거리의 불빛이 유리창에 스치면서, 그녀 얼굴 위로 아주 잠깐씩 그림자가 지나갔다. 그 변화가 반복될수록,

  • 형수의 밤   6. 6분의 공백

    카페는 회사 건물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점심시간이 지난 뒤라 한산했다.유리창 밖으로는 출입증을 목에 건 직원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유림은 이미 와 있었다.짙은 네이비 재킷, 단정한 머리.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곧았다.하나와 건우가 들어서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와주셔서 감사합니다.”목소리는 낮고 안정적이었다.하나는 마주 인사했다.“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건우는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유림과 눈이 마주쳤다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세 사람은 마

  • 형수의 밤   5. 공백의 길이

    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방은 익숙했다.벽지의 색, 침대 옆 협탁의 위치, 책상 위에 뒤집힌 법전까지.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다.그런데도 공기는 낯설었다.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 컵이 부딪히는 소리,혼자일 때는 존재하지 않던 생활의 잔향이 집 안에 남아 있었다.그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하나가 부엌에 있었다.단정하게 묶인 머리, 다림질된 셔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어제 새벽의 젖은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일어났네.”건우는 대답을 늦췄다가 짧게 말했다.“네.”하나는 커피를 내

  • 형수의 밤   4. 문장 사이의 공백

    회의실 창밖으로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잔잔했지만, 오래 갈 비였다.유림은 앉지 않았다. 테이블 끝에 서서, 파일을 내려다보는 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대표님이 어제 저녁,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그녀의 말투는 단정했다.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건우는 파일을 덮지 않았다.통화 기록의 숫자들이 시야에 남아 있었다.저녁 7시 12분.“오늘로 끝내자고 하셨다고요.”그가 되물었다.“네.”“무엇을.”유림은 잠시 침묵했다.답을 고르는 사람의 침묵이 아니라,상대를 재는 사람의 침묵이었다.“업무 관계를요.”

  • 형수의 밤   3. 마지막 통화

    아침은 비가 그친 뒤에야 찾아왔다.창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사라지자,집 안은 이상할 만큼 고요해졌다.어젯밤의 대화가 정말 있었던 일인지,건우는 한동안 확신하지 못했다.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그는 잠시 멈춰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익숙한 소리였다.누군가 이 집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낯설었다.하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어제 젖었던 코트는 의자에 걸려 있었다.“일어났어?”목소리가 차분했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어젯밤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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