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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형이 처음에 만나러 간 사람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8 06:35:22

이번엔 서하도 바로 대꾸하지 못했다.

그 한 문장이 둘 사이 공기를 조금 다르게 만들었다.

지금 이 밤의 대화와 이동과 추적은 전부 하나가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 위에서 성립하는 일이었다.

그 사실을 말로 꺼내는 순간, 갑자기 너무 비윤리적이고 잔인한 일이 되어버렸다.

건우는 자기가 지금 누구와 손잡고 누구를 구하려는 건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구를 배제하고 있는 건지 선명하게 자각하게 됐다.

서하는 한참 뒤에야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건 네가 제일 싫어하는 방식 아니야?”

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맞았다.’

하나를 지키겠다고 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선택은 늘 하나가 모르는 시간대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윤신우도 어쩌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나가 감당 못 할까 봐, 하나가 다칠까 봐,

하나가 알면 더 무너질까 봐.

그래서 혼자 알아보고, 혼자 확인하고,

혼자 결정하다가 결국 너무 늦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스치자, 건우는 갑자기 몸 안쪽이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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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수의 밤   217. 형은 죽었습니다

    사람은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 앞에서 처음부터 가장 큰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대개는 이런 식으로, 아직 완전히 병이라고 인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곳부터 찾는다.건우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문이 열리자 복도는 놀랄 만큼 조용했다. 흰색 벽, 회색 바닥, 그리고 너무 과하지 않게 놓인 화분 몇 개. 센터 유리문에는 반투명 시트지가 붙어 있어 안쪽이 완전히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 작게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기억할 수 없는 불안도, 설명할 수 없는 피로도 상담이 필요합니다.”건우는 그 문장을 한참 쳐다봤다.기억할 수 없는 불안. 설명할 수 없는 피로.그건 광고 문구였을 뿐인데, 이상하게 하나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윤신우도 이 문구를 봤을까. 그리고 그걸 보는 순간, 조금이라도 안심했을까. 적어도 여기까지 오면 누군가 자기 말을 “이상하다”고만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까.그 생각이 들자 건우는 괜히 목 안쪽이 메말랐다.그는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센터 안은 생각보다 더 조용했다.은은한 방향제 냄새와 낮은 볼륨의 클래식 음악이 섞여 있었고, 접수 데스크 뒤쪽 벽에는 상담 일정표와 자격증 액자가 단정하게 걸려 있었다. 오전 첫 시간이라 그런지 대기실은 비어 있었고, 접수대 안쪽에 앉아 있던 직원이 고개를 들어 건우를 봤다.“예약하셨어요?”건우는 잠깐 숨을 고르고 말했다.“아니요. 예약은 안 했고… 김 센터장님 계신가 해서요.”직원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건 당연했다. 이런 곳은 갑자기 찾아온 낯선 사람에게 바로 상담자 이름을 열어주지 않는다. 특히 건우처럼 얼굴에 잠도 못 자고 예민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직원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상담 관련 문의시면 먼저 접수 도와드릴 수 있는데요.”건우는 바로 아니라고 하지 못했다.상담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그럼 왜 왔냐는 다음 질문이 따라올 테니까.그는 최대한 표정을

  • 형수의 밤   216. 먼저 다녀간 사람

    이번엔 통화.사망 나흘 전 오후 5시 12분.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11분 42초.사망 사흘 전 오전 10시 03분.같은 번호로 다시 7분 08초.그리고 사망 이틀 전 오후 2시 19분.이번엔 윤신우가 직접 그 번호가 남긴 문자 링크를 열어본 흔적이 있었다.건우는 바로 번호를 추적했다.처음엔 광고 대행 번호나 상담 연결 번호처럼 보였지만, 검색을 한 단계 더 타고 들어가자 낯익은 단어가 튀어나왔다.한림심리안정센터건우의 손이 멈췄다.센터장.방금 전 서하가 흘린 단어와 너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그는 곧바로 홈페이지 캐시를 열었다. 오래된 상담센터 페이지였고, 대외적으로는 직장인 스트레스, 외상 후 불안, 수면장애, 가족상담 등을 다루는 민간 심리상담 기관으로 보였다. 병원은 아니지만, 병원으로 가기 전에 누군가가 먼저 익명으로 문의하기 좋은 종류의 곳. 무엇보다 중요한 건, 홈페이지 상단에 대표 상담자 이름 대신 ‘센터장 김○○’이라는 표기가 큼직하게 걸려 있었다.이제 퍼즐이 조금 맞아들기 시작했다.윤신우는 병원에 바로 가지 않았다.먼저 상담센터에 전화를 걸었고, 누군가에게 상황을 설명하려 했고,아마 그다음 단계에서 병원이나 다른 조치를 고민했을 것이다.건우는 더 아래로 내려가 윤신우 캘린더 임시 저장 파일을 열었다.그리고 거기서 짧은 문장을 하나 발견했다.금요일 7:30 / 김 센터장 / 하나 얘기 정리그 문장을 읽는 순간, 건우는 마치 누군가에게 가슴 한가운데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하나 얘기 정리.’그 다섯 글자가 너무 인간적이어서, 너무 처참했다.윤신우는 그날 무슨 말을 해야 할지조차 미리 정리하려 했던 것이다. 하나가 이상하다고, 가끔 기억이 비고, 같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그런데 이걸 병이라고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다고.그걸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전에, 자기 혼자 먼저 말이 되게 정리해보려 했던 사람의 흔적.건우는 모니터를 오래 보지 못하고 잠깐 눈을 감았다.

  • 형수의 밤   215. 형이 처음에 만나러 간 사람

    이번엔 서하도 바로 대꾸하지 못했다.그 한 문장이 둘 사이 공기를 조금 다르게 만들었다. 지금 이 밤의 대화와 이동과 추적은 전부 하나가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 위에서 성립하는 일이었다. 그 사실을 말로 꺼내는 순간, 갑자기 너무 비윤리적이고 잔인한 일이 되어버렸다. 건우는 자기가 지금 누구와 손잡고 누구를 구하려는 건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구를 배제하고 있는 건지 선명하게 자각하게 됐다.서하는 한참 뒤에야 아주 조용히 말했다.“그건 네가 제일 싫어하는 방식 아니야?”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맞았다.’하나를 지키겠다고 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선택은 늘 하나가 모르는 시간대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윤신우도 어쩌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나가 감당 못 할까 봐, 하나가 다칠까 봐, 하나가 알면 더 무너질까 봐. 그래서 혼자 알아보고, 혼자 확인하고, 혼자 결정하다가 결국 너무 늦어버렸을지도 모른다.그 생각이 스치자, 건우는 갑자기 몸 안쪽이 서늘해졌다.자기가 지금 형이 걸었던 길 위에 똑같이 발을 올리고 있다는 감각 때문이었다.건우는 문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아주 천천히 말했다.“그래도 오늘은 확인해야 해.”서하는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대신 그를 오래 보다가, 아주 낮게 덧붙였다.“형이 처음 간 곳은 병원이 아니었어.”건우의 손이 문고리 위에서 멈췄다.“뭐?”서하는 창가에서 몸을 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이제 그녀의 얼굴은 다시 조금 달라져 있었다. 방금 전처럼 경계가 흐린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선명한 서하라고 단정하기도 어려운 얼굴. 마치 밤이 깊어질수록 둘 사이 경계가 아니라 둘 다 피로해지는 방식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병원 가기 전에.”그녀가 말했다.“형은 먼저 누군가를 만나러 갔어.”건우는 미간을 좁혔다.“누구.”서하는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했다.“기억이 정확하진 않은데… 이름은 아니고, 직함 같은 걸 말했어.”그녀는 눈을 감고 그날의 조각을 더듬듯 천천

  • 형수의 밤   214. 늦은 사람

    병원이라는 말을 먼저 꺼낸 건 건우였지만,정작 그 말을 입 밖으로 뱉고 나자마자 그는 그게 얼마나 늦은 문장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병원 가자.’너무 정상적이고, 너무 상식적이고, 그래서 더 무력한 말.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균열 앞에 서면 결국 가장 평범한 구조를 먼저 떠올린다. 진단, 치료, 상담, 입원. 이름을 붙이면 통제할 수 있을 것 같고, 병명으로 바꾸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방금 전 눈앞에서 본 건우는, 그것들이 과연 지금 이 상태를 따라잡을 수 있는 언어인지 자신할 수 없었다.서하는 창가 쪽에 선 채 더 이상 웃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건우의 손이 닿아 있던 팔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마치 자기 몸이 자기 것인지 아닌지 잠깐 확인하는 사람처럼 손끝을 아주 천천히 접었다 폈다. 그 사소한 움직임 하나가 이상하게 더 아프게 느껴졌다. 사람이 무너지는 장면은 늘 극적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이런 식이다. 말보다 먼저 손끝이 망설이고, 시선이 한 박자 늦고, 자기 몸을 자기 것처럼 쓰지 못하는 순간들이 조용히 쌓이면서.건우는 결국 손을 거두었다.그리고 한참 뒤에야 아주 낮게 물었다.“형이 병원 알아봤어?”서하는 그 질문을 듣고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인 채 건우를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는 자신 안의 균열을 버티는 쪽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긴장이 눈빛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 질문이 단순한 확인이 아니라, 윤신우가 마지막에 어디까지 갔는지를 묻는 질문이라는 걸 알아들은 사람의 표정.“알아봤지.”그녀가 마침내 말했다.“그 사람, 생각보다 오래 버텼어.”건우는 그 문장에서 먼저 숨이 걸렸다.생각보다 오래 버텼다.그 말은 이상하게 위로처럼 들리면서도, 동시에 너무 잔인했다.윤신우는 아무것도 모른 채 우발적으로 죽은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마지막 며칠 동안은 이 이상한 상태를 붙들고 어떻게든 해결하려 했던 사람이었다는 뜻이니까.건

  • 형수의 밤   213. 그날은 지금보다 더 심했어

    그 문장은 건우를 완전히 멈추게 만들었다.서하는 늘 하나보다 더 단단하고, 더 선명하고, 더 자각적인 존재처럼 보였다. 그래서 건우는 무의식적으로라도 서하 쪽이 더 안정적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말하고 있었다.자기 자신조차 자기 경계를 확신하지 못한다고.그건 지금까지 건우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나쁜 상태였다.건우는 어느새 아주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가 있었다.서하는 그걸 피하지 않았다.둘 사이 거리가 숨이 닿을 만큼 좁아졌을 때, 건우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날도 이랬어?”서하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질문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둘 다 알고 있었다.윤신우의 마지막 밤.엘리베이터 앞.삭제된 19분.서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건우는 오히려 답을 먼저 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아주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날은 지금보다 더 심했어.”건우는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얼마나.”“하나도 불안했고, 나도 흔들렸고… 중간이 더 자주 열렸어.”그녀는 잠깐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건우를 봤다.“형은 그걸 본 거야.”그 문장은 너무 정확해서, 건우는 더 이상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윤신우는 단순히 낯선 얼굴을 본 게 아니었다.하나와 서하가 번갈아 드러나는 그 불안정한 경계 자체를 봤던 것이다.그리고 그걸 본 사람은 그 순간부터 더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건우는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그의 머릿속에는 엘리베이터 앞에 선 윤신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피곤했을 형, 처음엔 그냥 하나라고 생각했을 형, 두 번째엔 설명되지 않는 공포 앞에서 잠깐 멈췄을 형. 그리고 결국 그 밤을 끝까지 살아서 빠져나오지 못한 형.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그런데 지금 더 견디기 힘든 건, 눈앞의 사람도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건우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녀의 팔을 아주 조심스럽게 잡았다.서하는 놀라

  • 형수의 밤   212. 나라고 확신하고 싶은데

    먼저 말을 건넨 쪽은 그녀였다.목소리는 하나의 것이었지만, 그 안에 섞인 결은 단순하지 않았다. 건우는 그 한마디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사람은 완전히 하나도, 완전히 서하도 아니었다. 그 둘 사이 경계가 얇아진 채, 아직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지 않은 상태. 그게 오히려 더 불안했다.건우는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너 뭐 하고 있었어.”그녀는 잠깐 창문 쪽을 돌아봤다가, 다시 건우를 봤다.“그냥.”그리고 아주 천천히 덧붙였다.“잘 기억 안 나.”그 말은 지금까지 여러 번 들었던 문장이었지만, 오늘은 전혀 다르게 들렸다. 전에는 그저 불안과 공백의 언어였다면, 지금은 마치 자기 안에서 무언가가 바뀌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눈치채고 있는 사람의 언어처럼 들렸다.건우는 그제야 한 발 더 다가갔다.“언제부터 여기 있었어.”그녀는 잠깐 눈을 깜빡였다.“모르겠어.”“방금 깬 거야?”이번엔 대답이 조금 늦었다.그 짧은 틈 안에서, 그녀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방금까지 자신이 어떤 얼굴로 서 있었는지, 누구의 의식으로 이 방 안에 있었는지, 그걸 자기 자신도 붙잡지 못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그녀의 시선이 건우 어깨 너머를 향했다.복도.서하가 서 있을 자리.그 눈빛이 변하는 걸 건우는 분명히 봤다.불안에서 경계로.경계에서 차가운 자각으로.그 변화는 극적이지 않았다.오히려 너무 조용해서 더 섬뜩했다.그녀는 건우를 보지 않은 채, 아주 낮게 말했다.“들어왔네.”그 말은 건우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건우의 등 뒤 어딘가를 향한 말.건우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려다 멈췄다. 그러는 사이, 눈앞의 그녀가 아주 천천히 다시 건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까와는 분명히 달랐다. 같은 얼굴인데, 사람을 보는 온도가 바뀌어 있었다. 그 미세한 차이가 너무 선명해서, 건우는 오히려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서하였다.아니, 정확히는 방금까지 하나였던 얼굴 안

  • 형수의 밤   6. 6분의 공백

    카페는 회사 건물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점심시간이 지난 뒤라 한산했다.유리창 밖으로는 출입증을 목에 건 직원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유림은 이미 와 있었다.짙은 네이비 재킷, 단정한 머리.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곧았다.하나와 건우가 들어서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와주셔서 감사합니다.”목소리는 낮고 안정적이었다.하나는 마주 인사했다.“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건우는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유림과 눈이 마주쳤다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세 사람은 마

  • 형수의 밤   5. 공백의 길이

    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방은 익숙했다.벽지의 색, 침대 옆 협탁의 위치, 책상 위에 뒤집힌 법전까지.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다.그런데도 공기는 낯설었다.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 컵이 부딪히는 소리,혼자일 때는 존재하지 않던 생활의 잔향이 집 안에 남아 있었다.그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하나가 부엌에 있었다.단정하게 묶인 머리, 다림질된 셔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어제 새벽의 젖은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일어났네.”건우는 대답을 늦췄다가 짧게 말했다.“네.”하나는 커피를 내

  • 형수의 밤   4. 문장 사이의 공백

    회의실 창밖으로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잔잔했지만, 오래 갈 비였다.유림은 앉지 않았다. 테이블 끝에 서서, 파일을 내려다보는 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대표님이 어제 저녁,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그녀의 말투는 단정했다.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건우는 파일을 덮지 않았다.통화 기록의 숫자들이 시야에 남아 있었다.저녁 7시 12분.“오늘로 끝내자고 하셨다고요.”그가 되물었다.“네.”“무엇을.”유림은 잠시 침묵했다.답을 고르는 사람의 침묵이 아니라,상대를 재는 사람의 침묵이었다.“업무 관계를요.”

  • 형수의 밤   3. 마지막 통화

    아침은 비가 그친 뒤에야 찾아왔다.창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사라지자,집 안은 이상할 만큼 고요해졌다.어젯밤의 대화가 정말 있었던 일인지,건우는 한동안 확신하지 못했다.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그는 잠시 멈춰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익숙한 소리였다.누군가 이 집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낯설었다.하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어제 젖었던 코트는 의자에 걸려 있었다.“일어났어?”목소리가 차분했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어젯밤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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