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하나는 벽에 손을 짚었다. 다리가 풀린 건 아니었지만, 균형을 잡기 위해 무언가가 필요해 보였다. 건우는 다가가려다가 멈췄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붙잡힘이 아니라, 자기 몸 안에서 벌어진 말을 스스로 받아들일 시간이었다.“신우 씨도 알았어?”“정확히는 몰랐을 거야. 하지만 느꼈어. 녹음에서 말했잖아. 네 안에 설명하지 못한 밤이 있다고.”하나는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오래 감았다. 마치 안쪽에서 그 이름이 울리는지 확인하는 사람처럼.“서하.”그녀가 아주 작게 따라 말했다.그 순간, 건우의 등 뒤로 차가운 감각이 스쳤다. 이름은 호출이 될 수 있다. 그는 그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하나가 눈을 떴다.눈빛은 그대로였다. 아직은 하나였다.“그 사람은 뭘 했어.”건우는 대답하기 어려웠다. 서하가 무엇을 했는지 말하려면 결국 그날 밤으로 가야 한다. 신우의 마지막 숨, 건우가 본 장면, 자신이 외면한 선택. 지금 이 복도에서 그것을 전부 말하면 하나는 감당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는 이미 물었다.“지금은 여기까지.”건우는 겨우 말했다.“이름부터 알아. 나머지는 장소를 바꿔서 말할게. 여기서는 안 돼.”하나는 그를 오래 보았다. 예전 같으면 그 말에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에도 나중으로 미루는 거면, 나 너 못 믿어.”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그래서 말할게. 오늘. 경찰서 나가면.”하나는 그 약속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받아들였다기보다, 일단 그 선을 잡아두는 쪽에 가까웠다.그때 복도 끝에서 젊은 형사가 급히 다가왔다.“두 분, 다시 들어오셔야겠습니다.”건우는 바로 몸을 돌렸다.“무슨 일입니까.”젊은 형사는 대답하기 전에 하나를 한 번 보았다. 그 시선이 짧았지만 묘하게 조심스러웠다.“정미라 주소지 확인 결과, 현재 비어 있습니다. 그런데 안에서 윤신우 씨 관련 물건이 나왔습니다.”하나의 얼굴이 굳었다.건우가 물었
“문태오는요.”건우가 물었다.젊은 형사의 표정이 더 굳었다.“지하 직원 통로 이후로 영상이 끊깁니다. 그 통로는 세 갈래로 나뉘는데, 하나는 폐기물 반출구, 하나는 기계실, 하나는 오래된 주차장 연결 통로입니다. 현재 병원 측 협조 받아 확인 중인데, 일부 구간 CCTV가 고장 난 상태입니다.”형사는 낮게 말했다.“너무 편리하게 고장 났군.”젊은 형사는 대답하지 않았다.건우는 그 말을 듣고 손을 천천히 쥐었다가 풀었다. 정미라가 병원 내부 구조를 알고 있다면, 문태오를 영상이 끊기는 구간으로 데려가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사라진 사람이 다시 나타날지, 아니면 신우처럼 다른 방식으로 발견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하나는 사진에서 눈을 떼고 말했다.“문태오 씨가 그 사람을 따라간 이유가 있을 거예요.”모두 그녀를 봤다.하나는 스스로도 조심스럽게 생각을 정리하듯 말을 이어갔다.“도망치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을 그렇게 따라가지는 않잖아요. 적어도 그 순간에는 저 사람이 자기를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신우 씨와 연결된 사람이라고 믿었을 것 같아요.”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 그래서 문태오와 정미라 사이의 접촉 기록도 확인해야 합니다.”건우는 문득 신우가 녹음 속에서 남긴 말을 떠올렸다. 내가 죽으면, 나를 찌른 사람만 찾지 마라. 내가 왜 그 시간에 그 사람을 집에 들였는지부터 봐라. 이제 그 문장은 더 넓어졌다. 문태오는 왜 정미라를 따라갔을까. 신우는 왜 정미라 또는 차미령과 연결된 사람을 집에 들였을까. 그리고 건우의 사고 직후, 왜 그 여자는 신우에게 하나를 곁에 두라고 말했을까.형사는 자료를 정리한 뒤 말했다.“정미라의 현재 주소지로 인력 보냈습니다. 휴직 중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 거주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고, 연락처는 꺼져 있습니다. 출국 기록은 아직 확인 중입니다.”건우는 고개를 들었다.“도주했을 가능성도 있겠네요.”“가능성 있습니다. 다만 이
정미라라는 이름이 회의실 공기 속에 완전히 놓인 뒤에도, 누구도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이름 하나가 밝혀졌을 뿐인데, 그 이름은 단순한 신원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건우의 사고 당시 병원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 신우가 죽기 전 쫓고 있던 두 개의 이름 중 현재에 가까운 이름, 문태오를 병원 지하 통로로 데려간 직원 카드의 명의자, 그리고 하나가 얼굴보다 먼저 자세와 목소리로 기억해낸 사람. 서로 다른 시간에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한 사람의 이름으로 묶이는 순간, 사건은 더 선명해지는 대신 더 위험해졌다.형사는 자료를 다시 정리했다. 손이 빠르지는 않았지만, 움직임마다 목적이 분명했다. 정미라의 근무 이력, 휴직 사유, 강건우 사고 당시의 근무 여부, 윤신우와의 접촉 가능성, 차미령이라는 이름의 과거 기록. 그가 수첩에 적는 항목들은 단순한 메모가 아니라, 이제부터 수사가 어디로 향할지를 결정하는 뼈대였다.“정미라가 강건우 씨 사고 당시 이 병원에서 근무했다면, 사고 직후 의료기록이나 병동 출입에 접근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형사는 건우와 하나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다만 병원 직원이었다는 사실만으로 사고에 직접 관련됐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당시 근무표, 출입 기록, 담당 구역, 그리고 윤신우 씨와 접촉한 기록까지 확인해야 합니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사의 말은 맞았다. 하지만 그의 안쪽에서는 이미 다른 계산이 돌고 있었다. 정미라가 사고 직후 병원 안에 있었고, 신우와 병원 복도에서 대화를 나눴으며, 하나를 곁에 두라는 말을 했다면, 그녀는 단순히 사고 이후의 상황을 이용한 사람이 아니라 사고 이전부터 무언가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신우가 왜 뒤늦게 그녀를 추적했는지도 설명된다. 형은 처음부터 모든 걸 알았던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며 어긋난 기억과 기록 사이에서 그녀의 흔적을 찾아낸 것이다.하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을 다시 보고 있었다. 병원 지하
건우는 그 장면을 보며, 문득 녹음 속 여자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 사람을 움직이는 말, 그리고 병원 복도에서 신우에게 하나를 곁에 두라고 말하던 그 잔인한 담담함. 그 여자가 실제 병원 관련자였는지, 의료기관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단지 병원이라는 공간을 잘 이용하는 사람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처음으로 그녀에게 몸의 형태가 생겼다. 고개를 기울이는 습관, 한쪽으로 빠진 어깨, 검은 손목줄, 소독약 냄새.사람은 이름을 바꿀 수 있지만, 몸에 밴 습관까지 바꾸기는 어렵다.형사는 영상을 멈춘 채 말했다.“이 인물이 정미라 또는 차미령과 동일인인지 확인하는 게 우선입니다. 그리고 문태오의 현재 위치도 동시에 찾아야 합니다.”하나는 눈을 떴다.“문태오 씨는… 따라간 거죠.”형사는 그녀를 보았다.“영상상으로는 강제로 끌려간 것 같지는 않습니다.”“그럼 믿고 간 거네요.”하나의 말은 조용했지만, 정확했다. 문태오가 도망치듯 움직이다가도 그 인물을 보고 따라갔다면,최소한 그 순간만큼은 상대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판단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건우는 낮게 말했다.“아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겠네요.”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습니다.”그때 젊은 형사가 다시 들어왔다. 이번에는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병원 직원 출입 기록 확인 중인데, 해당 시간대 직원 전용 출입문이 내부 카드로 열렸습니다. 카드 명의자는 현재 휴직 중인 간호사입니다.”형사의 눈이 좁혀졌다.“이름.”젊은 형사는 종이를 내려다봤다.“정미라입니다.”회의실 안의 모든 소리가 한순간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하나는 숨을 삼켰고, 건우는 천천히 눈을 들어 형사를 봤다. 정미라. 현재 명의의 이름. 차미령이라는 과거의 이름 뒤에 숨어 있던 사람. 그리고 병원 직원 카드. 이제 그녀는 완전히 실체를 얻었다.형사는 곧바로 지시했다.“주소지 확인하고, 휴직 사유, 근무 이력, 강건우 씨 사고 당시 근무 여부까지
형사는 그 말을 천천히 기록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말했다.“윤신우 씨가 하나 씨의 기억 방식까지 문태오에게 말했다는 건, 두 사람이 단순히 자료 거래만 한 사이는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 윤신우 씨가 문태오에게 꽤 구체적인 이야기를 했다는 뜻이니까요.”건우는 그 말에 동의했다. 신우가 누군가에게 하나의 기억 방식까지 말할 정도였다면, 그때 신우는 이미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단계에 있었다. 문태오를 믿었는지, 이용했는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말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단순한 돈 거래보다 깊었다.“그럼 문태오는 신우 형이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도 알겠네요.”건우가 말했다.“그럴 가능성이 큽니다.”형사는 그렇게 답한 뒤, 잠깐 말을 멈췄다. 그리고 훨씬 낮은 목소리로 이어갔다.“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문태오가 가진 정보가 많을수록, 그를 없애거나 숨기려는 쪽도 생길 수 있습니다.”하나는 그 말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사람 하나가 또 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이제는 추상적인 위협으로 들리지 않았다. 신우는 죽었고, 문태오는 사라졌다. 둘 사이에 있는 이름이 정미라든 차미령이든, 그 이름은 단순히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지금도 움직이는 힘이었다.잠시 뒤 젊은 형사가 회의실로 돌아왔다. 얼굴이 더 굳어 있었다.“병원 지하 주차장 CCTV 일부 확보했습니다. 문태오로 보이는 인물이 지하 2층 직원 출입 통로 쪽으로 이동한 장면이 있습니다. 혼자는 아니었습니다.”회의실 안이 조용해졌다.형사가 물었다.“누구와 같이 있었습니까.”젊은 형사는 태블릿 화면을 켜서 테이블 위에 놓았다. 화면은 병원 지하의 어두운 복도를 비추고 있었다. 시간이 표시되어 있었고, 화면 한쪽에서 문태오가 빠르게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주변을 살폈고, 누군가를 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복도 중간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병원 직원처럼 보이는 하얀 가운을 걸쳤지만, 얼굴은 마스크와 모자로 가려져 있었
형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파일을 재생했다.이번에는 두 사람 모두 다시 듣지 않았다. 아니, 들었지만 이미 한 번 찢긴 자리라 처음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형사는 녹음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끊지 않았다. 재생이 끝난 뒤, 방 안에는 길고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이건 사건 범위가 달라집니다.”형사가 말했다.“강건우 씨 사고, 윤신우 씨 사망, 그리고 강하나 씨와 윤신우 씨의 결혼 배경까지 전부 다시 봐야 합니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하나는 조용히 물었다.“그 여자를 찾을 수 있습니까.”형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찾아야 합니다.”그 말은 약속이 아니라 방향이었다.그리고 그 방향이 생긴 순간, 건우는 처음으로 이 사건이 신우의 죽음을 넘어 자신이 잃어버린 1년 전체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걸 확실히 느꼈다.그때 형사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화면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짧은 대화가 이어졌고, 그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갔다.전화를 끊은 뒤, 그는 건우를 보았다.“문태오가 사라졌습니다.”건우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형사는 이어 말했다.“연락처는 끊겼고, 방금 말한 병원 CCTV에는 문태오가 병원에 들어오는 장면은 있는데, 나가는 장면이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하나의 얼굴이 굳었다.건우는 천천히 물었다.“그럼 어디로 갔다는 겁니까.”형사는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만으로도 충분했다.문태오는 병원에 들어왔고, 자료를 넘겼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 사라짐은 단순한 도주처럼 보이지 않았다.사건은 이제 또 다른 사람을 삼키기 시작하고 있었다.문태오가 병원 안으로 들어온 장면은 남아 있는데 나간 장면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말이 떨어진 뒤, 회의실 안의 공기는 한 번 더 다른 무게를 얻었다. 조금 전까지는 녹음 파일의 내용이 사건의 범위를 넓히고 있었다면, 이제는 그 파일을 건넨 사람이 눈앞의 현실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 수사를 다시 현재형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건우는 형사의 얼굴을 보
카페는 회사 건물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점심시간이 지난 뒤라 한산했다.유리창 밖으로는 출입증을 목에 건 직원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유림은 이미 와 있었다.짙은 네이비 재킷, 단정한 머리.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곧았다.하나와 건우가 들어서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와주셔서 감사합니다.”목소리는 낮고 안정적이었다.하나는 마주 인사했다.“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건우는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유림과 눈이 마주쳤다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세 사람은 마
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방은 익숙했다.벽지의 색, 침대 옆 협탁의 위치, 책상 위에 뒤집힌 법전까지.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다.그런데도 공기는 낯설었다.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 컵이 부딪히는 소리,혼자일 때는 존재하지 않던 생활의 잔향이 집 안에 남아 있었다.그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하나가 부엌에 있었다.단정하게 묶인 머리, 다림질된 셔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어제 새벽의 젖은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일어났네.”건우는 대답을 늦췄다가 짧게 말했다.“네.”하나는 커피를 내
회의실 창밖으로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잔잔했지만, 오래 갈 비였다.유림은 앉지 않았다. 테이블 끝에 서서, 파일을 내려다보는 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대표님이 어제 저녁,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그녀의 말투는 단정했다.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건우는 파일을 덮지 않았다.통화 기록의 숫자들이 시야에 남아 있었다.저녁 7시 12분.“오늘로 끝내자고 하셨다고요.”그가 되물었다.“네.”“무엇을.”유림은 잠시 침묵했다.답을 고르는 사람의 침묵이 아니라,상대를 재는 사람의 침묵이었다.“업무 관계를요.”
아침은 비가 그친 뒤에야 찾아왔다.창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사라지자,집 안은 이상할 만큼 고요해졌다.어젯밤의 대화가 정말 있었던 일인지,건우는 한동안 확신하지 못했다.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그는 잠시 멈춰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익숙한 소리였다.누군가 이 집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낯설었다.하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어제 젖었던 코트는 의자에 걸려 있었다.“일어났어?”목소리가 차분했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어젯밤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