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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서류가 움직이는 밤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01 09:08:18

서류를 넣은 우편함 뚜껑이 닫히는 소리는 생각보다 건조했다.

금속이 맞부딪히는 짧은 소리.

그 안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갔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실감나지 않았다.

건우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돌아서면 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끝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낯선 번호였다.

잠시 망설이다가 받았다.

“윤건우 씨죠.”

낮은 남자 목소리.

“누구십니까.”

“회사에서 몇 번 마주친 적 있습니다. 전략기획 쪽.”

건우는 발걸음을 멈췄다.

전략기획.

형이 죽기 직전까지 붙잡고 있던 팀.

“무슨 일이죠.”

“잠깐 뵐 수 있을까요.”

직설적인 요청이었다.

“지금은 어렵습니다.”

“대표님 사고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대표님.

그 단어가 여전히 낯설게 들렸다.

형은 늘 형이었지, 대표가 아니었다.

“어디입니까.”

건우는 결국 물었다.

약속 장소는 회사 근처가 아니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오래된 카페.

조명이 어두웠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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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수의 밤   243. 없던 기억

    건우는 한 발짝 물러난 자리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몸이 멈춘 게 아니라, 움직이려고 하면 먼저 머릿속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생각이 이어지다가 중간에서 잘리는 게 아니라,이어지기 직전에 누가 한 번 끊어버리는 것처럼, 다음이 나오지 않았다.방금 전까지는 분명히 ‘거기 없었다’고 말할 수 있었는데,지금은 그 문장을 다시 꺼내려고 하면 어딘가가 비어 있었다.“나… 거기 없었어.”그가 다시 말했다.이번에는 확인이 아니라, 스스로를 붙잡기 위한 문장이었다.서하는 그걸 듣고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건우를 바라보는 눈이 조금 더 조용해졌다.“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 형수의 밤   242. 그날 밤

    서하가 고개를 들었을 때, 건우는 이미 그 눈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말을 꺼내기 전부터, 이 대화가 어디로 가게 될지 알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었다.확신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빈틈이 있었고,의심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많은 조각이 맞아떨어져 있었다.그래서 더 불안정했다. 하나로 결론 내릴 수 없는 상태에서 이미 결론에 가까워진 감각이 먼저 몸을 붙잡고 있었다.“서하야.”그가 먼저 불렀다.이름을 부르는 순간, 말이 더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그날 밤.”

  • 형수의 밤   241. 기록에 없던 새로운 구조

    여자가 말한 ‘경계’라는 단어가 방 안에 남아 있는 동안에도 공기는 그 자리에서 멈춰 있지 않았다.오히려 그 말이 떨어진 이후부터,보이지 않던 압력이 더 분명하게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지금까지는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짐작만 하면서 버텨왔다면,이제는 그 한계선 위에 정확히 올라서 있다는 감각이 있었다.발을 잘못 디디면 바로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그 위에서 균형을 잡고 서 있는 상태.건우는 그걸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몸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느낌은 이미 분명해졌고,서하의 상태도 마찬가지였다. 호흡은 계속 어긋나고 있었고,시선은 한 번 맞았다가도 금방 흐트러졌으며,반응은 의식보다 먼저 튀어나왔다가

  • 형수의 밤   243. 그 확실함이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서하의 말이 떨어진 뒤에도, 건우는 한동안 아무 반응을 하지 못했다.그녀를 보고 있었고, 분명히 같은 자리에 서 있었는데,그 말 한 문장이 그 사이의 거리를 이상하게 뒤틀어 놓았다.조금 전까지는 의심과 확신 사이에서 버티고 있었다면,지금은 그 두 개가 동시에 밀려들어오면서 기준 자체가 흐려지고 있었다.“그게 무슨 뜻이야.”건우가 겨우 입을 열었다.짧게 끊지 않고, 숨을 한 번 더 이어 붙이며 물었다.“혼자가 아니었다는 얘기야, 아니면…내가 생각하는 그 상황이 아니라는 얘기야.”서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대신 건우를 보는 눈이 조금

  • 형수의 밤   240. 따라오지 않는 몸

    “같이.”그 한 단어가 방 안에 남아 있을 때, 공기는 잠깐 고요해진 것처럼 보였다. 말이 더 필요 없을 만큼 정리가 끝난 상태였고, 그 정리 위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시선도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선택이 끝난 뒤에도, 몸이 그 선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였고, 그 차이가 드러나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처음 변한 건 호흡이었다.서하가 숨을 들이쉬는 타이밍이 미묘하게 틀어졌다. 아까까지는 의식적으로라도 리듬을 붙잡고 있었는데,이번에는 그 리듬 자체가 따라오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들이쉬는 숨이 짧아졌다가, 내쉬는 숨이 길어졌다가, 그 사이에 아주 작은 끊김이 계속 끼어들었다. 건우는 그걸 보면서도 바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방금까지의 흐름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에서, 성급하게 개입하면 오히려 더 빨리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걸 그대로 두기에는 변화가 너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서하의 시선이 한 번 더 어긋났다.건우를 보고 있었는데, 초점이 정확히 맞지 않았다. 아주 짧은 순간, 다른 쪽을 같이 보고 있는 것처럼 겹쳤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 반복이 두 번, 세 번 이어지면서, 단순한 피로나 긴장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상태로 넘어가기 시작했다.“서하야.”건우가 낮게 불렀다.서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입을 열었다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그 대신 숨이 먼저 끊겼다.그녀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건우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이번에는 멈추지 않았다.“지금 어디까지야.”그가 물었다.문장을 짧게 자르지 않고, 그대로 이어 붙였다.“겹치는 건지, 넘어가는 건지, 아니면 이미”말을 끝까지 잇기 전에, 서하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나 아닌 쪽이…”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건우의 눈이 멈췄다.“…더 빨라.”그 문장은 설명이 아니었다.상태 그 자체였다.건우는 그걸 이해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지금까지는 같이

  • 형수의 밤   239. 둘 다 놓지 않는 쪽으로

    “누구 생각이야.”그가 물었다.문장을 자르지 않고, 그대로 밀어 넣었다.서하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숨이 한 번 끊겼다가 이어졌다.“…둘 다.”그 답은 회피가 아니었다.정확했다.같은 몸 안에서,같은 순간에,다른 결론이 동시에 올라오고 있었다.건우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이번에는 멈추지 않았다.“그럼 나눠서 말해.”그가 낮게 말했다.“지금처럼 섞지 말고.”서하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그 말은 단순한 요구가 아니었다.같은 몸 안에서 의도적으로 분리해서 말하라는 요청이었다.잠깐의 정적. 그리고, 서하의 입이 다시 열렸다.“…하나는,”그녀가 천천히 말했다.“버티기 힘들어.”이번에는 확실했다.톤이 달랐다.건우는 그걸 그대로 들었다. 끊지 않았다.“그래서”말이 이어졌다.“이 상태 오래 못 가.”건우는 눈을 떼지 않았다.“서하는?”그가 바로 물었다.서하는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이번에는 조금 더 빠르게 나왔다.“난 간다.”그 두 단어는 짧았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서하의 결이었다.“끝까지.”건우는 그 말을 듣고,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같은 몸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이 동시에 올라오는 상태.이건 더 이상 단순한 겹침이 아니었다.충돌이었다.여자는 그 장면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말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번에는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내려갔다.이 상태가 어디까지 가는지,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반응이었다.건우는 다시 입을 열었다.“둘 다 들었다.”그는 말을 끊지 않고 이어갔다.“그럼 이제 정해야지.”서하의 시선이 다시 올라왔다.“누구 말로 갈 건지.”방 안 공기가 다시 바뀌었다.이번에는 유지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로 넘어가고 있었다.말이 떨어진 뒤, 방 안은 잠깐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비어 있지 않았는데, 서로가 들은 문장을 각자 안쪽으로 끌고 들어가면서, 그 사이에 놓여 있던 공기가 한 번 접히는 느낌이었다. 건우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방금 스

  • 형수의 밤   4. 문장 사이의 공백

    회의실 창밖으로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잔잔했지만, 오래 갈 비였다.유림은 앉지 않았다. 테이블 끝에 서서, 파일을 내려다보는 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대표님이 어제 저녁,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그녀의 말투는 단정했다.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건우는 파일을 덮지 않았다.통화 기록의 숫자들이 시야에 남아 있었다.저녁 7시 12분.“오늘로 끝내자고 하셨다고요.”그가 되물었다.“네.”“무엇을.”유림은 잠시 침묵했다.답을 고르는 사람의 침묵이 아니라,상대를 재는 사람의 침묵이었다.“업무 관계를요.”

  • 형수의 밤   3. 마지막 통화

    아침은 비가 그친 뒤에야 찾아왔다.창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사라지자,집 안은 이상할 만큼 고요해졌다.어젯밤의 대화가 정말 있었던 일인지,건우는 한동안 확신하지 못했다.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그는 잠시 멈춰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익숙한 소리였다.누군가 이 집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낯설었다.하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어제 젖었던 코트는 의자에 걸려 있었다.“일어났어?”목소리가 차분했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어젯밤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 형수의 밤   6. 6분의 공백

    카페는 회사 건물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점심시간이 지난 뒤라 한산했다.유리창 밖으로는 출입증을 목에 건 직원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유림은 이미 와 있었다.짙은 네이비 재킷, 단정한 머리.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곧았다.하나와 건우가 들어서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와주셔서 감사합니다.”목소리는 낮고 안정적이었다.하나는 마주 인사했다.“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건우는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유림과 눈이 마주쳤다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세 사람은 마

  • 형수의 밤   5. 공백의 길이

    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방은 익숙했다.벽지의 색, 침대 옆 협탁의 위치, 책상 위에 뒤집힌 법전까지.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다.그런데도 공기는 낯설었다.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 컵이 부딪히는 소리,혼자일 때는 존재하지 않던 생활의 잔향이 집 안에 남아 있었다.그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하나가 부엌에 있었다.단정하게 묶인 머리, 다림질된 셔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어제 새벽의 젖은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일어났네.”건우는 대답을 늦췄다가 짧게 말했다.“네.”하나는 커피를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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