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비를 맞은 채로 이어지는 길 위에서,둘 사이에는 더 이상 급하게 말을 꺼낼 필요가 없었다.하나가 건우를 찾아왔다는 사실,그리고 그 표정과 숨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이미 충분히 전달된 상태였고,지금은 그걸 확인하러 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걸서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건우는 속도를 일부러 늦추지 않았지만,그렇다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발걸음은 일정했고,그 일정함이 오히려 이 상황을 더 또렷하게 만들고 있었다.하나는 한 걸음 정도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가까이 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거리를 벌리지도 않은 채,건우의 뒤를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시선을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바깥의 공기가 생각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단순히 비 때문이 아니라, 방금 전까지 안쪽에서 보고 온 장면이그대로 따라나온 것처럼, 피부에 닿는 공기 자체가 밀도가다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건우는 한 발짝 바깥으로 나왔다가,그대로 멈췄다. 빗방울이 얼굴에 닿고, 눈썹을 타고 흘러내렸는데,그 감각이 낯설지 않았다. 기억이 아니라, 몸이 먼저 알고 있는 감각에 가까웠다.그는 고개를 들었다.골목 끝이 보였다.그리고, 사람이 있었다.하나였다.우산도 쓰지 않은 채 서 있었다.비를 그대로 맞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이미 다 젖어
서하가 고개를 끄덕인 뒤에도,둘 사이의 거리는 더 좁혀지지 않았고,그렇다고 다시 벌어지지도 않았다.그 애매한 간격이 오히려 지금 상태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는데,서로가 같은 장면을 보고 같은 결론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그걸 어떻게 바깥으로 끌고 나갈지는 아직 완전히 정해지지 않았다는 걸둘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우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서하를 바라보다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방 안쪽을 다시 한 번 훑었다.조금 전까지 기억 속에서 겹쳐 보이던 장면은 사라지고,현재의 공간만이 남아 있었지만,그 현재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건 분명했다.“이걸 알고 있는 상태로.”
그 장면은 사라지지 않았다.눈을 감지 않아도, 다시 떠올리려 애쓰지 않아도,방금 전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처럼 또렷하게 남아 있었고,그 또렷함이 현실의 감각과 겹쳐지면서어디까지가 지금이고 어디까지가 그날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졌다.건우는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서 있었다가,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고,그 호흡이 가슴 깊숙이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동안에야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과거의 현장이 아니라현재의 공간이라는 걸 겨우 구분해냈다.그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문턱을 넘어 들어왔던 자리에서 한 발짝만 움직이면 다시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문은 처음부터 열려 있지 않았다.정확히는, 열려 있었다고 믿어왔던 기억이 잘못된 것이었다.건우는 그 사실을 문 앞에 서서야 알았다.손잡이를 잡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았고,오히려 익숙한 공간으로 들어가는 동작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는데,막상 손끝이 닿는 순간, 이 문을 자신이 언제,어떤 방식으로 통과했는지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비어 있다는 걸 분명하게 느꼈다.그는 손을 떼지 않았다.잡은 채로 잠깐 멈춰 있었다.이상하다는 감각이 올라왔지만, 그 감각을 붙잡고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은 따라오지 않았다.오히려 반대로, 이 문을 열지 않으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공백이
건우는 벽에 등을 기대고 선 채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방금 전까지는 무엇이 사실인지, 어떤 기억이 맞는지그걸 구분하려고 애쓰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보다 먼저,왜 그때 자신이 돌아보지 않았는지를 떠올려야 할 것 같은감각이 더 강하게 올라왔다.‘살아 있었어.’머릿속에 떠오른 그 한 문장은, 확신이라기보다는 가능성에 가까웠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가능성이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이미 한 번 겪었던 장면처럼 남아 있었다.뒤에서 들리던 숨,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기척,그리고 그걸 알고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던 자신. 건우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아니야…”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밤이 깊어지고, 어둠이 가득한 방, 건우는 숫자를 다시 적었다.9:129:189:37그리고 그 옆에 한 줄을 덧붙였다.‘왜.’-형은 왜 전화했는가.-위험을 알리기 위해?-아니면 누군가의 도착을 확인하기 위해?그는 처음으로 그 가능성을 떠올렸다.형이 전화한 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면.그 생각은 섬뜩했다.만약 누군가와 약속이 있었다면.9시 18분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건우는 펜을 내려놓았다.기억은
비는 오지 않았는데도, 저녁 공기가 눅눅했다.건우는 창문을 열어두고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 걸 느꼈다.거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숫자가 적힌 메모가 놓여 있었다.9:129:189:37그 아래, 어젯밤 그가 덧붙인 한 줄.‘조용했다.’그는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짚어보았다.조용했다면, 형은 움직이지 않았다.움직이지 않았다면, 누군가를 맞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그 생각이 목을 죄었다.하나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물 흐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지는…건우는 문득 물었다.“그날… 진동 느
밤은 쉽게 오지 않았다.건우는 거실 소파에 앉은 채, 불을 켜지도 끄지도 못한 상태로 시간을 흘려보냈다.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하나의 말. 나가려는 목소리였다.유림의 말. 두 문장이 서로를 부정하고 있었다.형이 나가려 했다면, 문은 열렸어야 한다.문이 잠겨 있었다면, 형은 나가지 않았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혹시 문을 잠근 사람이, 형이 아닐 수도 있다면. 그 생각은 곧바로 밀어냈다.너무 빨랐다. 너무 직접적이었다.아침, 하나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부엌에서 접시를 정리하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차 안의 공기가 조금씩 식는 것 같았다.라디오도 켜지지 않았고, 창문은 닫힌 채였다.건우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빼지 못했다.9시 12분.9시 18분.6분.그 짧은 시간이 자꾸 마음을 긁었다.집에 들어서자, 현관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빛이 바닥에 길게 떨어졌다.하나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그대로 거실에 섰다.“유림 씨 말, 어떻게 들렸어?”그녀가 먼저 물었다.건우는 잠시 생각했다.“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요.”“근데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