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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누구 생각인데

Author: 이스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09 16:09:24

해경은 재하를 봤다.

농담으로 넘겨주길 기다리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가볍게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아직 그래.”

재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해경은 들고 있던 커버를 고쳐 잡았다.

“그럼 내일은…….”

“다음에 가자.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구경은 못 하겠다.”

그는 평소처럼 웃으려다 그만뒀다.

해경도 억지로 웃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이면 지금보다 더 멀리 밀어내는 것 같았다.

“응. 내일 현장에서 봐.”

재하가 떠난 뒤에도 해경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별이 옷걸이 하나를 내밀었다. 아까 커버와 함께 주지 못한 것이었다.

“이것도요.”

“네.”

그는 따로 묻지 않았다.

해경은 한별이 돌아가는 쪽을 봤다. 한마디쯤 할 줄 알았다. 재하와 갈 거냐고 물을 때는 언제고.

'조용히 있으면 또 왜 서운한데.'

지금 재하에게 한 대답을 떠올리니 그런 자신이 조금 싫어졌다.

해경은 옷걸이를 커버 안에 넣었다. 오늘은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해경은 호텔 로비에서 세린과 만났다.

조식당에서 시장에 간다는 말을 듣고 함께 나선 참이었다. 혼자 방에 있으면 어제 일을 자꾸 되짚을 것 같았다.

세린은 커다란 선글라스를 내밀었다.

“둘 중 뭐가 나아요?”

“오른쪽이요.”

“역시. 왼쪽은 얼굴 작아 보인대서 샀는데 코가 없어져요.”

써보니 정말 콧등까지 가렸다. 해경이 웃자 세린도 거울을 보며 웃었다.

“오늘은 실장님 말고 해경 씨라고 불러도 돼요?”

“네. 저도 세린 씨라고 할게요.”

그 호칭으로 처음 말을 걸기까지는 조금 어색했다.

시장에 도착하자 세린은 그 어색함을 가격 흥정에 써버렸다.

상인이 계산기에 숫자를 찍자 세린이 절반을 지웠다.

“너무 깎으시는 거 아니에요?”

“안 되면 안 된다고 하시겠죠.”

상인은 잠시 세린을 보더니 물건을 세 개 꺼냈다. 세린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다섯 개가 나왔다.

해경은 옆에 붙은 작은 표지판을 읽었다.

“그거 묶음 가격인가 봐요.”

“네?”

“세린 씨가 수량을 늘리신 것 같은데.”

두 사람은 결국 작은 라탄 가방 다섯 개를 앞에 두고 웃었다.

해경이 번역기를 켜고서야 거래가 다시 시작됐다.

가방은 하나만 샀다.

세린이 새 가방을 어깨에 걸치자, 해경은 느슨하게 풀린 매듭을 봤다.

“잠깐만요.”

손을 뻗다가 멈췄다.

“이건 직업병이에요. 돈 안 받을게요.”

“아쉽네. 다섯 개 샀어야 했는데.”

끈을 다시 묶어주자 세린이 가방 안에서 작은 거울을 꺼냈다. 립을 고치고는 해경에게도 건넸다.

해경은 입술보다 눈 밑부터 살폈다. 아침에 꼼꼼히 가렸는데 더운 바람에 화장이 조금 들떴다.

'괜히 나왔나.'

파우치를 꺼내려는데 세린이 골목 끝을 가리켰다.

“저기 앉아서 해요. 여기서 하면 땀만 나요.”

카페 안은 서늘했다. 차가운 잔이 나오자 해경도 어깨에서 힘을 뺐다.

휴대폰이 울렸다.

〈시장 갔어요?〉

한별이었다.

해경은 화면을 두 번 읽었다.

〈네.〉

곧바로 답이 왔다.

〈승재가 세린 씨랑 나가는 거 봤대요.〉

'누구랑 갔는지는 알고 물었네.'

해경은 컵에 붙은 물기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왜요?〉

〈거기 코코넛 과자 있으면 좀 사다 줘요. 돈 보낼게요.〉

그녀는 휴대폰을 뒤집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뇨. 심부름이요.”

세린이 빨대를 내려놓았다.

“쉬는 날에도요?”

그러게 말이었다.

해경은 다시 휴대폰을 집었다.

〈직접 사 드세요.〉

보내고 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호텔로 돌아왔을 때 한별은 로비 소파에 있었다. 승재와 화면을 보다가 해경 일행을 발견했다.

세린이 먼저 손을 들었다.

“오빠, 과자 못 샀어. 해경 씨한테 들었는데.”

“안 사 와도 되는데.”

그의 시선이 해경의 손에 멎었다.

투명한 봉투 안에 코코넛 과자가 들었다.

'왜 하필 투명한 데 넣어줘서.'

해경은 봉투를 가방 뒤로 옮겼다.

“제 거예요.”

“안 물었는데.”

“물어보실 것 같아서요.”

세린은 웃으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승재도 통화를 받으러 자리를 비웠다.

한별이 해경 옆으로 왔다.

“맛있어요?”

“아직 안 먹었어요.”

또 먼저 먹어보라고 할까 봐 그녀가 봉투를 열었다.

바삭한 과자 조각을 입에 넣자 코코넛 향이 퍼졌다.

한별은 얌전히 기다렸다.

결국 해경이 봉투를 내밀었다.

“하나만 드세요.”

그가 가장 작은 조각을 골랐다. 그럴 사람 같지 않아 괜히 손을 보게 됐다.

“더 큰 거 드셔도 되는데.”

“하나만이라면서요.”

큰 걸 고르면 빼앗기라도 할 줄 아나. 해경은 봉투째 그에게 넘겼다.

“잠깐 들고 계세요. 가방 좀 정리하게.”

지퍼를 열자 한별이 물었다.

“재미있었어요?”

“네. 가방 다섯 개 살 뻔했어요.”

그가 이유를 물었다. 해경은 계산기에 숫자를 찍던 세린의 표정까지 흉내 냈다. 한별이 웃었다.

말을 마치고 나서야 해경은 자신이 꽤 오래 떠들었다는 걸 알았다.

“배우님은 왜 안 나가셨어요?”

“대본 봤어요.”

“오전 내내요?”

“중간에 과자 생각도 좀 하고.”

해경은 봉투를 돌려받았다.

'그래, 과자. 그것 때문에 연락했지.'

한별이 손가락에 묻은 가루를 털었다.

“오늘은 웃네요.”

가방 지퍼를 잠그던 손이 느려졌다.

“어제는 안 웃었어요?”

“끝나고요.”

재하가 돌아간 뒤였다.

한별이 그때 자신의 얼굴을 봤다는 걸 몰랐다.

“그래서 안 물었어요. 더 얘기하기 싫어 보여서.”

해경은 봉투 윗부분을 두 번 접었다. 접힌 선이 비뚤어져 다시 폈다.

“과자는 핑계예요?”

묻고 나니 너무 아는 척한 것 같았다.

한별이 해경을 내려다봤다.

“과자는 먹고 싶었고.”

그가 접히지 않는 봉투 끝을 잡아줬다.

“누구랑 갔는지는 궁금했죠. 승재한테 내가 물었거든.”

해경은 봉투를 당기지 않았다.

'그걸 왜 지금 말해.'

아까는 심부름이라고 생각하며 과자를 샀다. 지금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한별이 손을 놓자 봉투가 그녀 쪽으로 기울었다.

“내일도 나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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