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마, 마마! 소인은 역병이 아니옵니다! 맹세코 역병이 아니오라, 그저 얼굴에 바른 분(粉)이 맞지 않아 잠시 탈이 난 것뿐이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살기 위해 내뱉은 절박한 변명. 미옥의 짙은 눈매가 일순간 흥미롭게 휘어졌다."분 때문이라고? 그래, 가만 보니 지금도 얼굴에 백분을 두껍게 올렸구나. 그 백분을 지워보거라. 내 직접 보아줄 터이니.""히익……!"은월은 반사적으로 두 손을 올려 제 뺨을 감싸 쥐었다. 이 끔찍한 몰골이 드러나면 당장 흉측하다며 내쳐질 것이 뻔했다.잔뜩 겁에 질려 고개를 젓는 나인을 보며,
초희의 처소에서 빠져나온 은월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뒤뜰의 으슥한 담벼락을 타고 걷고 있었다.참담한 심정에 자꾸만 왈칵 눈물이 차올랐지만, 은월은 행여나 물기가 뺨을 타고 흐를까 서둘러 옷고름을 쥐고 눈가를 꾹꾹 눌러 닦아내야만 했다.'눈물에 분이 씻겨 내려가면 안 돼. 마마께서 덮어주신 뽀얀 백분이 지워지면, 그 흉측한 몰골이 다시 드러나고 말 거야.'눈물조차 마음 편히 흘리지 못한 채, 면포로 얼굴을 칭칭 감고 숨죽여 걷던 그녀의 걸음이 일순간 우뚝 멈춰 섰다. 어느새 다가온 낯선 궁인 서넛이 쥐도 새도 모르게 그녀의 앞뒤
날이 채 밝기도 전, 초희의 처소에는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밤새 끙끙 앓던 은월이 덜덜 떨리는 걸음으로 내실에 들어와 바닥에 엎드렸다.면포 너머로 언뜻 드러난 어린 나인의 뺨은 참혹했다. 붉은 수포가 두꺼비 등껍질처럼 울퉁불퉁하게 돋아나 있었고, 밤새 긁어모은 진물이 엉겨 붙어 흉측한 몰골이었다.그 꼴을 내려다보는 초희의 눈동자에 찰나의 희열과 안도감이 교차했다.'이리도 효험이 빠르단 말인가.'초희는 소매 깃으로 입가를 가린 채 내심 환희를 삼켰다.'그래, 이만하면 되었다. 나는 그년이 독을 먹고 단숨에 숨통이 끊어지기를
같은 시각, 깊은 밤이 내려앉은 연화당.미옥은 거울 앞에 앉아 제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거울 속 여인의 입술은 붉게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조금 전, 하륜이 집요하게 짓이기고 삼켜낸 지독한 흔적이었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혀끝이 아릿할 정도로 통증이 선명했다.미옥은 화장대 한구석에 놓인 작은 백자 합을 집어 들었다. 얼마 전, 하륜이 직접 옥안(玉顔)을 가꿀 때 쓰라며 쥐여주었던 연고였다.손가락 끝에 덜어낸 투명한 연고를 부르튼 입술 위에 얇게 펴 발랐다."……!"그 순간, 미옥의 두 눈이 기이함에 커졌다.상
물건이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싼값에 사들일 권리를 확보하고, 값이 오르자 그 권리 자체를 팔아 막대한 이문을 남겼다. 하륜도 혀를 내두를 만큼 기민하고 계산적인 수완이었다.“대단한데……. 값이 오를 거라는 것을 어떻게 미리 알았지?”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사혁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알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도박이었을 뿐입니다. 틀려도 본전은 하겠지 싶은.” “그렇다면 더욱 대단하군. 내가 없었으면 큰 상단의 주인이 되고도 남았겠어.”‘여기서 더 말리면 결국 말이 막힐 터.’사혁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덕분에 사병들과
어스름한 저녁놀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하륜의 사가(私家).적막이 감도는 방 안, 사혁은 희미한 촛불에 의지해 탁상 위에 펼쳐진 장부를 넘기고 있었다. 사각거리는 붓끝이 종이 위를 스칠 때마다 막대한 액수의 은자가 수치화되어 기록되었다.[서역산 최상품 비단 오십 필. 은자 삼천 냥으로 환전 완료.]얼마 전, 미옥이 조운선에게 받은 것을 넘겨준 물건이었다. 사혁은 이 눈에 띄는 사치품을 도성에 점조직으로 깔아둔 유령 상단을 통해 완벽하게 은자로 세탁했다.서역에서 넘어온 귀한 밀무역품이라는 소문 하나에,
“으아, 이 한겨울에 빨래 담당이라니! 세수도 하기 싫은 날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원래 돌아가면서 하기로 했잖아!”동기의 칭얼거림이 차가운 냇가에 울려 퍼졌다. 미옥은 대꾸 대신 얼음장 같은 물에 방망이질을 해댔다.“입 말고 몸을 움직여. 그럼 좀 덜 추울 테니까.” “그러지 말고, 미옥아.”콧소리 섞인 목소리에 미옥이 경계 서린 눈초리로 고개를 돌렸다.“또 뭔 소리를 하려고?” “노 씨한테 가서 뜨거운 물 좀 달라고 해봐. 네가 부탁하면 물이 뭐야, 빨래도 대신 해줄걸?”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고 방망이질이나
“모실 아이를 보내었는데, 어찌 저를 찾으십니까.”문을 열고 들어선 하륜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조소가 섞여 있었다.“네 놈의 집에서 네 놈을 찾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인가.”“쓸모가... 없으셨습니까.”낮게 깔리는 하륜의 음성에는 묘한 박동이 섞여 있었다. 연호는 입술 끝을 비스듬히 올리며 답했다.“쓸모라…, 누구든 와서 대체 할 수 있는 거라면 없다고 봐야겠지.”하륜이 다가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극진한 태도였으나, 연호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사냥감을 살피는 맹수처럼 예리했다.“두통은 좀 어떠십니까. 안색이 눈에 띄게 좋
취명향 덕에 어깨의 고통은 둔감해졌지만, 이따금 머리를 찌르는 통증에 절로 눈살이 찡그려졌다. 다시 하륜을 부르려는 찰나, 문이 벌컥 열리며 미옥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이것 좀 보세요!”미옥은 품 안에 가득 찬 이름 모를 풀들을 한 움큼 들고 다가와 연호의 앞에 툭 내려놓았다.“……이게 뭐지?”연호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길쭉한 이파리에서는 모과처럼 상큼하면서도 박하처럼 매운 향이 훅 끼쳤다. 피와 취명향에 절여진 방 안의 공기를 뚫고 들어오는 생경한 냄새였다.“이름은 모릅니다. 하지만 천자님의 두통을 낫게 해줄 겁니다
'주인님을 놈이라고 부르다니 필시 높으신 분이구나.'미옥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어느 정도의 신분일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시, 신선님입니까?”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에 남자가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흑발 사이로, 갈증에 젖은 눈동자가 번뜩였다.“신선이라…… 하긴, 이 향에 취하면 이곳이 극락인지 지옥인지 분간이 안 가긴 하지. 가까이 와서 확인해 보거라. 내가 신선인지, 아니면 너를 잡아먹을 괴물인지.”미옥은 침을 꿀꺽 삼키고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었다. 발이 어찌나 무겁게 느껴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