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은은 더는 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는 자신과 머리 하나는 차이나는 아담한 키의 소민아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알아서 생각해봐요.”소민아는 멍하니 문 앞까지 나가는 기성은을 쳐다보고 있었다.돌연 그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분이 좋아지고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기성은이 나가기 전, 소민아는 뒤에서 그의 등을 와락 끌어안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울하게 가라앉았던 감정이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저랑 화해하러 올 줄 알았어요. 성은 씨... 사실 나 성은 씨도 날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어제 헤어지자고 했던 말 취소할게요! 성은 씨가 모든 재산을 다 나한테 줬으니까 성은 씨는 이제 제 남자친구예요!”소민아는 참 다루기 쉬운 사람이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조금 달래면 금방 풀리곤 한다.더욱이 오늘은 기성은이 직접 집에 찾아오기까지 했으니 그 효과는 더할 나위 없었다.기성은은 별다른 감정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그럼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후회 안 하는 거예요?”무언가 의미하는 바가 있는 뼈 있는 말이었다.하지만 소민아는 그 뜻을 알아채지 못한 듯 의문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옆으로 젖히고는 그를 쳐다보았다. 머리 위에 털 한 오리를 붙이고 있는 그녀는 어딘가 약간 어리숙해 보이기도 했다.“제가 왜 후회하겠어요? 언젠간 후회한다고 해도 그때 가서 볼 일이에요. 성은 씨가 나한테 이렇게나 많은 돈을 줬잖아요. 서울에서 별장 하나는 거뜬히 살 수 있지 않아요?”기성은이 눈을 내리뜨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네.”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소민아의 머리 위에 달려있는 털을 잡아냈다.소민아가 흐뭇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럼 됐어요. 제 목숨을 요구하거나 장기를 빼내겠다고만 하지 않으면 뭘 하든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앞으로 나 상처 주면 안 돼요. 또 그랬다간 이 돈 다 써버릴지도 몰라요!”그 순간 소민아는 너무 신나 수소 풍선처럼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소민아는 순간 화가 치밀어올랐다.“기본적인 부끄러움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그녀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무언가 깨달은 듯 물었다.“기성은 씨,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요. 정말 나 좋아하는 거 맞아요? 진심으로 나랑 사귀려는 거예요, 아니면 그냥 갖고 놀고 싶은 거예요?”기성은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소민아는 이미 그의 눈동자에서 답을 찾은 것 같았다.일분일초 그녀의 마음은 커다란 기복을 보였다.소민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침대 끝에 놓인 잠옷을 깔고 앉았다.“기 비서님이 저 같은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사귀자고 했을 때부터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거 맞죠?”“그냥 나한테 솔직히 말해요. 대체 무슨 목적이길래 자신의 감정을 이용하고 이렇게 많은 돈까지 쓰면서 여기에서 연기하는 거예요? 제가 철이 좀 없긴 해도 바보는 아니에요. 상대가 날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눈을 보면 다 알 수 있어요. 난 기 비서님 좋아하고 있다는 거 인정해요. 진심으로 기 비서님과 사귀어보고 싶고요. 전 종래로 제 감정을 이용해 장난을 치지는 않아요.”소민아는 발갛게 실핏줄이 선 눈으로 묵묵부답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쥐 잡듯 잡으며 사납게 구는 것보다 지금 이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 더 비참했다.그녀를 이용해 뭘 하려는지 왜 지어내서라도 말하지 않는단 말인가.짧게라도 좋아한다고 하면 될 텐데...그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아마도... 어제 만났던 주가은 씨야말로 그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겠지.“가세요. 저랑 같이 있는 거 힘들잖아요. 당신 같은 사람은 연기에 소질 없어요.”기성은은 확실히 사람을 속이는 데에 능하지 않았다.“민아 씨 사직서는 내가 없앴어요. 회사 규정대로 다시 들어와 일할 수 있을 거예요. 월급은 전의 3배로 줄게요. 왜 이렇게 하는지는 알 필요 없어요.”그는 단호히 몸을 돌렸다. 나가기 전 탁자 위에 지갑도 다시 내려놓았다.“꺼져요! 나한테서 썩 떨어져요!
그가... 지각했다.성세 그룹이 설립된 이후로 기성은은 단 한 번도 지각했던 적이 없다. 오늘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백혜진은 발갛게 부은 얼굴로 출근한 소민아를 보고는 커피 한 잔을 들고 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민아 씨, 눈이 왜 그래요? 어젯밤 울었어요? 소피아 씨가 또 괴롭혔어요?”“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제 슬픈 영화를 많이 봐서 그래요. 송 부대표님께서 찾으셔서 올라가 볼게요.”송시아가 그녀를 찾은 건 회사 일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일 때문이었다.오랜만에 보는 송시아는 평소와 약간 다른 듯한 모습이었다. 오늘은 반듯한 정장이 아닌 헐렁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기성은과 사귀어요?”송시아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소민아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쭈뼛거리며 말했다.“부대표님...”송시아는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마우스를 움직여 메일함을 열었다.“오늘 아침 기성은이 나한테 메일을 하나 보냈어요. 무슨 내용인지 알아요?”기성은이 그녀에게 메일을 보내다니. 기성은과 송시아는 늘 서로 터치하지 않고 각자의 일만 해왔다. 또한 기성은이 자리 잡은 방향은 아주 명확하다. 무슨 일이 있든 그는 줄곧 전연우 편이다.송 부대표와 대표님의 관계는 그 시작부터 뚜렷하지가 않았다. 회사 직원들 모두 그녀가 성세 그룹 다음 안주인이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소월이 귀국한 이후부터 송시아는 대표님의 총애를 잃었고, 급기야 대표님은 장소월과 결혼 발표까지 했다.그 뒤로부터 송시아와 전연우의 관계엔 금이 가기 시작했고, 심지어 이젠 완전히 두 패로 나뉘었다. 송시아가 비서로부터 부대표까지 승진한 건 대표님이 그녀에게 준 공헌에 대한 보상이다.성세 그룹은 두 사람이 함께 일으켜 세운 회사다. 지금 이 위치까지 오르는 데에 송시아의 노력을 무시할 수 없다.소민아가 고개를 저었다.“저... 전 모르겠어요.”송시아는 컴퓨터 모니터를 돌려 그녀에게 메일을 보여주었다. “기성은이 나한테 민아 씨 사직서 수리하
소민아는 의문스러운 얼굴로 메일을 열어보았다. 정직원으로 전환된 인턴들 명단이었다. 한 명은 디자인팀, 한 명은 마케팅팀, 그리고 소민아였다.소민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정말 그녀의 이름이 쓰여있었다.비서실 문밖에서 몇 명 여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아요. 소피아 씨. 울지 말아요. 이번 달엔 안 됐지만 다음 달엔 분명 기회가 있을 거예요.”“맞아요! 다들 뒷배가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이기겠어요. 원망할 건 한 사람밖에 없어요. 말로는 퇴사하겠다고 해놓고선 뒤로는 소피아 씨 자리 차지한 그 사람 말이에요!”“이렇게 뻔뻔한 사람은 진짜 처음 봐요.”벽을 뚫고 들어오는 커다란 소리에 소민아는 더는 못 들은 척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소피아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위로를 받고 있었다. 정직원 자리 하나 때문에 소민아는 그들에게 상종도 하지 못할 파렴치한 인간말종이 되어버렸다.소민아는 더는 참지 못하고 책상을 쾅 치고는 일어섰다.“다시 한번 말해봐요! 비겁하게 뒷담화나 하지 말고! 그 입 함부로 놀리지 말아요. 나 그렇게 만만한 사람 아니에요!”소피아는 방금 울었는지 눈시울이 새빨개진 상태였다. 그녀가 씩씩거리며 소민아 앞으로 걸어가 따귀를 날렸다.“소민아 씨! 능력이면 능력, 학력이면 학력 다 나보다 한 수 아래잖아요. 사모님이 뒤를 봐주는 것 외에 소민아 씨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는데요! 그래요! 난 당신처럼 뻔뻔하지 못해서 정직원 자리 하나 때문에 기 비서님을 침대까지 꼬드기지 못했어요. 나한테 이번 정직원 전환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아요?”소민아의 얼굴에 곧바로 다섯 개 손가락 자국이 남았다. 그녀는 참지 않고 바로 따귀를 날려 받은 대로 되돌려주었다.“그깟 정직원 자리 난 관심도 없어요. 갖고 싶으면 기성은에게 직접 말해요. 병신처럼 내 앞에서 징징거리지 말고.”“날... 때렸어요? 감히 날 때려요? 우리 엄마도 내 몸엔 손 안 댄다고요! 소민아 씨, 당신 죽여버릴 거예요!”소피아는 미친
회사 내 중요한 결정을 제외한 다른 일엔 전연우는 종래로 관여하지 않는다. 이렇듯 사소한 일에까지 대표가 나서야 한다면 성세 그룹은 한 번 완전히 뒤엎어야 한다. 전연우가 그 어떤 회사보다도 높은 연봉을 직원들에게 주는 건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성세 그룹은 그런 쓰레기 같은 인력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기성은은 비서실에 도착하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소민아가 소피아를 완전히 제압하고 몸을 누르고 앉아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밑에 깔린 사람은 이미 얼굴 전체가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기성은이 소리쳤다.“소민아 씨, 내가 나가자마자 반역이라도 하는 거예요?”기성은이 바닥에서 소민아를 끌어올렸다. 살펴보니 소민아의 목도 그리 무사하지는 않았다. 군데군데 손톱에 긁혀 피까지 나오고 있었다.소민아는 억울한 얼굴로 기성은을 쳐다보았다.“반역한다고 하면 어쩔건데요? 할 수 있으면 해고하세요!”기성은의 얼굴이 차갑게 굳고, 서늘한 한기가 그녀의 몸을 감쌌다. 이렇게까지 화가 난 모습은 처음이라 소민아는 순간 겁에 질려 더는 말하지 못했다.소피아가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자 그가 이마를 짓누르며 말했다.“얼른 병원에 데려가세요. 모든 병원비는 내가 책임질 테니까.”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의아한 눈빛으로 기성은과 소민아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기성은이 왜 개인적으로 혼자 병원비를 낸단 말인가? 이런 병원비는 본래 회사에서 부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기성은이 개인적으로 이런 행동을 하려는 것일까?설마... 소민아와 기성은이 사귄다는 게 사실일까?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감싸니 사람이라면 그들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실은... 그 말은 기성은이 무의식적으로 뱉어낸 말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소민아를 보호해주고 있었던 것이다.어젯밤 일이 일어난 지도 불과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기성은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소민아에게 말했다.“사무실로 따라 들어와요.”소민아는 아직 화가 채 가시지 않아
기성은이 장소월을 쳐다보았다.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기성은은 종래로 그녀를 대표님의 와이프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했던 행동들 모두 전연우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다.그를 조선 시대에 비유한다면 충심으로 똘똘 뭉쳐 주인님인 전연우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장군이다.장소월이 말했다.“기 비서님, 그런 눈빛으로 날 볼 필요 없어요. 기 비서님이 날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거 나도 알아요.”“아까 민아 씨랑 했던 말 조금 들었어요. 기 비서님이 민아 씨를 이용해 뭘 하려는지 짐작이 가네요. 정말 전연우와 똑같은 부류의 인간이에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여자를 이용하는 그런 비겁한 짓을 왜 하는 거예요?”“똑똑히 들어요!”장소월의 목소리가 돌연 딱딱하게 굳고 차가워졌다.“민아 씨에게 진심이든 아니든, 멀리 떨어지세요...”“두 사람이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니에요. 그냥 민아 씨가 기 비서님에게 너무나도 과분한 사람이라 그래요...”“신이랑 씨가 훨씬 더 좋은 사람이에요. 전연우의 그 더러운 수단 배우면 안 되죠...”장소월은 아이의 편을 들어주러 온 학부모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기성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장소월은 사무실을 나섰다. 문 앞까지 걸어갔을 때 그녀가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기 비서님과 민아 씨의 일에 대해 전연우와 상의할 거예요. 필경... 지금의 그 사람은 내 말이라면 다 들으니까요.”기성은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가 가늘게 뜬 눈으로 멀어져가는 장소월을 쳐다보았다.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확실히 이 자리가 가져다주는 영광은 그녀에게 너무 과분하다.“아니, 소민아 씨 대체 어떤 사람이에요? 어떻게 사모님까지 직접 걸음 하셔서 두둔해줄 수가 있죠? 세상에... 우린 이제 끝났어요...”“흑흑... 이제 어떻게 해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런 말은 하지 않는 건데. 이제 회사 짤릴지도 모르겠네요.”“저희... 지금 민아 씨에게 사과하면 너무 늦은 거겠죠?”장
장소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미세한 곡선을 그렸다.“민아 씨... 난 민아 씨가 그들의 희생품이 되는 걸 원하지 않아요. 민아 씨는 정말 착하고 귀한 사람이에요. 내 말 들어요... 성세 그룹을 떠나야 해요. 기성은이 놓아주지 않는다면 내가 전연우에게 말해볼게요. 기성은보단... 신이랑 씨가 민아 씨와 더 잘 어울려요.”소민아는 순진한 사람이다. 장소월 역시 직장 내 암투를 경험한 적은 없지만 소민아는 그들이 권력 다툼을 하는 데에 쓰이는 도구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기성은과 소민아의 스캔들이 전해진 그 순간부터 전연우와 송시아의 싸움이 정식으로 시작된 것이다.지금 상황에서 소민아에게 가장 최선의 선택은 바로 떠나는 것이다.장소월은 그녀에게 연고를 다 발라준 뒤 소염제를 손에 올려주었다.“몸 관리 잘해야 해요.”장소월의 시야에 머지않은 곳에서 달려오고 있는 벤틀리가 들어왔다.그녀는 그렇게 전연우와 함께 떠났다.소민아는 줄곧 그녀가 했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장소월이 뒷좌석에 올라타자 전연우는 들고 있던 담요를 그녀 다리에 덮어주었다.“아무한테나 다 잘해주면서 나한테만 쌀쌀맞지.”장소월이 차갑게 말했다.“네 말 한마디면 곧이곧대로 복종할 사람 줄 섰잖아.”전연우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왜 또 화가 난 거야. 하루 24시간 내가 네 옆에 있잖아. 그거로도 부족해?”장소월은 가감 없이 솔직하게 그에게 말했다.“난 민아 씨가 너와 송시아 두 사람의 싸움에 피해받는 희생품이 되게 하고 싶지 않아.”전연우가 어두워진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장소월도 똑바로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송시아의 목적이 뭔지 너도 알고 있잖아. 널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이야말로 성세 그룹 안주인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 해. 너희 두 사람이 피 터지는 싸움 끝에 갈라섰을 때 영향받는 건 너희뿐만이 아니야! 지금의 넌 예전과는 달라, 전연우...”“수많은 사람들이 성세 그룹에서 일하며 가족들을 지키고 있어.
사무실엔 아무도 없었다. 하여 그녀는 위층 회의실로 뛰어 올라갔다. 회사 직원들 모두가 소란을 떨고 있는 그녀를 보았지만 아무도 감히 뭐라고는 하지 못했다. 성세 그룹 안주인이라는 뒷배를 갖고 있는 그녀를 누가 건드리겠는가.저번 사모님이 직접 비서실로 걸음해 기 비서를 호되게 꾸짖었다는 소문이 회사에 자자했다. 대표님이 수십 년을 함께 해온 비서를 해고한다는 말도 함께 돌고 있었다.이후 소문은 점점 더 부풀어 올라 소민아가 강제로 결혼한다고까지 했다.소민아는 99층에서 마침 대표 사무실에서 나오는 기성은과 마주쳤다. 기성은은 서류를 들고 그녀를 못 본 척 지나가 버렸다. 소민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날 무시해?’소민아는 돌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기성은의 넥타이를 움켜쥐었다.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동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말이다.기성은은 그녀가 회사에서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조용한 복도, 센서등이 켜졌다가 몇 초 뒤 다시 꺼졌다. 비상구 표지판만 희미한 초록색 불빛을 내뿜는 어둠 속에서 소민아는 고개를 들고 빛나는 남자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기성은의 경고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소민아는 차가운 그 목소리를 들으니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기성은 씨, 나 이제 다 알겠어요... 당신이 내가 뭘 하길 원하는지 알겠다고요. 아니, 아직은 모른다고 해도 앞으로는 분명 알게 되겠죠. 지금은 때가 아니라면요.”“이거 놔요!”기성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일갈했다.소민아는 바로 손을 내렸다. 그의 목소리에 꺼졌던 센서등이 다시 켜졌고 기성은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의 눈동자는 조금의 감정도 없는 기계 사람처럼 텅 비어 있었다. 정말...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던 말인가?“그럼 이렇게 하죠! 제가 회사에 계속 남아서 당신들이 하라는 대로 할게요.”소민아 역시 자신은 이용당하는 도구에 적합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로울 것 하나 없는 이
배가 고픈 데다 아기들이 발길질까지 하니 더욱 아팠다. “아가들아, 제발 차지 마. 규영 언니랑 미진 언니가 곧 맛있는 거 가져다줄 거야.”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규영과 미진은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뱃속 두 녀석들이 워낙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으니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간단히 드실 걸 가져다드릴게요. 여기 앉아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거듭 당부했다. 소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여기 이렇게 많은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잖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절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게요.” 규영과 미진은 사람들에게 다시 신신당부한 뒤에야 먹을 것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지난번 일 이후로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게 되어 소현아의 음식은 반드시 그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소현아는 혼자 소파에 앉아서 작게 아기들과 이야기했다. “아가들아, 소월 이모가 전연우 그 나쁜 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전화를 왜 안 받은 거지?” “나 소월이가 너무 걱정돼. 근데 너희가 너무 무거워서 몰래 도망갈 수도 없어.”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점점 잦아드는 태동뿐이었다. 소현아는 아기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누군가 문을 열었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얇은 연노랑 잠옷만 입고 있던 소현아는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곧이어 도우미들의 공손한 인사 소리가 들렸다. “효연 아가씨.” 천효연은 거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 보고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여기 뒀던 내 꽃병은 어디 갔어?” 계단 모퉁이에 있던 꽃병이 사라진 걸 발견한 천효연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현아 아가씨가 다치실까 봐 잠시 장식품들을 다 치웠습니다.” 소현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천효연의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 “그 바보는 지훈 씨가 방에 가둬놨잖아?” 도우미
엄마와 통화를 마친 뒤, 소현아는 장소월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연우 그 나쁜 놈이 소월이를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혹시 소월이는 강용 소식을 알지 않을까... 소현아는 강지훈이 강용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장소월의 당부를 기억하며 감히 묻지 못했다. 통화음이 두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소현아는 흥분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소월아! 드디어 전화 받았네! 있잖아,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나 계속 방에 가둬놓고 문밖으로 못 나오게 했어. 나 진짜 답답해 미치겠어!” “널 여기 데려와 같이 놀려고 했는데, 강지훈의 말이 전연우 그 나쁜 놈이 너 안 보낸다고 하더라고. 둘 다 진짜 짜증 나! 내가 간신히 휴대폰 구해서 전화한 거야. 소월아, 그 나쁜 놈한테 말하고 이쪽으로 놀러 와줄 수 있어?” 한참을 떠들었을 때, 저쪽에서 낮고 위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훈이 내가 소월이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언제 나한테 물어봤는데?” 소현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에야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전... 전연우 씨? 왜 당신이 전화를 받아요?” 전연우가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쁜 놈이 전화를 받아서 많이 실망했나?” 소현아는 겁을 먹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저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잘못 들었어요! 소월이는요? 이거 소월이 폰이잖아요. 빨리 소월이한테 돌려줘요!” 전연우가 말했다. “소월이는 전화 안 받아. 다시 전화하지 마.” “소월이한테 나라고 말해줘요. 소월이가 제 전화 안 받을 리 없어요.”소현아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소월이 찾지 마. 바빠서 너랑 소꿉놀이할 시간 없으니까.” “그리고 강지훈한테 전해. 내게 터무니없는 누명 씌우지 말라고.” 전연우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현아가 다시 걸어봤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현아 아가씨, 이제 일어나서 운동할 시간이에요.” 규영과 미
소현아는 얼굴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빨 자국을 달고서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강지훈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소월이한테 전화해도 돼요?” “그쪽에서 받기만 한다면야.” 소현아는 이제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저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 강지훈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신이 나 붕방거리던 소현아는 김빠진 공처럼 순식간에 축 처져버렸다. “하지만 방에만 계속 있는 건 너무 따분하단 말이에요.” “절대 도망 안 갈게요. 여기 아기들도 있잖아요. 그냥 아래층에서 좀 돌아다니게만 해줘요, 네?” 그녀가 지금 머무는 방은 집에 있던 침실을 완벽하게 똑같이 복원한 곳이었다. 소현아는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며칠 동안 줄곧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녀는 방안을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방은 갑자기 창고로 변해버렸고, 아무리 깨려고 해도 도저히 깨어날 수가 없었다. 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밥을 한입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연우 그 나쁜 놈도 소월이가 마당에서 그림 그리는 건 허락하던데... 강지훈 씨는 날 침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네. 전연우보다도 더 나빠.” “...” “아래층에서만 놀아. 방을 나서면 규영과 미진이 따라갈 거야.”결국 강지훈이 한발 물러섰다. 소현아의 눈에 다시 별빛이 들어왔다. “음, 당신은 전연우 그 나쁜 놈보다 조금 나아요. 정말 아주 조금.” 아침을 먹고 난 뒤 소현아는 바로 휴대폰을 요구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거의 즉시 연결되었다. “현아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명세진의 목소리는 흥분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 조심스러웠다.오랜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소현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
강지훈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아왔다.옆방에서 샤워를 마친 강지훈은 잠옷을 입고 소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소현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2.2미터나 되는 퀸사이즈 침대에서 편안하게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말이다. 무슨 꿈을 꾸는지 웅얼거리며 입가에 흘린 침을 닦고 있었다.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강지훈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침대 곁으로 다가간 그는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배를 덮어주고는 코를 꼬집었다.“윽...”잠시 후 소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눈을 떴다.“강지훈 씨 너무 싫어요. 숨을 쉴 수가 없잖아요. 빨리 놔줘요.”침대 곁에 있는 사람을 본 소현아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강지훈이 말했다. “말해 봐.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제대로 말하면 놔줄게.”소현아는 씩씩거리며 눈을 감고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뻐끔뻐끔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복어 같았다.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까지 막아버렸다.몇 초 지나지 않아 소현아는 다시 웅얼거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지훈은 그저 잠시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지만, 한번 맛을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그는 손을 떼어 그녀의 허리에 얹고 반바지를 벗기려 했다.소현아는 필사적으로 바지를 붙잡고 엉덩이를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강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손 놔. 살살할게.”“저 졸려요. 자고 싶으니까 강지훈 씨도 빨리 자요.”그녀는 강지훈이 또 키스하려 할까 봐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낑낑거리며 그를 밀치고는 죽은 척 눈을 감았다.강지훈이 어떻게 하든 소현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정말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곤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다음 날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 꼭 안겨있었다. 그녀의 코끝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아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어젯밤 일이 떠오른 소현아는 그의 가슴을 힘껏 깨물었다.곧이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