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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마지막 저주(1)

Aвтор: 유리구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21 08:04:30

분노도 원망도 모두 하얗게 타버려 차가운 재만 남은 상태.

오직 이 지옥을 스스로 끝낼 수 있다는 서늘한 안도감만이 그녀를 지배했다.

사각, 사각.

만년필 촉이 종이 위를 긁고 지나가는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지안의 입술 사이로 조용한 읊조림이 새어 나왔다.

“다음 생이 있다면…….”

차태경이 이 종이를 보게 될 순간을 상상했다.

오만하고 완벽한 그의 세상에 자신이 남길 유일한 오점.

“절대 너 같은 악마와 얽히지 않기를.”

만년필에 힘이 들어갔다. 종이가 찢어질 듯 날카로운 필체가 이어졌다.

“네가 평생, 내 피를 뒤집어쓰고 지옥에 살기를.”

탁.

만년필의 촉이 종이 끝을 강하게 찌르며 마침표를 찍었다.

지안은 만년필을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마지막 저주가 담긴 유서였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펜트하우스의 거대한 통유리창 쪽을 응시했다.

바깥으로 연결된 넓은 베란다.

지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유리문을 밀어 열었다.

훅 끼쳐오는 차가운 고층의 바람이 그녀의 낡은 흰 셔츠를 매섭게 흔들었다.

난간 너머로는 까마득한 서울의 빌딩 숲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지안은 난간을 짚고 한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공포는 없었다.

차태경의 곁에서 숨을 쉬는 것이, 저 허공으로 몸을 던지는 것보다 백 배는 더 끔찍한 지옥이었으니까.

---

같은 시각.

서울중앙지방법원 대법정.

“원고 측이 제시한 증거는 법적 효력을 상실했습니다. 피고 법인은 이미 적법한 절차를 거쳐…….”

태경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변론을 이어가고 있었다.

재판장의 시선, 방청객의 숨소리 하나까지 완벽하게 통제된 공간.

그가 설계한 승리의 판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변론 요지서를 다음 장으로 넘기려던 태경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윽.

가슴 한가운데를 날카로운 송곳으로 꿰뚫는 듯한 통증.

태경의 짙은 미간이 깊게 패였다.

그는 넥타이를 쥔 채 숨을 들이켰다.

“원고 대리인. 변론 이어가시지요.”

재판장의 목소리가 수조 속에 잠긴 것처럼 아득하게 멀어졌다.

태경의 귓가에 이명이 울렸다. 삐이이-.

심장 박동이 통제할 수 없이 날뛰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다려진 셔츠 깃 너머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단순한 육체적 통증이 아니었다.

자신의 손아귀에 꽉 쥐고 있던 보이지 않는 끈이, 툭 하고 끊어지는 듯한 기괴하고도 소름 끼치는 감각.

‘송지안.’

머릿속을 스치는 단 하나의 이름.

오늘 아침, 초점조차 없던 그녀의 텅 빈 눈동자.

저항조차 포기한 채 바닥에 늘어져 있던 몸.

그것이 굴복이 아니었음을, 태경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완벽한 통제를 벗어나, 영원히 도망치려 하고 있다는 직감.

태경은 들고 있던 변론 요지서를 법정 바닥에 그대로 떨어뜨렸다.

펄럭. 종이 뭉치가 흩어지는 소리에 법정 안이 술렁거렸다.

“대, 대표님?”

뒤에 앉아 있던 수석 비서가 당황하여 그를 불렀다.

하지만 태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재판장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눈길을 주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차태경 변호사!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재판장이 의사봉을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태경은 등조차 돌리지 않았다.

굳게 닫힌 법정 문을 거칠게 밀어젖히고 복도로 뛰쳐나갔다.

“차 대표님!”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

그는 법원 로비를 가로질러 미친 사람처럼 달렸다.

끼이익- 쾅!

대형 세단이 굉음을 내며 법원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신호등의 붉은 불빛이 연달아 번쩍였지만, 태경은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

경적을 울리며 피하는 차들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가 좁은 차 안을 채웠다.

태경은 목을 조르는 듯한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뜯어 던졌다.

설명할 수 없는 극도의 공포.

승소를 놓쳤을 때도, 타깃이 도망쳤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그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펜트하우스 앞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 뚜- 뚜-.

신호음만 길게 이어질 뿐,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운전대를 쥔 태경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빌어먹을. 받아, 받으라고!”

태경이 휴대전화를 조수석으로 거칠게 내던지며 가속 페달을 짓밟았다.

RPM 게이지가 한계치까지 치솟았다.

도심의 풍경이 잔상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쓸데없는 짓 할 생각 말고.’

아침에 자신이 뱉었던 서늘한 경고가 환청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녀가 길거리를 헤매며 생기를 잃어갈 때, 자신이 느꼈던 승리감 이면의 불안감.

그 불안감의 정체가 이제야 명확해졌다.

자신의 잔혹한 통제가 그녀를 꺾어버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었다는 사실.

“안 돼. 절대 안 돼.”

태경의 이가 부서질 듯 맞물렸다.

전방에 늘어선 꽉 막힌 차선.

태경은 운전대를 거칠게 꺾어 반대편 중앙선을 넘어 역주행을 시작했다.

마주 오는 차들의 경적 소리와 날카로운 브레이크 마찰음이 귓가를 때렸지만, 그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제발, 제발.’

오직 승리와 통제만을 맹신하던 사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신을 향해 처절하게 빌고 있었다.

그 오만한 입술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거대한 주상복합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태경의 핏발 선 시선이, 까마득한 꼭대기 층의 테라스를 향해 미친 듯이 뻗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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