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지안은 편의점 계산대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코드 리더기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며칠 전 공사장에서 쫓겨난 뒤, 간신히 구한 심야 아르바이트 자리였다.“계산 안 합니까?”
“아, 죄송합니다.”지안은 황급히 바코드를 찍고 거스름돈을 내밀었다.
손님은 불쾌한 표정으로 잔돈을 낚아채듯 받아 들고 나갔다. 지안은 마른세수를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편의점 문이 열리며 점장이 들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짙은 난처함이 서려 있었다.“저, 지안 씨.”
“예, 점장님.” “미안한데, 오늘까지만 일해야 할 것 같아.”지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바코드 리더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갑자기 왜…… 혹시 제가 실수라도 한 건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위에서 지시가 내려와서 그래. 우리 같은 직영점은 본사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잖아. 정말 미안해.”점장은 시선을 피하며 봉투 하나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틀 치 일당이 든 얇은 봉투. 지안은 봉투를 응시하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알겠습니다.”
편의점을 나선 지안은 차가운 새벽 공기를 들이마셨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어느새 자신이 머물던 허름한 고시원 앞이었다.“뭐야, 왜 아직도 안 나갔어?”
고시원 주인이 문을 막아서며 언성을 높였다.
“보증금 가압류 들어온 거 몰라? 당장 방 빼!”
“사장님, 며칠만, 딱 며칠만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지금 당장 갈 곳이 없어서…….” “내 알 바 아니지! 얼른 짐 싸서 나가!”주인은 지안을 거칠게 밀어내고 그녀의 방 문을 열어젖혔다.
좁은 방 안에 있던 낡은 캐리어 하나를 밖으로 집어 던졌다. 캐리어가 바닥에 나뒹굴며 지안의 옷가지 몇 벌이 쏟아져 내렸다.지안은 바닥에 주저앉아 쏟아진 옷들을 쓸어 담았다.
수치심과 모멸감이 온몸을 휘감았지만,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낡은 캐리어를 끌고 다시 거리로 나선 지안.
새벽의 거리는 지독하게 고요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걷다 버스 정류장 벤치에 주저앉았다. 멍한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했다.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극심한 불면증으로 인해 눈을 감아도 잠들 수 없었고, 잠이 들어도 끔찍한 악몽에 시달렸다. 태경의 서늘한 눈빛이 끊임없이 그녀의 목을 조르는 꿈. 지안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듯,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펜트하우스의 거대한 모니터 앞.
태경은 벤치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지안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니터 너머로 전해지는 지안의 깊은 절망감. 그녀의 텅 빈 눈동자는 더 이상 세상을 향해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어떠한 저항도, 분노도 없는, 완벽한 체념의 상태.태경은 위스키 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자신이 그녀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다.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발버둥 치다 결국 굴복할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그녀는 살기 위해 자신에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
태경의 심장이 불길하게 요동쳤다.
그가 원한 건 그녀의 죽음이 아니었다. 자신의 곁에서 숨을 쉬며 영원히 옭아매여 있는 것. 그것이 그가 바라는 완벽한 소유였다.“……망할.”
태경은 위스키 잔을 신경질적으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코트를 집어 들며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송지안 당장 찾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앞에 데려와.”
태경의 목소리에는 짙은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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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새벽.
지안은 낡은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동전을 넣고 다이얼을 눌렀다.신호음이 길게 이어지다 마침내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선배, 저예요. 지안이.” [지안아…… 너 괜찮니?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어.]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선배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선배, 부탁 하나만 할게요. 저, 비행기 표 하나만 구해주세요.”
[비행기 표? 어디로 가려고?] “어디든 상관없어요. 그냥…… 이 나라를 떠나고 싶어요.”지안의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다.
더 이상 차태경의 그림자가 미치지 않는 곳. 그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알았어. 내가 알아볼게. 조금만 기다려.]
전화가 끊어지고, 지안은 부스 유리에 기대어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것이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하지만 지안은 알지 못했다.
그녀의 통화 내역이 이미 태경의 정보망에 포착되었다는 사실을.“조금만, 조금만 더 눈을 감고 계십시오. 거의 다 왔사옵니다.”“어찌 이리 유난이십니까. 눈앞이 캄캄하여 발을 헛디딜 것 같습니다.”“제가 부인의 손을 이리 꽉 잡고 있지 않습니까. 제게 온전히 기대어 걸으시면 됩니다. 단 한 걸음도 다치지 않게, 돌부리 하나 채이지 않게 할 것입니다.”한양 도성 한복판, 가장 높게 솟아오른 거대한 누각의 가파른 계단.이헌은 서연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서서, 자신의 커다랗고 거친 두 손으로 그녀의 두 눈을 조심스럽게 가린 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서연의 가녀린 등이 온전히 기대어진 상태였다.서연은 앞이 보이지 않는 답답함과 느릿한 걸음에 작게 투덜거렸지만, 그녀의 붉은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옅고 다정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자신을 이끄는 이헌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혹여나 그녀가 넘어질까 봐 온몸의 신경을 팽팽하게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 그녀의 등 너머로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대군. 궐 밖으로 미복잠행을 나온 것도 모자라, 어찌 이 서늘한 야밤에 도성 한가운데의 누각까지 오르시는 겝니까.”서연이 조심스레 나무 계단을 밟으며 나지막이 물었다.“이 누각은 평소 양반들과 시인묵객들로 밤낮없이 북적이는, 풍류의 중심이라 들었습니다. 혹여나 사람들의 눈에 띄면…….”“걱정하지 마십시오.”이헌이 서연의 귓가에 대고 낮고 은밀하게 속삭였다.그의 뜨거운 숨결이 귓바퀴에 닿을 때마다 서연의 어깨가 찌릿하게 움찔거렸다.“오늘 밤, 이 누각 전체를 통째로 비워두라 흑위대에게 명했습니다. 이 거대한 건물 안에는, 아니 이 근방 백 보 안에는 개미새
“……!!”이헌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미친 듯이 팽창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져 콧김이 닿았다.서연의 따뜻한 체온과 코끝을 찌르는 달콤한 난초 향기가, 이헌의 자책감으로 굳어버린 감각을 강렬하고 아찔하게 일깨웠다.쪽.아주 짧고 다정한,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온기가 가득한 입맞춤.서연의 부드러운 입술이 이헌의 굳게 다문 차가운 입술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아…… 아아…….”이헌의 머릿속이 거대한 벼락을 맞은 듯 새하얗게 점멸했다. 멍청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그들이 부부의 연을 맺고 입맞춤을 나눈 적은 있었으나, 이처럼 서연이 먼저 예고 없이 다가와 입을 맞춘 것은 처음 있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그 다정하고도 놀랍고 도발적인 위로의 방식에, 이헌은 숨 쉬는 것조차 완벽하게 잊어버린 채 망연자실하게 그녀의 눈동자만 쳐다보았다.서연은 이헌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아주 깊고 맑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동자로 그의 핏발 선 시선을 얽어매었다.“대군.”서연의 목소리는 봄바람처럼 나긋하고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 뼈대처럼 담긴 힘은 거대한 산맥처럼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간밤의 그 끔찍했던 발작이, 대군을 또다시 그 춥고 외롭고 잔인한 과거의 감옥으로 밀어 넣은 것 같군요.”“부인…… 저는…….”“하지만 똑똑히, 아주 똑똑히 새겨들으십시오.”서연이 이헌의 뺨을 쥔 손에
그 지독하고 처절했던 밤이 지나간 후, 대군저의 공기는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헌 한 사람만이 만들어내는 숨 막히는 침울함과 무거운 압박감이었다.“…….”고요한 아침 수라상 앞.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진 진수성찬 앞에서도, 이헌은 숟가락을 들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애꿎은 빈 밥그릇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그의 거대한 몸이 한껏 움츠러들어, 마치 주인에게 크게 혼이 나 구석에 꼬리를 만 커다란 맹견 같았다. 밥알을 넘길 자격조차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는 듯했다.“대군. 어찌 식사를 들지 않으십니까.”맞은편에 단정히 앉은 서연이 조용히 은수저를 내려놓으며 물었다.“아…… 아가씨. 아니, 부인.”이헌이 화들짝 놀라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숟가락을 집어 들었지만, 여전히 그의 핏발 선 시선은 서연의 치맛자락 끝, 혹은 그녀의 발끝에만 위태롭게 고정되어 있었다. 감히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어디 편찮으신 겝니까. 안색이 상했습니다.”“그, 그것이 아니라…….”이헌의 목소리가 대역죄인처럼 한없이 기어들어 갔다.“간밤에…… 제가 참으로 흉측하고 추악한 꼴을 보였습니다. 짐승처럼 미쳐 발작하고 해괴한 소리를 질러, 옥체에 심려를 끼치고 고결한 귀를 더럽혔사옵니다.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그의 굵은 목울대가 크게, 그리고 뻣뻣하게 출렁였다.“제가 부인의 안식을 지키고 평안하게 해드려야 마땅하거늘. 오히려 저의 그 더럽고 미친
영혼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저 짐승 같은 오열이, 그가 그동안 얼마나 처절한 지옥 속에서 홀로 뒹굴어 왔는지를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었으니까.서연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맑은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내렸다.“다 괜찮습니다…….”서연은 발작하듯 떠는 이헌의 넓은 등을 두 팔로 꽉 감싸 안았다.자신의 품에서 피를 토하듯 우는 그를,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아주 단단히 옭아매었다.“울지 마십시오. 내가 곁에 있지 않습니까.”서연의 부드러운 손바닥이 그의 땀에 젖은 등을 규칙적으로, 아주 다정하게 토닥이기 시작했다.“제가 여기 있습니다.”그녀의 차분하고 물기 어린 목소리가 이헌의 귓가에 조용히 흘러들었다.“아무 데도 가지 않으니, 제발 안심하십시오.”“흐으…… 아가씨…… 아가씨…….”“예. 접니다. 당신의 서연이 여기 있습니다.”서연은 이헌의 고개를 자신의 가슴팍으로 조심스럽게 끌어당겼다.그의 뺨이 그녀의 왼쪽 가슴에 깊숙이 파묻혔다.쿵, 쿵, 쿵, 쿵.일정하고 따뜻하게 박동하는 서연의 심장 소리.그 어떤 맹세보다도 강력하고 생생한 생명의 증거.“……!”그녀의 심장 소리가 이헌의 귓가를 울리는 순간.그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던 지독한 과거의 환각이, 거짓말처럼 썰물 빠지듯 서서히 물러가기 시작했다.차가운 아스팔트의 환영이 깨어지고, 호박 등불이 비추는 따뜻한 조선의 침소가 눈에 들어왔다.살을
대군저 안채에 찾아온 일상은 놀라울 정도로 평화로웠다.칼바람이 불던 지난겨울의 기억은 아득한 전설처럼 희미해졌고, 두 사람의 곁에는 오직 따스한 온기와 달콤한 밀어만이 맴돌았다.“…….”어둠이 깊게 깔린 침소.서연은 이헌의 단단한 팔베개를 베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서로의 체온이 얽힌 이불 속은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한 성역이었다.하지만 그 완벽한 평화의 이면에서, 지독한 과거의 망령이 이헌의 목을 서서히 조여오고 있었다.“……헉, 으, 으윽……!”적막을 찢고, 이헌의 입술 사이로 기괴하게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그의 넓은 이마에는 굵은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감긴 두 눈의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서 미친 듯이 굴러갔고, 그의 호흡은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가파르고 거칠어졌다.‘안 돼…….’꿈속의 그는 조선의 대군저 침소가 아니었다.살을 에는 듯한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 닥치는, 수십 층 높이의 차가운 빌딩 옥상.발밑으로는 아득하게 까마득한 아스팔트 바닥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자신이 휘두른 권력과 율법의 칼날에 베여, 억울하게 피를 쏟으며 죽어갔던 한 여자.그녀의 핏기 없는 얼굴이 그의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왜…… 저를 죽이셨습니까.』“아, 아니야…… 내가, 내가 그런 것이……!”환각 속에서 이헌은 허공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그녀의 형체는 손끝에 닿기도 전에 바스러져 허공으로 흩어졌다.
천하를 호령하고 대신들을 짓밟는 폭군의 껍데기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아내의 따뜻한 온기를 미친 듯이 갈구하는 덩치 큰 짐승만이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서연은 그런 그의 넓은 등을 가만히 토닥이며, 들고 있던 수건으로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아주 부드럽고 꼼꼼하게 닦아내었다.“수고하셨습니다. 밖이 서늘하니 어서 무거운 겉옷을 벗으시지요.”서연이 이헌의 무거운 흑색 겉옷을 직접 벗겨내어 하인에게 넘겨주었다.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평온하고 일상적인, 완벽한 부부의 모습이었다.피비린내와 비명 소리로 얼룩졌던 이 대군저 안채는, 이제 두 사람의 달콤한 밀어와 웃음소리로 꽉 채워진 조선 최고의 완벽한 성역(聖域)이 되어 있었다.방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호박 등불 아래 찻상을 두고 마주 앉았다.상궁이 내어온 따뜻한 맑은 차와, 방금 수라간에서 구워온 고소한 잣나무 다식이 놓여 있었다.“이 다식은 어떠하십니까. 낮에 편전에서 부인 생각이 미치도록 나서, 수라간에 특별히 어명을 내려 들여보낸 것입니다.”이헌이 다식 하나를 손으로 직접 집어 서연의 입가로 조심스레 내밀었다.“달지 않고 참으로 고소합니다. 대군의 그 세심한 배려 덕분에 제 입이 매일 호강합니다.”서연이 그가 주는 다식을 오물거리며 받아먹고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그녀의 그 작은 칭찬 한마디와 미소 하나에, 이헌의 흉곽은 세상을 다 얻은 듯 터질 듯이 벅차게 부풀어 올랐다.“오늘 궐의 편전에서는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조세 개편안을 두고 훈구파들과 옥신각신 논하신다 들었는데, 얼굴에 핏대가 선 것을 보니 피곤하셨던 모양입니다.”서연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넌지시 그날의 정무에 대해 물었다.&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