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Chapter 841 - Chapter 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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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1화

임곽수의 약속을 받은 경안향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고, 조용히 공손하게 작별 인사를 남겼다.그녀가 떠난 뒤, 임 부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마루로 나와 임곽수를 바라보았다. “대인, 우리 세안이는 그런 아이가 아니잖아요. 혼례 전에 분명 기뻐했었고, 평생 우리처럼 그리고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처럼 일편단심 살겠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혼례 치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여인을 데리고 들어오다니요.”임곽수는 무릎을 탁 쳤다. “그러게나 말이오. 대체 뭔 일인지를 모르겠구려. 얼굴을 보기 어려우니, 오늘 밤이라도 세안이한테 찾아가 물어보는 게 좋겠소.”임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며느리는 어사대부의 딸인데… 이번 일은 세안이가 너무 심했어요.”두 사람은 사태의 본질을 모르고 있었다.오후가 되어, 임세안은 조정을 마치고 곧장 만안당으로 향했다.마침 잘 왔다는 듯, 두 사람은 그를 따로 불러내어 어제의 '사촌여동생' 이야기부터 캐물었다. “세안아, 첩을 두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그게 무슨 사촌여동생이란 말이냐. 내가 보기엔 그 여인들과 사귀는 게지.”임곽수는 수염을 쓸어 넘기며 화를 내고 있었고, 임 부인은 손으로 그를 막아 세웠다.“잠깐, 여보 우선 일단 세안이 이야기를 들어봅시다.”두 사람은 모두 그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치 임세안이 변명이라도 들어놓길 바라면서…임곽수는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 이제 말해 보거라. 어영부영 넘길 생각 말고.”그들 가족은 황후의 보살핌을 받아 오늘에 이르렀고, 임세안이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된 것도 결국 황후의 추천 덕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에 대한 평판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임세안은 깊은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저와 부인 사이의 일은 지금으로선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두 분께서는 부인에게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그게 무슨 말이냐?”“그냥…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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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2화

“이혼이라니?”임곽수가 다소 당황한 듯 되물었다.“서로 맞지 않으면 헤어져야죠. 꼭 얽매여 살아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임 부인이 단호히 잘라 말했다.“……”“……”‘아니, 어머니는 지금 도대체 누구 편을 드시는 겁니까? 저를 도우시려는 건지, 부인의 편이신 건지 알 수가 없군요…’경안향이 정말 경안향이 맞았다면, 만약 어떤 의도를 품고 본인에게 접근한 것이 아니라면… 설령 이 길이 험난하더라도, 그는 그녀와 끝까지 함께하려고 했다.하지만… 그녀는 정말 경안향이 맞을까?이 생각만 하면 가슴이 저릿했다. 자신의 순결한 몸이 혜아에게 그렇게나 가볍게 넘어갔다는 현실이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지금까지도 혜아의 행방은 묘연했다. 생각만 해도 울화가 치밀었다.임곽수는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됐다. 그럼 이 일엔 더 이상 간섭하지 않으마.”그는 임세안을 바라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허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사람 마음은 헤아릴 줄 알아야지. 설령 경 대인의 체면만 생각한다 하여도 말이다. 너희 혼사는 폐하와 황후 마마께서 맺어주신 연이 아니더냐.”“그래, 아무리 정이 식었다 해도 인연은 귀한 법이지. 혼사는 전생의 덕이라 하지 않더냐. 쉽게 여겨서는 아니 된다, 아들아.”임 부인도 자애로운 어조로 덧붙였다. 마음 한켠으로는 아들 편도 들면서, 며느리도 안쓰럽게 여긴 것이다.임세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아 부친과 모친께 예를 갖춰 인사했다.“아버지, 어머니.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훗날 모든 것을 낱낱이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디 지금은, 저와 부인 사이 일에는 간섭 마시고 지켜봐 주시옵소서.”…괜찮다니. 두 노인은 그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임세안이 내실을 나서자, 남은 두 어른은 눈을 마주쳤다.“이게 무슨 꼴이람. 얼마 지나지 않아 손자를 안겨줄 줄 알았거늘… 지금 저 상태로야, 손자 구경은 몇 년은 물 건너간 것 같소.”임곽수가 탄식했다.임 부인도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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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3화

경안향은 조심스레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서방님께서 요즘 정무로 몹시 분주하시다 하여, 소첩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그러면서 조심스럽게 들고 온 그릇을 내보이며 말했다.“방금 끓인 죽을 들고 왔습니다. 한 수저 드셔보시겠습니까?”임세안은 문 앞까지 나와 그녀를 마주했다.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얼굴에는 늘 묘한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그런 것은 부녀자들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오? 부인께서 드시는 것이 나을 듯하오. 부인의 안색이 좋아지면 나도 기쁘지 않겠소.”경안향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미소를 머금었다가,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정말, 기쁘십니까?”임세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그럼. 부인이 기쁘면 어찌 내가 기쁘지 않겠소? 혹여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소? 내게 말해주시오. 부인의 일이면 내가 마땅히 나설 일이니.”경안향은 속으로 혀를 찼다.‘나무토막 같은 사람아, 누가 봐도 내게 마음이 없는 것이 뻔한데!’그녀는 한청에게 고개로 신호를 주어 자리를 물리게 하고, 직접 문을 닫았다.임세안은 그 모습에 내심 경계심이 들었다.‘이건 무슨 분위기지... 설마 또 무슨 수를 쓰려는 건가?’그가 자리로 돌아가려는 찰나, 경안향이 발걸음을 재빠르게 옮겨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은 힘없이 다정하고, 눈망울에는 억울함과 애절함이 서려 있었다.“서방님, 혹시... 제가 미우십니까?”임세안은 속으로 치를 떨었지만 겉으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은 그녀의 팔을 떼내려 했으나, 예상 외로 단단히 붙들고 있는 손을 쉽게 떼지 못했다.“부인이 어찌 그런 말씀을 하는 것이오.”경안향은 고개를 들고 꾹 눌러 참고 있던 감정을 꺼냈다.“혼례 이후, 서방님께서 절 찾으신 건 단 한 번뿐이었습니다. 오늘 시부모님을 뵈었사온데, 두 분께선 하루빨리 손주를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손주? 웃기고 있군.’임세안은 속으로 그 말을 씹었다. 그런 말을 꺼내며 정을 구걸하다니. 얼마나 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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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4화

임세안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다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곁에 놓인 쟁반을 들어 경안향에게 건넸다.“부인, 가을이 오니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소. 이건 내가 상점에 들러 부인 치수에 맞춰 주문한 옷이오. 마음에 드는지 모르겠구려. 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일 다시 가서 새로 지어주겠소.”옷을 바라보던 경안향은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서방님, 이 옷이… 저를 위한 것이었습니까?”임세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소, 부인 말고 또 누구를 위해 이런 옷을 준비하겠소?”그는 정말 자신을 위한 옷이라고 말한 것이다. 경안향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서방님. 마음에 들어요.”“정말이오? 그럼 다행이구려. 매번 돌아와 부인이 내가 고른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게 소소한 기쁨이라오. 내 여인이 곱고 화사하게 있기만 하면 족하오.”경안향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서방님.”그제야 마음 한켠이 조금은 놓였다. 그가 자신을 멀리한 것이 혹여 다른 여인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남자란 허리 아픈 소리는 남에게 절대 말하지 않는 법인데…오늘 자신이 그렇게까지 들이대지 않았다면, 아마 임세안은 끝끝내 말하지 않았을 터.그녀는 옷을 품에 안고 말했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매일 입고 서방님 앞에 설게요.”“부인이 좋아하는 색이나 모양이 있으면 더 말해주오. 내 가게에 전해 다시 맞춰 짓게 하겠소.”“서방님께서 좋아하는 색, 서방님께서 좋아하는 모양이 곧 제게 가장 어울리는 것입니다.”임세안은 웃으며 답했다. “부인은 참 아름답고도 현명하오. 그렇게 매혹적인데, 내가 방에 있는 부인 곁에 있다간 도무지 집중을 못 할 테니 오늘은 그냥 여기서 머물겠소.”경안향은 부끄러운 듯 웃으며 물러갔다. 예상한 대로였다. 남자란… 아무리 고고한 체해도 결국은 다 똑같은 법.혹 욕정을 감출 수는 있을지언정, 아예 없을 수는 없다. 그렇지 않다면, 허약하든지 아니면 남색 취향이든지.경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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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5화

“또 조철을 찾았다더냐?”임세안이 물었다.이고가 고개를 끄덕였다.임세안은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하, 이 몸이 아직 죽지도 않았건만, 벌써 바깥 양반 노릇이 못 견딜 만큼 하고 싶더냐….”곧이어 입꼬리가 비틀렸다.“아니지. 애초에 그년은 물이 들끓는 천한 계집일 뿐이었지.”“이제 어찌 하시겠습니까?” 이고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임세안은 침상에 누운 채 팔을 베개 삼아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상관 말거라. 놈들의 흥을 깨트릴 필요도 없지.”“허나, 이건… 장군님 체면이….”이고는 이아령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그의 눈엔 그저 장군의 위엄이 모욕당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선명했을 뿐이다.장군의 위엄은 결코 더럽혀져선 안 된다!“이고야, 넌 나를 한심하게 보느냐?”이고는 입을 다물었다.임세안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이 일은 너와 나만 아는 일로 남기거라. 더 이상 퍼져선 안 된다. 당장은 말이다.”“그리고 한청에게 말하거라. 그 여자가 좀 더 오래 놀 수 있도록 기회를 주라고.”“…….”이고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이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장군께서 어찌 저리도 태연하게 아내가 오쟁이 지는 걸 말씀하시는 건가?임세안은 눈을 감으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명심하거라. 내 마음속에, 그 자는 더이상 내 부인이 아니야.”이고는 말없이 몇 순간을 서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임세안은 칼을 뽑지 않았다.“예, 소인 명심하겠습니다.”장군께서는 분명 속내가 따로 있으시리라 생각하였다.장군께서 그 여인을 부인으로 여기지 않으신다면, 그녀가 무엇을 하든 더는 문제 될 게 없으리라.하지만 이름만으론 여전히 그 여자는 장군의 부인이 아닌가.어사대부 가문의 딸이라지만 서출이라곤 해도 어찌 그런 천한 짓거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재수 없기는!이고는 속이 부글부글 끓은 채로 밖으로 나갔다.임세안은 침상 위에서 몸을 뒤척이며 눈을 떴다.깊고 어두운 밤, 그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그는 분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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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6화

가녀린 손끝이 남자의 턱을 쥐고 살며시 들어 올렸다.그녀는 그의 고개를 들게 하고는, 찬란한 붉은 입술을 열었다.“조철아, 내가 네 주인이 되어 준 게… 기쁘냐?”조철의 가슴은 쿵쾅거렸다.“소인, 소인 매우 기쁩니다.”그녀가 있었기에 자신은 처음으로 진정한 사내가 될 수 있었다.그녀가 있었기에 사람으로서, 살덩이를 가진 존재로서… 그저 피로 얼룩진 삶이 아닌, 쾌락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천상의 즐거움이라 여길 만큼, 생을 향유하는 법을 배웠다.“마님을 위한다면, 이 목숨 바쳐도 아깝지 않습니다.”“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맹세가 제일 듣기 좋은 법이지. 나도 그 소리를 아주 좋아한다.”경안향은 사뭇 느긋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조철아, 나에 관한 일에선 귀도 눈도 닫아야 한다.”“너는 그저 내 사람일 뿐이니 그 선만 지키면 된다. 그리하면 네가 원하는 것은 다 주마.”“소인은… 자유 따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마님의 곁에서, 마님의 개가 되어 평생 따르겠습니다.”“좋은 개로구나.”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진짜 개를 어루만지듯, 가볍고 느릿하게.보라. 조철 같은 죽음을 먹고 사는 자도, 감정 따윈 없던 이 사내도, 결국은 그녀 손바닥 위가 아닌가.임세안도 마찬가지일 터였다.그가 그녀가 주는 극락을 맛보고 나면, 두 번 다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하지만, 오늘은 일이 좀 골치 아프게 돌아가고 있었다.조철은 곧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마님께서 언짢으시군요. 소인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경안향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담담히 말했다.“내 일은 네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네가 해야 할 건, 복종 하나뿐이다.”“예, 반드시 명을 따르겠습니다.”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조철을 바라보았다.“잊지 마라. 너의 신분. 그리고 넌 질투할 자격도 없다. 알겠느냐?”‘질투…?’그 말에 조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부인께서 여기에 오신 이유가 혹시 다른 사내와 함께 하시려는 건가?그 순간, 가슴이 찢기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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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7화

경안향은 언젠가, 자신이 바로 이아령이었단 사실을 후희진에게 털어놓을 생각이었다.이아령이라는 이름은 이제 과거의 그림자일 뿐. 더는 입에 오르내려서는 안 될 이름이었다.그녀는 ‘경안향’이다.어사대부 경성세의 서녀이자, 임세안 장군의 아내.이처럼 높은 신분을 누가 부러워하지 않겠는가.소우연을 제거하거나, 그녀의 아이들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터였다.후희진은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럼. 우린 친구지.”경안향은 조용히 물었다.“공주께서 절 부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후희진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권했다.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얼마 전부터 석호라 하는 자가 병석에 누워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그 아이는 예전에 나와 인연이 있던 사람의 오라비였지.”“그런데 그자가, 임종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널 만나고 싶다 하였다.”후희진의 시선이 경안향을 꿰뚫듯 바라보았다.“그자가 널 보며, 과거의 어떤 사람을 떠올렸다는구나.”경안향은 손을 천천히 쥐었다.소매 속으로 꽉 움켜쥔 주먹을 감추며, 아무 일 없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한번은 뵙는 게 도리겠지요.”후희진은 경안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넌 정말 이상할 만큼 의심이 없구나. 나는 사막의 공주다. 혹시라도 널 해치려는 마음이 있다면 어쩌려고 그러느냐.”“혹은 네 남편에게 해를 가하려 한다면 말이다.”경안향은 미소를 머금었다.“공주께서는 그러실 분이 아니시지요.”“무엇으로 그리 장담하느냐?”후희진은 날카롭게 되물었다.“전에 뵈었을 때보다 공주께선 많이 수척해 보이십니다.”“예전엔 생기가 가득하셨는데, 이제는 성 안에서도 자유롭게 나다니지 못하시니, 아마도 위 장군의 뜻이 아니겠습니까.”그녀는 말끝을 흐렸으나, '금족령', '연금'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그건 듣는 이를 더 비참하게 만들 것이기에. 후희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경안향은 고개를 갸웃이며 나직이 말했다.“어떻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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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8화

경안향은 미소 지으며 후희진을 바라보았다.“공주께선 제가 미쳤다고 여기시겠지요. 하지만 말씀드리자면, 공주께서 사막을 위해 이리저리 마음 쓰신 일들, 그들이 정말 알고나 있겠습니까? 안다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이곳에 갇혀 캄캄한 날들을 버티며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후희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요즘 들어 자꾸만 위진규가 자신에게 말을 걸던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와 나눈 짧은 대화, 무심한 듯 다정했던 시선까지. 처음엔 경계했지만, 지금은 그 순간들이 뇌리에 깊이 남아 있었다.그리고 그 날, 위진규가 했던 말이 어렴풋이 떠올랐다.‘원래 우리 둘은 평범한 부부로, 소박하게 함께 늙어갈 수 있었을 겁니다. 허나 지금은 그럴 수 없게 되어버렸군요.’경안향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여인이란, 자손을 잇는 것만이 삶의 전부가 아닙니다. 사내의 환심을 사는 것도 아니고요. 진정 중요한 것은 역경 속에서도 제 몸을 지키고, 제 삶을 어루만지며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것이지요.”그녀는 후희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예의와 체면, 충의와 원한… 그 모든 것도 좋지만, 결국 자신을 첫째로 여겨야만 진정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때로는 거짓된 웃음과 말도 필요하지요. 남자란 존재는 본래 하반신으로 생각하는 족속이니, 그리 애쓸 필요 없습니다.”그 말은 마치 일격처럼 후희진의 가슴을 두드렸다.문득, 그녀는 소령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공주마마께서 나서지 않아도, 결국 사막은 공주마마를 밀어낼 겁니다.’소령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자청한 게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그저 사막에서 내몰려 상혼을 목적으로 시집온 공주였을 뿐이었다.그런데도… 그녀는 위진규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는 국경에서부터 함께 걸어온 사람, 누구보다도 책임감 강한 사내였다. 자신이 바란 혼인은 이미 이루어졌다. 그런데도 자신은 왜 애초에 얻을 수 없는 군사지도 하나에 마음을 뺏겨, 스스로 파멸의 길을 택했던가?위진규의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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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9화

후희진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경안향이 먼저 말을 이었다.“가끔은 같이 바람이라도 쐬러 나가면 좋겠지만, 한 가지는 명심해 주셔야 합니다. 아무리 친밀한 사이여도, 남 눈에 지나치게 가까워 보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왜, 왜 그래야 하느냐? 혹시 내가 사막 사람이라서 그러는 것이냐? 난 이제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군사지도도 포기하였다.”“널 곤란하게 하진 않을 게야.”후희진은 다급히 해명했다. 그녀의 눈빛은 간절했다.경안향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웃었다.“아닙니다, 공주마마 때문이 아니라, 저 자신 때문입니다.”“너 자신 때문이라니?”경안향은 한숨을 쉬며 말을 흐렸다.“더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때쯤 몇 가지 이야기를 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후희진은 더는 캐묻지 않았다. 사람마다 마음 깊숙한 비밀 하나쯤은 있으니, 억지로 들춰낼 필요는 없다고 여긴 것이다.두 사람은 함께 본채를 나서 뒤뜰로 향했다.후희진이 손으로 가리킨 곳은 후원 한켠의 조용한 곁채였다.“저 자가 바로 석호다. 만일 보고 싶지 않다면, 무리하여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경안향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아닙니다. 만나 보겠습니다. 공주마마께선 잠시 이곳에서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후희진의 눈빛에 잠깐 의심이 스쳤다. 경안향과 석호, 혹시 두 사람이 아는 사이는 아닐까?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깊이 따지지 않았다. 석호 또한 그에 대해 말한 적 없었고, 경안향 역시 말하지 않았다.“그래. 그러도록 하마.”후희진은 하인을 데리고 곁채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로 물러났다.경안향은 조철을 바라보았다. 단 한 번 눈빛을 보냈을 뿐인데, 조철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혹시 후희진이나 다른 이가 다가올 경우, 곧장 알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여기서 기다리거라.”경안향의 말에 조철은 단정히 고개를 끄덕였다.“예, 마님.”그는 나무처럼 곧게 서서 후희진 일행과 비슷한 거리까지 물러나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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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0화

“석호야, 널 사랑하는 사람은 나뿐이야. 나만 널 가족으로 여기고, 나만 널 아껴주지 않느냐.”“그들은 혈육에 불과해. 너에게 붙어 네 피를 빨아먹는 흡혈충에 불과하다. 그리 생각하라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석호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경안향의 얼굴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그 사람들은... 제 가족입니다. 피붙이들이라고요.”경안향은 무릎을 꿇은 채 땅바닥에 엎드려 조용히 말했다.“제발... 목소리 좀 낮추거라.”“남이 들을까 두렵나 봅니다?”석호는 일부러 묻듯 말했다.경안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 사실 많이 망설였다. 하지만... 명이를 위해서, 조윤 장군이 명이를 데리고 상운국을 무사히 빠져나가려면...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선 안 되는 일이었어. 명이를 잃어버렸다는 소문이 나면, 분명 소우연과 이육진의 귀에 들어갈 테고, 그러면 조윤 장군과 명이는 절대 도망치지 못할 테니깐…”그녀는 흐느끼며 석호에게 기어갔다. 그의 손목을 붙잡은 손이 하얗게 떨리고 있었다. “석호야, 나는 처음부터 너를 가족처럼 여겼다. 내가 너에게 어떻게 했는지, 너도 다 알지 않느냐.”석호는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그는 태감이 된 이후, 누구에게도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처음에는 경안향, 아니, 과거 이아령도 그를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두 사람은 남녀 사이로 얽히게 되었고, 그는 비록 태감이지만, 그녀 곁에서 '남자'로 살아있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특히 사막국에서의 삼 년 동안, 형제로 위장하며 함께 살던 그 밤들. 매일 밤 그녀 곁에서 잠들고, 그녀가 건네는 온기를 느끼며 남자의 욕망과 온기를 되찾은 그 시간들. 그 기억은 너무나도 강렬했다. 그 당시의 기억들은 그를 지금 이 순간에도 미워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그 불길한 날, 낭청리에서의 화재. 그 모든 이들이 죽어간 것을 안 이후, 그는 가족에 대한 죄책감과 경안향을 향한 증오 사이에서 찢겨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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