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e Kapitel von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Kapitel 1021 – Kapitel 1030

1165 Kapitel

제1021화

최수빈은 발소리를 죽여 딸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앳된 얼굴로 깊이 잠든 아이를 바라보는 순간, 가슴 한켠이 시큰거렸다.주예린을 복잡한 환경 속에서 키우고 싶지 않았고 더더욱 이 뜻밖의 아이가 딸에게 짐이 되는 일은 바라지 않았다.그날 밤, 최수빈은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다.거실 소파에 앉아 창밖으로 스며드는 달빛을 바라보며 육민성의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지만 처음 세운 생각은 끝내 바뀌지 않았다.동이 트기 직전이 되어서야 그녀는 몸을 일으켜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항공우주 연구원에서 남은 마지막 인수인계 절차를 마치기 위해 집을 나설 준비를 했다.잠에서 깬 육민성은 핏발 서린 최수빈의 눈을 보고 가슴이 미어졌다.“오늘은 그냥 쉬는 게 어때? 내가 항공우주 연구원 쪽에 말해볼게.”“괜찮아요. 정말 마지막 절차만 남았거든요. 이것만 끝내면 다 정리돼요.”최수빈은 애써 웃으며 가방을 들었다.“선배는 집에서 예린이랑 같이 있어 줘요. 금방 다녀올게요.”항공우주 연구원에 도착해서 보니 사무실은 이미 분주히 돌아가고 있었다.최수빈이 막 자리에 도착했을 때, 조금 떨어진 소파에 임하은이 앉아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앞에는 고급스러운 보온 도시락이 놓여 있었는데 몇몇 여자 동료들이 둘러서서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하은 씨, 주 대표님 정말 세심하시네요. 매일 임산부 식단도 챙겨주시고 너무 부러워요.”“그러게요. 영양사한테 따로 맞춘 식단이라던데 맛도 있고 몸에도 좋다면서요? 진짜 행복하시겠어요.”임하은은 흐뭇한 표정을 지은 채 있다가 최수빈을 보자 곧바로 손짓했다.“수빈 씨, 이리 와서 같이 좀 먹어요. 민혁 씨가 너무 많이 챙겨와서 혼자서는 다 못 먹겠어요.”최수빈은 사양하려 했지만 끝내 옆에 있던 동료에게 떠밀리듯 자리에 끌려갔다.임하은이 도시락통 뚜껑을 열자 정갈하게 담긴 음식에서 먹음직스러운 향이 퍼져 나왔다.임하은은 갈비 한 점을 집어 최수빈의 앞 접시에 올려놓으며 일부러 호기심을 가장한 말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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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2화

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꾹 눌러 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날카로운 눈빛으로 임하은을 응시했다.“하은 씨, 제가 민혁 씨와 어떤 결혼생활을 했는지는 하은 씨가 평가할 일이 아니에요. 남의 과거를 이러쿵저러쿵 짐작할 시간에, 지금 본인 상황이나 잘 챙기세요. 세상 모든 사람이 하은 씨처럼, 배 속 아이 하나로 자기 자리를 굳힐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임하은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굳어지며 표정이 삽시간에 험악해졌다.“수빈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별다른 뜻 없어요.”최수빈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투는 한없이 담담했다.“저는 이만 할 일이 있어서요. 하은 씨의 식사에 더는 함께하지 않겠습니다.”말을 마치고 나서 최수빈은 곧장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뒤에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임하은과 어찌할 바를 몰라 시선을 피하는 동료들만 남았다.자리에 돌아온 최수빈은 컴퓨터 화면에 멍하니 시선을 둔 채 한동안 손을 움직이지 못했다.임하은의 말은 거칠고 모욕적이었지만 동시에 그녀를 더욱 냉정하게 만들었다.주민혁과의 일은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이었고 떠올릴수록 쓰라린 실수였다.그리고 뜻밖에 찾아온 이 아이는 그 실수의 연장선처럼 느껴졌다.그녀는 이 아이가 자신의 미래에 짐이 되게 할 수 없었다. 더더욱 주예린의 성장을 방해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됐다.이러한 생각에 이르자 최수빈의 눈빛이 서서히 단단해졌다.그녀는 컴퓨터를 켜고 남은 인수인계 문서를 빠르게 처리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남아 있었다.최대한 빨리 절차를 끝낼 것.이 뜻밖의 상황을 정리할 것.그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점심시간, 최수빈의 휴대폰이 울렸다. 육민성이었다.“인수인계는 어디까지 했어? 내가 데리러 갈까?”“거의 끝났어요. 오후면 마무리돼요.”최수빈의 목소리에는 피곤한 기색이 엿보였다.“선배... 저 생각해봤는데, 이 아이는 결국 지우기로 했어요.”전화기 너머가 몇 초간 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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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3화

최수빈은 휴대폰을 쥔 채 잠시 굳어 있었다. 손끝이 서서히 차가워졌다.전화를 받은 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주민혁이 왜 전화를 걸었는지 알아차렸다.무슨 사정을 묻겠다는 게 아니라 임하은을 대신해 따지러 온 게 분명했다.그녀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따지러 온 거예요?”주민혁은 몇 초간 말이 없었으나 이내 낮게 말했다.“아니야. 아까 말투가 좀 거칠었을 수도 있겠네. 그냥 상황이 어떤지 물어본 거야.”“상황을 물어봐요?”최수빈은 짧게 웃더니 한층 더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둘이 무슨 얘기 했는지는 하은 씨가 말 안 해줬어요? 아니면 말은 했는데 민혁 씨가 못 믿겠어서 굳이 나한테 확인하러 온 거예요? 민혁 씨, 이러는 게 정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시선이 진료실 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그러자 초침이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소리가 팽팽해진 신경을 두드리는 것처럼 느껴졌다.“내가 두 사람 눈에 거슬리거나, 내가 있어서 하은 씨가 불편해질까 봐 걱정되는 거라면 그냥 분명하게 말해요. 나를 거절해도 되고 이유를 만들어서 내가 두 사람이랑 멀어지게 해도 돼요. 매달리지 않을 거고 먼저 다가가서 두 사람을 자극할 생각도 없으니까.”휴대폰 너머는 다시 긴 침묵에 잠기며 희미한 숨소리만 들려왔다.최수빈이 몇 초를 더 기다렸지만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가슴 속은 더욱더 답답해졌다.왜 주민혁은 늘 이러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가 과거를 정리하고 완전히 벗어나려 할 때마다 그는 꼭 한 번씩 나타나 흐름을 흩트려 놓았다.약 삼십 초쯤 지났을까, 휴대폰 너머에서 주민혁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뚝’ 하는 소리와 함께 통화가 끊겼다.최수빈은 어두워진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힘없이 웃었다.갑작스럽게 걸려와서 아무 설명도 없이 끝나버린 통화, 앞뒤도 맥락도 없는 어설픈 소동 같았다.최수빈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의사가 건네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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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4화

강지안은 조금도 놀란 기색이 없이 그저 맞은편 소파를 가리킬 뿐이었다.“앉아. 오늘 밤쯤은 올 줄 알았어.”주민혁은 소파에 몸을 내려놓았지만 아무 말 없이 그녀만 바라봤다.강지안도 서두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자료를 정리하던 손길을 이어갔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주민혁이 입을 열었다.“나는... 감정 문제를 잘 못 다뤄.”강지안은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손에 들고 있던 차트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따뜻한 물을 한 잔 따라 그의 앞에 놓았다. 그리고 차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주민혁, 지금 네 상태로는 감정 얘기를 할 때가 아니야.”물컵을 쥔 주민혁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강지안을 보았다.“나는 심리 상담사야.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아.”강지안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자기감정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책임지는 건... 상대에게도 불공평하고 너 자신에게도 무책임한 일이야.”말을 마친 순간, 그녀의 가슴 한켠이 시큰거렸다. 하지만 이 말의 이면을 아는 사람은 아마 그녀뿐일 것이었다.주민혁의 문제는 감정이 불안정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안정돼 있었다. 너무 차분해서 때로는 냉정하고 무정해 보일 만큼 말이다.그는 늘 이성적으로 판단했고 언제나 이성이 감정을 이겼다.그러나 그 이성이라는 가면 뒤에 얼마나 많은 자기 갈등이 일어나는지, 강지안만이 알고 있었다.주민혁은 깊은 밤, 아무 말 없이 전화를 걸어오곤 했다. 침묵한 채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숨소리만을 붙잡고 있었다.예전 최수빈과 자주 가던 식당 앞을 지나칠 때면, 그는 습관처럼 차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시선이 잠시 흐려졌다.이성으로 자신을 단단히 감싸 놓았지만 그 이성은 결국 도로 주민혁을 찌르며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아프게 했다.“넌 감정이 불안정한 게 아니야.”결국 강지안이 참지 못하고 낮게 말을 덧붙였다.“너무 이성적인 거야. 자기감정도 남의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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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5화

‘나는 과연, 더 존재할 필요가 있는 걸까?’...그 후 며칠 동안 최수빈은 일을 완전히 내려놓고 집에서 주예린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블록을 맞추며 보내는 하루하루는 잔잔하고도 따뜻했다.항공우주 연구원에 입사한 이후, 이렇게 한가로운 시간은 처음이었다.끝도 없이 이어지던 프로젝트 보고서도, 갑작스러운 야근 연락도 없었다. 사람을 지치게 만들던 스캔들도 사라지고 집 안에는 딸의 웃음소리와 안정된 일상만이 남았다. 그 덕분에 늘 팽팽하게 조여 있던 신경도 서서히 풀어졌다.그날 오후, 최수빈은 주예린과 함께 동화책을 사러 쇼핑몰에 갔다.그러다 유아용품 매장 앞을 지나는데 주예린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쇼윈도를 가리켰다.“엄마, 저기 봐요. 저 작은 원피스 너무 예뻐요!”최수빈은 아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진열장 안에는 분홍색 레이스 원피스가 걸려 있었고 치맛자락에는 토끼 자수가 정성스럽게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작은 아기 신발과 부드러운 인형들이 함께 전시돼 있었다.그 순간, 그녀는 자연스럽게 배 속의 아이를 떠올렸다.아직 형태조차 갖추지 못한 그 작은 생명도 만약 무사히 태어난다면 주예린처럼 예쁜 원피스를 입고 앳된 목소리로 엄마를 부르지 않을까.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오며 눈가가 살짝 뜨거워졌다.“엄마, 왜 그래요?”주예린이 이상함을 느낀 듯 손을 잡아당기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올려다봤다.최수빈은 정신을 차리고 몸을 낮춰 아이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웃어 보였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원피스가 너무 예뻐서. 우리 안에 들어가 볼까?”“네!”주예린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최수빈의 손을 잡아끌어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매장 안에는 은은한 아기 세제 향이 퍼져 있었고 진열대마다 다양한 유아용품들이 가득했다.부드러운 바디수트, 앙증맞은 공갈 젖꼭지, 아기 침대까지...하나같이 작고 정성스러워 저절로 마음이 녹아내렸다.주예린은 신이 난 듯 매장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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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6화

최수빈은 주예린의 손을 잡고 있었다. 한 손에는 미리 사둔 그림책과 주예린이 좋아하는 곰인형, 그리고 충동적으로 집어 든 아기 양말 한 켤레가 들려 있었다....그날, 최수빈이 주예린과 함께 블록을 맞추고 있는데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보니 문 앞에는 임하은이 서 있었다. 그녀는 정갈한 원피스 차림에 손에는 금박이 찍힌 봉투를 들고 있었으며 얼굴에는 흠잡을 데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수빈 씨, 방해한 건 아니죠?”임하은은 손에 든 봉투를 가볍게 흔들었다.“저랑 민혁 씨의 약혼식이 다음 주말로 잡혔어요. 직접 청첩장을 전해드리고 싶어서요. 꼭 와주셨으면 해요.”최수빈은 봉투를 받아 들었다. 화려한 청첩장 문양이 눈에 들어왔지만 마음에 별다른 파문이 일지는 않았다.최수빈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 알겠습니다.”최수빈의 평온한 반응에 임하은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아주 미세하게 실망한 기색이 스쳤지만 이내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그럼 아이랑 시간 보내는 거 방해하지 않을게요. 그날 봐요.”말을 마치자 임하은은 돌아섰다.문을 닫은 최수빈은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정성스럽게 디자인된 약혼식 초대장이 들어 있었는데 주민혁과 임하은의 이름, 날짜와 장소가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주예린이 다가와 초대장에 인쇄된 사진을 가리켰다.“엄마, 이거 아빠랑 하은 이모예요? 두 사람 결혼하는 거예요?”최수빈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결혼이 아니라 약혼식이야.”“예린이, 가고 싶어?”주예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천천히 저었다.마음이 몹시 불편한 것이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가슴에 걸린 것 같았다. 코끝과 눈시울도 시큰거렸다.‘아빠는 역시 날 사랑하지 않는 걸까...’주예린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가 말했다.“가기 싫어요. 난 민성 삼촌이랑 놀고 싶어요.”최수빈은 옅게 웃더니 다시 한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아빠랑 엄마는 이미 이혼했어. 아빠가 누구와 결혼하든 그건 아빠의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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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7화

주민혁과의 통화를 끊은 뒤, 최수빈은 휴대폰 화면에 남아 있는 통화 기록을 잠시 바라보았다.‘그래. 그 약혼식에는 굳이 갈 필요가 없지.’그녀는 과거와 작별하기 위해 어떤 ‘형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야 알 것 같았다.진짜 이별은 의식이 아니라 마음에서 이루어진다는 걸.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그걸로 충분했다.최수빈은 휴대폰을 아무렇게나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거실 한가운데로 걸어갔다.주예린이 카펫 위에 엎드린 채 블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표정이 밝지 않았으나 그 이유는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내일이면 전학 수속 절차를 밟아야 했다. 아이는 새로 사귄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아쉬운 거였다.최수빈은 주예린 옆에 앉아 작은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주었다.“새 친구들이랑 헤어지는 게 아쉬운 거지?”주예린은 서운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들어 조용히 끄덕였다.“네... 우리 나중에 또 만날 수 있어요?”“그럼, 당연하지.”최수빈은 딸의 작은 손을 꼭 잡았다.“은산시에 자리 잡으면 엄마가 다시 데리고 와서 같이 놀게 해줄게. 아니면 친구들이 은산시에 놀러 오게 해도 되고. 어때?”주예린의 눈빛이 잠시 반짝였지만 마음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그런데... 은산시 초등학교에 좋은 친구가 없으면 어떡해요?”“있을 거야.”최수빈은 싱긋 미소 지었다.“예린이처럼 귀여운 아이가 친구를 못 사귈 리가 없잖아. 게다가 민성 삼촌이 같이 학교도 데려다주고 새 친구들 사귀는 것도 도와줄 거야.”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최수빈이 문을 열어보니 육민성이 서 있었는데 손에는 정갈한 케이크 상자가 들려 있었다.“내일 전학 수속 절차 밟는다길래, 예린이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 사 왔어. 힘내라고.”육민성은 케이크 상자를 살짝 흔들며 거실로 들어왔다.케이크를 본 주예린은 곧장 카펫에서 벌떡 일어나 육민성에게 달려갔다.“삼촌!”육민성은 몸을 낮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우리 예린이, 오늘 좀 속상했다며? 걱정 마. 은산시에 가면 삼촌이 매일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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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8화

“전에 미리 준비해 둔 집이야. 원래는 친척들 오면 머물게 하려고 했던 곳인데 마침 잘됐네.”육민성은 짐을 들어 주며 집을 소개했다.“침실은 이쪽이고. 예린이 방은 일부러 공주방으로 꾸며 놨어. 마음에 들 거야.”주예린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분홍색 벽지와 하얀 공주 침대, 책장 가득 놓인 그림책과 장난감을 보고는 신이 나서 펄쩍 뛰었다.“엄마, 삼촌, 이것 좀 봐요! 너무 예뻐요!”최수빈은 육민성을 돌아보더니 진심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선배, 정말 고마워요.”...은산시, 저녁 무렵.이혜정은 앞치마를 두른 채 부엌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냄비 안에서는 갈비찜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고 달콤한 향이 창을 타고 마당까지 퍼졌다.최수빈은 주예린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곧 짐을 내려놓자마자 이혜정이 다가와 그녀를 위아래로 살폈다.“살이 빠졌네. 그동안 밥 제대로 못 먹었지?”“엄마, 저 괜찮아요.”최수빈은 웃으며 달래더니 곧바로 뒤에 서 있던 육민성을 소개했다.“이분은 육민성, 제 친구예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다 이 사람 덕분이었어요.”육민성은 바로 앞으로 나서 정중히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육민성이라고 합니다. 수빈이한테서 아주머니 얘기 많이 들었어요.”그는 손에 들고 있던 영양제 몇 상자를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작은 마음이니 부담 갖지 마세요.”이혜정은 그의 단정한 태도를 보며 금세 미소를 숨기지 못하더니 이내 손을 잡아 소파로 이끌었다.“뭘 이런 걸 다... 얼른 앉아. 우리 수빈이랑 예린이, 그동안 많이 신경 써 줬겠네.”그러고는 최수빈을 향해 눈을 찡긋한 뒤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네가 말하던 그 친구가 이 사람이야? 보통 친구 같진 않은데... 혹시 내 새 사위 될 사람 아니야?”최수빈은 얼굴이 붉어지며 급히 손을 내저었다.“엄마, 그런 말 하지 마요. 그냥 친구예요.”그때 송미연이 씩씩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는 케이크 상자가 들려 있었다.“이모! 수빈아, 예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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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9화

이혜정은 그제야 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거듭 당부했다.“그럼 예린이랑 너 스스로 다 잘 챙겨야 한다?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엄마한테 전화하고.”식사를 마친 뒤 송미연은 최수빈을 데리고 베란다로 나갔다. 저녁 바람이 살짝 불어와 공기에 서늘한 기운이 섞였다.“수빈아, 너 그거 들었어?”송미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요즘 은산시에서 주민혁이랑 임하은 약혼식 얘기가 엄청 나와. 규모도 크고 유명 인사들 잔뜩 초대했다더라.”말끝에는 자연스레 호기심이 묻어났다.“나랑 우리 부모님도 청첩장 받았는데, 너는?”최수빈은 어깨를 으쓱했다.“나도 받았어. 그런데 안 갈 거야.”“그럴 줄 알았어.”송미연이 웃었다.“그런 자리는 재미도 없잖아. 다 형식적인 인사뿐이고. 지금 네 모습이 훨씬 좋아. 예린이도 있고 일도 하고 육 대표님 같은 좋은 사람도 곁에 있잖아. 그거면 충분해.”최수빈은 멀리 반짝이는 불빛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응. 나도 지금 이대로가 좋아. 더 이상 과거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다음 날 아침, 최수빈은 주예린과 함께 개명 절차를 밟으러 갔다.민원실이 한산했기에 금세 차례가 돌아왔다. 서류 심사는 이미 모두 끝난 상태였고 그동안 시간이 맞지 않아 미뤄 두었던 것뿐이었다.직원이 새로 발급된 가족관계 서류를 건네는 순간, 최수빈의 마음에 여러 감정이 스쳐 갔다.서류에는 딸의 이름이 ‘주예린’에서 ‘최율’로 바뀌어 있었다.“엄마, 이게 내 새 이름이에요?”주예린은 다가와 ‘최율’이라는 두 글자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최율... 이름 예쁘다!”최수빈은 아이의 앞에 쪼그려 앉아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그래. 이제부터 네 이름은 최율이야. 너한테 딱 맞는, 아주 예쁘고 귀여운 이름으로 지었어.”“네!”주예린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최수빈의 목을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췄다.“엄마, 나 이 이름 마음에 들어요.”민원실을 나온 뒤, 최수빈은 주예린을 데리고 새 학교로 향했다.교정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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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0화

연구개발팀 동료들은 이미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는 꽃다발과 색색의 리본을 들고 있었고 얼굴에는 진심 어린 웃음이 가득했다.“수빈 씨, 돌아온 걸 환영합니다!”팀장이 가장 먼저 앞으로 나와 해바라기 꽃다발을 건넸다.“수빈 씨가 없어서 실험실에서 막혀 있던 과제들이 한동안 진척이 없었어요. 다들 정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최수빈은 꽃을 받아 들었다. 해바라기 특유의 은은한 향이 코끝을 스치자 마음이 따뜻해졌다.“고마워요. 앞으로 또 다 같이 어깨 나란히 하고 일하게 됐네요.”동료들은 그녀를 둘러싸고 사무실 쪽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는 내내 여기저기서 인사가 쏟아졌고 익숙한 분위기에 최수빈의 몸과 마음도 자연스럽게 풀어졌다.사실 지금의 최수빈은, 더 이상 누군가에게 기대야 했던 과거의 그녀가 아니었다.주민혁과 이혼하면서 받은 상당한 재산에 그동안 항공우주 연구원에서 모은 저축까지 더해져, 연구에 전념하기에는 충분한 기반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게다가 천공연구원은 원래부터 연구비가 부족한 곳도 아니었다.그녀의 복귀는 단순한 인력 보강이 아니라 팀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나 다름없었다.익숙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 보니 책상 위에는 새 컴퓨터와 각종 사무용품이 깔끔하게 준비돼 있었다. 창문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책상을 비추고 있었고 모든 것이 정겹게 느껴졌다.그때 육민성이 커피 한 잔을 들고 들어와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어때, 역시 여기가 제일 편하지? 그러니까, 그때 괜히 나가지 말았어야 했다니까. 천공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잖아.”최수빈은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익숙한 맛이 혀끝에 퍼졌다.그녀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창밖을 바라보다가 미소 지었다.“밖에 나가보지 않으면 자기 마음이 어떤지 모르잖아요. 항공우주 연구원에서 지낸 기간 동안 많이 배웠지만 그 덕분에 하나 확실히 알게 됐죠. 내가 정말 원하는 건, 인간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마음 편히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곳이라는 걸.”잠시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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