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각, 능지국.출정 전까지만 해도 모두가 승리를 확신했다. 하지만 출정 후 패배를 겪고 나자 모두가 고개를 떨구었고 온 진영은 침울한 기운에 잠겨 있었다.그동안 귀면인이 군을 이끌고 싸울 때마다 연전연승이었다. 그 덕에 자신감은 이미 하늘을 찔렀고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는 짜릿함에 완전히 중독되어 있었다.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패배를 맛보았다. 그것도 연기준의 손에 말이다진국의 상왕이라는 이름이 능지국 군대에 번져나가자 그것은 낮게 깔린 기압처럼 그들의 머리 위를 짓누르고 있었다.모두들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지만 오직 상석에 앉은 단안만은 태평했다. 그는 오히려 여유롭게 붓을 들어 하얀 종이 위에 글씨를 쓰고 있었다.그는 부하들이 진국의 상왕을 입에 올리는 걸 보자 문득 그날 밤 자신의 서재를 침입했던 그 젊고 날랜 소년 장수를 떠올렸다. 전장에서 전략을 주도하며 자신과 대등하게 맞섰던 그 위풍당당한 장군.단안은 미묘하게 눈썹을 들어 올리며 그의 얼굴에 감탄이 비쳤다. 이상하게도 단안은 그 사내에게서 자신의 젊은 시절 그림자를 보았다.그리고 또 한 사람. 그에게 할아버지라 부르던 그 여자아이.두 사람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부부였다.그날 밤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서재에 침입한 것은 대체 무슨 속셈이었을까?그러나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던 모습을 떠올리자 그는 오히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제법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능지국에 와서 그렇게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을 그는 본 적이 없었다.그때 부장 하나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우리 군이 패했는데 대장군께선 한마디 말씀도 없으시군요. 혹 책임을 피하시려는 겁니까?”모두의 시선이 단안에게로 향했다.그는 태연하게 붓의 마지막 획을 그었다. 단안은 글씨를 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붓을 거두며 방금 말을 꺼낸 부장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는 내가 무슨 말을 하길 바라는 것이냐? 진국이 사신을 보내 화리를 청했을 때 본 장군은 두 나라가 앉아 협상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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