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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1화

하슬기는 워낙 솔직한 성격이라 송남지의 말에 발끈하며 씩씩거렸다.“감히 내 앞에서 나정이를 돌려 까는 거예요? 내가 장담하는데 나정이가 있는 한 그쪽은 영원히 짝퉁, 대타일 뿐이에요. 첫사랑 얼굴을 닮았다는 이유로 횡재했으면 조용히 찌그러져 있을 것이지, 왜 내 앞에서 깝쳐요? 역겨워 죽겠네, 진짜!”송남지는 당당하게 하슬기를 바라보며 말했다.“나는 누구에게도 자랑할 생각 없고 하슬기 씨도 역겨워할 필요 없어요. 제발 생각 좀 하고 살아요. 나는 애초부터 양나정 씨를 힘들게 할 마음, 눈곱만큼도 없었으니까.”하슬기는 팔짱을 낀 채 비웃듯 말했다.“그쪽처럼 착한 척 하는 여자들은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지 뻔히 보여요. 솔직히 말해서 내 남편도 첫사랑 닮은 여자한테 홀려서 정신을 못 차린 적이 있었거든요. 당신 같은 사람들은 앞에서는 천사인 척하면서 뒤에서는 남자 홀리는 여우 짓만 하잖아요. 당신 입으로는 나정이를 괴롭힐 생각 없다고 하지만 정말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면 남성에 와서 결혼식에 참석하지도 않았겠죠.”송남지는 하슬기의 논리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하지만 하슬기가 악의가 있어서 이러는 건 아닌 듯했다.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첫째, 나는 결혼식에 오기 전까지 양나정이라는 사람이 있는지조차 몰랐어요. 둘째, 나는 정훈 씨와 정식으로 결혼한 법적인 배우자예요. 그러니 남편 따라서 결혼식에 오는 게 당연한 일 아니에요? 오히려 양나정 씨야말로...”송남지는 잠시 말을 멈췄다.그러자 하슬기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내 앞에서 나정이 험담할 필요 없어요. 우리의 우정은 그쪽 같은 사람이 망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송남지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나는 두 사람의 우정을 망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다만 오늘은 하슬기 씨가 주인공이고 하슬기 씨의 결혼식인데 이런 자리에서 체면을 구기고 불쾌한 일을 겪었잖아요. 나는 그저 하슬기 씨의 좋은 친구인 양나정 씨가 마음만 먹었다면 충분히 이 모든 상황을 막을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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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2화

양나정은 한동안 정신이 멍해졌다.‘내가 알던 무모하고 솔직한 하슬기가 언제부터 이런 속셈을 품게 된 걸까?’그녀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하슬기를 바라봤다. 채 말도 꺼내기 전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슬기야, 네 눈에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는 거야? 나는 혼자 아멜국에 있어서, 그쪽 법을 잘 몰랐어. 이혼 수속이 금방 끝날 수 있는 게 아닌 줄 알았지. 널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결혼식에 못 갈 수도 있다고 미리 말한 거야.”양나정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코를 훌쩍이며 눈동자에 물처럼 맑은 억울함이 흘러넘쳤다.“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다니, 너무 슬퍼. 하지만 널 탓하진 않아. 분명히 누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한 거지, 그렇지?”양나정의 연이은 공격에 하슬기는 다시 정신이 혼미해졌다.하정훈은 송남지와 하슬기가 잇따라 들어오자 송남지의 안색이 창백한 것을 보고 하슬기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생각했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형언할 수 없는 냉혹한 시선을 보냈다.서정우는 서경 하씨 가문과 인맥을 맺을 수 있는 기회라 여전히 하정훈에게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형님, 다음 달에 서경에 갈 일이 있는데, 그때...”하정훈은 그의 말을 들을 마음이 없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아내가 괴롭힘을 당했다는 생각뿐이었다.그는 손을 들어 올리며 가늘고 긴 눈에서 빛을 뿜어내며 서정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슬기가 워낙 제멋대로라 삼촌, 숙모께서 외동딸이라고 너무 오냐오냐 키우셨어. 오늘 매제에게 시집갔으니 네가 그 성질 좀 잘 다루고 길들여서 살았으면 좋겠어.”하정훈의 말은 굳이 명확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서정우는 정치판에서 구른 세월이 얼만데 못 알아들으면 바보나 다름없었다.“형님, 염려 마십시오. 슬기 성격은 제가 확실히 고쳐놓겠습니다. 다음 달 서경에 갈 때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있을 겁니다.”하정훈은 가늘게 뜨고 있던 눈을 서서히 풀었다.그러면서 무심하게 덧붙였다.“네 성격도 좀 고쳐야 할 텐데.”아까 서정우가 식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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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3화

그녀는 살짝 하정훈의 귓가에 속삭였다.“심각한 건 아니에요. 그냥 속이 조금 안 좋을 뿐인데, 괜히 의사까지 호텔로 부르면 삼촌이랑 숙모님이 나를 엄청 까다로운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어요.”하정훈은 그녀의 부드러운 숨결에 간지러움을 느끼며 살짝 미소지었다.“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하현준과 신미정은 최대한 성의를 다해 하정훈과 송남지를 호텔 스위트룸까지 안내했다.신미정은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핀 채, 아까 식탁에서 있었던 불쾌한 일은 마치 꿈결처럼 잊은 듯했다.그 모습을 보며 송남지는 생각했다.‘나도 저런 처세술을 익힌다면 앞으로 혼자서도 충분히 잘 헤쳐나갈 수 있지.'“정훈아, 네가 오늘 밤 여기 남아있어 준다니 정말 기쁘구나. 저녁은 사람을 보내 데리러 올 테니, 다시 하씨 저택으로 돌아가서 저녁 만찬을 함께하는 게 어떻겠니?”하정훈은 망설임 없이 신미정의 제안을 거절했다.“숙모님, 남지가 몸이 안 좋아서 왔다 갔다 하기 힘들어요. 걱정 마세요. 굶기진 않을 테니까.”하현준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누가 봐도 지금 하정훈에게 누가 더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네가 그렇게 말하니 안심이 되는구나.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남지가 굶을까 봐 걱정했거든.”송남지는 지금 하현준이 자신에게 보이는 관심이 아까 신미정의 무관심과 마찬가지로 모두 하정훈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신미정의 무관심에 풀이 죽지도 않았고 하현준의 호의에 들뜨지도 않았다.그녀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호텔은 해변에 위치해 있었다.스위트룸에는 커다란 통유리창이 있었고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게 얼굴을 감싸주어 뜨거운 햇볕도 그저 찬란하게만 느껴졌다.송남지는 그제서야 조금 편안해졌다.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드디어 풀려나는 기분이었다.하정훈은 스위트룸에 들어오자마자 비서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회사 업무에 문제가 생겨 그는 서재로 들어가 긴급하게 회의를 진행했다.송남지 또한 자유를 만끽하며 통유리창 옆 소파에 기대앉아 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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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4화

양나정은 하슬기가 마음이 여리다는 걸 간파하고 있었다.하슬기가 남자였다면 여우들한테 꼼짝없이 휘둘렸을 것이다.양나정은 조금만 불쌍한 척해도 하슬기는 기본적인 판단력마저 잃어버렸다.그녀는 검은색 캐리어를 끌며 울먹였다.“국내에는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는다는 걸 알아. 그냥 아멜국으로 돌아갈래. 다시는 안 올 거야!”하슬기는 이 모습을 보고 당황해서 황급히 양나정의 캐리어를 붙잡았다.“누가 그래? 남성 하씨 가문의 문은 언제나 너한테 활짝 열려 있어. 이제 서씨 가문도 생겼잖아!”하슬기가 붙잡자 양나정은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고 캐리어를 내려놓고 스위트룸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면서 머뭇거리며 말했다.“아, 사실 누가 나를 반기든 아니든, 나는 어차피 혼자 아멜국으로 돌아가야 해. 난 남성에 집도 없으니... 그저 내가 떠나고 나서 그 여우 같은 년이 또 난리를 쳐서 네가 또 혼자 슬퍼할까 봐 걱정이야.”서정우의 외도 상대를 떠올리자 하슬기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나정아, 아멜국에 있는 집 팔고 그냥 남성에 정착하면 안 돼? 그러면 우리 서로 의지하면서 지낼 수 있잖아?”양나정은 말로는 계속 거절했다.“나는 더 이상 국내에 남아있을 엄두가 안 나. 새언니가 불편해하면 어떡해. 그러면 정훈 오빠는 날 괴롭히는 건 물론이고 너까지 힘들게 할 텐데.”그 말을 듣자 하슬기는 더욱 발끈했다. 짙은 눈썹과 큼직한 눈망울을 가진 그녀의 얼굴에는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송남지는 횡재한 거나 마찬가지인데 혼자 조용히 찌그러져 있으면 될 것을 왜 굳이 튀어나와서 너를 괴롭히는 거야? 걔가 너랑 닮지 않았으면 지금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겠어?”양나정은 여전히 가련한 표정으로 말했다.“그저 내가 복이 없었던 탓이지. 정훈 오빠와 인연이 닿지 않아서 이렇게 된 걸 어쩌겠어.”하슬기는 양나정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나정아, 너도 그때 어쩔 수 없었던 거잖아. 오빠를 탓할 수도 없어. 오빠도 네가 이미 결혼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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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5화

가엾고 안쓰러운 절친의 모습에 하슬기는 즉시 행동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다.“그래도 네가 선배잖아.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말 몇 마디 나누는 게 뭐가 어때서 기분 나빠해? 내가 자리를 마련해 줄게.”양나정은 오랜 시간 공들인 계획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 순간을 맞이했다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송남지는 여러 가게를 돌아다녔지만, 물감 파는 곳을 찾지 못해 번거롭다는 생각에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했다.그러고는 맨발로 해변가를 한 바퀴 돌아 호텔로 돌아왔다.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녀는 오늘의 신랑인 서정우와 우연히 마주쳤다.서정우와 마주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 호텔은 오늘 결혼식에 참석한 모든 하객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니 서정우 또한 당연히 이곳에 머물러야 했다.서경의 다른 도련님들과 달리 서정우는 어딘가 능글맞고 장난기 넘치는 남성 특유의 분위기를 풍겼다. 심지어 말투조차도 늘 장난스럽고 빈정거리는 듯했다.“형수님은 양나정이랑 정말 많이 닮으셨네요.”서정우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찡그린 모습부터 웃는 모습, 심지어 부드러운 성격과 태도까지 모두 똑 닮았다.송남지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다.“양나정 씨는 미인이시니까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고마워요.”서정우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의문을 조심스럽게 꺼냈다.“형수님, 형님이 전에 양나정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나요?”역시 남성 사람들은 이렇게 편안하게 가십을 즐기는 모양이었다.송남지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들은 적 없어요.”서정우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그렇겠죠. 누가 자기 아내한테 과거 연애사를 이야기하겠어요. 하지만 형수님이 듣고 싶으시다면 제가 이야기해 드릴 수 있어요.”송남지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여전히 침착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정훈 씨가 이야기하지 않는 건 묻지 않을 거고 이야기한다면 그때 잘 들으면 돼요.”서정우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감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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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6화

송남지가 결정을 못 내리고 머뭇거리는 순간, 스위트룸 문이 갑자기 열렸다.송남지의 시야에 양나정의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송남지는 양나정의 눈가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 붉게 젖어 있는 것을 가장 먼저 포착했다.양나정의 뒤에는 하정훈이 서 있었는데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송남지는 어색함을 느끼며 문 쪽으로 몸을 약간 틀었다.“제가 방해했나요? 괜찮아요, 두 분 마저 이야기 나누세요.”송남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정훈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스쳤다.송남지는 얼른 방에서 나가 문을 닫으려 했지만 하정훈이 성큼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우리 사모님, 돌아왔어?”송남지는 하정훈의 손에 잡힌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억센 손아귀가 평소보다 조금 더 강하게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다.양나정은 눈물을 참으며 억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새언니, 정훈 오빠랑 이야기는 다 끝났어요. 시간이 늦었으니 저는 가볼게요.”송남지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잘 가요...”양나정은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스위트룸을 나섰다.그녀가 나가자마자 하정훈은 재빨리 문을 닫았다.쾅 하는 소리가 송남지의 귓전을 울릴 정도로 크게 울렸다.‘하정훈은 도대체 왜 이렇게 화가 난 걸까? 혹시 정말로 내가 하정훈과 양나정의 대화를 방해한 걸까?’송남지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안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잖아. 양나정이 먼저 문을 열어서 마주친 건데. 아니면 하정훈은 내가 엿들은 줄 알고 화를 내는 건가?’송남지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하정훈의 분노에 찬 눈과 마주쳤다.“나도 막 도착해서 두 분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못 들었어요...”하정훈은 날카로운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불쾌감을 드러냈다.“어디 갔다 왔어?”송남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저녁노을이 너무 예뻐서 물감을 사서 그림을 그리려고 했는데, 돌아다녀 봐도 못 찾아서 그냥 포기했어요.”하정훈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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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7화

하정훈이 보기에도 송남지의 말은 딱히 틀린 구석이 없었다.하지만 그는 왠지 모르게 불쾌했다.“그건 그렇다 치고 아까 왜 문을 닫고 양나정과 나 둘만 남겨두려 한 거야?”하정훈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이어 물었다.“남지야, 넌 내가 다른 여자와 좀 더 시간을 보내도 아무렇지 않은 거야?”송남지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오늘따라 하정훈이 유독 예민하게 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그녀는 설명했다.“양나정 씨가 눈물을 글썽이길래, 혹시 아직 못다 한 얘기가 있나 싶었어요. 나는 서두를 것도 없고 시간도 넉넉하니까...”송남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정훈은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깨물었다.그의 키스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너무 세게 깨물어서 송남지는 얼굴을 찡그리며 아프다고 소리쳤다.“정훈 씨, 아파요...”하정훈은 키스를 멈추진 않았지만 힘을 조금은 풀었다.길고 긴 키스는 유리창에서 소파로 이어졌고 결국 두 사람은 키스한 채로 욕실로 들어갔다.욕조에는 물이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하정훈의 키스는 멈출 줄 몰랐고 그의 손길 또한 쉴 새 없이 움직였다.그는 능숙하게 송남지의 옷을 벗겨냈다.욕실에도 커다란 통유리창이 있었지만 여기는 18층이었고 그것도 탁 트인 바다를 마주한 18층이었다.그래서 이곳에서 샤워하는 것은 비록 통유리창이라 해도, 다른 어떤 가림막도 필요 없었다.치마가 바닥에 툭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송남지는 키스에 정신을 놓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하정훈에게 안겨 욕조 안에 들어와 있었다.물 온도는 약간 뜨거웠고 그녀의 몸은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하정훈은 긴 다리를 움직여 욕조 안으로 성큼 들어섰고 그 바람에 여기저기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바닥에 떨어진 물방울은 마치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시원하게 흩뿌려졌다.송남지는 욕조에 몸을 뉘인 채 자신에게로 몸을 기울이는 하정훈을 올려다봤다.그의 눈빛은 맹렬한 기세로 가득 차 있었고 마치 원시림 속 늑대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조명 아래 그의 눈동자에는 붉은 기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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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8화

송남지는 간신히 남은 정신으로 생각했다.‘질투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던가? 어째서 하정훈이 질투하는 거지?’송남지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하정훈은 귓불을 더욱 강하게 깨물었다.일종의 경고였다.그 경고를 알아차린 송남지는 서둘러 대답했다.“알... 알았어요.”하정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욕조 안에서 물이 튀어 오르고 바닥까지 닿는 창문에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뒤엉켜 있었다.다음 날.송남지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푹 잤다. 몽롱한 상태로 몸을 뒤척이다가 옆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느꼈다.서재에서는 하정훈이 회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요즘 특히 바쁜 것 같았고 송남지는 요즘 특히 잠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시간을 보니 벌써 12시였다.어떻게 이렇게 오래 잘 수 있지?침대에서 일어난 송남지는 배가 몹시 고팠다. 어제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송남지는 조심스럽게 서재 문을 두드렸다.하정훈은 곧바로 일어나 문을 열었다.문틈 사이로 송남지는 영상 회의를 진행 중인 고위 간부들이 몹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송남지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이런 중요한 시간에 하정훈을 방해했으니 말이다.그녀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나 뭐 좀 먹고 올게요.”얼른 말을 끝내고 나가려는데 하정훈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1분만 기다려.”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돌려 컴퓨터 앞으로 간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죄송합니다, 여러분. 지금 아내와 점심을 먹으러 가야 해서요. 오후에 서경에 돌아가서 직접 만나서 다시 회의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송남지는 듣고 있기가 민망했다.마치 자신이 하정훈을 몹시 귀찮게 하는 것처럼 들렸다. 중요한 회의를 멈추고 자신과 밥을 먹으러 가게 하다니.하정훈은 서재에서 나오자마자 물었다.“남성의 해산물 요리 맛보러 갈까? 꽤 유명해.”여기까지 왔으니 현지 특산물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하지만 송남지는 해산물 특유의 비린내를 상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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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9화

하정훈은 무심하게 말했다.“우리가 밥을 한두 번 먹었나?”송남지는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편식이 그렇게 심했나?’그녀는 고개를 숙여 남성 특유의 신맛이 나는 요리를 한 입 먹었다. 시큼하면서도 입맛을 돋우는 맛이었다. 다시 고개를 들자 옆에 흰색 접시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은은한 시트러스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양나정은 마치 덜 익은 레몬처럼 약간 앙칼지면서도 청량한 목소리로 말했다.“정훈 오빠한테 들었는데 오후에 바로 서경으로 돌아가신다면서요?”송남지는 정말이지 얄궂은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레스토랑에서도 마주치다니.“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접시를 든 하슬기가 뒤늦게 도착했다. 하정훈 옆에만 빈자리가 있었고 그녀는 하정훈 옆에 앉을지 망설였다.그녀의 사촌 오빠는 어릴 때부터 융통성 없이 딱딱했고 엄격하기가 마치 어른 같았다기 때문이다.하슬기는 왠지 모르게 가까이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기는 하정훈 옆에 앉는 것이 부담스러워 조심스럽게 제안했다.“나정아, 네가 저쪽으로 가고 내가 새언니랑 같이 앉을게.”하정훈은 무심하게 눈썹을 찌푸리더니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양나정 옆에 섰다.“너희 둘이 같이 앉아.”양나정은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송남지는 그저 하정훈이 접시를 들고 일어나 양나정에게 자리를 양보하게 하고 결국 자신의 옆에 앉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하슬기는 자리에 앉아 입을 삐죽 내밀며 평소에 송남지가 온갖 아양을 떨며 하정훈을 홀렸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렇지 않고서야 하정훈이 양나정과 함께 있는 것조차 저렇게 꺼릴 리가 없었다.하슬기는 시선을 가다듬고 맞은편에 앉은 송남지를 쏘아봤다. ‘저 여자는 겉으로는 얌전해 보여도 수단이 엄청나네. 서정우 옆에 붙어 있는 여우 년이랑 전혀 다를 것 없잖아.’“오빠, 이따가 슬기랑 같이 공항까지 배웅해 줄게.”양나정은 부드럽게 제안했다.하정훈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단칼에 거절했다.“됐어. 운전기사가 데려다줄 거야.”양나정은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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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0화

송남지는 하슬기의 결연한 모습에 다음 순간 양나정이 하정훈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폭탄 발언이라도 터뜨릴까 봐 불안했다.그녀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하슬기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말해 봐요.”하정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하슬기를 쏘아보았다.‘하씨 가문 사람들은 다 신중한데, 어쩌다 저렇게 경솔한 애가 태어났을까?’ 양나정은 여전히 부드러운 태도로 하슬기를 말렸다.“슬기야, 그런 이야기는 새언니 앞에서 하기 좀 그렇잖아. 새언니가 들으면 분명히 기분 상할 거야.”송남지는 하슬기가 싫지는 않았지만 양나정은 조금 시끄럽다고 생각했다. “양나정 씨, 만약 정말 내가 기분 상할까 봐 걱정했다면, 내가 듣고 분명히 기분 나빠할 말은 꺼내지도 않았을 거예요.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겠죠.”양나정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은 당혹스러움이 느껴졌다.그녀는 하슬기 옆에 얌전히 앉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하슬기는 양나정의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여전히 그녀를 옹호하며 말했다.“나정이는 새언니를 생각해서 그러는 건데, 새언니는 정말 고마운 줄을 모르는군요.”하정훈은 하슬기에 대한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그는 입맛이 뚝 떨어져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됐어, 그만 좀 해. 할 말 있으면 지금 당장 말해.”하슬기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오빠, 나정이가 예전에 그 아멜국 사람이랑 결혼한 건 순전히 영주권 때문이었어. 둘은 실질적인 결혼 생활을 한 적도 없고 오빠도 내연남 같은 게 아니야. 예전에 이 오해 때문에 헤어졌던 건데, 이제 오해가 풀렸잖아.”송남지는 깜짝 놀랐다.‘하정훈이 양나정이 이미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헤어졌던 건가? 이제 양나정은 이혼했으니 그럼 둘은?’그녀의 오른쪽 눈꺼풀이 떨리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역시 꽤 중요한 이야기였다.양나정은 여전히 하슬기만 속아 넘어가는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슬기야, 다 지난 일인데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할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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