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Chapter 581 - Chapter 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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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1화

우륵의 사신은 대전 한가운데 굳은 듯 서 있었다. 황제의 말에 동의할 수도, 비동의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문무백관의 시선이 한꺼번에 그를 향했다.지금 부정의 말 한마디만 내뱉어도 모두가 달려들어 한 대씩 주먹을 꽂을 듯한 기세였다.시은은 가만히 눈썹을 찌푸렸다. 이상했다. 우륵 관원이 이렇게 순진할 리가 있나? 겉으로 따르고 속으로 어기는 법도 모른단 말인가? 남의 땅에 들어왔으면 듣기 좋은 말부터 골라서 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저 사신은 긴장에 짓눌린 채, 감히 누구의 비위도 거스를 수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마치 대성조의 황제와 불찰친왕이 동시에 이 자리에 있는 듯이.맹시은의 살구빛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그녀는 사신의 뒤에 선, 눈에 띄지 않는 수행원 하나를 바라보았다. 곁에 선 시녀 지아에게 눈짓한 뒤 귓가에 몇 마디를 속삭였다.지아는 조용히 맹여산 곁으로 가서 그 말을 전했다. 맹여산이 고개를 돌려 맹시은을 한 번 보았다. 그러고는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그리 대답이 어렵다면 뒤에 숨은 수행원이 나와서 말해보거라. 내가 평생 전쟁터를 누비며 우륵의 호방한 사내들은 많이 보았으나 저리 뒤에 웅크린 자는 처음 보아서 말이다.”말이 끝나자 대전은 숨이 멎은 듯 고요해졌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맹여산이 비웃듯 웃었다.“우륵은 왼편을 높인다 하였지. 뒤에 선 그자, 호위의 옷을 입었으나 왼쪽 귀에 계황석을 달고 있더군.”그러고는 정력원을 돌아보았다.“기주는 우륵과 가장 가깝지 않은가? 우륵에서 모르는 이 없는 풍습일 텐데, 정 장군은 몰랐는가?”정력원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저는 우륵인이 아닌데 어찌 알겠습니까?”기주는 양국의 교역구이자 변방 요충지였으니 우륵인이 가장 흔히 드나드는 곳이기도 했다.맹여산은 그를 한 번 흘겨볼 뿐, 더 말하지 않았다. 그 순간, 불찰친왕의 왼손 집게손가락이 오른손의 터키석 반지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윽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불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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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2화

“신녀, 공주 마마께 문안드립니다.”시은이 몸을 굽히려 하자 아란이 재빨리 붙잡았다.“다친 다리로 무슨 예를 올린단 말이냐?”가까이서 보니 아란의 눈동자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막 남편을 잃었고 아이는 억류된 채 갓 과부가 된 몸으로 또다시 협상의 장기말이 되었다. 그 무게가 고스란히 눈가에 맺혀 있는 것 같았다.조금 전 그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쓰러지지 않는 맹시은.그녀는 옅게 웃었다.“마마께서 과찬하셨습니다. 쓰러지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조금 더 버틸 뿐이지요.”아란은 씁쓸하게 웃었다.“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 버팀이다. 태후의 손에 이끌려 우륵으로 갔고 이제는 우륵의 손에 떠밀려 대성조로 돌아왔다. 어디가 집이고 어디에 내 자리가 있겠느냐?”맹시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마마께서 먼저 말씀을 여셨으니 저도 숨기지 않겠습니다. 집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마께서 어디에 서고 싶은지가 중요하지요. 마마께서 서 있는 곳이 곧 집입니다.”아란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부드러우면서도 흔들림 없는 눈빛이었다.맹시은은 하늘의 달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는 처음에 그저 살아남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한 곳에서 살 수 없다면 다른 곳으로 옮겨 살아남으면 되니까요. 살아남고 나니, 이번에는 조금 더 잘 살고 싶어졌습니다. 제 아이가 저와 같은 길을 걷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지요. 속담에 나무는 옮기면 죽고 사람은 옮기면 산다 하지 않습니까?”그녀는 다시 아란을 바라보았다.“마마의 소원은 무엇입니까?”아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윽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살아남는 것. 열이와 함께 무사히 살아남는 것.”시은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그럼 살아남으셔야지요.”아란은 그 눈빛을 바라보았다. 조용하지만 끊임없이 힘이 스며드는 듯한 눈빛이었다.그래. 개미조차 목숨을 아끼며 사는데 한 나라의 공주가 어찌 이리 초라하게 주저앉을 수 있겠는가? 오라버니는 한 나라의 군주이고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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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3화

전각 안이 잠시 고요해졌다. 숟가락을 들던 손들이 일제히 멈춘 듯했다.황후가 유산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아는 일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모두가 입에 올리기를 꺼리는 일이기도 했다. 황후 앞에서 아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은 궁 안의 암묵적인 금기였다. 그런데 오늘 황후가 먼저 그 말을 꺼낸 것이다.못 들은 척하면 무례가 되고 받아치면 자칫 상처를 건드릴 수도 있다.묘한 긴장이 전각을 감쌌다.그때, 회양백 부인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폐하와 마마께서는 아직 젊으시니 어린 태자께서는 마마에게로 오시는 길일 것입니다.”황후의 입가가 힘겹게 당겨졌다.“부인의 위로에 감사하오.”흥양후 부인도 덧붙였다.“마마께서 염려하실 일은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국사에 마음을 쏟고 계실 뿐… 그 도리를 다하시면 아이는 자연히 오겠지요.”짧은 두 마디였으나 말을 끝내고 나니 흥양후 부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아란은 여러 부인들을 둘러본 뒤, 황후를 바라보았다.“우륵에 이런 말이 있어 마마께 전하고 싶습니다.”먼저 낯선 우륵어 한 구절을 읊은 뒤, 천천히 풀어 설명했다.“아이와 어미의 인연은 전생에 이미 맺어진 것이라 합니다. 그러니 사람의 도리를 다하며 하늘의 뜻을 기다리면 되지요. 마마께서도 조용히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게 어떻겠습니까?”황후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는 듯했으나 곧이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본궁도 꽃이 피기를 기다리마.”그리고 전각 안의 부인들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식사를 마쳤다면 편전으로 가서 음악을 즐기거라. 본궁은 조금 피로하여 먼저 물러가겠다.”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렸다.“황후 마마를 배웅합니다.”방금의 말이 황후의 마음을 조금은 풀어주었는지, 아니면 오히려 더 무겁게 만들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흥양후 부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괜히 입을 열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아이를 잃은 여인에게는 어떤 미사여구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아이 하나를 안겨주는 게 한마디 위로보다 더 나을 수도 있었다. 방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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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4화

시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황후 마마께 청해보는 건 어떠십니까? 마마께서 공주 마마를 보고 싶어 하신다고, 하룻밤 궁에 머물게 해 달라 청하는 겁니다.”이미 입궁한 이상, 불찰친왕이 감히 궁 안에서 사람을 끌어내가지는 못할 터였다.아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좋다. 지금 바로 황후 마마를 뵈러가마.”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설 때, 몸에 걸친 거대한 보석 장식이 무겁게 상에 부딪혔다. 둔탁한 소리에 시은은 저 화려한 옷이 얼마나 무거운지 깨달을 수 있었다.맹시은은 무희들의 연회도 보지 않았고 부인들의 탐색 어린 시선도 피하고 싶어 그냥 자리에 남아 배를 채웠다. 상 위의 음식은 대부분 거의 손대지 않은 채였다. 유독 그녀의 상만 말끔히 비어 있었다.봉서전의 관사 어멈은 그녀가 모자라게 먹은 줄 알고 하마터면 다시 한 상을 차리려 했다.“관사 어멈, 앞전 의논은 끝났는지 알아봐 줄 수 있겠느냐?”관사 어멈이 움직이려는 찰나, 전 내관이 모습을 드러냈다.“의논은 당분간 끝나기 어려울 듯합니다. 각 부인과 규수들께서는 먼저 귀가하셔도 좋다는 전갈입니다.”그는 다시 맹시은을 향해 공손히 말했다.“방금 봉서전으로 오실 때, 수하가 소홀하여 가마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헌데 출궁하실 가마는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맹시은은 옅게 웃었다.“괜찮다. 마침 태의도 더 걸으라 하셨거든.”전 내관은 그녀가 문제 삼지 않는 것을 보고 허리를 굽혔다.“대인배이십니다. 감사드립니다. 소인이 맹 장군을 정성껏 모시겠습니다.”“부탁하마, 전 내관.”시은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아이들은 곤히 잠들어 있었고 마당의 하인들도 졸음에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간단히 몸을 씻고 나오니 어느새 깨어난 연아가 눈을 비비며 속삭였다.“어머니, 이제 오셨습니까?”맹시은은 한 발로 조심스레 뛰어 침상 가장자리에 앉았다.“자, 이제 자렴. 어미가 돌아왔단다.”연아는 그녀의 팔을 꼭 붙들고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고른 숨소리가 방 안에 번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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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5화

주종현이 찾아왔을 때, 시은은 정원에서 복동이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흙을 쥐고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는 흙을 움켜쥐면서도 슬쩍슬쩍 어른들의 눈치를 살폈다. 단낭이 일부러 안 된다고 말하면 오히려 제 뜻대로 된 듯 깔깔 웃었다.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어 작은 거지 꼴이 따로 없었다.“어쩌자고 아이를 땅에 앉혀 논 것이냐? 얼마나 더러운데.”시은이 담담히 답했다.“더러우면 씻기면 되지요. 지금 저렇게 신났는데 왜 말립니까?”주종현은 복동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이렇게 더러워져서야... 아비도 못 알아보겠다.”복동이는 동그란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아직 다 나지 않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아비 앞에서 다시 흙을 한 움큼 집어 들었다.“먹어!”주종현은 아이가 먹겠다는 줄 알고 황급히 손을 뻗었다.“안 된다!”그러나 복동이는 제 입에 넣으려는 게 아니었다. 제법 효심 깊게도 그대로 아비의 입에 쑤셔 넣었다.그러자 시은과 단낭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저 녀석, 이렇게 오래 기다리더니 드디어 제 발로 걸려든 사람이 생겼네요.”주종현은 복동이의 겨드랑이를 잡아 번쩍 들어 올렸다.“얼른 데려가 씻기거라.”복동이가 데려가진 뒤 그는 손에 묻은 흙을 툭툭 털었다.“날도 좋으니 백마사에 가서 바람이나 쐬자.”하지만 맹시은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안 가요.”경성에 머문 세월이 짧지 않았지만 백마사에 간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갈 때마다 좋은 일은 없었다.주종현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거절도 참 단호하네.”맹시은은 지팡이를 짚고 익숙하게 몸을 일으켰다.“당신이 연아도 아닌데 제가 일부러 맞춰 줄 이유가 있나요?”그녀가 등을 돌리자 초라한 행색의 세자가 곧장 뒤를 따랐다.“오늘 혜능법사께서 설법을 연다고 해서 일부러 데려가려던 건데.”맹시은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저는 신불을 믿지 않습니다. 신당에 마음이 없는데 왜 남들이 간절히 바라는 기회를 낭비하겠어요?”그때 춘도가 급히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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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6화

법사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가득했다.“시주 여러분, 편히 앉으십시오.”설법이 절반쯤 흘렀을 무렵, 아란 공주는 끝내 자리를 버티지 못했다. 그녀는 시은의 손을 잡아 조용히 나한전을 빠져나왔다.나한전 앞에는 대웅전이 있고, 한쪽에는 좁은 골목이 나 있었다. 아란은 망설임 없이 시은을 끌고 그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뒤따르던 두 시녀는 익숙하다는 듯 자연스레 뒤를 막았다. 골목을 돌아 작은 문으로 들어서자 길은 또다시 굽이쳤다. 이리저리 꺾여 들어가니 후산의 탁 트인 빈터가 나타났다.맹시은은 속으로 놀랐다. 아란 공주가 이곳을 이렇게까지 훤히 알고 있다니. 공주가 길을 이끌지 않았다면 이런 길이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공주 마마, 여긴 왜 오셨습니까?”아란이 눈을 찡긋했다.“구경하러.”구경이라니.맹시은은 본능적으로 거절하고 싶어졌다. 대개 이런 구경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녀는 다친 다리를 끌고 있어 혹 들키기라도 한다면 달아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아란은 그녀의 망설임을 허락하지 않았다.그녀는 곧장 맹시은을 옆 작은 방으로 끌어들였다. 안은 텅 비어 있었지만 또렷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안에는 이미 두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맹여산과 진도림.하지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역시 이 방에 숨어 누군가의 말을 엿듣고 있었다.맹시은은 눈이 번쩍 뜨였다. 이 작은방의 뒤편이 은밀한 별채와 맞닿아 있었다. 말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충분히 숨었다고 여겼겠지만 그들의 말은 한 자도 빠짐없이 이쪽으로 흘러들고 있었다.두 노인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들과 눈이 마주치자 똑같이 검지를 입술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말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불찰친왕과 정력원이었다.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고 있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격렬히 언성을 높이고 있었던 것이다. 한바탕 다툼이 지나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저쪽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진도림이 낮게 입을 열었다.“맹 장군께서는 어찌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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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7화

송하윤은 영국공부에서 쫓겨난 몸이니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그래서 재방의 큰스님은 이처럼 더러운 돈을 만지는 일을 그녀에게 남겨 준 것이다.송하윤의 얼굴에는 이미 아무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꽂혔다.너무도 익숙한 얼굴. 동공이 가늘게 떨리며 심장이 세차게 요동쳤다. 가슴속에서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강시아.눈동자 깊은 곳에서 증오가 일렁였다. 지금의 송 가는 무너졌다. 어머니는 죽고 오라버니도 죽었다. 이제 숨 붙이고 남은 건 그녀 하나뿐이다. 주종현은 그녀를 버렸고 영국공부도 등을 돌렸다. 그런데 왜? 어째서 강시아는 아직도 살아 있는가. 왜!“윤 아가씨, 큰스님께서 부르십니다.”어린 사미의 목소리가 그녀의 생각을 끊었다. 송하윤은 재빨리 표정을 지우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려 재방 쪽으로 걸어갔다.맹시은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방금 전, 누군가의 강렬한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보았을 때는, 그저 마른 등이 하나만 보일 뿐이었다. 물동이를 들고 힘겹게 재방으로 향하는 뒷모습.“왜 그러느냐?”아란이 물었다.“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나한전의 설법은 이미 끝나 있었다.불찰친왕이 어디선가 모습을 드러냈다.그는 시은을 한 번 훑어본 뒤, 시선을 아란에게 돌렸다.“왕후께서는 어디로 가신 겁니까? 제가 한참이나 찾았습니다.”아란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가엾은 제 아들을 위해 신의 가호를 빌었지요. 눈먼 것들이 괜히 해치려 들지 않도록 말입니다. 왕숙도 조카를 위해 빌어보시겠습니까?”불찰친왕의 안색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는 짧게 우륵어 한 마디를 던지고는 소매를 휘날리며 떠났다.맹시은은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대성조의 언어를 꽤 잘하더군요.”우륵어 한 마디를 빼고는 모두 또렷이 들렸다. 억양은 거칠었지만 뜻은 분명했다.아란이 말했다.“그는 기주에서 자랐다.”그 말에 맹시은이 눈을 크게 떴다.“기주에서요?”기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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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8화

송하윤은 난생처음 다음 날 휴가를 냈다. 영국공부 근처에 하루 종일 숨어 지켜보았지만 주종현과 맹시은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어제 본 것이 헛것이었나 싶을 지경이었다.해질녘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주종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송하윤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저 남자. 저자가 바로 그녀의 모든 불행의 근원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이와 나란히 살아가고 있는데 그녀는 진창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주종현이 저택 안으로 사라진 뒤에야 그녀는 천천히 몸을 드러냈다. 고개를 들어 저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슴속에서 복수의 불길이 조용히 타오르기 시작했다.그때 영국공부 측문에서 익숙한 인영 하나가 나왔다. 고 유모가 골목 어귀에 이르러 고개를 들자 건너편에 서 있는 송하윤이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예전의 오만함은 온데간데 없었고 지금은 마치 고인 물처럼 고요하고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국공에게 쫓겨난 뒤 큰 마님은 한동안 깊이 상심했다. 사람을 보내 찾아보았으나 그녀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다시 마주치다니.고 유모는 걸음을 떼려다 문득 멈추었다. 송 아가씨가 돌아온다면 무슨 신분으로 돌아오겠는가? 세자는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지 않을 것이다. 저택에 남는다 해도 주인도, 하인도 아닌 어정쩡한 처지가 될 뿐이다.큰 마님이 그녀를 잠시 감싸줄 수는 있어도 평생 지켜줄 수는 없다. 차라리 지금처럼 밖에서 조용히 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유모는 한숨을 내쉬고 돌아섰다.오늘은, 보지 못한 셈 치자.요즘 들어 맹시은은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주종현이 지나치게 한가해 보였기 때문이다.“혹시 파직이라도 당하셨어요?”주종현은 작은 귀방에서 또 하나의 목마를 만들고 있었다. 막 깎아낸 나무에 동유를 정성껏 바르고 있다 맹시은의 물음에 잠시 멈칫했다.“무슨 파직? 나한테 안 좋은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것이냐?”그는 고개를 들고 맹시은을 한 번 흘겨보았다. 지난번 공부 장인과 마주한 뒤 마치 막힌 혈이 뚫리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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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9화

연아와 복동이가 국공부로 돌아간다 한들 아버지의 입에서 또 하나의 희망으로 불릴 뿐이었다. 조부가 손자를 아끼는 따뜻한 마음이 아니라 가문의 기대라는 이름으로 덧씌워진 무게였다.“아버지!”연아가 작은 책가방을 들고 학당에서 돌아왔다. 요즘 그녀는 이곳에 아버지가 있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보이지 않으면 아버지는 어디 갔느냐고 먼저 물을 정도였다. 그녀는 아직 동유를 바르고 있는 목마를 한 번 훑어보았다.“또 복동이 거예요?”아버지는 복동이를 위해 이미 수많은 장난감을 만들어주었다. 맹시은은 딸의 속마음을 가장 잘 알았다. 작은 소녀는 은근히 샘이 난 것이다. 그녀는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주종현을 흘겨보았다.“거 봐요. 물 한 그릇을 반듯하게 못 나눴잖아요.”주종현은 눈썹을 슬쩍 치켜올리고는 딸의 작은 손을 잡았다.“당연히 네 것도 있지. 따라와 보렴.”부녀는 손을 잡고 귀방으로 들어갔다.잠시 뒤, 연아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두 사람이 함께 커다란 연 하나를 들어 나오자 맹시은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이걸 언제 만든 거예요? 이게 정말 날 수는 있나요?”보통 연은 대나무 뼈대에 얇은 종이를 씌운다. 그런데 이 연은 나무 살로 틀을 짜 놓았다. 성인 한 명이 들어도 버거울 만큼 묵직했다. 대체 얼마나 센 바람이 불어야 저게 뜬단 말인가?주종현은 자신만만했다.“분명히 날오를 것이다. 공부에서 책을 빌려보았다. 전조 때 제사와 기복에 쓰던 대형 연 제작법이지.”연아는 이미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지금 당장 가요! 아버지가 만들어 준 큰 연을 다 보게 할 거예요!”복동이도 어느새 새 단어를 익혀 누나를 따라 손뼉을 치며 외쳤다.“연!”아이들이 이렇게 기뻐하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지금 가자!”맹시은은 살짝 부는 바람을 올려다보았다.이 바람으로는…나갈 때는 그렇게 신이 났던 두 아이가 돌아올 때는 그만큼 풀이 죽어 있었다.주종현은 거대한 연을 어깨에 메고 뛰느라 땀범벅이 되었다. 무인이라 다행이지 보통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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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0화

“공부의 대신들이 다 목수 출신은 아니지 않나요?”단낭이 작게 중얼거렸다.“그래도 여자는 벼슬을 할 수는 없잖아요…”맹시은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벼슬을 못 한다고 해서 생계를 잇는 기술이 익힐 수 없는 건 아니지. 아이가 즐겁다면 그걸로 충분해.”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단낭, 정현을 떠나 이곳으로 나올 때 벼슬을 하러 온 것이냐, 아니면 살기 위해, 조금은 더 기쁘게 살기 위해 온 것이냐.”세상은 늘 여인에게 가르침을 주입한다. 어질고 온순해야 한다고, 단정하고 고요해야 한다고, 공손하고 현숙해야 한다고. 그러나 스스로 기뻐해도 된다는 말은 단 한 마디도 말해주지 않는다.맹시은의 기억 속에서 어머니는 그녀에게 틀에 맞추어 살라 한 적이 없었다. 지금 그녀가 하는 일은, 그녀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아이의 기쁨을 지켜주는 것뿐이었다.밤이 되었다. 맹시은은 마지막 장부를 덮었다.벽 너머에서는 여전히 두드리고 깎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녀는 지팡이를 집어 벽을 두드렸다. 이제 밤이 깊었다는 신호였다.잠시 뒤, 소리가 멎었다. 문 앞에는 온몸에 나무 톱밥을 뒤집어쓴 채 서 있는 부녀가 있었다.“들어오지 말거라!”맹시은이 단호하게 말했다.“깨끗이 씻고 들어와.”주종현은 눈에 기대를 가득 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맹시은은 그를 흘깃 보며 담담히 말했다.“당신은 돌아가세요.”연아는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아버지, 내일 봐요.”주종현은 말없이 서 있었다. 하늘에 오르지 못한 그 거대한 연을, 부녀는 꼬박 열이틀 동안 붙잡았다. 수없이 날려보고 수없이 실패했다.결국 주종현은 포기했다. 그러나 연아는 아니었다. 목공에 대한 열정이 오히려 불붙었다. 예쁜 아가씨가 정말 목수가 되어버릴 기세였다.봄이 저물 무렵. 별장 밭의 복숭아가 익어 싱싱한 과실이 한 광주리씩 저택으로 들어왔다.그리고 또 하나의 중대한 일이 있었다. 맹여산이 경성을 떠난다는 것이었다.맹시은은 그가 서북 진영으로 돌아가는 줄로만 알았지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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