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 후 시작된 그의 집착의 모든 챕터: 챕터 101 - 챕터 110

632 챕터

제101화

서은주는 집 안을 말끔히 정리해 놓고 텅 빈 큰 집을 바라보다가 괜히 마음이 허전해졌다.이 시간쯤이면 두 사람은 이미 비행기에서 내렸을 테니 연락하려다가도 괜히 방해가 될까 싶어 그만두었다.그런데 먼저 전화가 걸려 왔다. 다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육강민이 아니라 육민찬이었다.“이모, 우리 집에 도착했어.”“그래? 안 피곤해?”“전혀.”아이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이모, 혼자 있을 때도 꼭 밥 잘 챙겨 먹어야 해…”어른처럼 휴대폰을 붙잡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녀석의 모습에 서은주는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육씨 가문의 식구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아주 말썽꾸러기에 고집불통인 꼬마 도련님의 환심을 제대로 사로잡은 이름 모를 그 여인의 존재에 감탄을 금치 못할 뿐이었다.“아빠랑도 잠깐 통화할래?”육강민은 원래도 도도한 구석이 있었다.그는 비행기가 착륙한 뒤로 지금까지, 서은주에게 먼저 연락 한 통 하지 않았던 터라, 이 말을 듣고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헛기침까지 했다.그렇게 전화받을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지만, 건네받은 휴대폰 화면은 이미 통화 종료 상태였다.“이모가 방해 안 할거래.”“……”그 순간 거실에 있던 사람들 전부 웃음을 터뜨렸다.“둘째야, 너랑 통화하기 싫다는 걸 보면 너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아니니?”그러자 육민찬이 콧방귀를 뀌었다.“이모는 원래부터 내 새엄마 될 생각도 없었어요. 아빠가 영 별로였던 거죠.”육강민은 또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그는 꽤 오랜만에 경성에 돌아왔고, 최근에 새로운 이슈가 있다는 것도 알기에 친구들은 저녁에 모이자며 불러냈다.하지만 육강민은 내내 딴생각뿐이었고 술잔을 들고서도 시선은 계속 휴대폰으로 향했다.서로 눈치를 보던 친구 중 한 명이 물었다.“누구 전화 기다리는 거야?”“아니야.”“그럼, 휴대폰 압수.”“……”“모처럼 다 같이 모였는데, 폰만 보고 있으면 안 되지.”그러자 육강민의 형이 한마디 덧붙였다.“얘 오늘 하루 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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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화

전화기 너머로 한동안 아무 말이 없자, 육지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계속 은주 씨를 지켜볼까요?”“당분간은 필요 없어.”회사 창립기념일이 코앞이라 그는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밤샘 야근은 피할 수 없을 상황에서 자신의 곁을 떠나서도 즐겁게 지내는 서은주의 근황에 대해선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서은주는 손리정과 함께 와인바에 갔다.외모가 워낙 눈에 띄다 보니 이성들의 시선이 뜨거워졌고 슬쩍슬쩍 다가오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서은주는 술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고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 역시 전부 정중히 거절했다.“와인바에 와서 술을 안 마신다?”손리정이 눈살을 찌푸렸다.“내일 학술회가 있어서 일을 망칠까 봐 그러는 거야.”“그럼, 관심 있다고 다가오는 사람들은 왜 거절하는 건데?” “나 애매한 관계 싫어하는 거 알잖아.”손리정은 고개를 저었다.“그럼, 육강민은 뭐야? 명분도 없는 관계면서 잠자리까지 했잖아!”“그 사람은 달라.”손리정은 서은주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은주야, 너무 깊이 빠지면 안 된다.”서은주는 그저 가볍게 웃을 뿐이었다.자정이 넘어 위미든으로 돌아온 서은주는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서은주는 육강민이 늘 누워있던 쪽으로 몸을 옮겼다.육강민 특유의 은은한 단향이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후 며칠 동안 서은주는 학술회에 참석하거나, 집에 틀어박혀 각종 학술 논문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학술회 마지막 날에는 의학계 거장의 특별 강연이 예정되어 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정작 누가 오는지는 주최 측에서도 밝히지 않았다.그날, 서은주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그때 초인종이 울리자, 서은주는 육지성일 거라 생각했다.그는 아직 강성에 머물고 있었고, 가끔씩 서류를 가지러 들르곤 했기 때문이다.서은주는 별다른 의심 없이 손에 묻은 물기를 닦고 문을 열었다.그런데 문 앞에는 고급진 옷차림의 귀부인이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육가희가 있었다.육가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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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화

“네.”화제가 갑자기 바뀌자, 서은주는 잠깐 멍해졌다가, 그냥 예의상 물었다.“식사는 하셨어요? 괜찮으시면 조금 드실래요?”그저 형식적인 말이었는데, 뜻밖에도 한주미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좀 부탁할게요.”서은주는 육강민의 어머니와 한 식탁에 앉아 밥을 먹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원래 혼자 먹을 생각으로 준비한 식사라 급히 반찬 하나를 더 볶고, 국도 끓였지만, 괜히 마음이 쓰였다.“급하게 만든 거라 입에 안 맞아도 이해해 주세요.”“괜찮네요.”한주미의 표정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다만 식사는 제법 많이 하셨다.“그동안 민찬이 돌보느라 수고했어요.”그 말을 남기고, 한주미는 곧바로 자리를 떴다.서은주는 설거지를 하면서, 이 일을 육강민에게 말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생각 끝에 그만두기로 했다. 한주미가 내려오자, 육가희가 곧바로 다가왔다.“그 여자가 뭐라고 하셨어요? 작은 아빠랑 헤어질 거래요?”하지만 한주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육가희 역시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묵으실 호텔은 잡아놨어요. 먼저 저녁부터 드실까요?”“아니, 바로 호텔로 가자. 좀 피곤하구나.”육가희는 바람 좀 더 잡아볼 생각이었지만,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는 한주미가 몹시 피곤해 보이는 바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한 시간 넘게 무슨 얘길 했을지, 육가희는 솔직히 너무 궁금했다.한주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기에 서은주는 좋은 결과를 얻었을 리 없다고 육가희는 확신했다.호텔 객실에 도착하자마자, 한주미는 곧장 육강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머니?”“그 아가씨를 직접 만나고 오는 길이다.”요즘 육강민은 회사 일로 정신이 없었다.연일 야근에 외박까지 하다 보니, 어머니의 행적을 전혀 알지 못했고 설마 강성에까지 갔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순간 온몸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왜 제게 말씀 안 하셨어요?”“너랑 얘기 좀 해보고 싶었는데 네가 기회를 줬니? 하루 종일 일만 하잖아!”“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내가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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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화

서은주는 한주미를 배웅한 뒤, 샤워를 하고 다시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그때 노트북 화면에 영상 통화 요청이 떴다.육민찬이었다.통화가 연결되고 화면은 녀석의 얼굴로 가득했다.카메라를 너무 가까이 댄 탓이었다.“이모, 안녕?”서은주의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졌다.“오늘은 뭐 했어?”“할아버지랑 텃밭 정리했고, 학원 가고, 복싱도 했어! 코치님도 나 엄청 힘 세다고 칭찬했어.”육민찬은 자주 서은주와 영상 통화를 했고 사소한 일까지 전부 공유했다.심지어 아이스크림 하나를 먹어도 꼭 보여줘야 직성이 풀리는 육민찬은 완벽한 수다쟁이였다.서은주는 조용히 들어주며 가끔 맞장구만 쳤다.그러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육민찬, 이제 늦었어. 그만 자야지.”화면에 육강민이 나타났다.방금 샤워를 마친 듯, 잠옷 차림에 목에는 수건이 걸려 있었고,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무심한 듯 느슨한 분위기는 묘하게 섹시하기까지 했다. “이모랑 영상 통화 중이잖아요.”육민찬이 인상을 찌푸렸다.“조금만 더 얘기하면 안 돼요?”“안 돼!”육강민은 녀석의 태블릿을 그대로 가져가 버렸다.육민찬은 어쩔 수 없이 서은주에게 인사를 하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서은주도 막 통화를 마치려는 순간, 그가 말했다.“끊지 마. 나랑 얘기 좀 해.”한편, 그런 아빠의 모습에 육민찬은 잔뜩 분통이 터졌다.‘아빠는 먼저 연락할 용기도 없으면서!’화면이 바뀌고, 육강민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그는 아무 말 없이 서은주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고작 며칠 보지 못했을 뿐이고 수천 리나 떨어져 있는데도 서은주를 집어삼킬듯이 이글거리는 눈빛에 서은주는 이성이 잠식되는 것 같아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은주야.”육강민이 서은주의 이름을 불렀다.그 순간, 서은주의 심장이 봄에 반응하는 만물마냥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아마도 너무 오랜만인 탓에 그 두 글자가 유난히도 다정하게 들렸다. “요즘 뭐 하고 있어?”“학술회에 다녀오고 강의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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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화

그날 밤, 서은주의 머릿속은 온통 육강민뿐이었고 그의 품이 문득문득 떠올라 괜히 그 온기가 그리워졌다.그러다 결국 잠을 설쳤고, 그 여파로 학술회장에 도착했을 때는 영 정신이 없었다.“밤잠을 설치기라도 했어요?”엄명한이 커피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정신 좀 차리라고요.”“고맙습니다.”서은주는 웃으며 커피를 받았다.“오늘이 학술회 마지막 날이잖아요. 그 신비한 거물급 인물은 대체 누구예요?”“곧 알게 될 겁니다.”엄명한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을 아꼈다.서은주는 베일에 싸인 학술계 거물 인사가 유주만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강연이 끝나자마자 그는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놀랍죠? 유주만 교수님은 한동안 공식 석상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어요.”엄명한이 웃으며 덧붙였다.“이따가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서은주에게 호감이 생긴 엄명한은 강연 내내 유주만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는 서은주의 모습을 보고 이 기회에 점수를 좀 따고 싶었다. 그리고 엄명한이 서은주와 함께 유주만에게 인사를 드리려는 그때, 유주만이 먼저 웃으며 입을 열었다.“여기서 또 보네요.”“그간 무탈하셨습니까?”서은주는 정중하게 인사했다.“두 분 아는 사이였어요?”엄명한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우연히, 두 번 정도 봤지.”유주만은 서은주를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얼굴빛이 좋아 보이네요.”“덕분입니다.”“내 강연 어땠어요?”유주만은 따로 얘기하려는 듯 서은주에게 손짓했다.학술회는 호텔에서 열리고 있었다.그들이 호텔 로비에 이르렀을 때 뜻밖의 익숙한 얼굴들과 마주쳤다.이순옥이 서미진과 함께 유주만을 향해 급히 다가왔다.“유주만 선생님, 제 남편 좀 봐주세요.”서은주를 본 두 사람은 약간 놀란 기색이었다.“남편분 진료 기록은 이미 봤고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유주만은 담담히 말했다.학술회는 학계 거물들이 많이 참석하는 자리였기에 전문가의 소견을 직접 듣고 싶어 다가오는 자들이 많았다.“그런데도 계속 다리가 아프다고 해서요.”이순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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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화

서미진을 바라보고 있는 서은주는 그저 무덤덤했다.서미진은 방금 전에 봤던 그 남자가 떠올랐다.외모도, 분위기도 나무랄 데 없었고, 게다가 다정한 말투까지 완벽한 신사였다.그리고 육강민 또한 이젠 노골적으로 서은주를 감싸고 있었다.왜 잘난 남자들은 전부 서은주에게 빠지는지 질투가 치밀어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여기저기 남자 꼬시고 다니는 걸 보면 남자 없으면 잠도 안 오나 보지?”서미진의 비아냥에도 서은주는 그저 냉소를 흘렸다.“적어도 누구처럼 유혹하려다가 경찰서로 끌려가진 않지.”정곡을 찔려버린 서미진은 화를 억누를 수 없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일 이후로 모두가 그녀를 비웃었기에 서미진은 강성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그런데 서은주 따위가, 감히 자신을 조롱하고 있었다.“육강민이 너한테 진심일 거라고 생각해?”서미진은 이를 갈았다.“예전엔 진백현한테 놀아나고, 지금은 육강민한테 휘둘리는 것뿐이잖아.”그러자 서은주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되물었다.“그런데 왜 너와는 즐기려조차 하지 않을까?”그녀는 짧게 웃으며 덧붙였다.“아마 더럽다고 생각해서겠지.”“서은주!”서미진은 그만 이성을 잃었고 그대로 달려들어 서은주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대비하지 못했던 서은주는 순간 시야가 번쩍이며 머리가 울리고 귀에서 웅웅 소리까지 났다.“널 사람 취급해 준다고 정말로 인생 역전한 줄 아나 보지? 유주만 선생님께서 진료를 거부한 것도 네가 그 못된 입을 놀려서지? 경고하는데 우리 아빠한테 무슨 일 생기면 그땐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서미진은 악을 쓰며 소리쳤다.유주만이 서진우의 진료를 거부한 일까지 자연스럽게 서은주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넌 그냥 우리 집에서 키우던 개 같은 존재에 불과하지 않아.”최근 들어 일이 계속 꼬였던 서미진은 그동안 쌓인 분노를 전부 서은주에게 쏟아내고 있었고 말은 점점 더 독해졌다.서은주는 잠시 숨을 고르며 따귀 맞은 뺨을 만졌다.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서미진을 바라보았다.그 눈빛에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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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화

서미진은 부모에게서도 아무런 위로를 받지 못하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병원을 나섰다.어릴 때부터 늘 자신에게 짓눌려 살아왔던 서은주가 언제부터 감히 자신의 머리 위에 올라타 큰소리를 치게 된 건지. 서미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서미진은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반드시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마음먹었다.**서은주는 얼음팩으로 얼굴을 식히고 나서, 수박을 먹으며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아까 한 대 더 때릴 걸 그랬다는 생각에 괜히 억울해져 한숨을 쉬었다.오늘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육강민에게서 온 메시지였다.[유 교수랑 점심 먹었다며? 사인은 받았어?][아니. 깜빡했네요.]식사 자리엔 학계의 거물들이 있어 서은주는 조용히 옆에서 듣기만 했을 뿐, 사인을 부탁할 분위기가 아니었다.[다음에 만나면 내가 대신 받아줄게.]서은주는 살짝 설렜다.그날 영상 통화 이후로, 육강민은 자주 메시지를 보내왔다.밥은 먹었는지, 육민찬이 저지른 소소한 해프닝 같은 이야기들도 서슴치 않았다.하지만 서은주는 이렇듯 잦은 연락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마치 부부 사이에서 하루 일과를 보고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서은주는 자신이 너무 깊이 빠질까 두려워 그의 메시지에 일부러 답장을 늦게 하거나, 아예 모른 척할 때도 있었다.그러다 어느날, 서은주는 시간을 내어 청산묘를 찾았다.국화꽃 한 다발을 안고,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 아래 소나무가 빽빽한 길을 걸었다.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는데도 묘하게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서은주는 국화꽃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요즘 부모님께서 남긴 육아 노트를 여러 번 읽어보았다.임신부터 첫 입덧, 태동, 사소한 변화까지 꼼꼼히 적혀 있었다.부모님은 서은주가 큰 부자가 되길 바란 게 아니라,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랐다는 걸 노트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서은주는 부모님의 사진을 살며시 쓰다듬었다.“아빠, 엄마 저 지금 잘 지내고 있어요.”“그냥……”“너무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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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화

버려진 창고 안.양아치들은 순서를 정해 놓고 들뜬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중 우두머리는 팔에 문신이 가득한 대머리 남자였다. 그는 담담히 말했다.“즐기되, 해야 할 일은 잊지 마라.”양아치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흩어졌고, 흰머리로 염색한 한 남자 하나만 남았다.누렇게 변색된 이, 온몸에서 풍기는 담배와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그는 다가와 서은주의 입에 붙은 테이프를 떼어냈다.“신음소리가 없으면 재미없잖아.”이미 마음을 다잡은 서은주는 오히려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눈부시도록 화사한 미소에 남자는 잠시 넋을 잃었다.“오빠, 손발부터 풀어줘야 제가 제대로 모실 수 있지 않을까요?”“뭐?”멈칫하던 남자가 되물었다.“더 즐길 수 있길 바라는 것뿐이죠. 저도 안 한 지 꽤 오래됐거든요. 밖에 사람들이 있는데, 저 같이 가녀린 여자가 어딜 도망갈 수 있겠어요.”아름다운 여인이 애교를 부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자 남자는 정신이 몽롱해졌다. “씨발, 존나 야하네!”그의 몸은 순식간에 반응했다.남자는 욕설을 내뱉으며 주머니에서 접이식 칼을 꺼내 서은주의 손과 발을 묶은 끈을 끊어냈다.그리고 칼을 마구잡이로 던져버리고, 서은주에게 성급히 달려들었다.“뭐가 그리 급해요.”몸을 일으킨 서은주는 그의 허리띠를 붙잡아 균형을 잡았다.이렇게나 적극적인 서은주의 태도에 남자는 침을 삼켰고, 눈은 활활 따오르기 시작했다.“잠깐만요.”서은주는 남자에게 미소를 날렸다.허리띠가 풀리고 그의 바지가 무릎까지 내려오는 그 순간, 서은주는 갑자기 몸을 틀어 바닥에 떨어진 접이식 칼을 낚아채 문 쪽으로, 필사적으로 달렸다.온갖 달콤한 상상에 잠겨 있던 남자는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이 년이!”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남자는 바로 쫓아가려 했지만 반쯤 벗겨진 바지 탓에 그대로 넘어져 버렸다. “저년이 도망간다! 잡아!”서은주는 이미 창고 입구까지 달려 나왔지만, 순식간에 대여섯 명에게 둘러싸였다.서은주는 손에 쥔 칼을 꽉 쥐었다. 심장이 목까지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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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화

그때, 차에서 누군가가 내렸다.다리에 힘이 풀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던 순간, 서은주는 누군가의 품에 안겼다.익숙한 단향에 서은주는 순간 고개를 들었다.“강, 강민 씨?”육강민은 한 손으로 서은주의 허리를 감싸안고, 다른 한 손으로 서은주의 이마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잠깐 자리를 비웠다고 이렇게까지 엉망이 된 거야?”그 말에 서은주의 손에 힘이 풀렸다.쥐고 있던 접이식 칼이 쨍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서은주의 눈가가 순식간에 촉촉히 젖어 들었다.“이제 내가 왔으니, 괜찮아.”육강민은 서은주를 더 깊이 품에 안았다.서은주가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육강민의 마음도 함께 저려 왔다. 그사이, 놈들도 차 앞까지 쫓아왔다.그들은 육강민을 알아보지 못한 채 고함을 질렀다.“괜히 끼어들지 말고 꺼져!”“뭐라고?”그때, 반대편 차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내렸다.흰 셔츠에 검은 바지. 조금 긴 머리가 눈썹을 가릴 듯 말 듯 드리워져 있었고, 피부는 유난히 희고, 외모는 눈에 띄게 잘생겼다.나른함과 퇴폐미가 몇 분씩 뒤섞인 그 남자는, 온몸에서 자유분방하면서도 오만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사람 말이 그렇게 어렵냐?”놈들이 계속 고함쳤다.“꺼지라잖아!”그중 한 명이 서은주에게 다가가 손을 뻗는 순간, 육강민이 움직였다.그는 기다란 다리를 휘둘러 그대로 상대의 가슴팍을 세차게 걷어찼다.“억!”놈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날아가 바닥에 나뒹굴었고, 가슴을 부여잡고 몸을 웅크린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이는 육강민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건장한 사내가 한순간에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못 하는 광경을 보자, 간담이 서늘해졌다.“다 덤벼!”대머리가 소리치자, 놈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그때, 아까 내린 잘생긴 남자가 말했다.“육지성, 우리도 가자.”하지만 운전석에서 내린 육지성이 고개를 저었다.“주헌 도련님, 혼자서도 거뜬합니다.”“머릿수에서 밀리는데도?”“스스로를 믿으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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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화

놈들은 경찰을 보자마자, 부친이라도 만난 것처럼 달려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들은 육강민과 방주헌을 가리키며 자기들이 얼마나 심하게 맞았는지 하소연을 늘어놓았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육강민이 고개를 숙여 품에 안긴 서은주를 내려다봤다.서은주는 고개를 저었다.놈들은 경찰서로 끌려갔고, 육강민은 서은주와 함께 차에 올랐다.그의 품은 무척 따뜻했다.차가 폐창고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서은주의 팽팽하던 신경도 서서히 풀려갔다.“여긴 어떻게 오신 거예요?”서은주는 그의 품에 기대 조용히 물었다.“집에 갔는데 네가 없더라. 차 위치가 묘지로 찍혀 있어서 가봤는데 거기도 없어서 휴대폰을 추적했지.”육강민은 서은주의 창백한 얼굴에 마음이 아팠다. 서은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지쳐서, 온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잠깐 눈 좀 붙여. 병원으로 갈 거야.”육강민은 그렇게 말한 뒤 조수석에 앉아 있는 방주헌을 보며 덧붙였다.“유 교수님께 전화 드려.”방주헌이 고개를 끄덕였다.병원에 도착했을 때, 유주만은 이미 기다리고 있었고 간단한 검사를 마친 뒤 말했다.“큰 문제는 없어요. 마취제를 좀 흡입해서 몸이 많이 피곤할 뿐입니다. 푹 쉬면 괜찮을 거예요. 그래도 불안하면 내일 종합검진 해보죠.”“감사합니다, 유 교수님.”육강민이 정중히 인사했다.유주만은 곧 자리를 떠났고 그를 배웅한 뒤, 육강민은 병상에 누워 있는 서은주를 바라봤다.얼굴은 창백했고, 입술에는 혈색이 없었다.“물 좀 마실래?”서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육강민은 미지근한 물을 따라놓고 서은주를 부축해 품에 안고 천천히 물을 먹였다.보호자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방주헌은 단체 채팅방에 문자를 연달아 올렸다.방주헌: [이것들아! 내가 제일 먼저 형수님을 봤다고! ㅋㅋ][근데 형수님한테 일이 좀 생겼어. 그래서 우리 냉혈한 육강민이 지금 완전 도우미 아줌마가 됐다니까. 마실 것을 따르고 먹여 주기까지 하면서 극진히 보살피고 계심.][이 눈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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