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번 생은 가족부터 다시 선택할 거야: Chapter 211 - Chapter 220

340 Chapters

제211화

입추가 되자, 당유화가 가을 복숭아를 선물하기 위해 직접 찾아왔다.당 부인은 강남 사람으로, 그곳에는 입추에 복숭아를 먹는 풍습이 있었다. 다 먹은 복숭아씨를 모아두었다가 섣달그믐에 태우면, 일 년 내내 병과 재난 없이 무사히 보낼 수 있다고 믿었다.“설아야, 널 위해 특별히 크고 붉은 복숭아로 골라 왔어. 이걸 먹으면 일 년 내내 아프지 않을 거야.”소설아는 사람을 시켜 복숭아를 가져가게 한 뒤, 그중 두 개를 씻어 먹기 좋게 썰어 오라고 일렀다.“이렇게 더운 날씨에 어찌 직접 왔어? 관사를 시켜 보내는 편이 수월했을 텐데.”당유화와 소명준은 이전에 정혼한 사이였다. 파혼한 마당에 더욱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은 피해야 했다.당유화는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그녀의 두 눈은 호기심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소설아의 귓가로 바짝 다가와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너희 위원후부에 큰일이 났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정말이야?”소설아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위원후부에 일어난 큰일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지. 그중 어떤 일이 궁금할까?”당유화는 찻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축였다.“세자 저하께서 후사를 볼 수 없게 되었다던데, 그게 사실이야?”“응, 사실이야.”소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전생에 당유화는 회임을 하기 위해 그 쓴 약을 수도 없이 들이켰다. 어의가 처방해 준 약부터 떠돌이 의원이 지어준 약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세 사발씩 마셔대는 바람에 얼굴이 누렇게 뜰 정도였다.어의의 처방이야 몸을 따뜻하게 보하고 기력을 다스리는 약재라 괜찮았지만, 떠돌이 의원들의 처방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했다. 무근수(無根水: 땅에 닿지 않은 빗물이나 눈), 두꺼비 껍질, 관음토(觀音土: 식용이 가능한 흙의 일종), 과부집 문 앞의 흙에 월경혈을 섞은 것 등등…처음에는 도저히 넘기지 못해 약만 보면 구역질을 해댔다. 허나 나중에는 펑펑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 끔찍한 약을 다 삼켰다.민씨는 겉으로는 자애로운 척하면서 뒤에서는 매일같이 당유화를 괴롭혔다
Read more

제212화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전생에 당유화가 아이를 낳지 못한 건 자신이 그녀를 오해한 탓이었다.전생의 당유화는 그를 죽을 만큼 사랑했으니, 이번 생에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싶었다.당씨 가문에서 보낸 두 명의 책사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소설아가 당유화를 데리고 꽃을 감상하고 있을 때, 어린 하녀가 와서 보고했다. “큰 아가씨, 세자 저하께서 오셨습니다.”소설아가 말했다. “손님이 있어 뵙기 불편하다고 전하거라.”하녀가 돌아갔다가 금방 다시 왔다. “세자 저하께서 당씨 가문 아가씨가 계신 것을 알고 계시고, 아가씨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소설아가 당유화를 힐끗 보며 말했다. “만나기 싫으면 내가 쫓아낼 방법이 있어.”당유화는 손사래를 쳤다. “만나고 싶어 하니 한 번 보지 뭐. 네가 있는데 설마 나를 해치기야 하겠어?”그녀는 아이도 못 낳는 남자가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무척 궁금했다.소설아는 세자를 서쪽 별채로 청해 향긋한 차를 내왔다. 소명준은 감히 앉지 못하고 계속 서 있었다.당유화가 말했다. “세자 저하, 용건이 있으시면 앉아서 말씀하시지요.”소명준은 엉덩이가 아파 앉을 수가 없었다. “서서 말하도록 하마.”당유화가 그를 흘겨보았다. '아이도 못 낳는 남자는 앉는 것도 싫어하는구나.'소명준 역시 당유화를 관찰하고 있었다.기억 속 웃음기 하나 없던 부인과 비교하면, 지금의 당유화는 무척 젊었고 얼굴에는 늘 웃음이 묻어났으며 발랄하고 생기가 넘쳤다. 전생처럼 매일 수심에 잠겨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모습과는 달랐다.전생보다 훨씬 아름다웠고, 훨씬 젊었다.전생에 그는 월 이낭 때문에 당유화를 몹시 꺼렸고, 서재에서 잠을 잘지언정 그녀의 처소에는 가려고 하지 않았다.그녀는 그와 첫날밤을 보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썼다. 그만큼 당유화는 비굴할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소명준은 마음속으로 꽤 자신감이 생겼다. “유화야, 우리 혼인 말인데…”당유화가 재빨리 그의 말을 끊었다.
Read more

제213화

귀의가 큰아버지 댁에 도착하자마자, 소명풍이 사람을 보내 전갈을 전해왔다.소설아가 서둘러 갔을 때, 소명풍과 소명남은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멀리서 소설아의 마차를 본 소명풍이 해맑게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햇살처럼 밝은 미소를 보니 보는 사람마저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그는 자신의 입을 가리키며 소리 없이 '아, 아' 거렸다.소설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명풍아, 어찌 아직도 말을 못 해? 며칠이나 지났는데?”그녀의 기억에 전생에서는 귀의에게 독을 당해 벙어리가 되어도 사흘이면 나았다.소명남이 설명했다. “원래는 말문이 트였는데, 귀의께서 오신 뒤에 셋째가 또 독을 당해 벙어리가 된 거란다.”소설아는 입을 가리고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무슨 말을 했길래?”소명풍은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절을 하는 시늉을 하더니, 두 손을 모으고 싹싹 빌었다.소설아가 물었다. “또 제자로 거두어 달라고 했어?”소명풍은 상대가 자신의 뜻을 알아채자 엄지를 치켜세우며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소명남이 고개를 저었다. “이 녀석이 참새마냥 귀의 곁을 졸졸 따라다니며 짹짹거렸단다. 귀의께서 뒷간에 가실 때도 문 앞을 지키며 휴지를 건넸지. 귀의께서 오신 지 한 시진도 채 안 되어 이 녀석을 벙어리로 만들어버리셨다. 그러고도 얌전히 있지 못하고 계속 귀의를 귀찮게 굴기에, 행여나 전신 마비 독이라도 당할까 봐 밖으로 데리고 나와 널 기다린 거란다.”소설아는 입을 가리고 가볍게 웃었다. 과연 명풍이는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소설아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하녀와 하인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이내 큰어머니가 종종걸음으로 나왔다. “설아야 왔느냐. 어서 방으로 들어가자구나. 오이냉국을 만들어 얼음을 띄워 두었으니 지금 먹기 딱 좋을 게다.”소명풍은 오이냉국이 있다는 말에 또 '아, 아, 아' 소리를 내며 자신의 입을 가리켰다.큰어머니가 그의 등을 찰싹 때렸다. “네 것도 있으니 어서 들어가거라. 우리 설아 덥겠다.”
Read more

제214화

소설아가 아직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모두가 무척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아야, 그렇게까지 설명할 필요 없단다. 우리는 널 믿어. 네 말대로 하마.”어떤 의심도, 의문도 없는 온전한 믿음이었다.소설아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소중히 여겨진다'는 말의 따뜻한 감정이 피어올랐다.‘가족에게 전적으로 신뢰받는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온 가족에게 굳건한 믿음을 받는 이 기분이 참으로 좋았다. 고생한 뒤에 그 노력을 알아주고 인정받는 다는 것은 더없이 뿌듯한 일이었다.큰어머니가 그녀를 대청 쪽으로 떠밀었다. “설아야, 어서 가서 앉아 쉬어라. 귀의께서 진맥하시는 데 얼마나 더 걸릴지도 모르잖니. 여긴 더우니 애들더러 지키라고 하면 된다.”소설아는 큰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대청으로 돌아갔다. 탁자 위에는 과일과 다과, 향긋한 차가 가득 차려져 있었다. 소설아가 온다는 소식에 큰어머니가 정성껏 맛있는 음식들을 잔뜩 준비해 둔 것이었다.이런 것들은 소설아가 평소에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지만, 이곳에서 그녀는 소중하고 귀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두 시진쯤 지났을까, 마침내 문이 열리고 귀의가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 나오며 처방전 한 장을 내밀었다.소설아는 그것을 받아 들고 곧바로 사람을 시켜 약을 지어 오게 했다.말을 할 수 없는 소명풍은 과장된 몸짓으로 귀의를 향해 손을 뻗어 안내하는 시늉을 했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귀의를 객실로 모셔 쉬게 하려는 것이었다.귀의는 그를 흘끗 보고는 거절하지 않았다.소명풍은 신난 망아지처럼 깡충깡충 뛰며 앞장섰다.소설아가 처방전을 살펴보았을 때, 과연 그 위에는 보기에도 독해 보이는 약재들이 잔뜩 적혀 있었다.큰어머니도 곁에서 처방전을 보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소설아가 물었다. “큰어머니, 혹 이 처방전이 문제라도 될까 걱정이신가요?”큰어머니는 잠시 놀란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우리 설아가 어렵게 모셔온 의원인데 문제 될 게 뭐 있겠니? 난 그저 여기 적힌 약재들을 약방에서 다
Read more

제215화

소설아는 예전에 ‘녹운’에서 돋아난 새순을 떼어 따로 옮겨 심었다. 정성껏 가꾼 끝에 그 새순에서도 마침내 꽃이 피어났다.이렇게 분촉해 키운 난초는 과거 귀의에게 선물했던 화분보다도 훨씬 뛰어난 품격을 자랑했다. 한 줄기에서 두 송이 꽃이 함께 피어나는 병체화(並蒂花: 한 줄기에 두 송이 꽃이 피는 것)인 데다 꽃잎이 무려 아홉 장이나 달려 있어, 난초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절품이라 할 만했다.귀의는 난초를 끔찍이 아끼니, 이 난초 화분이라면 틀림없이 그의 입을 열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큰어머니가 또 칭찬을 늘어놓았다. “우리 설아는 꽃도 참 잘 가꾸지. 손수 키워낸 꽃들이 하나같이 어찌나 눈부시게 아름다운지. 설아를 아내로 맞이하는 사내는 분명 전생에 큰 공을 세운 게 틀림없을 게야…”소설아는 칭찬에 머쓱해져 두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객실에서 소명풍은 열정적으로 귀의에게 차를 따르고 어깨를 주물렀다. 귀의도 그를 꾸짖지 않고 뒤를 졸졸 따라다니게 내버려 두었다.소설아가 난초를 안고 들어오는 것을 보자 귀의의 두 눈이 번쩍 빛났다. “이 꽃, 참으로 눈에 익구나.”소설아는 탁자 위에 꽃을 내려놓았다. “예전 그 녹운에서 가지를 친 것입니다. 마음에 드신다면 얼마든지 가져가십시오.”귀의는 받지 않고 담담히 쳐다보며 물었다. “또 치료할 사람이 있느냐?”“없습니다.”소설아가 소명풍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저 귀의께서 이 아이를 제자로 거두어 주셨으면 해서요.”소명풍은 눈을 반짝이더니, 그 자리에서 넙죽 무릎을 꿇고 이마가 땅에 닿도록 세 번 절을 하고는 소리 없는 입모양으로 외쳤다. “스승님, 제 절을 받으십시오!”귀의는 안색이 어두워지며 소리쳤다. “난 평생 제자를 거둔 적이 없다! 꽃은 도로 가져가라! 원칙에 관한 문제를 고작 난초 화분 하나로 깰 수 있을 것 같으냐!”그는 입으로는 꽃을 가져가라면서도 시선은 난초에서 한시도 떼지 못했다.전생에 겪어본 적이 있어 소설아는 귀의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빙그레
Read more

제216화

소명천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하마터면 침상에서 벌떡 뛰어오를 뻔했다.“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여봐라, 당장 나를 소명풍의 처소로 모셔라!”소명천은 소명주를 불러 함께 큰아버지의 저택 입구로 가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소설아! 당장 귀의를 모셔 와 내 병을 보게 해라! 귀의를 모셔다 소명풍의 저택에 숨겨놓은 꿍꿍이가 대체 무엇이냐? 내가 네게 빌기를 바라는 것이냐!”그가 하도 큰 소란을 피우자 소명남이 나와 호통을 쳤다.“소명천! 어찌 남의 집 앞에 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냐!”소명천은 오히려 당당하게 맞받아쳤다.“귀의를 찾으러 왔다!”소명남이 코웃음을 쳤다.“귀의께서는 지금 우리 아버지를 진맥하고 계신다.”소명천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뭐라고?! 귀의가 네 그 눈먼 애비의 병을 보고 있다고?”소명남은 주먹을 꽉 쥐었다.“소명천, 네놈이 정녕 예의라곤 밥 말아 먹은 게냐. 우리 아버지는 네가 큰아버지라 불러야 할 분이거늘! 당장 그 개 같은 주둥이를 다물거라. 한 번만 더 함부로 혓바닥을 놀렸다간, 몸이 성치 않은 놈이라도 가차 없이 두들겨 패 줄 터이니 그리 알거라!”자신이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소명천이 소리쳤다.“당장 소설아 그 년을 불러내라!”소명남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네놈은 설아를 대체 무어라 생각하기에 오라 가라 하명하는 것이냐?”“설아라니, 참으로 다정하기도 하군!”소명천은 소명남을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았다.그의 꿈속 기억에 소명남의 일가는 번듯한 옷 한 벌조차 없을 만큼 몰락했는데, 어찌 이리 으리으리한 저택에 살 수 있단 말인가.하인과 하녀를 부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걸친 옷 또한 고급 비단이었다.십중팔구 소설아가 저들에게 돈을 쥐여준 것이 틀림없었다!돈을 준 것도 모자라 귀의까지 모셔다 주다니!정작 자신들은 후부에서 옷을 아껴 입고 물에 데친 채소만 먹으며 근근이 버티고 있거늘, 소설아가 밖에서 소명남 일가가 금은보화를 누리며 호의호식하도록 돕고 있
Read more

제217화

소설아는 소명천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막 물로 씻어낸 듯 맑고 서늘했다.“둘째 도련님, 술이라도 드시고 오신 겁니까? 제 향료 가게는 도련님께서 그토록 아끼는 명주 때문에 완전히 거덜 났는데, 남을 도울 은자가 어디 남아 있겠습니까?”소명남은 소설아를 제 등 뒤로 감싸듯 세우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설아야, 저런 자와 말섞을 것 없다. 내가 당장 내쫓아 주마. 썩 꺼지지 못하겠느냐? 더 버티다간 험한 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소명천은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악을 썼다.“소명남! 내 다리만 멀쩡했다면 너 따위는 상대도 안 됐다! 정 자신 있으면 내 다리가 나은 뒤에 겨뤄 보자! 다친 사람을 몰아붙이는 게 사내다운 짓이냐?”소명천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자 저택 안은 순식간에 소란에 휩싸였다.소란을 듣고 나온 큰어머니는 그를 보더니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명천이 아니냐? 다 같은 식구끼리 좋게 말하면 될 일을, 어찌 이리 얼굴을 붉히고 그러느냐.”큰어머니의 성정이 여리다는 것을 아는 소명천은 곧장 태도를 누그러뜨렸다.“큰어머니, 제가 크게 다쳐 귀의의 진맥을 꼭 받아야 합니다. 부디 안으로 들어가 귀의를 뵐 수 있게만 해 주십시오.”큰어머니는 소설아를 힐끗 바라보며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곁에 있던 소명주도 재빨리 거들었다.“큰어머니, 저희는 모두 한 식구 아닙니까? 설마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도 외면하시려는 건 아니시겠지요?”소설아는 큰어머니를 더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조용히 입을 열었다.“좋습니다. 둘째 도련님을 귀의께 모셔 가세요. 다만 진맥을 봐주실지 말지는 귀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소명천은 얼굴에 기색이 돌며 서둘러 재촉했다.“어서! 어서 나를 안으로 들여보내라!”객실 안에서는 소명풍이 귀의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무공을 익힌 덕분인지 손놀림이 제법 능숙했고, 귀의 역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러다 들것에 실려 들어오는 소명천을 본 소명풍은 순간 손을 멈추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Read more

제218화

귀의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진료비를 낼 형편이 안 된다면 돌아가거라. 여기서 목청만 높인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소명풍은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제발 저놈을 벙어리로 만들어 주십시오. 영영 입을 열지 못하게요!’소명천은 씩씩거리며 소리를 질렀다.“소설아! 내 진료비를 내놔라! 그 돈만 내준다면 이번 일은 없던 것으로 해주마!”소설아는 그의 곁에 선 소명주를 힐끗 바라보더니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둘째 도련님, 향료 가게만 무너지지 않았더라도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드렸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가게까지 망해 버려 저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정작 향료 가게를 망쳐 도련님의 진맥 기회까지 날려버린 명주는 원망하지 않으시고, 어찌 저만 탓하십니까?”소명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 역시 소명주를 원망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다만 그의 눈에 소설아는 훨씬 만만한 상대였다. 궂은일을 시켜도 군말 없이 해냈고, 모진 말을 들어도 좀처럼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소설아에게만 제멋대로 굴며 온갖 짜증과 성질을 쏟아냈다.심지어는 자신이야말로 소설아를 가장 아끼는 오라비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소설아 또한 마땅히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희생해야 한다고 여겼다.“소설아! 차라리 귀의의 약동이 되거라! 귀의를 위해 약을 시험하는 사람이라도 되면 되지 않느냐!”소설아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온 마음을 다한 헌신은 고마움을 낳지 못했다. 돌아온 것은 업신여김과 모욕뿐이었다.소명천의 말이 점점 도를 넘자, 소명남이 침상 모서리를 움켜쥔 채 호통쳤다.“명색이 오라비라는 자가 어찌 그런 망측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느냐! 진료비가 없으면 당장 돌아가라!”소명천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소명남, 위선 떨지 마라. 네놈도 결국은 소설아 손에 들린 은자를 노리고…”하지만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순간 그의 목소리가 뚝 끊기더니, 아무리 입을 뻐끔거려도 한마디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평소 눈엣가시 같던 놈이 독에 당해 벙어리가 된 모습을 본 소명풍은
Read more

제219화

소명주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둘째 오라버니,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언니에게는 분명 돈이 있을 거라고요. 향료 가게 일도 틀림없이 저를 함정에 빠뜨리려 꾸민 짓일 거예요. 전에 사람을 붙여 미행까지 시키셨는데, 언니가 몰래 향료 가게를 운영한다는 건 끝내 알아내지 못하셨잖아요?”소명천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사람을 붙여 뒤를 캐 보긴 했지만, 소설아는 기껏해야 화초 가게를 오갈 뿐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향료 가게와 아무런 접점도 없어 보였다.그럼에도 그는 소설아가 향료 가게와 깊이 얽혀 있음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그렇지 않고서야 소명남과 소명풍, 그 두 사람을 먹여 살릴 만큼의 돈이 어디서 나왔겠는가.게다가 원래 자신에게 돌아왔어야 할 이 대유의 제자가 될 기회마저 소명리에게 넘겨주지 않았던가.생각해 보면 큰 형이 제자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부터 수상함을 눈치챘어야 했다.소명천은 이를 악물었다.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돈을 되찾아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억울함을 도저히 삼킬 수 없을 것만 같았다.소명주가 나지막이 말했다.“언니가 끝내 향료 가게를 내놓지 않겠다면, 차라리 아무도 갖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죠.”소명천은 고개를 들더니 종이 위에 커다란 물음표 하나를 그렸다.소명주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지난번에 언니가 영비 마마의 심기를 크게 거슬렀잖아요. 영비 마마의 손을 빌리면 될 거예요.”*큰어머니 댁에서 후부로 돌아온 소설아는 소명천이 곧장 위원후에게 달려가 고자질할 것이라 짐작했다.하지만 위원후는 생식 능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예전의 정력을 되찾겠다며 단약을 만드는 일에 깊이 빠져 다른 일에는 좀처럼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설령 그에게 일이 전해진다 해도 소설아에게는 충분히 대처할 자신이 있었다.그런데 의외로 소명주와 소명천은 쥐 죽은 듯 잠잠했다.후부로 돌아온 뒤에도 아무런 소동을 일으키지 않았고, 세자 소명준을 찾아가는 일조차 없었다.그만큼 뒤에서 더 큰 계략을 꾸미고 있다는 뜻이었다.
Read more

제220화

그가 진실을 알았다면, 가문에서 애지중지 키운 적장자가 밖에서 얼굴을 드러내며 장사판을 벌이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소설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서 각로께서 그토록 훌륭한 자제를 길러 놓았더니, 알고 보니 간사한 장사치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면 가슴을 치며 통탄하시겠네요.”서 각로는 불같은 성정으로 이름난 인물이었다. 소설아는 서경수가 밖에서 벌여 온 일들을 그가 알게 된다면 얼마나 노발대발할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서경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대꾸했다.“장사치라니요. 저는 몸소 백성들 속으로 뛰어들어 민생을 살핀 것이라 부르고 싶습니다.”그는 금살 부채를 펼쳐 ‘촥’ 소리를 내더니 느긋하게 부채질했다. 은은한 향이 바람을 타고 퍼졌다.“생김새는 참 얌전하신데, 말씀만큼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시는군요.”소설아는 옅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그보다 본론으로 돌아가지요. 대체 누가 저를 해치려 한다는 겁니까?”서경수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공왕 세자 저하의 영비 말입니다. 생김새는 평범하지만 총애가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대체 무슨 일로 그분의 심기를 건드리셨습니까?”소설아는 지난번 공왕 세자부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한 뒤 물었다.“영비 마마께서 저를 어떻게 해치려 하신다는 건가요?”“영비의 친정은 지방에 있고, 부친은 동지(同知: 중추부 종이품) 벼슬을 지내고 있습니다. 외가 쪽 사촌 오라버니는 오성병마사에서 관직을 맡고 있지요.”오성병마사는 도성의 순찰과 치안, 시장 관리를 담당하는 관청이었다.비록 높은 벼슬은 아니었지만 상점 단속에는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서경수는 목소리를 낮췄다.“듣자 하니 낭자의 향료 가게 몇 곳을 압류할 생각인 모양입니다. 상대는 영비이고, 낭자는 몰락한 후부의 수양딸일 뿐인데 어떻게 맞서실 생각입니까?”그의 손안에서 금살 부채가 천천히 돌았다. 부채가 얼굴 절반을 가린 사이, 드러난 얼굴에는 장난기와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저를 다정하게 오라버니라 한 번
Read more
PREV
1
...
2021222324
...
34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