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사랑에 빠지다의 모든 챕터: 챕터 71 - 챕터 80

86 챕터

EPISODE 71

“주소 불러 줘”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차 안의 정적을 깨웠다.유진은 아직 잠이 덜 깬 눈을 깜빡이며 간신히 입술을 뗐다.“유엔빌리지 3길 2번지…”목소리가 힘없이 기어들어갔다.대시보드에 붉게 찍힌 디지털시계의 숫자는 ‘4:45’를 가리키고 있었다.새벽 4시 45분.유진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분명 어제… 차에 탄 시간이 9시 15분이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정신없이잠 들수가 있지?]아무리 피로가 극에 달했다고 해도 타인의 집에서 무방비하게 일곱 시간 넘게 잠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밀려오는 수치심과 당혹감에 유진의 뺨이 화끈거렸다.유진이 눈동자를 굴리며 안절부절못하자,운전대를 잡은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미소를 지었다.“실험실에 그렇게 시간을 투자했는데… 피곤할 만하지. 걱정 마”그가 백미러로 유진의 눈치를 살피며 부드러운 저음으로 말을 이었다.“너 잠버릇은 얌전하더라. 물론 주사도 없었고. 둘 중 하나라도 있으면 길가에 버리고 가려고 했는데… 깨우기 아까울 정도로 너무 얌전히 잘 자서, 더 자라고 내가 내 집에 데려간 거니까. 자책할 필요는 없어”마치 유진의 속마음을 투시경으로 들여다보는 것처럼,그가 먼저 선수 쳐 자연스러운 변명을 내어주었다.유진은 그런 그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하게 불편했다.모두에게 숨기고 싶어 하는 자신의 가장 나약하고 아픈 부분,방어벽이 무너진 모습을 그에게 들키는 것이 싫었다.그의 앞에만 서면 자꾸만 예전의 겁 많고 한심했던 과거의 자신이 껍질을 깨고 튀어나오려고 요동쳤다.어색한 공기를 깨기 위해 유진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아무 말이나 쏟아냈다.“선배 집… 학교 바로 앞이네요”“응”“편하겠다”“뭐… 나쁘지 않아”“순라길에 한옥집이라… 좋겠어요”창피함을 견디기 위한 무의미한 대화였다.하지만 그는 귀찮은 내색 없이 묵묵히 받아주었다.“근데… 한옥인데… 지하층이 있나봐요”“응. 대지가 단차가 있어서…”“방이 몇 개에요?”“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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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72

정확히 20분이 지났다.저택의 거대한 대문이 열리며 유진이 걸어 나왔다.차에 올라타는 그녀의 숨결은 가빴고,방금 막 씻고 나온 향긋한 비누 잔향이 섞여 있었다.유진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품에 안고 있던 텀블러를 요스케에게 건넸다.건네는 텀블러 너머로 그녀의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미세한 떨림…하지만 운전대에 팔을 걸치고 있던 요스케의 예리한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요스케는 그녀가 건넨 텀블러를 받아들며 유진의 손목에 시선을 고정했다.옷소매 사이로 살짝 드러난 하얀 파스가 요스케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속에서부터 불쾌감과 걱정이 동시에 치밀었다.“혹시… 손목 많이 아픈 거야?”요스케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에 유진이 짐짓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네?”“오늘 일요일이라 외래는 안 할테니까… 응급실 잠깐 들리자. 진짜로 많이 다쳤으면… 그 병원장이라는 느끼한 새끼한테 치료비 받아야지. 아님 고소라도 하던가”요스케의 거친 말투에는 유진을 향한 보호본능이 뚝뚝 묻어났다.그의 은근한 다정함이 차 안의 공기를 뜨겁게 달궜다.유진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파스가 붙어 있는 자신의 손목을 가만히 돌려보았다.선호의 악력이 남긴 둔탁한 통증이 아직 뼈마디에 남아 있었다.하지만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었다.무엇보다 이 숨 막히는 상황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괜찮은 것 같아요. 응급실은 오바고… 진단도 안 나올 것 같기도 하고…살짝 삔 정도라…”“그래도 그 자식 고소하고 싶으면 해. 내가 증인 돼 줄 테니까”요스케의 시선이 유진의 가녀린 목덜미와 손목을 번갈아 머물렀다.당장이라도 그녀를 건드린 그 늙은 선배라는 놈의 얼굴을 짓밟아주고 싶었다.그리고 순간 올라오는 폭력적인 충동을 억누르는 듯 그의 손가락이 운전대를 거칠게 쥐었다.유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렇게 법석 떨어봐야 저도 얻는 거 없어요. 만약 얻는 게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때 거기서 고래 고래 소리를 질렀을 거에요”그는 다시 아무 말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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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73

“내가… 태어난 것처럼?”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유진의 날카로운 가시가 혜경의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꿰뚫은 듯…차 안에는 잔인한 정적이 흘렀다.혜경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냉정하게 바라보며,유진은 한 글자 한 글자 잔인하도록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걱정 마. 혹시라도… 사고가 난다고 해도 책임지지 못할 일은 만들지 않아.엄마 때문에 완벽한 선행학습을 해서… 나… 엄마처럼 되지 않아”유진은 휴대폰에 찍힌 사진 몇 장을 그녀에게 보여줬다.[응급사후피임약 처방전…]화면 가득 찍힌 선명한 글자에 혜경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위태롭고도 노골적인 현실이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유진은 조소 섞인 눈빛으로 휴대폰을 거두었다.“믿어줘. 나 오빠와 끝났어. 그러니까 나 풀어 줘”혜경은 떨리는 숨을 내쉬며 핸들을 잡은 손을 움켜쥐었다.딸의 손에 들린 처방전 사진은 혜경에게 충격이었다.하지만 동시에 묘한 해방감을 주는 열쇠였다.“서회장이랑 통화해 볼게”“회장님에게 말씀 드릴 만큼 큰 돈 원하는 게 아니야.그냥 작은 오피스텔 전세금이면 돼”혜경이 미간을 찌푸리며 유진을 돌아보았다.“왜? 기왕이면 보안 좋고 편한 곳에 있음 좋지?”“아니… 불편해. 회장님 돈 쓰는 거… 그리고 이미 서회장님에게는 받은 돈도 있어”“……”“그 돈이면 왠만한 강남에 40평 아파트 구하고도 남는 돈 주셨어. 근데 그 돈 쓰기 싫어서 엄마한테 부탁하는 거야”유진의 고집스러운 태도에 혜경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아니… 너 왜 이렇게 바보 같이 고집을 피워? 네 돈이야. 엘리치 네 거라고! 그리고 말했잖아. 아빠가 너 버린 거 아니라고!”유진이 혜경의 말을 날카롭게 잘라냈다.유진의 눈빛에는 서늘한 증오가 서려 있었다.“알아. 그래도 싫어. 서회장님이 엄마한테 한 짓… 나 용서 못해. 그리고 그 결과가 나라는 게 싫어”“널 어쩌면 좋니? 진짜 어떻게 해…”혜경은 결국 이마를 짚으며 신음을 내뱉었다.고슴도치처럼 온몸에 가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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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74

“의대생들이구나… 둘이 CC에요?”부동산 중개사 아주머니가 돋보기안경 너머로 두 사람을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훤칠한 키에 이국적이면서도 수려한 외모의 남자…언뜻 봐도 평범한 기류를 풍기지 않는 유진…두 사람에게 누구라도 시선이 머물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유진이 당황해 입을 열기도 전…요스케가 한 발 먼저 자연스럽게 치고 들어왔다.“네. 제가 내년부터 인턴이라서 결혼 하려고 요. 빨리 정착하면 아무래도 맘이 편할 것 같기도 하고…”요스케가 능청스럽게 말을 흘리며 유진의 어깨를 제 쪽으로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그의 넓은 단단한 온기가 유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순간 유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그의 손가락 끝이 얇은 옷가지 너머로 유진의 살결에 닿아 묘한 전율을 일으켰다.은근하고도 짜릿한 스킨십…순식간에 그녀의 체온을 덥혔다.“맞아. 연애만 하다 쫑나는 커플 많이 봤네. 이 사람이다 싶음… 재지 말고 빨리 하는 게 좋아요”“그쵸?”“거기다 아가씨가 진짜 너무 미인이네. 눈독 들이는 남자들 엄청 많을 것 같은데?”중개사의 유쾌한 호들갑에 요스케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러니까 좀 괜찮은 데로 알아봐 주세요”“예산이?”“아… 아무래도 인턴이라 월급이 많지 않아서… 자금이 넉넉하지는 않아요. 작지만 큰… 스튜디오로 부탁드릴 게요”그는 중개사에게 비타민 보조제 선물 상자를 슥하고 건넸다.“저희 병원에서도 이거 많이 먹거든요. 이거 드시고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유진은 예상도 못한 그의 영악하고도 능숙한 처세에 놀라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늘 실험실에서 무뚝뚝하게 연구에만 몰두하던 남자…그런 남자에게 이런 능구렁이 같은 면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아이 뭐… 이런 걸… 우리 잘 지내봐요. 의사 선생님들 되실 분들인데…내가 진짜 알짜만 보여줄게”선물에 흡족해진 중개사는 태도를 싹 바꾸더니 씩 웃었다.그리고 잘 풀지 않는 숨겨진 알짜 매물 여러 곳을 보여주었다.채광이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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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75

“걱정 마. 너한테 비싼 와인 얻어 먹겠다는 거 아니니까”당황한 유진의 표정을 읽었는지 요스케가 잡고 있던 손목을 슬며시 놓아주며 장난스레 웃었다.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아쉬울 정도로 서늘한 바람이 스쳤다.“몰랐으면 모를까… 네 사정 알았는데… 벗겨 먹을 수는 없지. 그래도 내가 선배인데…”그의 능청스러운 반농담에 유진을 짓누르고 있던 팽팽한 긴장감이 한풀 꺾였다.유진의 얼굴에도 아주 오랜만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번졌다.“그럼… 어디서 싼 와인을 먹을 수 있어요?”“여기!”고즈넉한 정취가 그대로 살아있는 순라길의 좁고 한적한 뒷골목.인적조차 드문 그곳에 기품이 느껴지는 나무 대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유진은 고개를 가볍게 갸웃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여기가… 어디에요?”“내 집… 기억 안 나?”그의 말에 유진의 눈이 커졌다.“아… 선배 집이 부동산 바로 앞이었네요”요스케는 유진의 어수룩한 모습이 귀엽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너… 운전 하면 안되겠다. 모든 다 잘하는 지 알았는데… 의외로 길치인데?”“아… 그건… 그때는 너무 당황해서…”유진은 말끝을 흐리며 황급히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실수로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신세 지게 됐던 그 밤의 부끄럽고 아슬아슬했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그의 침대에 누워 숨을 쉬고 그의 향기에 갇혀 있던 기억…순간 뺨이 붉게 상기됐다.유진의 수줍은 변화를 눈치챈 요스케의 눈빛이 깊어졌다.“들어가자”요스케가 묵직한 나무 뒷문을 밀어 열었다.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드러난 내부로 그가 먼저 들어갔다.유진이 그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들어갔다.문을 통과하자마자 햇살을 머금은 아담하고 정갈한 정원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대지의 단차를 이용해 지어진 구조.정원 앞으로 커다란 통유리로 된 지하층의 서재가 은밀하게 내려다보였다.“아… 이렇게 뒷골목으로도 연결 되는 구나”유진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두리번거리듯 그의 집을 구경했다.보면 볼수록 감탄이 절로 나오는 아름다운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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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76

처음 만났던 그 찬란하고 위태롭던 순간부터…선호는 마치 구원자이자 히어로처럼 다가왔었다.모든 것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유진에게…그는 유진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저돌적이고 적극적이었다.세상의 잔인한 풍파에 치여 겁을 잔뜩 먹은 그녀가 그 어떤 망설임이나 도망칠 틈을 찾지 못하도록…선호는 무자비하게 그녀를 자신의 영역으로 몰아붙였다.거칠고 사나운 폭풍 같은 소유욕이었다.결국 유진은 휩쓸리듯 그의 손아귀에 쥐어졌고 온전히 그의 것이 되었다.약탈하듯 쟁취해 낸 관계였다.그래서 선호의 사랑에는 그녀를 가만히 기다려주거나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봐 주는 '여유' 따위는 애초에 존재할 수 없었다.조금이라도 손귀를 늦추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은…지독한 결핍과 불안이 늘 그를 지배했다.그 불안이 마침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다가왔다.그리고 선호의 세계는 산산조각이 났다.“너… 남자 있어?”숨이 막힐 듯한 주방의 대치 속에서 선호가 뿜어내던 광기 어린 다그쳤다.“네”유진의 차갑고 단호한 표정.돌아온 유진의 표정은 잔인할 정도로 차갑고 단호했다.그 눈빛에는 선호를 향한 한 줌의 미련도 두려움도 남아있지 않았다.그 순간 선호는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유진이 자신을 떠나갔던 3년 전 그 지옥 같은 날…그는 이미 속에서부터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결국 그는 이성 잃은 포악한 괴물이 됐다.‘달칵, 쨍그랑…’정적과 아늑한 조명이 감돌던 정혁의 카페 바 문이 거칠게 열렸다.붉게 충혈된 눈과 잔뜩 흐트러진 옷차림…지독한 술 냄새를 풍기는 선호가 불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일요일 오후의 한산함을 즐기던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선호는 주위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곧장 바 테이블을 장악하고 있는 정혁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그리고 맹수처럼 다짜고짜 거친 목소리를 뱉어냈다.“유진이… 남자 누구야?”선호의 목소리에는 이성을 잃은 자의 서늘한 광기가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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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77

“유진… 어딨어요?”낮게 르릉거리는 짐승의 안개 같은 목소리가 저택의 넓은 거실을 갈라놓았다.소파에 앉아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혜경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고개를 들자 눈이 뒤집힌 채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다가오는 선호가 보였다.그의 전신에서 지독한 알코올 향과 정제되지 않은 광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나도 몰라. 그냥 독립하고 싶다며 나가 버렸어”혜경은 아무 것도 모르는 척 그에게 무심하게 대답했다.“근데 잘 있다고 연락 왔어. 난… 유진이 믿어”혜경의 가시 돋친 말에 선호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기괴한 실소를 흘렸다.선호는 거실 테이블을 부술 듯이 다가가 혜경을 위에서 아래로 서늘하게 내려다보았다.이제 그는 어떤 것도 안중에도 없다는 듯 서슴없이 자신의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드러내며 읊조렸다.“믿는다고요…? 당신이 걜 치우건 아닌가요? 예전처럼 당신 인생 방해하지 못하게…”선호의 거친 폭언이 거실의 높은 천장을 때렸다.혜경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눈앞의 선호는 이미 이성을 잃은 괴물과 다름없었다.더 밀리면 정말 무슨 사고라도 칠 것 같았다.혜경은 주먹을 꽉 쥐고 그에게 경고하듯 서늘하게 선을 그었다.“가족이라 걱정하는 건 이해해. 하지만 걘 내 딸이야. 그리고 네 아버지 수양딸이고… 우리는 부모로써 언제나 유진이 잘 지낼 수 있게 최선을 다 할 거야”“……”“그러니까 너까지 걔 걱정할 필요는 없어”가족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위선적인 경고를 남긴 채 혜경은 차갑게 돌아섰다.선호는 멀어지는 혜경의 등 뒤로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쾅…! 달칵’유진이 흔적을 지우고 사라져 버린 텅 빈 방.선호는 주인이 떠난 침대 위에 주저앉아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가고 있었다.방 안에는 여전히 유진이 쓰던 은은한 향기의 잔향이 남아 있어 그를 더 미치게 만들었다.3년 전 그녀를 잃었을 때보다 더 지독한 갈증과 패배감이 그의 전신을 헤집어 놓았다.선호는 손을 떨며 휴대폰을 쥐었다.액정에 뜨는 유진의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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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78

부동산에서 집을 보고 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유진은 그에게 어떤 업데이트도 주지 않았다.새로 구한 집이 어디인지,계약은 잘 진행되었는지,언제 짐을 옮기는지조차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하지만 요스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직감할 수 있었다.매일 새벽마다 실험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김없이 마주치던 유진…그녀의 가녀린 실루엣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그리고 이제는 아주 가끔씩만…늦은 밤에만 실험실에 남아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다가 서둘러 자리를 떴다.요스케는 알았다.그녀가 이미 자신만의 은신처로 이사를 끝마쳤다는 것을…그와 동시에 두 사람이 새벽이라는 은밀한 시간대를 공유하며 마주 할 특별한 이유도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렸다.그렇게 유진은 요스케의 세계에서 다시 한 발자국 더 멀리 달아났다.항상 이런 식이었다.요스케가 아주 조금 다가갔다고 생각하면,그녀는 어김없이 그 거리만큼,혹은 그보다 더 멀리 도망쳐 버렸다.달팽이가 단단한 껍데기 속으로 몸을 숨기듯 방어벽을 세웠다.그래서 그는 섣불리 그녀를 붙잡을 수도 없었다.여기서 더 강하게 붙잡는다면…그의 앞에서 그대로 도망쳐 영영 사라져 버릴 테니까…결국 다가서지도 물러서지도 못한 채…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금 묘하고도 서먹한 어색함이 감돌기 시작했다.그렇게 며칠이 지난 오후.실험실 파티션 너머로 유진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수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내뱉는 그녀의 어조는 온기를 전부 잃어버린 듯 너무도 차갑고 냉정했다.[또 무슨 일이지…?]파티션에 기댄 채 펜을 만지작거리던 요스케의 미간이 좁아졌다.이토록 어쩌다 우연히 건너 들리는 그녀의 서늘한 목소리 단 한 조각만으로도,유진은 그의 심장을 제멋대로 들었다 놓았다 했다.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온 신경이 곤두서는 스스로가 당혹스러울 정도였다.잠시 후 통화를 끝낸 유진이 무거운 한숨을 쉬며 실험실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가방 지퍼를 닫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유진이 파티션 너머의 요스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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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79

‘딸랑…’맑은 종소리와 함께 카페 바 안으로 유진이 들어왔다.뒤이어 훤칠한 체구의 요스케가 부드러운 공기를 몰고 따라 들어왔다.그 순간 바 안쪽에서 에스프레소 머신을 마주하고 있던 정혁의 시선이 어색하게 흔들렸다.정혁의 커진 눈동자가 유진을 거쳐 이내 자신의 바로 앞 바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한 남자에게로 향했다.선호였다.그의 뒷모습을 확인한 유진의 얼굴에서 조금 전까지 머물던 부드러운 미소가 단숨에 증발해 버렸다.온몸의 세포가 차갑게 굳어가는 기분이었다.반면에 유진과 시선이 마주친 선호의 얼굴은 가식적일 정도로 환하게 피어올랐다.갈구하던 구원자를 마주한 중독자의 얼굴이었다.하지만 그 환희는 오래가지 못했다.유진의 뒤편… 그녀를 호위하듯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오는 요스케를 발견한 순간,선호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거칠고 서늘하게 일그러졌다.이성을 잃은 괴물의 눈빛이 요스케를 향해 칼날처럼 꽂혔다.유진은 요동치는 심장을 감추며 아무렇지 않은 척 찰나의 순간에 표정을 바꾸었다.그리고 선호를 철저히 유령 취급하며 무시했다.그리고 그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진 테이블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요스케 역시 기묘한 기류를 감지했다.하지만 묵묵히 유진의 맞은편에 동행했다.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정혁이 급하게 바 안쪽에서 뛰쳐나왔다.정혁은 선호의 억센 팔을 잡아채고 강한 힘으로 그를 가게 밖 뒷골목으로 끌어냈다.“너… 오늘은 그만 가!”정혁이 낮게 으르렁거리자 선호가 그의 손을 뿌리치며 핏발 선 눈으로 다그쳤다.“저 새끼야? 유진이 만나는 남자?”정혁은 잠시 선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응”이대로 유진에게 보내봤자 또다시 거친 손길로 그녀를 상처 입힐 게 뻔했다.정혁은 유진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단호하게 뱉었다.“그러니까… 이제 너도 그만 해. 너 자꾸 이러면… 유진만 다쳐”선호는 정혁의 조언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그리고 자신을 붙잡는 그의 어깨를 거칠게 밀쳤다.순간 유진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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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80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 가세요”요스케가 유진을 새로 이사한 오피스텔 건물 앞에 안전하게 내려주었다.차 안에서 나누었던 묘한 고백의 잔상이 공기 중에 여전히 아련하게 맴돌고 있었다.유진은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그와 헤어져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그리고 오피스텔의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딩동!’9층.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강철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유진은 피로가 몰려오는 눈을 깜빡이며 복도로 발을 내디뎠다.순간 유진의 걸음이 그대로 얼어붙었다.자신의 오피스텔 현관문 바로 앞에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린 채 서 있는 한 남자와 정확하게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선호… 그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여기… 어떻게 알았어요?”“내가 맘만 먹으면… 이 정도도 못 찾을 거라고 생각했니?”유진의 떨리는 질문에 벽에 기대어 있던 선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붉게 충혈된 눈동자… 엉망으로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독기와 슬픔이 번갈아 스쳤다.그는 이미 술에 찌들어 있었다.선호가 비틀거리며 한 걸음 다가와 비늘 같은 실소를 흘렸다.“취했어요. 그만 가세요”유진이 가방끈을 꽉 쥐며 차갑게 쏘아붙였다.하지만 선호는 그녀의 모멸찬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그리고 오직 하나의 의문만을 갈구하듯 유진의 턱 끝을 잡아 올렸다.“너… 그 남자 사랑해?”그의 한심하고도 유치한 질문에 유진은 말문이 막혔다.이런 질투를 부리는 그의 모습마저 그저 끔찍했다.유진은 그를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그를 무시했다.“오빠가 상관할 일 아니에요”순간 선호의 내면에서 무언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유진의 철저한 거부와 타인을 대하는 듯한 그 잔인한 태도…분노를 참지 못한 그가 철제 문을 향해 주먹을 거칠게 내리쳤다.‘쾅……!’고요하던 복도 전체가 울릴 정도로 거대하고 날카로운 충격음이 폭발했다.문이 찌그러질 듯한 소리에 유진은 소스라치게 놀라 숨을 들이켰다.잠시 후 9층 복도에 늘어선 이웃들의 도어록 해제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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