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os los capítulos de 블랙 황궁을 퇴사하려다 미친 황제와 엮여버렸다.: Capítulo 11 - Capítulo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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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어서 와, 빙결 결계는 처음이지?

​​루체른 공작저의 밤은 고요했다.하지만 그것은 평화가 아닌 거대한 폭풍을 앞둔 죽은 듯한 침묵이었다.​나는 방 안 침대에 주저앉아 주머니 속에서 꺼낸 은 원통을 만지작거렸다.아까 상점가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가시 왕관 문양은 내가 주머니 속으로 쑤셔 넣자마자 신기하게도 다시 사라져 있었다.하지만 내 이능력에 반응하며 미세하게 진동하던 그 서늘한 감각만은 아직도 선명했다.​‘카시안이… 반란이라니….’​오빠를 향한 배신감보다 더 무서운 건 너무나도 낯선 그의 모습이었다.‘모가지를 비틀어서라도 가져와’라고 서슬 퍼렇게 소리치던 걸 보면 이 물건이 정말 중요하긴 한 모양인데,만에 하나 이게 내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어쩌면 나 역시 그에게 ‘모가지가 비틀릴 대상’이 되지는 않을까?​하아, 카시안.아쉬울 것 하나 없는 공작가 차남이 도대체 왜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는 건데!심지어 비밀 자금과 장부까지 만들고 있다고 내 앞에서 실토(물론 오빠는 비자금이라고 했지만)하다니,이건 빼도 박도 못할 진. 실. 아닌가.복잡한 머리를 감싸고 있을 때였다.​바스락.​창문 너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주 미세하지만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마른 나뭇잎을 짓밟는 소리도, 밤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도 아니었다.그것은 마치… 굶주린 짐승의 숨소리처럼 낮고 거칠었다.​쾅—!!​귀를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내 방 발코니 쪽에서 푸른 섬광이 번쩍이며 터져 올랐다.​“꺄아악!”​나는 너무 놀라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며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베개 밑에 숨겨둔 호신용 단검을 꽉 쥔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카시안, 이 개구리 뒷다리 같은 놈이 기어코 날 입막음을 하려고 사람을 보냈구나!’​눈앞이 아찔해졌다.오빠가 보낸 암살자라니 이 무슨 막장 로판 같은 전개란 말인가.아니, 아무리 비밀 자금을 들켰어도 그렇지, 응?어떻게 하나뿐인 귀여운 막내 여동생을 죽이려 들어?나쁜 놈아! 가문의 수치! 인간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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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황실을 사칭한 자들

오빠는 열린 발코니 너머로 꽁꽁 얼어붙은 괴한들을 힐끗 보더니,이내 무서운 살기를 거두고 내게 다가왔다.​"놀랐지. 걱정 마라, 버러지들이 결계에 걸려든 것뿐이니까."​오빠는 사색이 된 나를 잠시 꼭 안아주었다.내 몸의 떨림이 멈춘 걸 확인한 후 조심히 안아 침대에 눕히고는 이불을 목 끝까지 꼼꼼하게 덮어주었다.​“오빠가 옆에 있으니 안심하고 자거라. 내일 아침이면 흔적도 없이 다 치워져 있을 거다.”​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첫째 오빠의 다정한 목소리와 내 머리를 쓰다듬는 커다란 손길이 좋았다.다만, 나는 차마 ‘저기, 오빠! 저놈들 사실 황실 암살자들인데,아무래도 나를 잡으러 온 것 같아요!’라는 진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아주 조그맣고 얌전한 막둥이가 되어 눈을 살포시 감아야 했다.​칼라일 오빠는 내가 잠들 때까지 침대 곁을 지키다,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릴 때쯤에야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번쩍 눈을 떴다.​‘자겠냐고! 이 상황에 잠이 오겠냐고!’​이불을 뻥 차고 일어나 발코니 쪽을 힐끗 보았다.이미 밖에서는 칼라일 오빠의 차가운 지시가 들려오고 있었다.​“……한 놈도 남기지 말고 지하 감옥으로 압송해라.루체른의 결계를 넘본 버러지들이 누군지 영혼까지 털어서라도 알아내.”​오빠의 목소리는 방금 전 나를 달래던 것과는 180도 달랐다.뼛속까지 시린 냉기가 문틈을 타고 넘어오는 것 같았다.나는 매트리스 속에 쑤셔 넣은 은 원통을 더듬거렸다.별 탈은 없는 것 같았다.​‘황실 기사단이 직접 움직였다는 건, 황제가 내 정체를 확실히 알았다는 뜻이겠지? 아니면 이 원통을 노리는 건가?’​평생을 로판 여주처럼 꽃길만 걷고 싶었는데,내 인생 장르는 왜 자꾸 ‘본격 가문 멸망 방지 첩보물’로 흘러가는 걸까.​​​**​​​막내의 방 앞을 정예 기사들에게 맡기고 집무실로 돌아온 칼라일의 표정은 혹한의 겨울 그 자체였다.책상 위에는 기사들이 얼어붙은 괴한들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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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오해의 오해의 오해

다음 날 아침,밤새 한숨도 못 잔 나는 퀭한 눈으로 식당에 들어섰다. ​식탁의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상석에는 신문을 든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큰오빠 칼라일이 앉아 있었고,맞은편에는 애꿎은 샐러드만 포크로 푹푹 찌르며 나를 살피는 작은오빠 카시안이 있었다.​어젯밤 내 방 발코니 쪽에서 결계가 터지는 요란한 소리가 났으니,카시안 역시 뜬눈으로 밤을 새운 게 분명했다. ​평소의 능글맞은 장난기는 싹 지워진 채,그의 눈동자에는 '도대체 막내 방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어디 다치진 않았나?' 하는 순수한 오라비로서의 걱정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하아… 핏줄이 좋긴 좋네. 나쁜 놈이긴 해도 저렇게 날 걱정해 주고.’​마음 한구석이 가시로 찔린 듯 쿡쿡 아려왔다.오빠가 저토록 애타게 나를 걱정해주고 있는데 그 물건이 바로 내 침대 매트리스 밑에 있다는 걸 알면 오빠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만약 정말로 저 물건이 반역의 결정적 증거라면,나는 오빠의 손에 죽게 될까?아니면 오빠를 내 손으로 고발해야 할까?​하지만 카시안의 속내는 내가 짐작하는 ‘반역’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타들어 가고 있었다.​‘제길, 내가 비자금을 끌어모아 금기된 아티팩트를 제작하고 있다는 걸 황실에서 알아차린 건가?’​카시안은 떨리는 손을 식탁 밑으로 숨기며 입술을 거칠게 깨물었다.​14년 전,제국 최강의 검사였던 아버지와 여신 루세티아의 가호를 받았던 강인한 어머니가고작 ‘마차 사고’ 따위로 허망하게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그는 단 한순간도 믿은 적이 없었다.​당시 일곱 살이었던 카시안은 기억하고 있었다.​사고 직후 우리 남매를 감싸 안았던 그 기묘하고도 서늘한 안개를.그날 이후 우리 셋의 기억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날의 진실만을 교묘하게 비워둔 채 조작되어 있었다.​카시안이 위험을 무릅쓰고 거액의 비자금을 암시장에 쏟아부으며 ‘기억 복원 아티팩트’를 제작하려 한 것은,오직 14년 전 그날 잃어버린 잔혹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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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사과라는 이름의 소환장

“아니, 오빠! 어제 그놈들 옷깃에 황실 문장이 있지 않았어요? 황실이 우릴 노린 거였잖아!”​내 물음에 칼라일 오빠가 차가운 눈빛으로 대답했다.​“옷깃에 뻔뻔하게도 황실의 태양 문장을 수놓았더군. 하지만 확인해 보니 조잡하게 꾸며낸 모조품이었다.누군가 황실을 사칭해 우리 루체른을 노린 거야. 가장 연약한 너를 인질로 삼으려는 비열한 수작이겠지.” “……네? 사칭이요?!”​카시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그 얼빠진 얼굴을 보니 ‘카시안이 보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갔다.하지만 나는 곧 더 큰 충격에 빠졌다.​‘카시안 오빠도 아니고, 황제가 보낸 것도 아니라고? 그럼 대체 누구지?상점가의 그 소년인가? 아니면 이 은 원통을 노리는 제3의 세력이 또 있다는 건가?!’​황제가 보낸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할 틈도 없었다.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흑막이 내 목숨을 정조준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 끔찍한 공포가 밀려왔다.​“누군진 몰라도 선을 넘었어. 오늘부로 저택의 결계를 세 배로 올리고, 호위 기사들을 전부 정예로 교체한다.카엘루스 폐하께도 이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그 ‘고드름 쥐새끼들’을 황궁으로 보냈다.”​우리 가족의 환장할 동상이몽 조찬 모임은 그렇게 각자의 지독한 두통을 안은 채 흘러갔다.제국 전체를 뒤흔들 거대한 폭풍이 루체른의 고요한 식탁 위로 서서히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그 시각, 황제의 집무실]​“……그래서. 루체른 공작이 이것들을 친히 내게 보냈다는 건가?”​나른하게 옥좌에 기대앉은 카엘루스의 붉은 눈동자가 바닥을 향했다.최고급 대리석 위에는 꽁꽁 얼어붙어 해동(?) 중인 사내 셋이 널브러져 있었다.​근위대장 엘릭이 긴장한 목소리로 보고를 올렸다.​“예, 폐하. 누군가 황실을 사칭하여 루체른 공작저, 그것도 막내 영애의 침소를 노렸다고 합니다. 폐하의 이름을 도용한 겁도 없는 쥐새끼들이니 황실 차원에서 엄중히 조사해 달라는 공작의 전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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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황궁으로 가는 길

​​"뭐가 와? 황실 마차가 우리 집 앞마당을 밟았다고?"​정적을 깬 칼라일 오빠의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다.파란 하늘을 보며 현실을 부정하던 내 손에서 편지를 낚아챈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혹한의 겨울처럼 얼어붙었다.​"이 미친 새끼가 누구한테 황명 따위를 지껄이는가.간밤에 가짜 그림자 놈들 때문에 내 동생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누누이 언급했거늘,사과는커녕 대놓고 황궁으로 불러들여?루체른을 무슨 제 발 밑 돌멩이 정도로 여기는 모양이지?"​칼라일은 옆구리에 차고 있던 제국 제일의 명검인 ‘리베르’의 검자루를 꽉 쥐었다.검집에서 새어 나온 푸른 검기가 바닥의 잔디를 하얗게 얼려버릴 듯 번뜩였다.​"오라버니, 설마…… 지금 그 검을 뽑으시려는 건 아니죠?" "마차 바퀴를 정확히 반 토막 내고,헛소리를 입에 담은 본보기로 같이 온 기사의 목을 쳐서 황궁으로 돌려보내 주마.엘리노아, 루체른은 오란다고 오고 가란다고 가는 가문이 아니다.황제가 망령이 든 게 아니라면 오늘 똑똑히 알게 되겠지." "안 돼요! 제발 참으세요, 오빠!"​나는 사색이 되어 칼라일의 소매 끝을 붙잡았다.저 남자는 빈말을 하는 법이 없다.정말로 황실 근위대를 썰어버리고 제국 전체를 얼음 벌판으로 만들 인간이다.​황제가 어젯밤 일을 빌미로 내가 그날 담을 넘던 시종인지 확인하려 든다는 사실까지 안다면,큰오빠는 아마 정말로 전쟁이라도 일으킬지도 모른다.두 오빠가 쌍으로 정말…!​"오빠, 제발 진정해! 이건 황명이야. 여기서 오빠가 칼을 휘두르면 우리 가문 전체가 반역으로 몰린다고!""막내야, 두려워하지 마라. 오라비가 널 지켜줄 테니!"​그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작은오빠 카시안이 평소의 능글맞은 미소를 싹 지운 채 내 옆에 섰다.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엔 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형님, 고정하십시오! 황실 마차에 손을 대는 순간 제 비밀…… 아니, 가문의 존립이 위태로워집니다.흑,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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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잊힌 신의 기록자와 조각난 빛

[같은 시각, 수도 외곽 지하 신전]​“……루체른의 결계에 막혀 모두 얼어붙었다라.” ​​붉은 휘장 너머,어둠의 옥좌에 비스듬히 앉은 자하크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실패를 보고하는 부하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지만,자하크의 뱀 같은 은빛 눈동자에는 분노 대신 기묘한 흥미가 번져 있었다. ​​“제국의 사냥개, 칼라일 루체른의 솜씨겠지. 여전히 성가신 놈이야.” ​​자하크가 길고 창백한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제단 위로 서늘한 푸른 불꽃이 일렁이며 타올랐다.불꽃 속에는 그가 심어둔 까마귀의 시야가 투영되고 있었다.화면 속에는 루체른 공작저를 떠나 황궁으로 서서히 멀어져 가는 황실 마차의 잔상이 맺혔다. ​​“루세티아의 파편이 담긴 성유물이 분명 저 영애의 품에 있을 거다.” ​​자하크의 핏기 없는 입꼬리가 섬뜩하게 비틀렸다.그가 갈구하는 것은 단순한 힘이 아니었다.​“성유물을 타락시켜 주술을 완성하기만 하면, 심연에 잠든 고대의 마신을 현세에 불러낼 수 있지.그리고 그 마신의 거대한 마력을 제물 삼아…마침내 내가 그토록 갈구하던 루세티아의 영혼을 다시 이 땅으로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자하크의 눈에 광기 어린 열망이 스쳤다.​수백 년 전 사라진 여신을 다시 현세로 끌어내리기 위해, 그는 가장 고결한 성물을 가장 추악한 어둠으로 물들일 계획이었다.​“가만히 있던 카엘루스 황제가 직접 판을 흔들기 시작했다라…….”​자하크는 턱을 괴며 흥미롭다는 듯 낮게 웃었다.​황제가 루체른의 영애를 어떻게 찾아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중요한 것은 제국에서 가장 뒤틀린 기운을 지닌 황제가 성물 곁에 머물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과거에도 그랬지. 한없이 고결했던 너는 고작 초라한 저 적안의 인간 따위 때문에 비참하게 소멸해 버렸어. ”​자하크의 눈에 서늘한 조소가 맺혔다.수백 년 전,여신이 한낱 인간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었던 그 멍청한 역사를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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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루체른 공녀가 지나간 자리

황실 마차의 육중한 문이 열리고, 눈이 시리도록 화려한 대리석 바닥 위에 발을 내디뎠다.​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숨 가쁘게 담을 넘고 달렸는데. 오늘은 정문으로, 그것도 황제가 보낸 마차를 타고 당당히 걸어 들어오다니. 인생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공녀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마차 앞에서 나를 맞이한 건 제국 기사단장, 엘릭 경이었다.​그는 우리 큰오빠 칼라일과 어린 시절부터 크고 작은 전쟁에서 생사를 함께한 절친한 친구이자, 제국에서 손꼽히는 강자 중 하나였다.​“엘릭 경, 오랜만에 뵙네요. 큰 오라버니가 안부를 전해달라더군요. (얼음 칼로 황궁을 초토화시키기 전에 얼른 동생을 돌려보내라는 무언의 압박과 함께요.)”​내 말에 엘릭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하하, 칼라일답군요. 그 무시무시한 인사는 여전한가 봅니다.”​엘릭은 예우를 갖추며 나를 안내했다. 하지만 기사들 사이를 가로질러 가던 내 눈에 기묘한 광경이 포착되었다. 엘릭의 어깨 부근, 그리고 뒤를 따르는 기사들의 그림자 끝에 아주 미세하고 끈적거리는 검은 실 같은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저게 뭐야? 불쾌하게.’​직감적으로 그것이 몸과 정신을 갉아먹는 불순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엘릭과 스쳐 지나가는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손끝에 힘을 주어 루세티아의 빛을 미세하게 튕겨냈다.​휘익—​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찰나의 순간이었다. 내 손끝에서 피어난 투명한 빛이 기사들의 어깨에 들러붙어 있던 검은 기운을 순식간에 태워버렸다.​“……!”​순간, 엘릭 경이 주춤하며 발걸음을 멈췄다. 수 주 동안 그를 괴롭히던 원인 모를 어깨의 결림과 피로가 마법처럼 씻겨 나간 탓이었다.​“왜 그러세요, 엘릭 경?”​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맑은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봤다. 엘릭은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의 어깨를 매만져보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서둘러 나를 안내했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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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폭군의 흥미를 끌어버렸다

“폐하, 제국이 안정을 되찾았으니 이제 황실의 후계를 논하셔야 합니다. 부디 명망 높은 가문의 영애들을 황후와 황비로 들이심이…….”​정무 회의실의 육중한 문이 거칠게 열리며 카엘루스가 걸어 나왔다. 뒤를 따르는 귀족들의 끈질긴 목소리가 복도의 정적을 어지럽혔다.​불과 몇 년 전, 형제들을 모조리 베어 넘기고 피칠갑이 된 채 왕좌에 올랐던 그를 보며 숨조차 쉬지 못하던 자들이었다.​제국에 평화가 깃들고 피 냄새가 옅어지자 이제는 하나둘씩 제 딸들을 밀어 넣어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속셈이다.​카엘루스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피처럼 붉은 적안에 서늘한 안광이 서리자 복도에 끔찍한 냉기가 서렸다.​“황후라. 짐의 곁이 그리도 탐 나는가?”​나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귀족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카엘루스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좋다. 경들의 자제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차출하여 남부 경계지로 보내도록. 시종 하나 없이 말이다. 마물이 들끓는 그곳에서 최소 반년 이상 제 힘으로 살아 돌아온다면, 그때 황후 후보로 고려해 보지.”“폐, 폐하! 금지옥엽 키운 영애들에게 마물 사냥이라니요!”“짐의 반려라면 제국을 위협하는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싫다면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후계 따위를 입에 담지 마라. 그 혓바닥을 뽑아버리기 전에.”​질린 표정의 귀족들을 뒤로한 채, 카엘루스는 거침없이 복도를 가로질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그때, 복도 끝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단장 엘릭이 다가와 정중히 예를 갖췄다.​“괜찮으십니까, 폐하.”“지긋지긋한 놈들. 이러면 무서워서라도 당분간은 조용하겠지. 그래, 루체른 공녀는 어디 있지? 잘 도착했나?”“태양궁 응접실로 안내했습니다. 그런데 폐하…….”​엘릭은 잠시 망설이다 엘리노아를 안내하는 동안 겪었던 기이한 현상에 대해 언급했다.​얼마 전 다녀온 남부 마물 사냥 이후 지독한 악취와 검은 살기에 찌들어 천근만근 같았던 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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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황궁 벽에 걸린 거미줄

​​벽면의 기하학적인 거미줄 문양과 그 마디마다 박힌 흑색 점들이 내 시야 안에서 기분 나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이건 단순히 누군가를 향한 저주 따위가 아니야. 황궁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거대한 거미집이지.'​나는 무의식적으로 다시 한번 벽면에 손을 뻗었다. 내 안의 권능이 이 기묘한 어둠을 태워버리라고 속삭이는 듯했다.​손끝에 서린 투명한 빛의 입자가 검은 마력과 부딪혀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기 직전이었다.​"어머, 루체른 영애께서는 황궁 벽지가 신기하셨나 보군요? 영지에서만 지내시느라 이런 화려한 장식은 처음 보시는 모양이죠?"​날카롭고 고압적인 목소리가 응접실의 정적을 찢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거두며 뒤를 돌아보자,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빨간 머리카락의 아가씨와 그 옆에 엄격한 표정의 시녀장이 함께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누구?"​기운을 탐색하느라 정신이 팔려 불청객이 들이닥치는 것조차 몰랐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허! 저는 벨루아 공작가의 적녀, 이자벨라 벨루아예요. 같은 공작가 사정도 제대로 모를 만큼 사교계에 문외한이었나요?”​내 물음이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이자벨라는 부채를 신경질적으로 탁-! 접으며 말을 이었다.​“어린애도 아니고, 영애는 수치를 모르나요? 이곳이 황궁인 줄도 모르고 혼자 있다고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다니…… 쯧. 아무래도 루체른에서는 궁중 예법조차 가르치지 않은 모양이군요?" ‘예법 선생들이 들으면 기함할 일이겠군.’​내게 큰 타격을 줬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비릿하게 웃으며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이런 말 따위, 솜털로 두들겨 맞는 것보다 간지러웠으나 이자벨라가 알 길은 없었다.​하지만 그녀가 한 발짝 내게 다가오는 순간 나는 보았다. 그녀의 그림자 끝에서 조금 전 엘릭에게서 봤던 그 기분 나쁜 검은 실이 일렁이며 벽면의 거미줄과 서서히 공명하기 시작하는 것을 말이다.​"실례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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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사냥꾼의 손바닥 위에서

카엘루스는 먹잇감을 몰아넣는 맹수처럼 천천히 다가와 내 앞에 멈춰 섰다. 그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이자벨라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오직 나만을 뚫어질 듯 응시했다. 마치 내 영혼 밑바닥까지 샅샅이 훑어내려는 듯한 시선이었다.​"루체른 영애. 응접실에서 무얼 하고 있었지? 낯익은 곳이라 반갑기라도 했던 건가?"​쿵—.​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한 발짝 더 다가와 내 귓가에 닿을 듯 말 듯 아주 낮게 속삭였다.​"아니면…… 이번에는 바닥 말고 벽을 닦으려고 왔나? 엘리안.”​카엘루스는 해사한 얼굴로 씨익 웃었다. 그 눈부신 미소가 내게는 사형 선고보다 더 잔인하게 다가왔다.​아아, 루세티아 여신님이 날 향해 시원하게 욕을 한 사발 퍼부으신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끔찍한 순간이 현실일 리 없으니까.​평생 꽃길만 걷고 싶었던 내 로판 여주 라이프가 오늘 이 응접실에서 '반역자' 혹은 '사칭범'으로 화려하게 마감될 위기에 처했다. 망했다.​​​**​​​“……누구요? 엘, 뭐요?”​내 입술은 사시나무 떨듯 잘게 떨리고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맑고 무해한 빛을 내뿜으며 고정시켰다.​지금 이 순간, 나는 루체른 공작가의 귀하게 자란 막내딸일 뿐이다. 한 달간 황궁 구석구석을 닦으며 강제 노동 수용소 생활을 해내던 시종 ‘엘리안’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다. 암, 그렇고말고.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고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폐하, 방금 뭐라고 하셨는지……? 엘리안이라니요? 아무리 제가 사교 활동을 하지 않는다 하여도… 호호, 제 이름은 엘리노아 루체른이랍니다. 엘. 리. 노. 아.”​최대한 무고한 표정을 지으며 나는 한술 더 떴다.​“혹여…… 폐하께서 애지중지 아끼시던 강아지 이름인지요?” “강. 아. 지.?”​순간 카엘루스의 눈썹이 위태롭게 꿈틀거렸다. 그는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와, 손에 쥔 아티팩트 조각을 내 코앞에서 느릿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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