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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면의 기하학적인 거미줄 문양과 그 마디마다 박힌 흑색 점들이 내 시야 안에서 기분 나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건 단순히 누군가를 향한 저주 따위가 아니야. 황궁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거대한 거미집이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다시 한번 벽면에 손을 뻗었다. 내 안의 권능이 이 기묘한 어둠을 태워버리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손끝에 서린 투명한 빛의 입자가 검은 마력과 부딪혀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기 직전이었다. "어머, 루체른 영애께서는 황궁 벽지가 신기하셨나 보군요? 영지에서만 지내시느라 이런 화려한 장식은 처음 보시는 모양이죠?" 날카롭고 고압적인 목소리가 응접실의 정적을 찢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거두며 뒤를 돌아보자,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빨간 머리카락의 아가씨와 그 옆에 엄격한 표정의 시녀장이 함께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 누구?" 기운을 탐색하느라 정신이 팔려 불청객이 들이닥치는 것조차 몰랐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허! 저는 벨루아 공작가의 적녀, 이자벨라 벨루아예요. 같은 공작가 사정도 제대로 모를 만큼 사교계에 문외한이었나요?” 내 물음이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이자벨라는 부채를 신경질적으로 탁-! 접으며 말을 이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영애는 수치를 모르나요? 이곳이 황궁인 줄도 모르고 혼자 있다고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다니…… 쯧. 아무래도 루체른에서는 궁중 예법조차 가르치지 않은 모양이군요?" ‘예법 선생들이 들으면 기함할 일이겠군.’ 내게 큰 타격을 줬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비릿하게 웃으며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이런 말 따위, 솜털로 두들겨 맞는 것보다 간지러웠으나 이자벨라가 알 길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한 발짝 내게 다가오는 순간 나는 보았다. 그녀의 그림자 끝에서 조금 전 엘릭에게서 봤던 그 기분 나쁜 검은 실이 일렁이며 벽면의 거미줄과 서서히 공명하기 시작하는 것을 말이다. "실례했군요. 무늬가 특이해서 잠시 넋을 잃었습니다." 내가 차분하게 대꾸하자, 이자벨라는 내 여유로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한 발짝 더 다가와 내 어깨를 툭 밀쳤다. "특이해서? 흥, 시골집에만 계셔서 이런 장식이 익숙지 않으신가 보죠? 아니… 그런데 영애. 갑자기 안색이 왜 이렇게 창백해진 거죠? 혹시 폐하를 뵙는 게 무서워서 그러시는 건가요?" 그녀의 손이 내 어깨에 닿는 순간, 내 안의 기운이 비명을 지르듯 요동쳤다. 동시에 벽면의 거미줄 문양이 그녀의 적의에 반응하듯 일제히 진동하며 검은 안개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거대한 거미 다리 같은 검은 마력이 이자벨라의 머리 위로 덮쳐오고 있었다. '안 돼, 이대로 두면 이 여자가 당할지도!' 나는 본능적으로 이자벨라의 팔목을 낚아채며 그녀를 내 쪽으로 세차게 끌어당겼다. "꺅!! 뭐, 뭐 하는 짓이야! 이 무례한—!" 이자벨라가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지만 내 눈엔 오직 그녀를 덮치려는 거대한 어둠의 형상뿐이었다. 나는 지체 없이 한 손으로 그녀를 붙잡고, 다른 한 손끝에 빛을 집중시켜 그녀의 등 뒤를 향해 튕겨냈다. 치익—! 엘릭 경에게 했던 것처럼 아무도 모르게 빛을 조심히 튕겨내자, 다행히 형체가 커지기 전이라 빠르게 제거할 수 있었다. 다만, 제삼자의 눈에는 이 상황이 어떻게 보일지 갑자기 까마득해졌다. 이자벨라는 내 손에 끌려와 바닥에 주저앉았고, 시녀장은 경악하며 입을 가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응접실이 꽤나 시끄럽군." 낮게 깔린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을 실은 목소리가 입구에서 울려 퍼졌다. 차갑게 식은 공기를 가르며 나타난 것은 바로 제국의 주인 카엘루스였다. 그는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채, 내가 이자벨라의 팔목을 낚아챈 후 벽을 향해 뻗었던 기운에 대해 황급히 갈무리하는 모습을 무심한 눈으로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폐, 폐하! 죽여주옵소서!" 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이자벨라와 시녀장이 사색이 되어 즉시 바닥에 엎드렸다. 나는 이자벨라의 팔을 조심스럽게 놓아주며 거친 숨을 골랐다. 방금 전까지 정의의 사도 노릇을 하느라 남들 모르게 빛을 쏟아붓는데 온 신경을 썼는데, 하필 그 현장에 황제가 떡하니 나타나다니! 정말이지 신께서 작정하고 내 인생에 장난을 치시는 게 분명했다. 천천히 들어 올린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카엘루스의 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심장은 박동을 멈췄다. ‘저, 저게 왜 저기에…….’ 가늘고 긴 손가락 사이에서 위태롭게 굴려지고 있는 것. 그것은 며칠 전 내가 도망치며 떨어뜨렸던 부서진 아티팩트의 조각이었다.*“엄마.”둘만의 낭만은 정확히 삼 분 뒤 끝났다.나는 고개를 돌리자 테라스 문에는 작은 실루엣 하나가 생겼다.바로 루시아였다.한 손에는 카루 인형을 들고 다른 손에는 이불 끝을 들고 있었다.“왜 안 자?”“잠 안 와.”“유모는?”“잔다.”“네가 먼저 재웠어?”“응.”도대체 누가 누구를 재우는 건지. 루시아가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엄마랑 잘래.”“그래.”내가 말하는 순간 카엘루스가 말했다.“안 돼.”루시아가 아빠를 봤다.“왜.”“네 침실이 있잖아.”“싫어.”“루시아.”“엄마랑 잘 거야.”“
황궁에 도착했을 때 나는 계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엄마아!”루시아가 내게 달려왔다. 나는 아이를 번쩍 안으며 물었다.“잘 놀았어?”“응!”“뭐 했어?”“고양이 샀고! 사탕 먹었고! 공연 봤고!”루시아가 엄청 신나게 말했다.“그리고?”루시아가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아빠가 길에서 나 잃어버렸어!”나는 천천히 카엘루스를 바라보자 그가 눈을 감았다.“……그건.”“카엘루스.”“잠깐이었다.”“애를 잃어버렸어요?”“루시아가 먼저 손을 놓은 거다.”“아빠 나한테 소리도 질렀어.”그러자 빠르게 카엘루스가 말을 막았다.“사과했다.”루시아가
그 뒤로 부녀는 사탕도 먹고 거리 공연도 봤다. 길 가다 만난 작은 분수에서 동전도 던지고 기도해보았다. 그리고 루시아는 끊임없이 말했다.“아빠.”“왜.”“저 사람은 왜 저래?”“아빠.”“왜.”“하늘은 왜 파래?”“아빠.”“왜.”“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했어?”카엘루스가 멈췄다. 이 질문은 뭔가 대답해 줘야만 할 것 같았다.“왜 궁금하지.”“그냥.”“…….”“엄마가 아빠 미쳤다고 맨날 말하잖아.”“…….”집에 가서 이야기할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그래도 좋아하니까 결혼한 거겠지.”루시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아빠 좋아.”카엘루스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그래.”“엄마가 더
다음 날 아침.황실 교육 일정이 전부 뒤집혔다.“뭐라고요?”황실 교육원장이 놀란 얼굴로 카엘루스를 바라봤다.“황녀 전하의 일정을 절반으로 줄여라.”“하, 하지만 폐하.”“오전 두 시간.”“그 정도로는 정규 황족 교육 과정을 소화하기 어렵습니다.”“그럼 정규 과정을 바꿔.”“예?”“네 살짜리가 소화하지 못하는 교육이라면.”카엘루스는 태연했다.“교육이 잘못된 거겠지.”교육원장의 입이 닫혔다. 나는 옆에서 차를 마시며 웃음을 참았다. 카엘루스의 시선이 날 향했다.“왜 웃지.”“아무것도.”“어제는 나보고 틀렸다더니.”“그래서 고쳤잖아요.”“…….”“잘했어요.”카엘루스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칭찬받는 기
“공부하기 싫어.”정확히 사흘 뒤 루시아는 다시 사고를 쳤다.이번에는 보물고가 아니라 바로 황녀궁 교육실이었다.나는 교육실 문을 열자마자 당황했다.“……이게 뭐야.”책이 날아다녔다. 정말로 공중에 떠 다니고 있었다.제국사 책과 예법서. 고대어 교본에 종이 수십 장이 허공을 빙글빙글 도는 중이었다. 교육 담당 궁정 마법사는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황후 전하…….”그의 얼굴에는 절망이 가득했다.“저는 분명 아무런 마법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알아요.”범인은 따로 있다.바로 루시아. 내 딸이었다.두 손을 허리에 얹고 서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바로 뀨. 녀석이 푸른 눈에서 마력이 반짝였다.“…&helli
황궁에는 절대로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장소가 몇 군데 있다.첫 번째. 제국의 국새와 역대 황실 보물이 보관된 황실 보물고.두 번째. 전쟁과 외교에 관련된 기밀문서가 쌓여 있는 황제의 비밀 집무실.세 번째. 황궁 지하 깊숙한 곳에 봉인된 침묵의 기록관.그리고 오늘 아침. 여기에 새로운 장소 하나가 추가되었다.바로.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 루시아 아르카디온의 침실.이유는 간단했다.“황녀 전하가…….”시녀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사라지셨습니다.”“…….”나는 찻잔을 든 채 굳었다. 맞은편에서 아침 신문을 읽던 카엘루스의 손도 그대로 멈췄다.아주 짧은 고요였다.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다시 한번 말해볼래?”“화, 황녀 전하께서 침실에 계시지 않습니다.”“언제부터?”&ldqu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카엘루스의 그림자가 나를 덮쳤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턱을 부드럽게 고정하며 들어 올렸다.“글쎄, 영애라면 이걸 어떻게 하고 싶을까?”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입가에 걸린 묘한 미소가 소름 끼치도록 매혹적이었다.‘헉! 위험하다…… 이건 마치 로판 30화쯤 나오는 남주의 전형적인 유혹 포즈잖아?!’머릿속 덕후 본능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애석하게도 내 몸은 정직했다. 서 있는 황제를 앉은 채로 올려다보느라 목 근육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저…… 폐
바닥에 놓인 조그마한 검은 알이 혹시라도 깨질세라 푹신한 바구니에 옮겨 담은 후, 우리들은 자리를 옮겨 응접실로 이동했다.조금 전까지 불꽃이 튀고 얼음 조각이 날리며 어둠의 파편에서 빛의 기둥까지 세상에 있는 힘없는 힘 모두 뒤엉키는 아수라장 속에서 겨우 살아남은 것 같은데, 응접실에서는 이질적으로 창가를 통해 나른한 햇갈이 쏟아져 내렸다.이 비현실적인 고요를 깬 것은 황제의 낮은 목소리였다.“그래, 그대들은 어디까지 알고 있지?”공작저의 최고급 소파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카엘루스는, 엘리노아의 부서진 아티팩
“내가 인내심이 없다고 말했을 텐데. 기억하지 못하나?”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영애가 강조했던 그 ‘최상급 기념품’을 친히 받으러 왔지. 말했지 않은가, 내가 인내심이 좀 없다고… 그런데, 기념품치고는 꽤 살벌한 걸 준비했군. 영애의 취향이 이렇게 과격한 줄은 몰랐어. 앞으로 참고하도록 하지.”칼라일 오라버니가 내 앞을 가로막으려 했으나, 카엘루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황권의 마력이 오라버니의 한기를 단숨에 눌러버렸다.“비켜라, 공작. 저건 루체른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쿠궁—!내 처절한 헛소리는 공중에서 마지막 발악을 하듯 팝콘처럼 튀어 오르는 매트리스 가 천장을 전통으로 들이받은 후 중간 부분이 부서졌다.동시에 비명 같은 파열음이 그 사이로 강렬한 은빛 광채와 함께 뿜어져 나오며, 힘을 이기지 못한 유리창들이 덜덜 떨리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저건…!”카시안 오빠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저 물건은 설마! 너 지금 저 침대 속에서 튀어나온 저 물건이 뭔지나 알고 가지고 있었던 거야? 이 꼬맹아? 저게 지금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지 알기나 하냐고!”칼라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