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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루체른 공녀가 지나간 자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20 10:01:40

황실 마차의 육중한 문이 열리고, 눈이 시리도록 화려한 대리석 바닥 위에 발을 내디뎠다.

​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숨 가쁘게 담을 넘고 달렸는데. 오늘은 정문으로, 그것도 황제가 보낸 마차를 타고 당당히 걸어 들어오다니. 인생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

“공녀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

마차 앞에서 나를 맞이한 건 제국 기사단장, 엘릭 경이었다.

​

그는 우리 큰오빠 칼라일과 어린 시절부터 크고 작은 전쟁에서 생사를 함께한 절친한 친구이자, 제국에서 손꼽히는 강자 중 하나였다.

​

“엘릭 경, 오랜만에 뵙네요. 큰 오라버니가 안부를 전해달라더군요. (얼음 칼로 황궁을 초토화시키기 전에 얼른 동생을 돌려보내라는 무언의 압박과 함께요.)”

​

내 말에 엘릭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하하, 칼라일답군요. 그 무시무시한 인사는 여전한가 봅니다.”

​

엘릭은 예우를 갖추며 나를 안내했다. 하지만 기사들 사이를 가로질러 가던 내 눈에 기묘한 광경이 포착되었다. 엘릭의 어깨 부근, 그리고 뒤를 따르는 기사들의 그림자 끝에 아주 미세하고 끈적거리는 검은 실 같은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

‘저게 뭐야? 불쾌하게.’

​

직감적으로 그것이 몸과 정신을 갉아먹는 불순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엘릭과 스쳐 지나가는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손끝에 힘을 주어 루세티아의 빛을 미세하게 튕겨냈다.

​

휘익—

​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찰나의 순간이었다. 내 손끝에서 피어난 투명한 빛이 기사들의 어깨에 들러붙어 있던 검은 기운을 순식간에 태워버렸다.

​

“……!”

​

순간, 엘릭 경이 주춤하며 발걸음을 멈췄다. 수 주 동안 그를 괴롭히던 원인 모를 어깨의 결림과 피로가 마법처럼 씻겨 나간 탓이었다.

​

“왜 그러세요, 엘릭 경?”

​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맑은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봤다. 엘릭은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의 어깨를 매만져보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서둘러 나를 안내했다.

​

“아닙니다. 잠시 기분 탓이겠지요. 이쪽입니다.”

​

황제 카엘루스는 정무 회의에 참석 중이라, 나는 예전 시종 시절 심부름으로 자주 들락거렸던 태양궁 응접실에서 기다리게 되었다.

​

내가 응접실로 들어가는 동안 뒤를 따르던 부단장이 엘릭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

“단장님, 방금 공녀님이 지나갈 때… 무언가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몸이 너무 가볍고 개운합니다. 마치 짓누르던 돌덩이가 사라진 것처럼요.”

​

엘릭 경은 응접실 문 너머의 나를 한 번 그리고 자신의 가벼워진 손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그의 눈에 예리한 빛이 감돌았다.

​

“일단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말하지 마라. 폐하께서 회의를 마치시는 대로 이 상황을 보고 드려야 할 것 같군.”

​

엘릭은 긴장된 얼굴로 부단장을 물리고는 응접실 문 앞에 서서 정중히 말했다.

​

“폐하께서 정무를 마치는 대로 오실 터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루체른 공녀.”

​

엘릭 경과 부단장이 물러간 후 나는 이 거대한 응접실에 혼자 남겨졌다. 긴장이 풀리자마자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며 방 안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

한 달 동안 시종으로 일하며 구석구석 닦고 광을 냈던 곳이라 눈에 익을 법도 한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이 공간이 낯설다 못해 기괴하게 느껴졌다.

​

‘잠깐, 저 벽지 무늬가 원래 저랬나?’

​

나는 벽면을 장식한 금색 덩굴 문양을 유심히 살폈다.

​

잠시나마 시종이던 시절 사다리까지 올라타며 마른 걸레질을 수천 번도 더 했던 그 무늬였다. 하지만 지금 내 눈에 비치는 것은 단순한 예술 작품이 아니었다.

​

특정 각도에서 빛이 굴절될 때마다 화려한 금실들이 거미줄처럼 뒤틀리며 서로를 옭아매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벽면을 타고 번져나가는 기하학적인 느낌이었다.

​

그 마디마다 박힌 미세한 흑색 점들이 마치 무언가를 감시하는 수만 개의 눈처럼 보인다면 단순한 착각일까?

​

‘이거 아무래도 단순한 장식이 아닌 것 같아. 어쩌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왜 지금은 소름 끼치도록 선명하게 시야에 박히는 걸까. 나는 홀린 듯 손을 뻗어 그 거미줄 같은 패턴에 가까이 가져갔다.

​

그 순간이었다. 속치마 주머니 속에 감추어 둔 은 원통이 마치 공명하듯 내 안의 빛을 마음대로 흡수하며 거세게 꿈틀거렸다.

​

치익—

​

내 손끝에서 새어 나온 투명한 빛이 벽면의 어둠에 닿는 그 순간, 기분 나쁜 마찰음이 들렸다. 금색 무늬 사이사이에 숨어 있던 끈적거리는 검은 마력이 내 빛에 반응해 비명을 지르듯 타올랐다.

​

그것은 아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안개처럼 피어오르다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

“이게 바로…… 카시안 오빠가 말했던 그 불순물?”

​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

황궁은 빛나고 있었지만 동시에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 화려한 금색 벽지 뒤에 숨겨진 어둠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카엘루스 황제는 이 소름 끼치는 진실을 과연 알고 있을까.

​

마음 한구석이 설명할 수 없는 어지러움으로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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