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황실 마차의 육중한 문이 열리고, 눈이 시리도록 화려한 대리석 바닥 위에 발을 내디뎠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숨 가쁘게 담을 넘고 달렸는데. 오늘은 정문으로, 그것도 황제가 보낸 마차를 타고 당당히 걸어 들어오다니. 인생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공녀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차 앞에서 나를 맞이한 건 제국 기사단장, 엘릭 경이었다.
그는 우리 큰오빠 칼라일과 어린 시절부터 크고 작은 전쟁에서 생사를 함께한 절친한 친구이자, 제국에서 손꼽히는 강자 중 하나였다.
“엘릭 경, 오랜만에 뵙네요. 큰 오라버니가 안부를 전해달라더군요. (얼음 칼로 황궁을 초토화시키기 전에 얼른 동생을 돌려보내라는 무언의 압박과 함께요.)”
내 말에 엘릭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칼라일답군요. 그 무시무시한 인사는 여전한가 봅니다.”
엘릭은 예우를 갖추며 나를 안내했다. 하지만 기사들 사이를 가로질러 가던 내 눈에 기묘한 광경이 포착되었다. 엘릭의 어깨 부근, 그리고 뒤를 따르는 기사들의 그림자 끝에 아주 미세하고 끈적거리는 검은 실 같은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저게 뭐야? 불쾌하게.’
직감적으로 그것이 몸과 정신을 갉아먹는 불순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엘릭과 스쳐 지나가는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손끝에 힘을 주어 루세티아의 빛을 미세하게 튕겨냈다.
휘익—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찰나의 순간이었다. 내 손끝에서 피어난 투명한 빛이 기사들의 어깨에 들러붙어 있던 검은 기운을 순식간에 태워버렸다.
“……!”
순간, 엘릭 경이 주춤하며 발걸음을 멈췄다. 수 주 동안 그를 괴롭히던 원인 모를 어깨의 결림과 피로가 마법처럼 씻겨 나간 탓이었다.
“왜 그러세요, 엘릭 경?”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맑은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봤다. 엘릭은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의 어깨를 매만져보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서둘러 나를 안내했다.
“아닙니다. 잠시 기분 탓이겠지요. 이쪽입니다.”
황제 카엘루스는 정무 회의에 참석 중이라, 나는 예전 시종 시절 심부름으로 자주 들락거렸던 태양궁 응접실에서 기다리게 되었다.
내가 응접실로 들어가는 동안 뒤를 따르던 부단장이 엘릭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단장님, 방금 공녀님이 지나갈 때… 무언가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몸이 너무 가볍고 개운합니다. 마치 짓누르던 돌덩이가 사라진 것처럼요.”
엘릭 경은 응접실 문 너머의 나를 한 번 그리고 자신의 가벼워진 손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그의 눈에 예리한 빛이 감돌았다.
“일단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말하지 마라. 폐하께서 회의를 마치시는 대로 이 상황을 보고 드려야 할 것 같군.”
엘릭은 긴장된 얼굴로 부단장을 물리고는 응접실 문 앞에 서서 정중히 말했다.
“폐하께서 정무를 마치는 대로 오실 터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루체른 공녀.”
엘릭 경과 부단장이 물러간 후 나는 이 거대한 응접실에 혼자 남겨졌다. 긴장이 풀리자마자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며 방 안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한 달 동안 시종으로 일하며 구석구석 닦고 광을 냈던 곳이라 눈에 익을 법도 한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이 공간이 낯설다 못해 기괴하게 느껴졌다.
‘잠깐, 저 벽지 무늬가 원래 저랬나?’
나는 벽면을 장식한 금색 덩굴 문양을 유심히 살폈다.
잠시나마 시종이던 시절 사다리까지 올라타며 마른 걸레질을 수천 번도 더 했던 그 무늬였다. 하지만 지금 내 눈에 비치는 것은 단순한 예술 작품이 아니었다.
특정 각도에서 빛이 굴절될 때마다 화려한 금실들이 거미줄처럼 뒤틀리며 서로를 옭아매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벽면을 타고 번져나가는 기하학적인 느낌이었다.
그 마디마다 박힌 미세한 흑색 점들이 마치 무언가를 감시하는 수만 개의 눈처럼 보인다면 단순한 착각일까?
‘이거 아무래도 단순한 장식이 아닌 것 같아. 어쩌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왜 지금은 소름 끼치도록 선명하게 시야에 박히는 걸까. 나는 홀린 듯 손을 뻗어 그 거미줄 같은 패턴에 가까이 가져갔다.
그 순간이었다. 속치마 주머니 속에 감추어 둔 은 원통이 마치 공명하듯 내 안의 빛을 마음대로 흡수하며 거세게 꿈틀거렸다.
치익—
내 손끝에서 새어 나온 투명한 빛이 벽면의 어둠에 닿는 그 순간, 기분 나쁜 마찰음이 들렸다. 금색 무늬 사이사이에 숨어 있던 끈적거리는 검은 마력이 내 빛에 반응해 비명을 지르듯 타올랐다.
그것은 아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안개처럼 피어오르다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이게 바로…… 카시안 오빠가 말했던 그 불순물?”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황궁은 빛나고 있었지만 동시에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 화려한 금색 벽지 뒤에 숨겨진 어둠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카엘루스 황제는 이 소름 끼치는 진실을 과연 알고 있을까.
마음 한구석이 설명할 수 없는 어지러움으로 일렁였다.
*“엄마.”둘만의 낭만은 정확히 삼 분 뒤 끝났다.나는 고개를 돌리자 테라스 문에는 작은 실루엣 하나가 생겼다.바로 루시아였다.한 손에는 카루 인형을 들고 다른 손에는 이불 끝을 들고 있었다.“왜 안 자?”“잠 안 와.”“유모는?”“잔다.”“네가 먼저 재웠어?”“응.”도대체 누가 누구를 재우는 건지. 루시아가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엄마랑 잘래.”“그래.”내가 말하는 순간 카엘루스가 말했다.“안 돼.”루시아가 아빠를 봤다.“왜.”“네 침실이 있잖아.”“싫어.”“루시아.”“엄마랑 잘 거야.”“
황궁에 도착했을 때 나는 계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엄마아!”루시아가 내게 달려왔다. 나는 아이를 번쩍 안으며 물었다.“잘 놀았어?”“응!”“뭐 했어?”“고양이 샀고! 사탕 먹었고! 공연 봤고!”루시아가 엄청 신나게 말했다.“그리고?”루시아가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아빠가 길에서 나 잃어버렸어!”나는 천천히 카엘루스를 바라보자 그가 눈을 감았다.“……그건.”“카엘루스.”“잠깐이었다.”“애를 잃어버렸어요?”“루시아가 먼저 손을 놓은 거다.”“아빠 나한테 소리도 질렀어.”그러자 빠르게 카엘루스가 말을 막았다.“사과했다.”루시아가
그 뒤로 부녀는 사탕도 먹고 거리 공연도 봤다. 길 가다 만난 작은 분수에서 동전도 던지고 기도해보았다. 그리고 루시아는 끊임없이 말했다.“아빠.”“왜.”“저 사람은 왜 저래?”“아빠.”“왜.”“하늘은 왜 파래?”“아빠.”“왜.”“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했어?”카엘루스가 멈췄다. 이 질문은 뭔가 대답해 줘야만 할 것 같았다.“왜 궁금하지.”“그냥.”“…….”“엄마가 아빠 미쳤다고 맨날 말하잖아.”“…….”집에 가서 이야기할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그래도 좋아하니까 결혼한 거겠지.”루시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아빠 좋아.”카엘루스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그래.”“엄마가 더
다음 날 아침.황실 교육 일정이 전부 뒤집혔다.“뭐라고요?”황실 교육원장이 놀란 얼굴로 카엘루스를 바라봤다.“황녀 전하의 일정을 절반으로 줄여라.”“하, 하지만 폐하.”“오전 두 시간.”“그 정도로는 정규 황족 교육 과정을 소화하기 어렵습니다.”“그럼 정규 과정을 바꿔.”“예?”“네 살짜리가 소화하지 못하는 교육이라면.”카엘루스는 태연했다.“교육이 잘못된 거겠지.”교육원장의 입이 닫혔다. 나는 옆에서 차를 마시며 웃음을 참았다. 카엘루스의 시선이 날 향했다.“왜 웃지.”“아무것도.”“어제는 나보고 틀렸다더니.”“그래서 고쳤잖아요.”“…….”“잘했어요.”카엘루스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칭찬받는 기
“공부하기 싫어.”정확히 사흘 뒤 루시아는 다시 사고를 쳤다.이번에는 보물고가 아니라 바로 황녀궁 교육실이었다.나는 교육실 문을 열자마자 당황했다.“……이게 뭐야.”책이 날아다녔다. 정말로 공중에 떠 다니고 있었다.제국사 책과 예법서. 고대어 교본에 종이 수십 장이 허공을 빙글빙글 도는 중이었다. 교육 담당 궁정 마법사는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황후 전하…….”그의 얼굴에는 절망이 가득했다.“저는 분명 아무런 마법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알아요.”범인은 따로 있다.바로 루시아. 내 딸이었다.두 손을 허리에 얹고 서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바로 뀨. 녀석이 푸른 눈에서 마력이 반짝였다.“…&helli
황궁에는 절대로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장소가 몇 군데 있다.첫 번째. 제국의 국새와 역대 황실 보물이 보관된 황실 보물고.두 번째. 전쟁과 외교에 관련된 기밀문서가 쌓여 있는 황제의 비밀 집무실.세 번째. 황궁 지하 깊숙한 곳에 봉인된 침묵의 기록관.그리고 오늘 아침. 여기에 새로운 장소 하나가 추가되었다.바로.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 루시아 아르카디온의 침실.이유는 간단했다.“황녀 전하가…….”시녀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사라지셨습니다.”“…….”나는 찻잔을 든 채 굳었다. 맞은편에서 아침 신문을 읽던 카엘루스의 손도 그대로 멈췄다.아주 짧은 고요였다.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다시 한번 말해볼래?”“화, 황녀 전하께서 침실에 계시지 않습니다.”“언제부터?”&ldqu
“폐하, 제국이 안정을 되찾았으니 이제 황실의 후계를 논하셔야 합니다. 부디 명망 높은 가문의 영애들을 황후와 황비로 들이심이…….”정무 회의실의 육중한 문이 거칠게 열리며 카엘루스가 걸어 나왔다. 뒤를 따르는 귀족들의 끈질긴 목소리가 복도의 정적을 어지럽혔다.불과 몇 년 전, 형제들을 모조리 베어 넘기고 피칠갑이 된 채 왕좌에 올랐던 그를 보며 숨조차 쉬지 못하던 자들이었다.제국에 평화가 깃들고 피 냄새가 옅어지자 이제는 하나둘씩 제 딸들을 밀어 넣어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속셈이다.카엘루스가 우뚝 걸음을 멈추
[같은 시각, 수도 외곽 지하 신전]“……루체른의 결계에 막혀 모두 얼어붙었다라.” 붉은 휘장 너머,어둠의 옥좌에 비스듬히 앉은 자하크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실패를 보고하는 부하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지만,자하크의 뱀 같은 은빛 눈동자에는 분노 대신 기묘한 흥미가 번져 있었다. “제국의 사냥개, 칼라일 루체른의 솜씨겠지. 여전히 성가신 놈이야.” 자하크가 길고 창백한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제단 위로 서늘한 푸른 불꽃이 일렁이며 타올랐다.불꽃 속에는 그가 심어둔 까마귀의 시야가 투영되고
"뭐가 와? 황실 마차가 우리 집 앞마당을 밟았다고?"정적을 깬 칼라일 오빠의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다.파란 하늘을 보며 현실을 부정하던 내 손에서 편지를 낚아챈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혹한의 겨울처럼 얼어붙었다."이 미친 새끼가 누구한테 황명 따위를 지껄이는가.간밤에 가짜 그림자 놈들 때문에 내 동생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누누이 언급했거늘,사과는커녕 대놓고 황궁으로 불러들여?루체른을 무슨 제 발 밑 돌멩이 정도로 여기는 모양이지?"칼라일은 옆구리에 차고 있던 제국 제일의 명검인 ‘리베르’의 검자루를
“아니, 오빠! 어제 그놈들 옷깃에 황실 문장이 있지 않았어요? 황실이 우릴 노린 거였잖아!”내 물음에 칼라일 오빠가 차가운 눈빛으로 대답했다.“옷깃에 뻔뻔하게도 황실의 태양 문장을 수놓았더군. 하지만 확인해 보니 조잡하게 꾸며낸 모조품이었다.누군가 황실을 사칭해 우리 루체른을 노린 거야. 가장 연약한 너를 인질로 삼으려는 비열한 수작이겠지.” “……네? 사칭이요?!”카시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그 얼빠진 얼굴을 보니 ‘카시안이 보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갔다.하지만 나는 곧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