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하아…… 하…….”
거칠게 몰아쉬는 숨이 방금 전 아르덴이 서 있던 공간의 잔열을 집어삼켰다. 심장이 늑골을 부수고 나올 것처럼 뛰었다.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뺨을 타고 흐르던 그의 서늘한 숨결, 얇은 잠옷 너머로 전해졌던 손바닥의 지독한 열기, 그리고 찰나의 순간 자신을 꿰뚫었던 눈빛. 그 모든 감각이 사슬처럼 그녀의 전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라리엘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그의 숨결이 닿았던 자리가 여전히 화끈거렸다. 마치 낙인이 찍힌 것 같았다. ‘자극하지 말라고?’ 그녀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조롱이었다. 가문의 원수이자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용의자, 그 괴물 같은 남자에게 본능적인 전율을 느꼈다는 사실이 그녀를 구역질 나게 했다. 증오해야 마당한 남자에게서 느낀 그 짧은 긴장감은, 라리엘에게 있어 그 어떤 모욕보다도 치욕스러웠다. 그의 품 안에서 잠시나마 숨이 멎었던 것은 분명 생존 본능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머릿속은 배신감 섞인 의문들로 어지러웠다. ‘너는 내게 관심조차 없다더니…….’ 아르덴이 보인 그 찰나의 갈증. 그것은 사랑도, 애정도 아니었다. 그것은 소유물을 향한 지독한 갈구이자, 언제든 무너뜨릴 수 있다는 오만한 포식자의 경고였다. 라리엘은 그가 남긴 ‘인내심’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그는 자신을 안는 것이 아니라, 짓밟는 것을 참아내고 있는지도 몰랐다. 만약 방금 그가 멈추지 않았다면? 그 질문은 독처럼 그녀의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그가 정말로 자신을 굴복시키려 들었다면, 나는 그를 밀어낼 수 있었을까. 아니면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숨이 막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차가운 바닥에 짓이겨졌을까. 라리엘의 호흡이 가빠졌다. 이미 끝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몸은 뒤늦게 그 가능성에 반응하고 있었다. 심장은 여전히 제멋대로 뛰었고, 손끝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비참함은 기어이 그녀를 삼켰다. 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피부를 찢을 듯한 통증이 퍼지자, 그제야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상상들이 잠시 멈췄다. ‘정신 차려, 라리엘 플로렌스.’ 그녀는 속으로, 아니 거의 소리 내어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플로렌스. 그 이름에는 아직 무게가 있었다. 한때는 존경과 신뢰를 의미했고, 지금은 복수와 생존을 동시에 짊어진 이름. 차가운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며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무너질 수 없다고. 거울 앞에 섰을 때, 라리엘은 잠시 숨을 멈췄다. 거울 속에 비친 여자는 낯설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핏기가 완전히 가신 얼굴, 정돈할 힘조차 잃은 머리칼, 그리고 무엇보다도—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눈동자. 그 눈동자 속에는 분노, 두려움, 그리고 부정할 수 없는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이런 꼴로는…” 그녀는 중얼거리다 말았다. 찬물을 받아 얼굴을 적셨다. 차가운 물이 피부를 때리자 숨이 턱 막혔지만, 동시에 정신이 또렷해졌다. 물방울이 턱을 타고 떨어지며 세면대에 부딪혔다. 하나, 둘. 마치 시간을 다시 세는 것처럼. 라리엘은 물기를 대충 닦아내고 텅 빈 침대 위로 몸을 뉘였다. 아르덴이 누웠을 자리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존재는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는 듯했다. 눌렸던 매트리스의 감촉, 공기 중에 희미하게 남은 그의 향. 그것들이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창밖에서는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마치 누군가 억눌러왔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내는 것처럼 점점 거칠어졌다. 라리엘은 어둠 속에서 눈을 부릅뜬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다음에 그가 다시 다가온다면.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때는 떨림이 아니라, 서슬 퍼런 칼날을 준비하겠노라고. 그가 어떤 표정을 짓든, 어떤 말을 던지든 흔들리지 않겠다고. 두려움 위에 결의를 덧씌우며, 그녀는 스스로와 계약을 맺었다. * 한편, 침실 문을 닫고 나온 아르덴의 발걸음은 평소의 우아하고 절제된 리듬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복도의 어둠이 그의 그림자를 길게 잡아 늘렸다. 그는 자신의 집무실 옆에 붙은 침실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잠갔다. 그리고 마치 더는 버틸 수 없다는 듯, 벽에 등을 기대고 거친 숨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낮게 읊조린 욕설은 방 안에서 메아리도 없이 흩어졌다. 라리엘 앞에서 그토록 서늘하고 여유롭게 굴던 공작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벽을 짚은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 자신도 부정할 수 없었다. 아르덴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아직도 손끝에는 라리엘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가느다란 허리의 곡선, 얇은 잠옷 너머로 전해지던 체온.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마치 피부에 새겨진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턱을 치켜들고 독기를 내뿜던 그녀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가쁘게 오르내리던 쇄골의 움직임.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그를 무너뜨릴 뻔했다. 그 찰나, 그는 정말로 자제력을 잃을 뻔했다. 그녀를 끌어안고, 자신을 향해 쏟아내던 그 아픈 말들을 입맞춤으로 막아버리고 싶다는 충동. 그것은 단순한 욕망이라기보다, 홀로 긴 겨울을 버텨온 이가 마침내 마주한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아 몸부림치는 절박한 갈증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는 멈춰야만 했다. 그녀를 안는 순간, 그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계획이 무너질 것을 알았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유리 성벽이 산산조각 나고, 그 파편이 가장 먼저 그녀를 해칠 것임을—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르덴은 비틀거리듯 탁자로 다가가 독주를 잔에 따랐다. 얼음도 넣지 않은 투명한 액체가 잔을 채웠다. 그는 한 번에 들이켰다. 독한 술이 목구멍을 태우며 내려갔다. 고통스러운 열기가 몸 안에 퍼지자, 미친 듯 날뛰던 심장박동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 빗줄기가 쏟아지는 어두운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원치 않던 기억이, 마치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6개월 전. 그 참혹했던 밤. 피비린내와 섞인 흙냄새. 뒤집힌 마차. 그리고 차갑게 식어가면서도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고 마지막 힘을 짜내 유언을 남기던 플로렌스 백작의 얼굴. ‘아르덴…… 내 딸을…… 라리엘만은 제발…….’ 백작의 죽음은 사고도, 그에 의한 살인도 아니었다. 그것은 아직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제국의 어딘가에서 꿈틀대며 지금도 그녀를 노리고 있을지 모르는 정체 모를 악의 일부였다. 아르덴은 백작의 시신 손에서 발견된 은색 단추를 떠올렸다. 그것이 자신의 가문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진실을 밝히고 라리엘을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던질 것인가, 아니면 모든 죄를 뒤집어쓴 악마가 되어 그녀를 이 성 안에 가둘 것인가. “너는 평생 나를 증오하며 살겠지.” 그는 창에 비친 자신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나직이 읊조렸다.몇 시간 뒤, 방안 가득 찬란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아르덴은 눈을 떴다. 지독한 악몽이었다.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뒤섞인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헤매는 꿈. 평소라면 식은땀에 젖어 불쾌하게 깨어났을 아침이었지만, 오늘 밤은 이상하게도 마지막 기억이 따뜻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었던, 그 다정한 감각.그는 숨을 멈춘 채 옆을 돌아보았다. 라리엘이 자신의 손을 양손으로 소중하게 감싸 쥔 채, 그의 팔 근처에 머리를 기대고 깊은 잠에 들어 있었다. 햇살을 받은 그녀의 속눈썹이 눈가에 부드러운 그림자를 드리웠고,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그녀의 어깨가 평화로워 보였다.아르덴은 지난 기억을 가까스로 떠올렸다. 어젯밤, 라리엘이 곁에 눕는 순간부터 그의 감각은 비정상적으로 곤두서 있었다. 얇은 이불 너머로 느껴지는 그녀의 작은 몸놀림, 공기 중에 흩날리는 은은한 향기. 그것들은 아르덴의 이성을 끊임없이 시험했다.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기고 싶은 본능적인 갈망을 억누르기 위해 잠들 때 까지도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그녀는 너를 증오한다', '너는 그녀의 아버지를 지키지 못한 죄인이다' 를 머릿속으로 수천 번 되새기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런 엄청난 자제력 끝에 겨우 잠이 들었을 때 악몽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자신을 건져 올린 것은, 다름 아닌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그녀의 손길이었다.아르덴은 굳어버린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자신은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녀의 아버지를 언급하며 위신을 운운했고, 그녀를 도구라 부르며 고립시켰다. 그런데 그녀는 왜 이 끔찍한 악마의 손을 잡아준 것일까.그의 가슴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통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죄책감이었고, 동시에 차마 입 밖으로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문이 열리고, 아르덴이 들어왔다. 평소 집무실 옆 작은 방에서 머물던 그가 이 방의 문턱을 넘는 것은 결혼 첫날밤 이후 처음이었다. 그는 걸치고 있던 제복 상의를 벗어 의자에 던지듯 걸치며 미간을 찌뿌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며칠간의 냉랭함과는 다른, 지독하게 어색하고 민망한 기류가 흘렀다.“…고모님이 복도 끝 방에 머무시니 어쩔 수 없군.”아르덴은 침대 근처로 다가오다 말고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이 침대 밑 대리석 바닥을 향했다. 결혼 첫날밤, 침대 아래 바닥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던 라리엘의 모습이 떠오른 듯했다.아르덴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로 내뱉었다.“오늘은 내가 바닥에서 자지. 네가 또 바닥에서 자다가 다음 날 병이라도 나면, 고모님께 내가 학대라도 한다고 광고하는 꼴이 될 테니까.”그의 배려는 여전히 가시 돋친 말에 담겨 있었다. 라리엘은 그 비아냥 섞인 말투에 울컥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을 걱정해서라기보다는 그저 '고모님의 눈'과 '알브릭의 체면' 때문이라는 그 태도는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됐어. 네가 바닥에서 주무시는 걸 고모님이 아시기라도 하면 그게 더 큰일이지. 쓸데없는 고집 피우지 말고 그냥 침대로 올라와.”“라리엘.”“괜찮으니까 올라오라고. 네 말대로 병이라도 나면 곤란하니까.”라리엘이 지지 않고 쏘아붙이며 침대 한쪽 끝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아르덴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결국 마지못한 듯 침대 반대편으로 다가와 몸을 뉘었다.탁, 소리와 함께 촛불이 꺼졌다.정적이 찾아오자, 감각은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졌다. 서로의 숨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라리엘은 괜히 의식하지 않는 척, 지극히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가장하며
만찬이 끝나고 헤르트루드가 방으로 물러간 뒤, 복도에는 다시 아르덴과 라리엘 두 사람만 남았다.“……손을 놓지 않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아르덴이 낮게 읊조렸다. 목소리에는 여전히 가시가 돋쳐 있었지만, 어쩐지 평소만큼 날카롭지는 않았다. 라리엘은 그를 돌아보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연기를 하라면서. 고모님을 속이려면 그 정도의 '오만하고 친절한 공작' 이미지는 필요했을 뿐이야.”“라리엘.”아르덴이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다 멈칫했다. 허공에서 멈춘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라리엘은 그를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내일 고모님과의 산책은 걱정 마. 네가 원하는 '완벽한 아내'의 모습을 보여드릴 테니까.”닫히는 문 뒤로 아르덴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밤사이 비라도 스쳐 간 듯, 가을 아침의 공기는 맑고 선선했다. 정원의 나무들은 아직 잎을 완전히 떨구지는 않았지만, 초록 사이사이로 황금빛과 붉은빛이 스며들어 계절이 깊어졌음을 조용히 알리고 있었다. 약속대로 헤르트루드 고모는 이른 아침부터 라리엘을 불러냈다. 아르덴은 정무가 바쁘다는 핑계로 서재에 틀어박혔고, 덕분에 두 여인만의 산책이 시작되었다.“자, 라리엘. 이 늙은이 보폭이 좀 빠르지? 무릎이 성할 때 부지런히 걸어둬야 하거든.”헤르트루드는 화려한 털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정원길을 누볐다. 라리엘은 숨을 고르며 그녀의 곁을 지켰다.공작저의 후원은 가을 햇살 아래서 한층 또렷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기하학적으로 다듬어진 회양목 울타리 사이로, 고결한 자태를 뽐내는 백색 대리석 조각상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났다. 중앙 분수대에서는 차가운 물줄기가 수정처럼 솟구쳐
마차가 멈추자마자 아르덴은 시종의 부축도 받지 않은 채 먼저 내렸다. 그는 뒤따라 내리는 라리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성큼성큼 본관으로 향했다.“부인, 방까지 모시겠습니다.”하녀장 마르타가 다가왔지만, 라리엘은 고개를 저었다.라리엘은 차가운 복도를 걸어 자신의 침실로 돌아갔다. 화려한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홀로 침대에 누웠다. 피로가 밀려왔지만 마차 안에서 느꼈던 그의 열기와 독설이 뒤섞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증오와 슬픔, 그리고 알 수 없는 상실감이 그녀를 짓눌렀다.후작저에서 돌아온 아르덴은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섰다.어두운 방 안, 촛불 하나 켜지지 않은 공간에서 그는 거칠게 크라바트를 풀어 헤쳤다. 숨이 막혔다. 그녀를 몰아세울 때마다 제 가슴이 먼저 무너지는 감각을 참아내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었다.똑똑.정적을 깨는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집사 베르너였다.“들어와.”베르너는 조용히 들어와 아르덴에게 두툼한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공작님, 지시하신 대로 플로렌스 백작님의 마지막 행적을 조사했습니다.”아르덴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서류 봉투를 낚아채듯 받은 그는 촛불을 켜고 내용을 훑기 시작했다. 종이를 넘기는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조사 결과는?”“공작님의 짐작이 맞았습니다. 백작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그 문헌'의 원본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현장에 그 원본이 없다는 건…”베르너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백작님을 살해한 목적이 ‘그 문헌’이라 짐작됩니다.”아르덴은 눈을 감았다. 라리엘이 그토록 증오하는 자신, 그리고
라리엘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의 생전 모습과 겹쳐 보이는 인자한 노신사였다. 그녀의 얼굴에 놀람과 반가움이 동시에 떠올랐다.“에드먼드 남작님!”아버지의 오랜 벗이자, 가문이 몰락하기 전 자주 저택을 방문했던 지인이었다. 차가운 공작저에서 홀로 싸워오던 라리엘에게 그의 등장은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와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남작님을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소식이 끊겨서 얼마나 걱정했는지……”“나야말로 백작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르네.”그의 시선에는 진심어린 애도가 담겨있었다.“자네가 이런… 갑작스러운 혼처를 맞이했다는 이야기에 걱정이 많았지. 백작께서 살아계셨다면 결코ㅡ”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기가 미묘하게 갈라졌다.“남작.”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대화를 가로질렀다. 어느새 다가온 아르덴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라리엘의 곁에 섰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어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동작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분명했다. 그것은 ‘내 영역 안의 것을 건드리지 마라’는 경고였다.“공작님, 저는 그저 오랜 인연으로 안부를 묻던 중이었습니다.”에드먼드 남작의 목소리는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미세한 떨림을 숨기지는 못했다. 아르덴은 눈매를 가늘게 뜨며 남작을 내려다보았다.“남작의 염려에 감사하군. 하지만 내 아내의 안위는 알브릭의 기사들과 내가 온전히 책임지고 있으니, 남작께서 밤잠을 설치며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네.”그의 말투는 정중했으나 칼날처럼 예리했다.“오히려 지금은 과음하신
마차를 타고 후작저로 가는 동안 아르덴은 신문을 읽는 척하고 있었으나, 시선은 내내 라리엘의 잘게 떨리는 손가락에 머물러 있었다.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옆모습은 당당해 보였지만, 가늘게 떨리는 긴 속눈썹까지 숨기지는 못했다.아르덴은 신문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당장이라도 저 가녀린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다정함은 독이 될 뿐이었기에, 아르덴은 수차례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갈등하던 그의 시선이 마침내 라리엘의 눈가에 맺힌 작은 불안을 포착한 순간, 이성은 결국 본능에 자리를 내주었다.아르덴이 무심하게 손을 뻗어 라리엘의 차가운 손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아르덴을 바라보았다.“...뭐야?”놀람과 경계가 뒤섞인 목소리였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그 온기가 닿는 순간 라리엘의 몸이 굳었지만, 아르덴은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창밖을 보며 차갑게 내뱉었다.“착각하지 마. 네 손이 하도 사시나무 떨 듯 떨리는 통에 마차가 흔들리는 것 같아 잡은 것뿐이니까.”“……뭐라고?”“그렇게 겁에 질린 표정으로 들어갔다간, 헤르만 후작 부인이 내 안목을 의심할 거야. 알브릭의 안주인이 고작 그 정도 담력밖에 안 된다면, 나도 곤란해지지 않겠어?”비정한 독설이었다. 걱정이 아니라 마치 품평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에 라리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이거 놔. 내 담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네 옆이 지나치게 숨 막혀서 그런 거니까.”이를 악물며 말한 라리엘이 손을 확 빼내려 했지만, 아르덴은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깍지를 끼듯 더욱 단단히 맞잡았다.“놓으라고 해서 놓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닐 텐데. 밖에서 사람들은 우리의 이 맞잡은 손을 보며 알브릭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