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하아…… 하…….”
거칠게 몰아쉬는 숨이 방금 전 아르덴이 서 있던 공간의 잔열을 집어삼켰다. 심장이 늑골을 부수고 나올 것처럼 뛰었다.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뺨을 타고 흐르던 그의 서늘한 숨결, 얇은 잠옷 너머로 전해졌던 손바닥의 지독한 열기, 그리고 찰나의 순간 자신을 꿰뚫었던 눈빛. 그 모든 감각이 사슬처럼 그녀의 전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라리엘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그의 숨결이 닿았던 자리가 여전히 화끈거렸다. 마치 낙인이 찍힌 것 같았다. ‘자극하지 말라고?’ 그녀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조롱이었다. 가문의 원수이자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용의자, 그 괴물 같은 남자에게 본능적인 전율을 느꼈다는 사실이 그녀를 구역질 나게 했다. 증오해야 마당한 남자에게서 느낀 그 짧은 긴장감은, 라리엘에게 있어 그 어떤 모욕보다도 치욕스러웠다. 그의 품 안에서 잠시나마 숨이 멎었던 것은 분명 생존 본능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머릿속은 배신감 섞인 의문들로 어지러웠다. ‘너는 내게 관심조차 없다더니…….’ 아르덴이 보인 그 찰나의 갈증. 그것은 사랑도, 애정도 아니었다. 그것은 소유물을 향한 지독한 갈구이자, 언제든 무너뜨릴 수 있다는 오만한 포식자의 경고였다. 라리엘은 그가 남긴 ‘인내심’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그는 자신을 안는 것이 아니라, 짓밟는 것을 참아내고 있는지도 몰랐다. 만약 방금 그가 멈추지 않았다면? 그 질문은 독처럼 그녀의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그가 정말로 자신을 굴복시키려 들었다면, 나는 그를 밀어낼 수 있었을까. 아니면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숨이 막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차가운 바닥에 짓이겨졌을까. 라리엘의 호흡이 가빠졌다. 이미 끝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몸은 뒤늦게 그 가능성에 반응하고 있었다. 심장은 여전히 제멋대로 뛰었고, 손끝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비참함은 기어이 그녀를 삼켰다. 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피부를 찢을 듯한 통증이 퍼지자, 그제야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상상들이 잠시 멈췄다. ‘정신 차려, 라리엘 플로렌스.’ 그녀는 속으로, 아니 거의 소리 내어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플로렌스. 그 이름에는 아직 무게가 있었다. 한때는 존경과 신뢰를 의미했고, 지금은 복수와 생존을 동시에 짊어진 이름. 차가운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며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무너질 수 없다고. 거울 앞에 섰을 때, 라리엘은 잠시 숨을 멈췄다. 거울 속에 비친 여자는 낯설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핏기가 완전히 가신 얼굴, 정돈할 힘조차 잃은 머리칼, 그리고 무엇보다도—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눈동자. 그 눈동자 속에는 분노, 두려움, 그리고 부정할 수 없는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이런 꼴로는…” 그녀는 중얼거리다 말았다. 찬물을 받아 얼굴을 적셨다. 차가운 물이 피부를 때리자 숨이 턱 막혔지만, 동시에 정신이 또렷해졌다. 물방울이 턱을 타고 떨어지며 세면대에 부딪혔다. 하나, 둘. 마치 시간을 다시 세는 것처럼. 라리엘은 물기를 대충 닦아내고 텅 빈 침대 위로 몸을 뉘였다. 아르덴이 누웠을 자리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존재는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는 듯했다. 눌렸던 매트리스의 감촉, 공기 중에 희미하게 남은 그의 향. 그것들이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창밖에서는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마치 누군가 억눌러왔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내는 것처럼 점점 거칠어졌다. 라리엘은 어둠 속에서 눈을 부릅뜬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다음에 그가 다시 다가온다면.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때는 떨림이 아니라, 서슬 퍼런 칼날을 준비하겠노라고. 그가 어떤 표정을 짓든, 어떤 말을 던지든 흔들리지 않겠다고. 두려움 위에 결의를 덧씌우며, 그녀는 스스로와 계약을 맺었다. * 한편, 침실 문을 닫고 나온 아르덴의 발걸음은 평소의 우아하고 절제된 리듬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복도의 어둠이 그의 그림자를 길게 잡아 늘렸다. 그는 자신의 집무실 옆에 붙은 침실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잠갔다. 그리고 마치 더는 버틸 수 없다는 듯, 벽에 등을 기대고 거친 숨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낮게 읊조린 욕설은 방 안에서 메아리도 없이 흩어졌다. 라리엘 앞에서 그토록 서늘하고 여유롭게 굴던 공작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벽을 짚은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 자신도 부정할 수 없었다. 아르덴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아직도 손끝에는 라리엘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가느다란 허리의 곡선, 얇은 잠옷 너머로 전해지던 체온.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마치 피부에 새겨진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턱을 치켜들고 독기를 내뿜던 그녀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가쁘게 오르내리던 쇄골의 움직임.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그를 무너뜨릴 뻔했다. 그 찰나, 그는 정말로 자제력을 잃을 뻔했다. 그녀를 끌어안고, 자신을 향해 쏟아내던 그 아픈 말들을 입맞춤으로 막아버리고 싶다는 충동. 그것은 단순한 욕망이라기보다, 홀로 긴 겨울을 버텨온 이가 마침내 마주한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아 몸부림치는 절박한 갈증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는 멈춰야만 했다. 그녀를 안는 순간, 그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계획이 무너질 것을 알았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유리 성벽이 산산조각 나고, 그 파편이 가장 먼저 그녀를 해칠 것임을—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르덴은 비틀거리듯 탁자로 다가가 독주를 잔에 따랐다. 얼음도 넣지 않은 투명한 액체가 잔을 채웠다. 그는 한 번에 들이켰다. 독한 술이 목구멍을 태우며 내려갔다. 고통스러운 열기가 몸 안에 퍼지자, 미친 듯 날뛰던 심장박동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 빗줄기가 쏟아지는 어두운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원치 않던 기억이, 마치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6개월 전. 그 참혹했던 밤. 피비린내와 섞인 흙냄새. 뒤집힌 마차. 그리고 차갑게 식어가면서도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고 마지막 힘을 짜내 유언을 남기던 플로렌스 백작의 얼굴. ‘아르덴…… 내 딸을…… 라리엘만은 제발…….’ 백작의 죽음은 사고도, 그에 의한 살인도 아니었다. 그것은 아직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제국의 어딘가에서 꿈틀대며 지금도 그녀를 노리고 있을지 모르는 정체 모를 악의 일부였다. 아르덴은 백작의 시신 손에서 발견된 은색 단추를 떠올렸다. 그것이 자신의 가문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진실을 밝히고 라리엘을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던질 것인가, 아니면 모든 죄를 뒤집어쓴 악마가 되어 그녀를 이 성 안에 가둘 것인가. “너는 평생 나를 증오하며 살겠지.” 그는 창에 비친 자신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나직이 읊조렸다.루시의 천진난만한 대답에 트리샤는 이제야 상황 파악이 끝났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보나마나 시골에서 올라온 티 팍팍 내셨겠구만. 그 아주머니가 장사 수완 발휘해서 아가씨를 살살 놀린 거예요. 그 광장은 일 년 내내 노점상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서 대리석 바닥 구경도 못 할뿐더러, 비둘기 똥이랑 온갖 고약한 오물 냄새가 진동하는 곳이라구요.”청천벽력 같은 폭로에 루시의 얼굴이 순식간에 억울함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마지막 희망을 붙잡듯 목소리를 높였다.“거짓말! 형부도 분명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장구쳐 주셨는데? 형부가 거짓말을 할 리 없잖아요!”“공작님도 한통속인건 안봐도 뻔하네요. 수도 사람들이 그렇게 무섭다니까.”트리샤는 새침하게 말하고는 잘 익은 딸기 하나를 입안에 쏙 집어넣고는 우물거렸다.루시는 믿었던 세계가 무너지는 듯한 울상을 지으며, 구원을 요청하듯 라리엘을 돌아보았다.“언니… 정말이야? 트리샤 언니 말이 다 사실이야?”“하하, 글쎄. 나도 그 광장에는 가본 적이 없어서 확답은 못 하겠네.”라리엘은 동생의 순진함이 귀여우면서도 차마 트리샤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쐐기를 박을 수는 없어 애매하게 웃어넘겼다.잔뜩 일그러진 루시의 미간과 떨리는 눈망울에 자작 부인과 엘리시아, 심지어 입안 가득 딸기를 문 트리샤까지 약속이라도 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평화로운 웃음소리가 봄바람을 타고 응접실 창밖으로 멀리 퍼져 나갔다.해가 뉘엿뉘엿 저물며 붉은 노을이 플로렌스 영지의 부드러운 능선을 가득 채웠다.온 가족이 모여 정성스럽게 차려진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저택은 각자의 휴식 시간으로 접어들었다.자작 부인은 거실 벽
3개월 후, 플로렌스 영지는 완연한 봄의 숨결을 머금고 있었다.이제는 ‘플로렌스 자작령’으로 규모가 줄어들었지만, 저택을 감싸는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따스하고 활기찼다.플로렌스 저택의 집무실 안, 창틈으로 스며드는 포근한 봄 햇살이 책상 위를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과거 아버지가 앉아 무거운 책임을 짊어졌던 책상 앞에 앉은 라리엘은, 이제 제법 익숙한 손놀림으로 두툼한 가죽 장부를 펼쳐 들고 있었다.그녀는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깃펜으로 꼼꼼히 숫자를 기입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장부를 들여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그 곁에는 초점이 흐릿한 눈을 가만히 감은 제이드가 지팡이를 짚은 채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부인, 서쪽 계곡 쪽 농지의 이번 달 세금 수입 현황을 다시 한번 불러주시겠습니까?”라리엘은 장부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차분하게 읽어 내려갔다.“서쪽 농지는 지난달보다 조금 늘었어요, 제이드. 하지만 동쪽 평야 지대는 여전히 회복이 더딘 모양이네요.”제이드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마치 영지의 지도를 그리는 듯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서쪽 농지는 지력이 좋아 봄이 되면 소출이 늘어날 테니 세금을 예년 수준으로 조금 더 거두셔도 무방할 겁니다. 하지만 동쪽 농지는 작년 수해의 여파가 남아있으니, 이번 봄에는 세금을 조금 감면하여 농민들이 씨앗을 살 여유를 주시는 게 좋겠군요.”봄을 맞아 영지 살림을 살펴보러 플로렌스를 방문한 라리엘은 며칠 째 이렇게 제이드와 함께 장부를 들고 씨름하는 중이었다.“아, 그리고 북쪽 과수원 농가에는 ‘객토(客土)’ 작업을 꼭 확인하라고 전하십시오. 봄에 다른 곳의 좋은 흙을 가져다 섞어주지
“…그렇구나.”짧게 내뱉은 말에는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한때 자신을 매섭게 몰아붙이던 이에 대한 연민인지, 이제 더는 방해받지 않을 거라는 안도인지, 아니면 그 둘이 기묘하게 뒤섞인 씁쓸함인지 그녀 스스로도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없었다.잠시 후,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는 것을 막으려는 듯 라리엘이 다시 가벼운 톤으로 물었다.“레이먼 백작님은 병세가 좀 나아지셨을까?”“응. 다음달부터는 의회에도 출석하실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하셨다고 들었어.”“정말 다행이네.”라리엘은 마음의 짐을 한결 덜어낸 듯 아르덴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위로 하얀 달빛이 은은하게 내려앉았다.“있지, 클로디아 양이 지난 번에 날 찾아왔을때 말이야. 네가 의장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귀족들이 더러 있다는 이야기를 내게 해줬어.”처음 듣는 뜻밖의 사실에 아르덴의 턱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라리엘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 여자가 그런 얘길 했어? 그걸 왜 이제야 말해?”만약 그녀가 라리엘을 그런 식으로 압박했다는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조용히 물러나게 수표 따위를 쥐여주는 선처 따위는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가문을 동원해 훨씬 더 혹독하고 처절한 대가를 치르게 했을 것이라는 후회가 가슴 속을 사납게 스쳤다.“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아르덴. 조금만 더 내 말을 들어봐.”라리엘이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사실 난 그때까지… 너나 알브릭 가문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내가 먼저 너를 떠나야 하는 게 아닐까 수없이 고민했어. 그래야만 한다고도
트리샤의 입에서 풋, 하는 짧은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녀는 여유로운 동작으로 품 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이건 그동안 수고한 값이다. 이제 더는 마주칠 일 없었으면 좋겠군.] …간단히 말하자면,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얘기지.”알브릭 가문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봉투가 클로디아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집어 든 클로디아가 인장을 확인하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거짓말하지 마! 당신 말을 어떻게 믿지? 공작님을 직접 뵙고 확인하겠어!”“흠, 글쎄… 정 못 믿겠다면 당신이 직접 공작님을 찾아가봐. 알브릭 저택 앞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는 모욕을 당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것 같네.”마침내 클로디아의 동공이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그녀가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있었다.“전언은 여기까지야. 그럼 난 이만.”트리샤는 넋이 나간 클로디아의 창백한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린 뒤, 마차 문을 열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잠시 후, 숨쉬는 법 조차 잊은 듯이 굳어 있던 클로디아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안에는 오라비의 지긋지긋한 도박 빚을 단숨에 청산하고도 남을 만한 거액의 수표 한 장이 들어있었다.보상이 아니라 단절의 선언이었다.수치심과 패배감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며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어둠 속 마차 안에는 무너져 내리는 한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이 한참동안 흘러나왔다.*재판을 고작 몇 시간 앞둔 깊은 밤, 침대 위에서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던 라리엘은 결국 감고 있던 눈을 가만히 떴다.어둠 속에서도 천장의 화려한 문양이 잔상처럼 어른거렸다. 아무리 눈을 감고
마차 바퀴가 불규칙한 돌길을 지날 때마다 덜컹거리는 진동이 차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이미 해질녘이 된 창밖에는 유흥가의 숨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라리엘은 그 생경한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옆자리로 고개를 돌렸다.그곳엔 잔뜩 날이 선 표정의 트리샤가 앉아 있었다.“무슨 협상이 그래요?”트리샤가 참아왔던 말을 가시 돋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예상치 못한 매서운 반응에 라리엘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트리샤를 가만히 쳐다보았다.“응? 내가 혹시 놓친 조건이라도 있었나요? 문서에 빠진 조항이라도…?”“조건이고 조항이고 간에, 얻어낸 게 하나도 없잖아요! 이왕 녹스의 수장을 만났으면, 부인 아버지의 목숨값으로 돈이라도 잔뜩 요구했어야죠!”트리샤는 한 손을 펴서 반대편 손바닥을 탕탕 치며 분을 토해냈다. 라리엘은 잠시 멍하니 그녀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했다.“얻어낸 게 없다니요. 약탈금에 제이드, 그리고 트리샤 씨까지. 무려 세 가지나 얻어냈는걸요?”라리엘은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 보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트리샤는 그 맑은 눈동자를 쳐다보다가 도리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한층 풀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러니까 그게 말이 되냐구요. 보상은 커녕, 짐짝을 둘이나 떠안은 셈이잖아요.”“무슨 소리에요? 난 충분히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짐짝이라니, 트리샤 씨는 내 친구 아니었어요?”친구라니.트리샤는 그 말에 또 한번 토를 달려고 숨을 한껏 들이켰다가, 라리엘의 확신에 찬 눈빛을 보고는 그대로 말을 삼켜버렸다.라리엘은 그런 트리샤를 짐짓 모른체 하고는 생글생글 웃으며
미첼로가 굳이 제이드의 이름을 들먹인 것은 라리엘을 떠보려는 의도였다.아버지의 죽음에 일조한 가문의 배신자를 구하려는 그녀의 본심이 순수하게 궁금했던 것이다.잠시 침묵을 지키던 미첼로는 조금 전까지의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고 의자에 등을 붙여 바르게 앉았다. 그는 패배를 인정하는 도박사처럼 가볍게 양손을 들어 보였다.“좋습니다. 더는 제가 고집을 부릴 방도가 없군요. 부인의 요구사항을 명확하게 정리해 보시지요.”그토록 원하던 미첼로의 항복 선언이었으나, 막상 그의 입에서 수락의 말이 떨어지자 라리엘은 찰나의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정말 이대로 끝인 걸까?'그녀는 눈앞에 앉은 미첼로의 미세한 근육 변화와 눈짓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살피며 입을 열었다.“…아까 전에도 분명히 말씀드렸듯이, 레오폴트 약탈금의 반환은 녹스에서 전적으로 책임집니다. 그리고, 미첼로 씨가 강조하셨던 그 ‘기브 앤 테이크’를 적용해 드리죠. 우리가 법정에서 녹스의 존재와 이 계약서의 실체를 발설하지 않는 대신, 제이드 크로이츠를 즉각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세요. 당신들이 우리 아버지에게 저지른 그 끔찍한 죄악에 대한 대가는, 그의 딸인 트리샤 크로이츠의 완전한 자유로 받겠습니다.”미첼로는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이내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하시죠. 거래 성립입니다.”미첼로는 녹스의 수장답게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서랍에서 고급 양피지를 꺼냈다.얼마간 깃펜이 종이 위를 달리는 사각거리는 방 안에 울려퍼졌다. 새로운 계약서 작성이 끝난 후, 그는 마지막으로 라리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수완이 보통이 아니시군요, 부인.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도 꼭 ‘거래&r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라리엘의 무릎 위에서 책을 거두어 제자리에 꽂았다. 그리고는 부서질 세라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안아 올렸다. 잠결에 으응, 하며 그의 품을 파고드는 라리엘의 온기에 아르덴은 숨을 멈췄다. 그녀에게선 여전히 예전 그 온실의 꽃향기가 났다. 그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며, 차가운 서고를 지나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그녀의 침실에 도착해 침대에 눕히는 순간까지도 아르덴은 팔에 힘을 풀지 못했다. 잠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는 이
숨이 조금 가라앉은 뒤에야 라리엘은 옷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닦아냈다. 눈물에 젖은 편지지를 구겨버리는 대신 조심스럽게 종이를 말렸다. 이 얼룩조차 자신의 일부라고 인정하듯. 지금 여기서 주저앉으면 정말로 아르덴의 말대로 '입 다물고 인형처럼' 살게 될 뿐이었다. '울고 있을 시간조차 아까워. 내가 무너지면 우리 가족은 정말 갈 곳이 없어져.' 라리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붉어진 눈가를 화장으로 차분히 가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거울 속에는 더 이상 처량하게 우는 소녀가 없었다.
연회장의 불빛이 하나둘 꺼진 뒤, 라리엘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화려하지만 갑옷처럼 무거웠던 자수정 드레스를 벗어던졌다. 꽉 조여졌던 코르셋이 풀리자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은 여전했다. 시녀들은 늘 그렇듯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편히 쉬십시오, 부인.”이라는 형식적인 인사만을 남기고 조용히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 침실은 완전히 라리엘 혼자만의 공간이 되었다. 촛불 하나만이 위태롭게 타오르는 방 안에서 라리엘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한동안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손은 무릎
라리엘은 짧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소임이라니? 오늘 내 소임은 너의 살아있는 장식품이 되는 것 아니었어? 충분히 완수했다고 생각하는데.” 날 선 대답에 아르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그는 괜히 먼 정원을 바라보며 짐짓 무심한 투로 덧붙였다. “…안색이 좋지 않군. 연회장의 향기가 너무 독했나?” 그것은 아르덴 나름의 절박한 안부였다. 괜찮으냐고, 아까 그들의 말에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진심이 서툰 질문 속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가시 돋친 말들에 온마음이 할퀴어진 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