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의회에서 돌아온 아르덴의 마차가 저택 정문에 들어선 것은 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였다.
아르덴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망토를 하인에게 넘겼다. 차가운 밤공기를 뚫고 저택으로 들어온 그의 모습에는 금실이 수놓인 어깨 장식과 단정한 칼집, 그리고 하루 종일 그를 조여 왔을 격식과 피로가 한데 엉겨 있었다. 예복도 채 벗지 않은 채 그는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라리엘은 이미 식탁 앞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기다렸다기보다는 도살장에 끌려온 짐승처럼 그가 올 시간만을 헤아리며 경직되어 있었다. 촛불은 이미 반쯤 녹아내렸고, 식탁 위의 음식은 손도 대지 않은 채 식어가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아르덴이 들어섰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긴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하녀가 조용히 다가와 와인을 따랐다. 아르덴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촛불에 비친 그의 얼굴은 낮보다 더 창백해 보였다. 푸른 눈동자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깊고 차가운 침묵을 머금고 있었다. “베르너에게 들었어.” 그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다. 그 평온함이 오히려 라리엘의 신경을 더 날카롭게 만들었다. “저택 안의 업무를 익히기 시작했다고.” 라리엘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녀는 재빨리 은색 포크를 내려놓았다. 금속이 접시에 닿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알브릭의 법도를 익히는 건 내 의무라며. ‘그림자’로서 쓸모가 있으려면 말이야.” 그녀는 일부러 ‘의무’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그 말은 스스로를 비하하는 동시에, 그가 그녀에게 부여한 역할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도발이었다. “이해가 빨라서 좋군.” 아르덴은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의 시선은 라리엘의 얼굴에서 시작해, 목선을 따라 내려가 하얗게 굳은 손가락 끝에 머물렀다. 그 시선은 집요했지만 노골적이지 않았다. 마치 물건의 상태를 점검하듯, 혹은 상대의 허점을 재는 장군처럼. “일과는 어땠지? 내 서재까지 가보려 했다던데.” 그는 잔을 돌리며 물었다. 그 순간 라리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베르너가 보고했으리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꺼내 들 줄은 몰랐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안주인으로서 공작 각하가 머무는 공간을 파악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녀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너의 그 충성스러운 개가 아주 단단히 가로막던데?” “그는 내 명령을 따랐을 뿐이야.” 아르덴은 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조용한 식당에 울렸다. 그는 천천히 식탁을 돌아 라리엘의 곁으로 다가왔다.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는 일정했다. 그 리듬이 마치 그녀의 숨통을 조금씩 조여 오는 박자처럼 느껴졌다. “네가 그 문을 여는 건 내가 허락한 날에만 가능해.” 그는 그녀의 바로 뒤에 멈춰 섰다. 라리엘은 등을 곧게 세운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존재가 바로 뒤에서 느껴졌다. 차가운 기운과 함께, 설명하기 어려운 압박감이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서재에 뭐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라리엘? 네가 찾는 ‘진실’ 같은 게 거기 굴러다닐 거라고 믿어?”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긁었다. 그는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어조였다. 그녀의 의심도, 복수심도, 그에게는 이미 읽힌 패처럼 보였다. 라리엘은 의자 손잡이를 꽉 쥐었다. “아무것도 없다면 그렇게 단단히 걸어 잠글 이유도 없겠지.”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가끔은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는 법이지.” 아르덴은 짧게 웃었다. 냉소에 가까운 소리였다. 그는 더 말을 잇지 않고 그대로 식당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그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라리엘은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식당에는 그가 남긴 한기만이 남아 있었다. 밤은 깊어갔다. 침실에는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라리엘은 드레스를 벗고 얇은 잠옷 차림으로 침대 끝에 앉아 있었다. 방을 밝히고 있는 촛불이 그녀의 불안한 숨결에 맞춰 흔들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아르덴이 들어왔다. 그는 셔츠 단추를 몇 개 풀어헤친 채였다. 하루의 피로가 묻어 있었지만, 그 눈빛은 여전히 또렷했다. 그는 침대로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벽면의 작은 탁자 위로 가 개인 소지품을 하나씩 챙기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난 옆방에서 자도록 하지.” 그의 말투는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너도 밤새 바닥에서 떨고 싶진 않을 테니까.” 그 말이 배려인지, 거리 두기인지 라리엘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애매한 친절이 그녀의 뒤틀린 자존심을 건드렸다. 동정받는 것도, 혐오당하는 것도 견디기 어려웠다. “그럴 필요 없어.” 그녀의 말에 아르덴의 손길이 멈췄다. 라리엘은 침대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돌아섰다. “우리는 부부잖아.” 그녀가 비웃듯 말했다. “비록 계약이고 증오뿐인 관계라 해도, 남들의 눈을 속여야 한다면 굳이 다른 방을 쓸 이유는 없지. 너의 그 ‘완벽한 연극’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다면 그냥 여기서 자.” 그 순간, 아르덴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는 천천히 챙기던 물건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라리엘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지만, 곧 벽에 등이 닿았다. 아르덴은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와 한 손으로 벽을 짚었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서늘한 향기가 라리엘의 이성을 흐트러뜨렸다.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고는 있어?”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그의 시선이 라리엘의 입술과, 얇은 잠옷 너머로 오르내리는 쇄골 부근을 스쳤다. “내가 너를 안기라도 바라는 거야?” 다른 한 손이 그녀의 허리춤으로 다가왔다. 얇은 천 위로 닿은 그의 손바닥은 예상과 달리 뜨거웠다. 라리엘은 숨을 들이켰다. 그의 손가락이 허리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며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숨결이 섞일 만큼 가까워졌다. 촛불이 일렁이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벽에 길고 기괴하게 늘어뜨렸다. 아르덴의 푸른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지나치게 위태로워 보였다. 그는 입술이 닿기 직전에서 멈췄다. “자꾸 자극하지 마, 라리엘.” 귓가에 떨어지는 그의 속삭임에 그녀는 전율했다. “나도 인내심이 무한한 성인군자는 아니거든. 네가 감당하지 못할 일은 시작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아르덴은 거칠게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침실을 나갔다. 쾅. 끝까지 그를 쏘아보고 있던 라리엘은 문이 닫히고 나서야 벽을 짚고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억눌렀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루시의 천진난만한 대답에 트리샤는 이제야 상황 파악이 끝났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보나마나 시골에서 올라온 티 팍팍 내셨겠구만. 그 아주머니가 장사 수완 발휘해서 아가씨를 살살 놀린 거예요. 그 광장은 일 년 내내 노점상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서 대리석 바닥 구경도 못 할뿐더러, 비둘기 똥이랑 온갖 고약한 오물 냄새가 진동하는 곳이라구요.”청천벽력 같은 폭로에 루시의 얼굴이 순식간에 억울함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마지막 희망을 붙잡듯 목소리를 높였다.“거짓말! 형부도 분명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장구쳐 주셨는데? 형부가 거짓말을 할 리 없잖아요!”“공작님도 한통속인건 안봐도 뻔하네요. 수도 사람들이 그렇게 무섭다니까.”트리샤는 새침하게 말하고는 잘 익은 딸기 하나를 입안에 쏙 집어넣고는 우물거렸다.루시는 믿었던 세계가 무너지는 듯한 울상을 지으며, 구원을 요청하듯 라리엘을 돌아보았다.“언니… 정말이야? 트리샤 언니 말이 다 사실이야?”“하하, 글쎄. 나도 그 광장에는 가본 적이 없어서 확답은 못 하겠네.”라리엘은 동생의 순진함이 귀여우면서도 차마 트리샤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쐐기를 박을 수는 없어 애매하게 웃어넘겼다.잔뜩 일그러진 루시의 미간과 떨리는 눈망울에 자작 부인과 엘리시아, 심지어 입안 가득 딸기를 문 트리샤까지 약속이라도 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평화로운 웃음소리가 봄바람을 타고 응접실 창밖으로 멀리 퍼져 나갔다.해가 뉘엿뉘엿 저물며 붉은 노을이 플로렌스 영지의 부드러운 능선을 가득 채웠다.온 가족이 모여 정성스럽게 차려진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저택은 각자의 휴식 시간으로 접어들었다.자작 부인은 거실 벽
3개월 후, 플로렌스 영지는 완연한 봄의 숨결을 머금고 있었다.이제는 ‘플로렌스 자작령’으로 규모가 줄어들었지만, 저택을 감싸는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따스하고 활기찼다.플로렌스 저택의 집무실 안, 창틈으로 스며드는 포근한 봄 햇살이 책상 위를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과거 아버지가 앉아 무거운 책임을 짊어졌던 책상 앞에 앉은 라리엘은, 이제 제법 익숙한 손놀림으로 두툼한 가죽 장부를 펼쳐 들고 있었다.그녀는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깃펜으로 꼼꼼히 숫자를 기입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장부를 들여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그 곁에는 초점이 흐릿한 눈을 가만히 감은 제이드가 지팡이를 짚은 채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부인, 서쪽 계곡 쪽 농지의 이번 달 세금 수입 현황을 다시 한번 불러주시겠습니까?”라리엘은 장부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차분하게 읽어 내려갔다.“서쪽 농지는 지난달보다 조금 늘었어요, 제이드. 하지만 동쪽 평야 지대는 여전히 회복이 더딘 모양이네요.”제이드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마치 영지의 지도를 그리는 듯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서쪽 농지는 지력이 좋아 봄이 되면 소출이 늘어날 테니 세금을 예년 수준으로 조금 더 거두셔도 무방할 겁니다. 하지만 동쪽 농지는 작년 수해의 여파가 남아있으니, 이번 봄에는 세금을 조금 감면하여 농민들이 씨앗을 살 여유를 주시는 게 좋겠군요.”봄을 맞아 영지 살림을 살펴보러 플로렌스를 방문한 라리엘은 며칠 째 이렇게 제이드와 함께 장부를 들고 씨름하는 중이었다.“아, 그리고 북쪽 과수원 농가에는 ‘객토(客土)’ 작업을 꼭 확인하라고 전하십시오. 봄에 다른 곳의 좋은 흙을 가져다 섞어주지
“…그렇구나.”짧게 내뱉은 말에는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한때 자신을 매섭게 몰아붙이던 이에 대한 연민인지, 이제 더는 방해받지 않을 거라는 안도인지, 아니면 그 둘이 기묘하게 뒤섞인 씁쓸함인지 그녀 스스로도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없었다.잠시 후,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는 것을 막으려는 듯 라리엘이 다시 가벼운 톤으로 물었다.“레이먼 백작님은 병세가 좀 나아지셨을까?”“응. 다음달부터는 의회에도 출석하실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하셨다고 들었어.”“정말 다행이네.”라리엘은 마음의 짐을 한결 덜어낸 듯 아르덴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위로 하얀 달빛이 은은하게 내려앉았다.“있지, 클로디아 양이 지난 번에 날 찾아왔을때 말이야. 네가 의장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귀족들이 더러 있다는 이야기를 내게 해줬어.”처음 듣는 뜻밖의 사실에 아르덴의 턱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라리엘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 여자가 그런 얘길 했어? 그걸 왜 이제야 말해?”만약 그녀가 라리엘을 그런 식으로 압박했다는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조용히 물러나게 수표 따위를 쥐여주는 선처 따위는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가문을 동원해 훨씬 더 혹독하고 처절한 대가를 치르게 했을 것이라는 후회가 가슴 속을 사납게 스쳤다.“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아르덴. 조금만 더 내 말을 들어봐.”라리엘이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사실 난 그때까지… 너나 알브릭 가문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내가 먼저 너를 떠나야 하는 게 아닐까 수없이 고민했어. 그래야만 한다고도
트리샤의 입에서 풋, 하는 짧은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녀는 여유로운 동작으로 품 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이건 그동안 수고한 값이다. 이제 더는 마주칠 일 없었으면 좋겠군.] …간단히 말하자면,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얘기지.”알브릭 가문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봉투가 클로디아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집어 든 클로디아가 인장을 확인하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거짓말하지 마! 당신 말을 어떻게 믿지? 공작님을 직접 뵙고 확인하겠어!”“흠, 글쎄… 정 못 믿겠다면 당신이 직접 공작님을 찾아가봐. 알브릭 저택 앞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는 모욕을 당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것 같네.”마침내 클로디아의 동공이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그녀가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있었다.“전언은 여기까지야. 그럼 난 이만.”트리샤는 넋이 나간 클로디아의 창백한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린 뒤, 마차 문을 열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잠시 후, 숨쉬는 법 조차 잊은 듯이 굳어 있던 클로디아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안에는 오라비의 지긋지긋한 도박 빚을 단숨에 청산하고도 남을 만한 거액의 수표 한 장이 들어있었다.보상이 아니라 단절의 선언이었다.수치심과 패배감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며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어둠 속 마차 안에는 무너져 내리는 한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이 한참동안 흘러나왔다.*재판을 고작 몇 시간 앞둔 깊은 밤, 침대 위에서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던 라리엘은 결국 감고 있던 눈을 가만히 떴다.어둠 속에서도 천장의 화려한 문양이 잔상처럼 어른거렸다. 아무리 눈을 감고
마차 바퀴가 불규칙한 돌길을 지날 때마다 덜컹거리는 진동이 차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이미 해질녘이 된 창밖에는 유흥가의 숨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라리엘은 그 생경한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옆자리로 고개를 돌렸다.그곳엔 잔뜩 날이 선 표정의 트리샤가 앉아 있었다.“무슨 협상이 그래요?”트리샤가 참아왔던 말을 가시 돋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예상치 못한 매서운 반응에 라리엘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트리샤를 가만히 쳐다보았다.“응? 내가 혹시 놓친 조건이라도 있었나요? 문서에 빠진 조항이라도…?”“조건이고 조항이고 간에, 얻어낸 게 하나도 없잖아요! 이왕 녹스의 수장을 만났으면, 부인 아버지의 목숨값으로 돈이라도 잔뜩 요구했어야죠!”트리샤는 한 손을 펴서 반대편 손바닥을 탕탕 치며 분을 토해냈다. 라리엘은 잠시 멍하니 그녀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했다.“얻어낸 게 없다니요. 약탈금에 제이드, 그리고 트리샤 씨까지. 무려 세 가지나 얻어냈는걸요?”라리엘은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 보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트리샤는 그 맑은 눈동자를 쳐다보다가 도리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한층 풀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러니까 그게 말이 되냐구요. 보상은 커녕, 짐짝을 둘이나 떠안은 셈이잖아요.”“무슨 소리에요? 난 충분히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짐짝이라니, 트리샤 씨는 내 친구 아니었어요?”친구라니.트리샤는 그 말에 또 한번 토를 달려고 숨을 한껏 들이켰다가, 라리엘의 확신에 찬 눈빛을 보고는 그대로 말을 삼켜버렸다.라리엘은 그런 트리샤를 짐짓 모른체 하고는 생글생글 웃으며
미첼로가 굳이 제이드의 이름을 들먹인 것은 라리엘을 떠보려는 의도였다.아버지의 죽음에 일조한 가문의 배신자를 구하려는 그녀의 본심이 순수하게 궁금했던 것이다.잠시 침묵을 지키던 미첼로는 조금 전까지의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고 의자에 등을 붙여 바르게 앉았다. 그는 패배를 인정하는 도박사처럼 가볍게 양손을 들어 보였다.“좋습니다. 더는 제가 고집을 부릴 방도가 없군요. 부인의 요구사항을 명확하게 정리해 보시지요.”그토록 원하던 미첼로의 항복 선언이었으나, 막상 그의 입에서 수락의 말이 떨어지자 라리엘은 찰나의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정말 이대로 끝인 걸까?'그녀는 눈앞에 앉은 미첼로의 미세한 근육 변화와 눈짓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살피며 입을 열었다.“…아까 전에도 분명히 말씀드렸듯이, 레오폴트 약탈금의 반환은 녹스에서 전적으로 책임집니다. 그리고, 미첼로 씨가 강조하셨던 그 ‘기브 앤 테이크’를 적용해 드리죠. 우리가 법정에서 녹스의 존재와 이 계약서의 실체를 발설하지 않는 대신, 제이드 크로이츠를 즉각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세요. 당신들이 우리 아버지에게 저지른 그 끔찍한 죄악에 대한 대가는, 그의 딸인 트리샤 크로이츠의 완전한 자유로 받겠습니다.”미첼로는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이내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하시죠. 거래 성립입니다.”미첼로는 녹스의 수장답게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서랍에서 고급 양피지를 꺼냈다.얼마간 깃펜이 종이 위를 달리는 사각거리는 방 안에 울려퍼졌다. 새로운 계약서 작성이 끝난 후, 그는 마지막으로 라리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수완이 보통이 아니시군요, 부인.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도 꼭 ‘거래&r
교묘한 비아냥이었다. 아르덴의 ‘자비’와 라리엘의 ‘처지’를 동시에 건드리는 말에 라리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때, 아르덴이 그녀의 허리를 자기 품으로 더 깊숙이 끌어당기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자비라니요, 백작. 나는 그저 내게 어울리는 가장 고귀한 꽃을 내 화원에 옮겨두었을 뿐입니다. 라리엘은 이제 플로렌스가 아니라 알브릭의 이름으로 빛날 테니까요.” 아르덴은 말을 마친 뒤, 보란 듯이 그녀의 목덜미 근처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 넘겼다. 손끝이 민감한 피부를 스치자 라리엘은 소름이 돋
라리엘은 서신을 쥔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참아냈다. 아버지는 죽기 직전까지도 아르덴을 ‘아들과 다름없는 친구’로 믿고 있었다. 자신의 가문이 가진 위험한 비밀까지 공유할 정도로 그를 신뢰했다. 그런데 아르덴은? 그는 이 서신을 받은 직후에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가문을 파멸시킨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와 함께 아르덴이 집어삼켜진 것일까? 라리엘은 서신을 소중하게 접어 품 안 깊숙이 숨겼다. 지금은 이것을 들고 아르덴을 추궁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창고를
그것으로 족했다. 어차피 자신이 죽인것과 다름 없었다. 자신이 더 깊이 파헤치지만 않았더라도, 백작에게 그런 것을 요청하지만 않았더라도 백작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녀가 진실을 알게 되면 분명 더 깊이 파헤치려 들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그녀 또한 표적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백작을 죽인 세력의 실체가 아직 안개속에 있다는 사실이 그의 피를 말리게 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오해한 채 증오하는 편이 나았다. 친구이자 스승의 딸에게 씌워진 비극적인 연극. 그 모든 비난과 저주는 자신 하나로 충분했다.
“하아…… 하…….” 거칠게 몰아쉬는 숨이 방금 전 아르덴이 서 있던 공간의 잔열을 집어삼켰다. 심장이 늑골을 부수고 나올 것처럼 뛰었다.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뺨을 타고 흐르던 그의 서늘한 숨결, 얇은 잠옷 너머로 전해졌던 손바닥의 지독한 열기, 그리고 찰나의 순간 자신을 꿰뚫었던 눈빛. 그 모든 감각이 사슬처럼 그녀의 전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라리엘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그의 숨결이 닿았던 자리가 여전히 화끈거렸다. 마치 낙인이 찍힌 것 같았다. ‘자극하지 말라고?’ 그녀는